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거꾸로 돌릴 수 없는 진리의 수레바퀴, 탄생과 성도와 열반은 동급이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4. 5. 8. 18:50

 

거꾸로 돌릴 수 없는 진리의 수레바퀴, 탄생과 성도와 열반은 동급이다

 

 

 

테라와다 웨삭은?

 

우리나라에서 부처님오신날은 음력으로 사월초파일이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일주일 후인 4 15일이다. 이 날을 풀문데이(Full Moon Day)’이라 하여 만월일이라 한다. 우리말로 보름날이다. 그런데 테라와다에서 4월 보름날은 부처님의 출생 뿐만 아니라 성도와 열반 이렇게 세 가지 사건을 한꺼번에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웨삭(Vesak)’이라 한다.

 

테라와다에서 웨삭은 탄생, 성도, 열반을 한꺼번에 기념하기 때문에 불교도의 최대 명절이다. 이는 탄생을 가장 큰 명절로 삼아 국가지정 공휴일로 정한 우리나라와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사대명절이라 불리우는 부처님오신날, 성도절, 출가절, 열반절 중에 어느 것을 가장 높은 비중을 두어야 할까?

 

일반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나 위인들의 경우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것이 보통이다. 종교역시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의 경우 예수가 태어난 날을 크리스마스라 하여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태어난 날 보다 깨달은 날에 더 비중을 두는 종교도 있다. 원불교의 경우 교주가 태어난 날 보다 성도한 날을 기념하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 역시 태어난 날 못지 않게 깨달은 날의 비중을 높이 해야 할 것이다. 또 열반한 날 역시 태어난 날 못지 않게 중요시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출가절은 제외된다. 출가한다고 하여 반드시 깨달으리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태어난 날과 성도한 날과 열반한 날을 동급으로 취급해야 할까?

 

탄생, 성도, 열반은 동급

 

테라와다에서는 탄생, 성도, 열반을 동급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이 세가지 사건에 대하여 한꺼번에 기념하고 있다. 사월 만월일을 웨삭이라 하여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 성도, 열반이 동급인 이유는 다름 아닌 불교의 정체성이라 본다. 특히 열반에 대하여 그렇다. 어느 종교이든지 태어난 날을 기념하지만 죽은 날을 기념하는 경우는 매우 드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탄생, 성도, 열반이 중요할까? 이 세가지 사건에 불교의 모든 것이 함축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경전에는 탄생, 성도, 열반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 되어 있다. 부처님의 탄생에 대한 것은 디가니까야 비유의 큰경(M14)’과 맛지마니까야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M123)’에 상세히 기록 되어 있다. 또 성도에 대한 것은 상윳따니까야 초전법륜경(S56.11)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S6.1)’ 등에 기록 되어 있다. 열반에 대한 것은 완전한 열반의 큰 경(D14)’ 등에 기록 되어 있다.

 

이렇게 세 가지 사건이 초기경전에 자세하게 기록 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로지 한 가지에 집중 되어 있다. 마치 일점회귀하듯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반을 향한다. 그래서 탄생이나 성도, 열반에 대한 기록은 결국 열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초기경전에서 열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보니 초기경전의 내용 또한 열반을 염두에 두고 읽어 나가면 이해하기 쉽다.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던 일

 

부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던 일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의 입태에서부터 탄생에 이르기 까지 일련의 과정에 대하여 예전에 없었던 놀라운 사건이라 하며 소개 하고 있다.

 

아난다가 설명하는 예전에 없었던 놀라운 사건의 첫 번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세존이시여, 저는 ‘아난다여, 보살은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에서 지냈다.’라고 세존의 앞에서 직접 듣고 세존의 앞에서 직접 배웠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보살은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에서 지냈다.’는 사실을 세존께 일어난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일로 기억합니다.

