담마의 거울

자수성가(自手成家)와 일가견(一家見)을 이루려면, 얼리버드(Early bird) 게송

담마다사 이병욱 2014. 5. 19. 11:36

 

 

자수성가(自手成家)와 일가견(一家見)을 이루려면, 얼리버드(Early bird) 게송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

 

얼리버드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 Early bird’이른 아침의 뜻이다. 이는 일찍 일어나는 사람 또는 정각보다 일찍 오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또 어학사전에 따르면 재빨리 무언가를 시작하거나 특히 그렇게 함으로써 일종의 유리한 점을 얻는 사람이라도 설명 되어 있다.

 

 

 

Early bird

 

 

얼리버드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새벽형인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새벽같이 무언가를 도모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새벽같이 일어나다 보면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여 뜻 밖에 횡재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새벽같이 일찍 일어나서 무언가를 도모하는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임에 틀림 없다. 그런 사람을 새벽형인간이라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모든 것이 새롭다. 더구나 잠을 잘 잤을 경우 그 상쾌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컨디션이 최상이라 날아갈 듯 활력이 넘친다. 이렇게 새벽에 일어나 일을 하면 매우 효율이 높다.

 

농부들이 새벽같이 일어나 들에 나가서 일을 하는 것도 효율이 높기 때문이다. 늦잠을 자서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일어나다 보면 일의 효율이 떨어질 것이다. 더구나 무더위가 시작 될 때는 땡볕에 일을 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게으른자는 이래 저래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새벽같이 일아나는 자는 이른 새벽에 그날 할 일 을 다 해버린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 자기계발을 한다. 그래서 새벽형인간이 되면 여러가지 유리한 점이 많다.

 

얼리버드 게송

 

법구경 게송 중에 새벽형인간을 뜻하는 듯한 게송이 있다. 이름한다면 얼리버드게송이 될 것이다.

 

 

1.

Appamādo amatapada,      압빠마도 아마따빠당

pamādo Maccuno pada,     빠마도 맛쭈노빠당

Appamattā na mīyanti,      압빠맛따 나 미얀띠

ye pamattā yathā matā.     예 빠맛따 야타 마따. (Dhp21)

(빠알리원문)

 

 

2.

방일하지 않음이 불사의 길이고

방일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니

방일하지 않은 사람은 죽지 않으며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 (Dhp21)

(전재성님역)

 

 

3.

つとめむのは不死境地である。

りなまけるのは境涯である。
つとめぬことがない。

りなまけるは、死者のごとくである。(Dhp21)

(나까무라 하지메역)

 

 

4.

부지런함은 생명의 길이요

게으름은 죽음의 길이다.

부지런한 사람은 죽지 않지만

게으른 사람은 죽은것과 마찬가지다. (Dhp21)

(법정스님역)

 

 

5.

戒爲甘露道

放逸爲死徑

不貪則不死

失道爲自喪 (Dhp21)

(한역)

 

 

6.

Heedfulness: the path to the Deathless.

Heedlessness: the path to death.

The heedful do not die.

The heedless are as if

       already dead. (Dhp21)

 

(Thanissaro Bhikkhu)

 

 

빠알리원문에 5개의 번역을 실었다. 게송에서 키워드는 부지런함을 뜻하는 appamādo, 게으름을 뜻하는 pamādo이다. 이를 다른 말로 방일하지 않음방일함으로도 번역 되었다.

 

방일(放逸)하다의 뜻은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방탕하게 놀다.”의 뜻이다. 게으름과는 뜻이 다르다. 나까무라하지메는 りなまける라 하여 게으름을 피우다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타닛사로빅쿠는 Heedlessness라 하여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빠일리 pamādo는 구체적으로 어떤 뜻일까?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pamādo의 뜻은 Carelessness(부주의), remissness(태만), indifference(무관심), sloth(나태), indolence(게으름), delay(지연)’의 뜻으로 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게으르다는 뜻이다.

 

게송에서는 방일과 불방일에 대하여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방일은 죽음의 길이고, 불방일은 불사의 길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일한 자는 이미 죽은 자와 다름 없다고 하였고, 불방일자는 결코 죽지 않는 자라 하였다. 이처럼 게으른 자와 부지런한 자의 차이는 극명하다.

 

게으름은 왜 죽음의 길일까?

 

게으름은 왜 죽음의 길일까? 그리고 부지런함은 왜 불사의 길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 설명 되어 있는 것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방일함

pamādo

죽음의 길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

새김을 잃고 새김을 버린 상태와 같음

방일하지 않음

appamādo

불사의 길

불사는 열반을 뜻함.

