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올바른 생활을 위한 네 가지 원리

담마다사 이병욱 2014. 5. 14. 09:54

 

 

올바른 생활을 위한 네 가지 원리

 

 

 

뉴스 같지 않은 뉴스를 내 보내고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한달이 다 되어 간다. 그 동안 대한민국은 상중에있던 것이나 다름 없었다. TV에서는 연일 참사관련 뉴스가 나와서 이를 지켜 보는 사람들을 더욱 더 슬픔을 느꼈다. 그런데 이제 서서히 여기에서 탈출하는 것 같다. 가장 먼저 공영방송에서 그런 느낌을 감지한다. 아홉시 메인 뉴스시간에 날씨 이야기로 뉴스를 시작 하는 가 하면 뉴스 같지 않은 뉴스를 내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바다속에는 찾지 못한 주검이 있는데 뉴스에서는 애써 이를 피해 가는 것 같다.

 

불교적 해법은 무엇일까?

 

세월호참사와 관련하여 불교계는 어떤 입장을 보였을까? 교계신문사이트 위주로 검색하여 보면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국민들은 슬퍼하는데 이에 대한 위로나 치유의 글은 드믈었다. 불교적 대책을 제시 하는 토론이나 글이 있긴 있었지만 기대에 못 미쳤다. 특히 조계종의 교수아사리모임에서 토론된 내용을 보면 실망스러웠다. 종단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스님은 “그런 묘수가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아무리 고민해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가 전부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초기불교를 연구하고 있는 스님은 불교에는 해법이 없다고 말하면서 사회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성찰론을 들었다.

 

이외 교계신문사이트에서는 여러 가지 불교적 해법이나 사고발생원인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다. 이를 헤드라인으로 본다면 한북스님은 세월호는 대재앙의 전조라 하였고, 법륜스님은 이런 대형 사고는 어떤 특정한 한 사람이 잘못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원인이 복합돼 일어난 사고라고 했다. 강병균교수는 세월호 침몰 사건은 선장이하 승무원들이 승객을 버리고 자기들만 탈출함으로써 희생자를 크게 키운 것이다라는 원론적인 말을 하였다.

 

성법스님은 불교닷컴 특별기고에서 한국불교가 어째서 눈앞에 벌어진 엄연한 현실에 대해 연기론적인 합리적 설명을 못한다는 말입니까?”라는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연기법적으로 사고를 보고 있다. 그러나 성법스님의 과거글을 보면 단멸론적 견해가 강하기 때문에 어떤 연기를 말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만일 상호의존적 연기로만 설명된다면 성법스님의 견해 대로 결국 질량보존의 법칙대로라는 표현으로 보아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라는 단멸론적시각에 따른 견해라 볼 수 있다.

 

마성스님의 불교적 해법

 

이런 와중에 마성스님이 이번 세월호참사와 관련하여 기고를 하였다. 불교닷컴에 실린 기사의 제목을 보면 직업윤리 부재와 기업주 탐욕이 원인라 되어 있다. 기사제목으로 실려 있는 이와 같은 말은 방송에서 늘 듣던 말이다.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은 선박회사에 있고, 그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직원들이 자신의 책임을 다 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님은 이와 더불어 근원적인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불교적 해법을 제시 하고 있다.

 

 

노동의 객관적외적 형식은 동일하지만, 그 윤리적정신적 내용은 크게 다르다. 불교적 입장에서 본 노동은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유전문(流轉門)의 노동에서 괴로움의 소멸이 되는환멸문(還滅門)의 노동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단순히 금전을 끌어 모으기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 노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궁극의 목표인 니르바나(열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기고] 세월호 참사의 원인은 무엇인가, 마성스님, 2014-05-07)

 

 

마성스님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은유전문(流轉門)의 노동에서 환멸문(還滅門)의 노동으로라는 말이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노동을 한다는 것이 단지 돈을 버는 것을 넘어 행복추구를 위한 노동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땀흘려 일한다는 것

 

마성스님은 노동하는 것에 대하여 종교적 의미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에릭 포름(Erich Formm)의 말을 인용하였다. 노동하는 것이 단지 먹고 살기 위하여 또는 미래의 안전을 위하여 축적하는 개념이라기 보다 땀흘려 일하는 그 자체에 숭고한 의미를 두는 것이다.