 

(Acchariyabbhuta sutta-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 맛지마니까야 M123, 전재성님역)

 

 

아난다는 부처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수행승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다. 예전에 없었던 놀라운 이야기 그 첫번째는 보살이 하늘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늘나라는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라 하였는데, 이는 도솔천(Tusita)를 말한다. 부처님이 모태에 들기 전에 욕계 도설천에서 태어난 사건을 말한다. 이렇게 과거에 모든 부처님들은 도솔천에 머물렀다. 고따마 붓다도 과거불에 들어 감으로 역시 도솔천에 머문 것이다.

 

19가지 놀랍고 예전에 없던 사건

 

경에서 소개된 놀랍고 예전에 없던 사건을 표로 만들어 보았다.

 

 

No

   

     

1

보살이 도솔천에 태어남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태어남

2

보살이 도솔천에서 지냄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지냄

 

3

도솔천 무리와 지냄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냄

4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도솔천무리에서 죽어서 모태에 들어 옴

 

5

자궁에 들었을 때 광대한 빛이 나타남

신들의 세계에, 악마들의 세계에, 하느님들의 세계에, 성직자들과 수행자들의 후예 가운데에,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의 세계에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남

6

보살과 어머니를 해치지 못함

보살이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왔을 때에 네 명의 하늘아들이 사방에서 그를 수호하였으므로 인간이나 인간이 아닌 자나 어떤 누구를 막론하고 보살이나 그 어머니를 해칠 수가 없었음

7

보살의 어머니는 오계를 지켰음

보살의 어머니는 본래 계행을 갖추고 있어,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것을 삼가고,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가고,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을 삼갔음

8

보살의 어머니에게 남자가 접근할 수 없었음

보살의 어머니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때문에 남자에 대하여 생각을 일으키지 않았고, 보살의 어머니에게 어떠한 남자라도 욕정을 즐기기 위해 접근할 수가 없었음

9

보살의 어머니는 다섯 가지 감각적쾌락을 향유함

보살의 어머니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얻게 되었으며,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들을 얻고 부여받아 그것들을 향유했음

10

모태에서 보살은 감관이 완전하였음

보살의 어머니는 어떠한 고통도 일으키지 않았고 보살의 어머니는 몸에 피로를 모르는 안락함을 즐겼고, 보살의 어머니는 모태를 통해서 보살이 모든 지체를 갖추고 감관이 완전하다는 것을 보았음

11

칠 일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도솔천에 태어남

보살이 태어난 지, 칠 일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에 태어났음

 

12

보살을 서서 출산하였음

다른 여인들이 앉거나 누워서 출산하는 것처럼, 보살의 어머니는 보살을 출산하지 않았음. 보살의 어머니는 보살을 서서 출산하였음

13

신들이 먼저 받음

보살이 모태에서 태어날 때에, 신들이 먼저 받았으며 나중에 사람들이 받았음

14

보살은 땅에 닿지 않았음

보살이 모태에서 나올 때에, 보살은 땅에 닿지 않았음.

네 하늘아들이 받아서 ‘왕비여, 기뻐하십시오. 그대에게 위대한 능력이 있는 아들이 태어났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어머니 앞에 놓았음

 

15

보살은 청정하게 태어났음

보살이 모태에서 태어날 때에, 보살은 청정하여 물에 오염되지 않고 점액에 오염되지 않고 피에 오염되지 않고 고름에 오염되지 않고 어떠한 부정한 것에 오염되지 않고 아름답고 청정하게 태어났음

16

찬물과 더운물로 보살과 어머니가 목욕함

보살이 모태에서 태어날 때에, 하나는 차갑고 하나는 따뜻한 두 가지 물이 공중에서 쏟아져서, 그것으로 보살과 어머니가 목욕을 했음

17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을 선언

보살이 태어나자마자 단단하게 발을 땅위에 딛고 서서 북쪽으로 일곱 발을 내딛고 흰 양산에 둘러싸여 모든 방향을 바라보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자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자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자이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을 선언했음

18

보살이 태어났을 때 광대한 빛이 나타남

보살이 모태에서 태어났을 때에, 신들의 세계에, 악마들의 세계에, 하느님들의 세계에, 성직자들과 수행자들의 후예 가운데에,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의 세계에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음