열반은 생겨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에

늙음과 죽음에 종속되지 않음

 

 

표를 보면 pamādoappamādo는 단순하게 게으른 것과 부지런 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길로 죽 갔을 때 결과는 천지차이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일한 것에 대하여 죽음의 길이라 하였다. 또 불방일한 것에 대하여 불사의 길이라 하였다.

 

 

게으른 자는 대체적으로 계속 게으른 경향이 있다. 매일 늦게 일어나는 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이렇게 한번 습관 들이면 고치기 힘들다. 그래서 게으른 자는 대체로 평생 게으르게 살아간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죽음이다.

 

게으른 자가 게을리 산 대가는 결국 죽음과 마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전재성님역)”라 하였다. 또 법정스님역도 게으른 사람은 죽은것과 마찬가지다라 하여 게으른 자는 이미 죽은 것과 같다고 기정사실화 하였다. 또 타닛사로 빅쿠도 already dead(이미 죽었다)”라고 하여, 역시 게으른자는 이미 죽은 상태임을 기정사실로 받아 들이고 있다.

 

이처럼 번역에서는 게으른자에게 이미 죽은 것과 같다고 하였다. 숨을 쉬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죽은 것과 같다고 보는 것은 결국 죽음과 마주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게으른자는 이미 죽음 목숨

 

게으른자는 이미 죽음 목숨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Maccuno pada : DhpA.I.229에 따르면, 방일한 자는 태어남을 뛰어 넘지 못하고 태어나서 늙음과 죽음에 종속된다. 따라서 방일은 죽음의 길이라고 불린다. 죽음은 방일한 자에게 다가온다.

 

(각주 526,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죽음은 방일한 자에게 다가온다라 하였다. 누구나 두려워 하고 맞닥뜨리기 싫은 죽음이다. 그런 죽음을 게으른 자가 피해 갈 수 없음을 말한다. 그것은 태어남을 뛰어 넘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태어남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듯이 태어남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죽음과 대면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pamādo(방일)에 대하여 죽음의 길(maccuno pada)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불방일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결책이 appamādo이다. 게으르지 않는 것, 불방일 한 것이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appamādo에 대하여 불사의 길(amatapada)이라 하였다.

 

불사의 길은 어떤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불사는 열반과 동의어라 하였다. 그런데 왜 불사(amata)’라 하였을까? 그것은 태어남이 없기 때문에 죽음도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사(不死)’라 한 것이다. 따라서 불사의 길로 죽 가게 되면 결국 죽지 않는 자가 될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불방일자는 결코 죽지 않는 자가 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Appamattā na mīyanti : DhpA.I.229에 따르면, 방일하지 않은 존재, 즉 알아차리는 존재, 새김을 확립한 존재는 죽지않는다. 그것을 문자 그대로 늙음과 죽음을 여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물론 늙음과 죽음을 넘어서는 존재는 없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윤회의 수레바퀴가 부서지지 않지만, 알아차리면, 윤회의 수레바퀴는 부서진다. 그래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가 태어남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죽는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계발시켜 알아차리는 자는 단시간에 길과 경지를 깨닫고 두 번째나 세 번째의 삶에서 태어남을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살든지 죽든지 간에 결코 죽지 않는다.

 

(각주 527, 전재성님)

 

 

알아차리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 죽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는 막가(magga, )’를 말하고, 열매는 팔라(phala, )’를 뜻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경지라 하였다. 이렇게 도와 과를 이룬 자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아라한이라면 더 이상 태어남이 없다. 도와 과를 이루어 예류자가 되면 적어도 일곱생 이내는 완전한 열반에 든다고 한다. 더 이상 태어남이 없기 때문에 불사인 것이다. 따라서 늘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자는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이다.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자가 방일하지 않는 자이고 부지런한 자이다. 이를 게송에서는 아빠마도(appamādo, 불방일)라 하였다.

 

코끼리 발자국의 비유

 

게송에서는 아빠마도의 중요성에 대하여 노래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빠마도가 경전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각주에서는 코끼리 발자국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Seyyathāpi bhikkhave, yāni kānici jagamāna padajātāni, sabbāni tāni hatthipade samodhāna gacchati. Hatthipada tesa aggamakkhāyati yadida mahantattena.

 

Evameva kho bhikkhave, ye keci kusaladhammā sabbe te appamādamūlakā, appamādasamosaraā.

 

Appamādo tesa dhammāna aggamakkhāyati. Appamattasseta bhikkhave, bhikkhuno pāikakha ariya aṭṭhagika magga bhāvessati, ariya aṭṭhagika magga bahulīkarissatī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걸어 다니는 뭇삶의 발자국이든지 그 모든 것들은 코끼리의 발자국에 들어가므로 그들 가운데 그 크기에 관한 한 코끼리의 발자국을 최상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 있든지 그 모든 것들은 방일하지 않음을 근본으로 하고 방일하지 않음을 귀결로 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 가운데 방일하지 않음을 최상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방일하지 않으면,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닦고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익히라는 것은 자명하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방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닦고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익히는가?”