 

땀흘려 일한다는 것은 불법이나 탈법, 불로소득을 배제한다는 말이다. 노동하는 것에 대하여 종교적으로 승화 되었을 때 열반은 이 세상을 떠나 저 멀리 피안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땀흘려 일하는 것에 대하여 현세의 행복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 앙굿따라니까야에 실려 있는 경을 근거로 말한 것이라 보여진다. 스님이 기고문에서 표현한 것과 유사한 내용이 경에 있기 때문이다. 경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ā ca vyagghapajja, ārakkhasampadā: idha vyagghapajja, kulaputtassa bhogā honti uṭṭhānaviriyādhigatā  bāhābalaparicitā sedāvakkhittā dhammikā dhammaladdhā, te ārakkhena guttiyā sampādeti 'kinti me ime bhoge neva rājāno hareyyu na corā hareyyu na aggi aheyya na udaka vaheyya na appiyā dāyādā hareyyunti. Aya vuccati vyagghapajja, ārakkhasampadā.

 

디가자누여, 수호를 갖춤이란 무엇입니까? 디가누자여, 세상에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 근면한 노력으로 얻고 두 팔의 힘으로 모으고 이마의 땀으로 벌어 들이고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지니고, ‘이 재물은 결코 왕도 빼앗을 수 없고, 도둑도 빼앗을 수 없고, 불도 태울 수 없고, 물도 휩쓸 수 없고, 악의적인 상속자가 빼앗을 수 없다.’라고 생각하여 그것들을 수호하고 그것들을 보존합니다. 디가자누여, 수호를 갖춤이란 이와 같습니다.

 

(Vyagghapajja-비야가빳자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8.54, 전재성님역)

 

 

 

labor

 

 

 부처님이 깍까라빳따라는 꼴리야인들의 도시에 있었을 때 말씀 하신 것이다. 꼴리야인 디가자누가 부처님에게 다가와 세존이시여, 저희들에게 저희를 위하여 현세에서의 이익과 현세에서의 안락과 미래에서의 이익괴 미래에서의 안락을 위해 가르침이 있도록 그 가르침을 설해 주십시요(bhagavā tathā dhamma desetu, ye ambhāka assu dhammā diṭṭhadhammahitāya diṭṭhadhammasukhāya samparāya hitāya samparāyasukhāyāti. A8.54)”라고 요청함에 따라 부처님이 위와 같이 말씀 하신 것이다.

 

올바른 생활을 위한 네 가지 원리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며 살고 있는 세속인들에게 가르침을 설하였다. 경에서는 모두 네 가지로 표현 되어 있다. 1) 부지런함을 갖춤(uṭṭhānasampadā), 2) 수호를 갖춤(ārakkhasampadā), 3) 선한 벗을 갖춤 (kalyāamittatā), 4) 올바른 생활을 갖춤(samajīvikatā) 이렇게 네 가지를 말한다. 이 네 가지 원리에 대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올바른 생활을 위한 네 가지 원리

No

  

 

 

1

부지런함을 갖춤

(uṭṭhānasampadā)

상업, 목축, 다른 기술과 같은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함

거기에 유능하고 게으르지 않고 올바른 수단을 강구하여 그것을 완수함

2

수호를 갖춤

(ārakkhasampadā)

근면한 노력으로 얻고 두 팔의 힘으로 모으고 이마의 땀방울로 정당하게 벌어들임

왕이나 도적 등 누구도 빼앗을 수 없음

3

선한 벗을 갖춤

(kalyāamittatā)

덕행, 믿음, 계행, 보시, 지혜를 갖춘 자와 사귐

덕행, 믿음, 계행, 보시, 지혜를 갖춘 자에게서 배움

4

올바른 생활을 갖춤

(samajīvikatā)

사치스럽지도 않고 곤궁하지도 않고 균형 있게 삶을 영위함

수입을 알고 지출을 알고 사치스럽지도 곤궁하지도 않고 균형 있게 생활함

 

 

 

이렇게 재가에서 네 가지 원리를 갖추었을 때 지금 여기(diṭṭhadhamma)’에서 이익(hitā)과 안락(sukhā)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위에 언급된 구절은 두 번째에 해당되는 수호를 갖춤에 대한 것이다.

 

팔뚝의 힘으로 벌고

 

부처님이 말씀 하신 네 가지 원리 중에 수호를 갖춤(ārakkhasampadā)’이 있다. 여기에서 부처님이 강조한 것은 두 팔의 힘이마의 땀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노동의 가치에 대한 것이다. 흔히 말하는 불법이나 탈법, 또는 불로소득으로 벌어 들이는 재화와 다른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팔뚝의 힘으로 벌고, 자신의 이마에서 흘린 땀방울로 벌었을 때 그 노동은 숭고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에릭 포름의 이야기와 함께 불교에서의 노동은 경제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를 뛰어넘어 종교적 의미로까지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라고 한 것이다. 노동하는 것이 단지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승화 되었을 때 세월호 참사와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2014-05-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