19

여래에게는 느낌이 자각적으로 일어나고 자각적으로 지속되고 자각적으로 사라짐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이것도 추가할 것을 말함

 

출처: 1) 디가니까야 비유의 큰경(D14)’

2) 맛지마니까야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M123)

 

 

보통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이 부처님에게는 있다. 그것을 경에서는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던 것(Acchariyabbhuta)’이라 하였다. 경에서는 총 19가지 사건을 들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것은 부처님에게 아난다에게 그대는 이와 같은 것도 여래에게 일어난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일로 새겨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에서 여래에게는 느낌이 자각적으로 일어나고 자각적으로 지속되고 자각적으로 사라진다. 지각이 자각적으로 일어나고 자각적으로 지속되고 자각적으로 사라진다. 사유가 자각적으로 일어나고 자각적으로 지속되고 자각적으로 사라진다.”라는 것도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던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자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경험적이고 놀랍고 경이로운 것임을 나타낸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과거에 탄생하였던 부처의 놀랍고 경이로운 이야기는 모두 18가지이다. 이 중 우리나라 불자들에게도 익숙한 이야기도 있다. 보살이 도솔천에 머문 이야기나 보살이 입태한 이야기, 보살이 서서 출산한 이야기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불자들이 모르고 있었던 이야기 들이 여럿 있다. 보살의 어머니가 다섯 가지 감각적쾌락을 향유하였다는 이야기, 보살이 모태에서 태어날 때에 신들이 먼저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는 초기경전을 보아야만 알 수 있다.

 

우두머리 선언

 

경에서 우리나라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확연하게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17번째 항목의 우두머리 선언이 그것이다. 고따마붓다를 비롯하여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이 태어날 때 일종의 탄생게를 말한다. 그런데 대승에서 말하는 탄생게와 다른 것이다. 대승에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삼계개고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 하여 하늘 위와 하늘아래 나 홀로 존귀하도다.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라는 게송을 읊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이와 다르게 다음과 같이 선언 하였다.

 

 

aggo'hamasmi lokassa,

jeṭṭho'hasmi lokassa,

seṭṭho'hamasmi lokassa,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 (M123, D14)

 

 

 

 

 

 

부처님은 왜 태어나자 마자 이와 같이 선언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 따르면 이 사건의 각각의 양상은 부처님 최후의 성취들의 전조로서 설명된 것이다.(Pps.IV.185)”라 하였다. 보살로서 삶을 끝내고 이 생에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어 다시는 나고 죽는 일이 없는 열반을 성취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태어나자 이런 선언을 한 것에 대하여 이후 전개 될 삶에 대한 전조로 보는 것이다.

 

선언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선구적이고, 가장 훌륭한 님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을 선언한 것은 가르침이 퇴전 할 수 없는 수레 바퀴를 굴리는 것을 말한다. (Pps.IV.185)”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런 선언 역시 전조에 속할 것이다. 부처님의 일생을 보면 무상정득각을 이루고 난 후 길에서 길로 길을 전법 하러 다녔기 때문이다.

 

선언에서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ayamantimā jāti)라 하였다. 이는 남김이 없는 열반의 세계(무여열반)에 드는 것을 말한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의 탄생게를 보면 부처님의 일생이 압축 되어 있는 것 같다. 일체지자로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 전법을 하고 생사 없는 열반에 듦으로서 따르는 자들에게 길을 제시한 것이다.

 

대승의 탄생게

 

그러나 대승에서 탄생게는 이와 확연하게 다르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하여 하늘 위와 하늘아래 나 홀로 존귀하도다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하여 원담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 하였다.