 

(Padasuttā-발자국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140, 전재성님역)

 

 

이 세상에서 코끼리발자국 보다 더 큰 것이 있을까? 아마 공룡이 살아 있다면 그 지위를 물려 주어야 할 것이다. 지구상에 코끼리 발자국 보다 더 넓은 발자국은 없다. 그래서 모든 동물의 발자국은 코끼리 발자국내에 모두 들어 온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코끼리발자국 비유를 하였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아빠마도(불방일)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착하고 불건전한 법들은 모두 아빠마도의 범주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떠한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 있든지 그 모든 것들은 방일하지 않음을 근본으로 한다(ye keci kusaladhammā sabbe te appamādamūlakā)라고 하였다. 가장 근본이 되는 법이 아빠마도라는 것이다.

 

담마에 대하여 으로 번역한 경우

 

전재성님의 번역을 보면 kusaladhammā’에 대하여 착하고 건전한 것이라 번역하였다. 담마(dhamma)에 대하여 이라 번역한 것이다. 이런 번역방식은 전재성박사의 번역특징이다. 담마에 대하여 가르침, 진리, 사실, 원리, , 것 등으로 번역하는데 이는 문장과 문맥에 따라 달리 번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오로지 으로만 번역한다. 빅쿠보디 역시 오로지 ‘dhamma’로만 번역한다. 그러다 보니 번역이 경직되기 쉽다. 경직 되기 쉽다는 것은 번역이 딱딱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재성님의 경우 담마에 대하여 가르침, 진리, 사실, 원리, , 것 등으로 다양하게 상황에 맞게 번역하기 때문에 번역이 부드럽다. 그리고 이해하기 쉽다. 이렇게 번역자 마다 번역의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벽의 비유

 

부처님은 모든 착하고 건전한 법(kusaladhammā)’들에 가장 우선하는 것이 불방일이라 하였다. 그래서 코끼리발자국비유를 들었다. 꼬끼리발자국이 모든 동물의 발자국을 모두 포섭하듯이, 불방일이 모든 착하고 건전한 법들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었다. 아침에 해가 뜨기 전에 나타나는 새벽이다.

 

새벽이 되면 아직 해가 뜨지 않았어도 동녁하늘이 훤하다. 이를 아빠마도(불방일)로 비유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적합하게 설명된 경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태양이 떠 오를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바로 새벽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생겨날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계행을 지키면,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닦고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익히라는 것은 자명하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방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닦고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익히는가?”

 

(Appamādasutta- 방일하지 않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54, 전재성님역)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 나기 전에 전조가 있을 수 있다. 그런 낌새를 알아 차린다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알 수 있는 전조가 있다. 아침에 해가 뜨기 전에 새벽녁이다. 새벽이 되면 해가 뜨지 않았지만 훤하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마침내 해가 떠 오른다.

 

경에서는 아빠마도(불방일)에 대하여 새벽으로 비유하였다. 그리고 팔정도에 대하여 태양으로 비유하였다. 태양이 떠 오르기 전에 새벽이 있듯이 팔정도 수행에 앞서 반드시 전제 되어야 할 것이 바로 아빠마도(불방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빠마도는 새벽형인간에게 딱 들어 맞는다.

 

자수성가(自手成家)와 일가견(一家見)

 

자수성가(自手成家)라는 말이 있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이 자기 힘으로 벌어 살림을 이루고 재산을 모은다는 뜻이다. 또 일가견(一家見)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에 관하여 일정한 경지에 오른 안목이나 견해를 뜻한다.

 

이처럼 자수성가 하고 일가견을 이룬 자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아마 공통적으로 부지런함이라 볼 수 있다. 게으른 자가 일가를 이루고 일가견을 이룬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수성가 하고 일가견을 이룬 자에 대한 또 하나 예를 든다면 얼리버드라 볼 수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일처리를 하는 새벽형 인간이 성공한 것이라 보여진다. 따라서 성공하는 근본 요인은 부지런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지런함이 다른 말로 불방일이라 하고 빠알리어로 아빠마도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아빠마도는 새벽형인간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태양이 떠 오르기 전 새벽이라는 전조현상이 생기듯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방일이 전제 조건이 됨을 알 수 있다. 왜 얼리버드(Early bird), 새벽형인간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답이 될 듯 하다.

 

 

2014-05-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