 

 

석가모니 당신만 위대하고 홀로 잘 났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외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천하에서 제일 존귀한 생명입니다. 자신을 얕보거나 허투루 살지 마십시오. 귀중하고 고귀한 인간으로서 삶을 얻었으니 의미 있게 사십시오. 속 좁은 자기 위주로 살지 말고 세상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 살아가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힌두라는 범신론의 영적 전통을 급진적으로 개혁함으로서 신들의 무대 위에 과감하게 인간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세계라는 무대에서 주연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경험하는 세계의 주연배우입니다. 모든 일이 당신에게서 시작되고 당신에게로 돌아갑니다. 당신이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경험하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인생만사 모든 선택이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인생의 최고결정자(Decision maker)이면서 창조자입니다(Creator). 당신은 근원(Source)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삶의 발전소이며, 당신이 경험하는 세계의 왕이라는 말입니다. 근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세요. 외부의 절대자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권위나 전통에 의지하지도 말고 당신의 지혜가 이끄는 대로 당당하게 살아가세요.     

 

(원담스님, 불기 2558 부처님 오신날 법문, 인터넷카페 마음의 호숫가에서  2014-05-07)

 

 

인터넷카페에 올려진 글이다. 글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에 대하여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나 자신이 최고결정자(Decision maker)이면서 창조자이자 근원(Source)이라 하였다.

 

천상천하유아독존에 대하여 인간선언으로 본다는 것은 부처님 당시 혁명적인 발상이라 볼 수 있다. 브라흐마와 아뜨만으로 설명되는 고대인도 바라문교 전통에서 인간선언을 한다는 것은 혁명적인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을 끌어 내리고 그 자리에 인간을 올려 놓은 선언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천상천하유아독존에 대하여 인간선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초기경전에 따르면 이 문구와 대응 되는 구절이 있다. 그것은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라는 문구이다. 부처님 스스로 가장 뛰어나고, 훌륭하고, 선구적인 자라 하였다. 이런 세 가지 설명 자체가 아마도 천상천하유아독존에 해당 될 것이다.

 

그러나 초긱경전의 주석에서는 원담스님이 말한 인간선언과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세 가지 님에 대한 설명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퇴전 할 수 없는 수레 바퀴를 굴리는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신의 자리에 인간의 위치를 올려 놓는 천상천하유아독존 설명과 달리, 가장 뛰어나고, 훌륭하고, 선구적인 자라 스스로 칭한 것은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한 필요 조건이 될 것이다. 더 이상 깨달을 수 없는 증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훌륭하고 선구적인 자가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승의 탄생게와 초기경전의 탄생게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두 번째 구절이라 볼 수 있다. 대승에서 삼계개고아당안지라는 말은 초기경전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신 초기경전에서는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대승의 탄생게와 초기불교의 탄생게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대체 어떤 것이 맞는 것일까?

 

믿거나 말거나 버전이라고?

 

대승불교전통에서는 불탄절에 탄생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때 마다 한역경전에 표현된 천상천하유아독존삼계개고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의 의미를 설명한다. 이 게송에 대하여 매일 뉴시스에 글을 올리고 있는 하도겸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모든 게무아(無我)’이며()’이라고 깨달은 부처님께서는 태어나면서하늘 위 하늘 아래 우리가 각기 존귀하다. 모든 세계의 고통 받는 중생들을 우리가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는 뜻을믿거나 말거나버전으로 선포했다. 부처님께서는 내(부처님)게도 의존하지 말고 오직 가르침을 따르라고 한 분이다. 그런 분이 제자들에게 내 생일 잘 챙겨야 한다고 하지 않았을 것임을 굳이 추측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오히려 챙겨서도 안 되며 그런 시간에 수행을 더욱 열심히 하고 마음 잘 닦아서 얼른 깨우치라고 하셨을 것이다.

 

([하도겸 칼럼]불교계 명절·생일잔치, 모두 ‘부처님오신날’ 한다면, 뉴시스 2014-05-05)

 

 

글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삼계개고아당안지에 대하여 “‘믿거나 말거나버전으로 선포했다라 하였다. 믿거나 말거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이제 갓 태어난 아기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라 보여진다. 그래서일까 부처님께서는 내(부처님)게도 의존하지 말고 오직 가르침을 따르라는 뜻으로 해석 하였다.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아가자고?

 

대승탄생게와 관련하여 원담스님은 자신의 카페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다 같이 외칩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귀하나니,

삼계개고 아당안지! 온통 괴로움에 휩싸인 세계를 내가 편안케 하리라.

우리 모두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행복하고 안락한 세계를 살아갑시다.”

우리가 이렇게 산다면 모든 것을 성취하다라는 뜻을 가진 싯다르타(Siddhartha)라는 이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원담스님, 불기 2558 부처님 오신날 법문, 인터넷카페 마음의 호숫가에서  2014-05-07)

 

 

원담스님에 따르면 우리모두 삶의 주인이 되자고 하였다. 삶의 주인이 되어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대승탄생게에 대하여 두 분의 해석을 보았다. 그러나 해석이 모두 다르다. 그리고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일까 대승탄생게를 설명하는 스님들이나 법사들의 이야기 또한 모두 다르다.

 

아라한선언

 

대승탄생게와 달리 초기불교의 탄생게를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하다. 그것은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전조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곳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것은 바로 열반이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선언 하였다. 이 선언에 대하여 아라한선언이라 한다. 또 아라한송이라 한다. 누구나 가르침을 실천하여 번뇌를 소멸하면 아라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라한이 된다는 것은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올라 간다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도 아라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라한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부처님의 깨달음이 입증 되는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로 시작 되는 아라한선언이 무수하게 나온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이 바로 열반의 실현에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탄생게에서도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경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갖는다. 마치 일점으로 회귀 하듯이 모든 가르침은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의 탄생게는 믿거나 말거나가 될 수 없다.

 

왜 열반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일까?

 

대승불교에서는 탄생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래서 부처님이 태어난 날을 가장 크게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탄생과 성도와 열반을 동급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사건을 한꺼번에 기념하고 있다. 4월 풀문데이(보름)에 탄생과 성도와 열반을 함께 기념하는 이유는 모두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일 탄생이 없었다면 부처가 이땅에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보살이 몸을 받아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깨달음이 없었다면 법의 바퀴를 굴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스스로 열반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법의 바퀴는 더 이상 굴러 가지 않고 불교가 오늘날 까지 존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함으로 해서 가르침이 증명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늘날 까지 전승되어 온 것은 법의 수레바퀴를 굴려온 승가의 역할도 크지만 무엇보다 부처님이 열반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그것은 자아를 가진 육체의 죽음이 아니다.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자아는 더 이상 존속하지 않기 때문에 아라한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그래서 열반에 대하여 불사(不死: Atama)라 한다. 이처럼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이 아라한의 죽음이다. 그런 모습을 부처님이 보여 주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법의 바퀴가 끊임 없이 굴러 온 것이다.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

 

그런데 그 법의 바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Rājāhamasmi sela                 라자하마스미 셀라

dhammarājā anuttaro,             담마라자 아눗따로
Dhammena cakka
vattemi          담메나 짝깡 왓떼미

cakka appativattiya.          짝깡 압빠띠왓띠양

 

“셀라여, 왕이지만 나는

위 없는 가르침의 왕으로

진리의 바퀴를 굴립니다.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

 

(셀라경, 숫따니빠따 Sn3.7,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굴리신 법의 바퀴는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다고 하였다. 오로지 앞으로만 나아간다는 뜻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법구경에서 첫번째 게송을 보면 수레바퀴의 비유가 있다. 그래서 수레바뀌가 황소의 발굽을 따르듯 (cakka va vahato pada)”이라 하였다. 게송에서 바퀴라는 말이 짝까(cakka)이다. 그런데 셀라경에서도 부처님은 짝까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은 진리의 바퀴를 굴립니다 (Dhammena cakka vattemi)”라 하였다. 말이 끄는 바퀴와 진리의 바퀴는 다르다. 그러나 고대인도에서 바퀴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어떤 의미일까?

 

앞으로만 구를 수밖에 없는 이유

 

법구경 1번 게송에서 수레바뀌가 황소의 발굽을 따르듯이라 하였다. 이 말에대하여 단순하게 생각하면 황소가 수레를 끄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수레의 원리를 보면 황소가 수레를 끈다는 것은 오로지 전진만 할 뿐 후진불가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주석에 따르면 황소는 수레를 거꾸로 돌리거나 거기서 벗어 날 수 없다. 황소가 앞으로 벗어나려고 하면, 멍에가 황소의 목을 조른다. 뒤로 벗어나려고 하면, 바퀴가 황소의 엉덩이 살을 도려 낸다.(DHP1번 각주)”라고 되어 있다. 멍에를 지고 수레를 끄는 황소는 오로지 앞으로만 나아 갈 수밖에 없다. 뒤로는 절대로 바퀴를 굴릴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셀라경에서 부처님은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cakka appativattiya,stn556) 라 한 것이다.

 

마치 황소가 끄는 수레바퀴를 절대로 뒤로 되돌릴 수 없듯이, 부처님이 한번 굴린 진리의 수레바퀴는 절대로 뒤로 되돌릴 수 없다. 황소가 끄는 수레처럼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 가는 것이 진리의 수레바퀴인 것이다. 이렇게 오로지 앞으로만 굴로 가는 진리의 수레바퀴를 부처님이 굴렸다. 그 첫 번째 바퀴가 굴러 간 것이 초전법륜경에 묘사 되어 있다.

 

처음으로 깨달음이 증명되었을 때

 

부처님이 오비구를 모아 놓고 처음으로 자신의 깨달음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꼰단냐에게서 진리의 눈이 열렸다. 이 장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꼰당냐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S56.11)”라고 설명 되어 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이것이 불교역사상 최초로 법의 바퀴가 굴러간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실 때에 땅위의 신들은 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쳤다. (S56.11)

 

 

꼰단냐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 부처님의 깨달음은 증명 된 것이다. 그 첫 번째 사건에 대한 소식을 땅의 신들이 안 것이다. 그래서 이를 세상에 알렸다. 어떻게 알렸을까? 땅의 신들은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진리의 수레바퀴는 마치 황소가 끄는 수레바퀴처럼 오로지 앞으로만 구를 뿐 절대로 후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왜 그럴까?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생노병사등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설하였을 때 누군가 누군가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생노병사 등이 괴로움이 아니라는 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이 말씀 하신 사성제는 진리로서 받아 들일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진리의 바퀴는 오로지 앞으로만 갈 뿐 뒤로 결코 되돌릴 수 없음을 말한다.

 

오늘날까지 쉬지 않고 앞으로만 굴러만 가는 바퀴

 

이렇게 꼰단냐가 이해 한 순간 진리의 바퀴는 움직이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쉬지 않고 앞으로만 굴러 갔다. 그렇다면 땅의 신을 비롯하여 하느님(브라흐마)까지 환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윤회를 종식시킬 수 있는 희망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실천하면 괴로움을 소멸하고 윤회를 종식하여 더 이상 나고 죽는 일 없는 열반을 실현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가 굴렀을 때 다음과 같은 감동의 순간을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 찰나, 그 순간, 그 잠깐 사이에 하느님의 세계에 까지 소리가 미쳤다. 또한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 (S56.11)

 

 

이렇게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나타난 것은 초기경에 따르면 세 번 나타난다. 보살이 모태에 들었을 때와 보살이 태어났을 때, 그리고 처음으로 법의 바퀴가 굴러 갔을 때이다. 이렇게 본다면 탄생과 성도와 열반은 동급이라 볼 수 있다.

 

탄생과 성도와 열반을 한날에 기념하는 웨삭

 

테리와다에서는 탄생과 성도와 열반 이렇게 세 가지 사건에 대하여 한날에 기념한다. 웨삭이라 하여 음력 사월 달이 꽉 찼을 때인 15일을 기념일로 삼는다. 이렇게 탄생과 성도와 열반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유엔에서 지난 1999년에 웨삭일에 대하여 공식으로 성스러운 날(Holy day, 聖日)’로 지정하였을 것이다.

 

 

 

2014-05-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