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과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18. 18:59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과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

 

 

 

슬프고 안타깝고

 

참으로 슬프고 안타깝다. 그리고 허탈하다. 그리고 분노한다. 진도여객선침몰사건을 전하는 뉴스를 들으면 슬프고, 안타깝고, 아쉽고, 분노한다. 수백명에 달하는 어린 학생들이 실종 되었다는 소식이 슬프다. 그리고 제발 살아 있기를!” 바라는 학부모들의 절규가 안타깝다.

 

방송에서는 여러가지 상황을 계속 보여 준다. TV에서는 오로지 여객선 침몰사건만 보여 준다. 다큐 프로를 주로 방송하는 EBS에서도 자막으로 사건을 계속 알려 준다.

 

자막에 따르면 일본 수상이 애도를 표하였다고 하고, 심지어 저 먼 브라질에서도 주요한 뉴스로 다루었다고 한다. 이렇게 온 국민을 슬픔에 빠뜨린 이번 사건을 보면 아쉬운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실내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안내도 그렇고 선장이 가장 먼저 탈출한 것도 그렇다. 이런 내용을 접할 때 마다 슬프고 허탈 하다 못해 분노로 발전된다.

 

현재 실종된 수백명의 학생에 대한 생사여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야기를 종합하여 볼 때 비관적이다. 그럼에도 학부모들은 한가닥 기대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틀림 없이 살아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이다. 그런 바램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구조작업은 진척 되지 않는다. 장비탓을 하고 날씨타령을 하다 보니 안타까운 시간만 지나는 것이다. 이를 바라 보는 부모는 가슴이 타들어 가고 이를 지켜 보는 국민들 역시 가슴이 타기는 마찬가지이다.

 

허탈에서 분노로

 

종종 자연재해에 대한 뉴스를 듣는다. 지진이나 쓰나미, 태풍 등 주로 해외에서 일어난 일이다. 수백명, 수천명, 수만명이 죽었을 때 덤덤하게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아마도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고 또한 자연의 변화로 인한 재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인재가 발생하였을 때이다.

 

비행기 추락사고나 열차전복, 선박침몰과 같은 사건은 사람의 잘못이 더 크다. 아무리 첨단장비로 갖추어져 있다고 하여도 사람이 운용하기 때문이다.

 

만일 무자격자가 운전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대형사고로 이어질 것이다. 설령 운전할 줄 아는 자라 하더라도 그가 술취한 상태거나 졸음운전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역시 대형사고가 발생할 것이다. 이렇게 경험도 없고 법규도 지키지 않고 윤리의식도 없는 자가 비행기나, 열차, 선박 등 거대한 운송수단을 운전하였을 때 사고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계속 방송되는 뉴스를 듣다 보면 슬픔에서 허탈로, 허탈에서 분노로 바뀐다. 그것은 충분히 막을 수 있고 살릴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특히 방안에서 꼼짝말고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이 원망스럽다. 그리고 가장 먼저 탈출한 선장이 원망스럽다. 배가 침몰해 가는 상황에서 조치를 취했더라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다. 만일 적절한 조치를 취했더라면 거의 대부분 구조 되었을 것이다. 배에는 탑승자 전원을 태우고 남을 구명정이 수십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도 써 먹어 보지 못하고 안내방송만 믿고 방에서 대기 하다 실종된 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피지도 못한 꽃처럼

 

누구나 한번 죽는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 그러나 가장 안타까운 것이 젊은 사람이 죽는 것이다.

 

살만치 살다 죽은 노인의 죽음에 대하여 호상이라 한다. 그래서 그다지 슬퍼 하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에서는 축제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피지도 못한 꽃처럼 학생이 죽었을 때, 그것도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로 인하여 죽었을 때 억울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애가 끊는 듯이 슬픈 것이다.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슬픈 것은 괴로움이다. 그렇다면 괴로움에 어떤 것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설하였다. 그래서 태어남도, 늙음도, 병듦도, 죽음도 괴로움이라 하였다.  근심, 비탄, 고통, 우울, 절망도 괴로움이고,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라 하였다. 이렇게 모두 열 두 가지 괴로움을 말씀 하셨는데 삶에서 겪는 괴로움은 여기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슬픔이란 무엇인가?

 

열 두 가지 괴로움 중에 슬픔에 대한 것이 근심, 비탄, 고통, 우울, 절망이다. 먼저 근심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o ca bhikkhave soko: yo kho bhikkhave aññataraññatarena byasanena samannāgatassa aññataraññatarena  dukkhadhammena phuṭṭhassa soko socanā socitatta anto soko anto parisoko, aya vuccati bhikkhave soko.

 

수행승들이여 근심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이러저러한 불행을 만나고 이러저러한 괴로운 것에 접촉하면, 걱정하고 걱정해서, 우울에 빠져서, 안으로 걱정하고 안으로 울적해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근심이라 한다.

 

(Mahāsatipaṭṭhānasutta-새김의 토대의 큰 경, 디가니까야 D22, 전재성님역)

 

 

근심이라 번역한 빠알리어는 소까(soka)이다. Soka  ‘grief; sorrow’의 뜻이다. 그래서 보통 슬픔으로 번역한다.

 

소까는 어떤 경우 발생하는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접촉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불행이나 괴로운 대상과 접촉 하였을 때이다. 그래서 걱정하고 또 걱정하는 것이 근심이라 하였다. 이렇게 한가지 대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근심하였을 때 우울에 빠질 것이라 하였다.

 

걱정하고 걱정해서

 

이와 같은 근심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It is manifested as continual sorrowing.(빅쿠 냐마몰리역)”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해석을 하면 이것은 끊임 없는 슬픔으로 나타난다의 뜻이다.

 

그러나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근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라고만 되어 있다.가장 차이 나는 부분이 ‘continual’에 대한 것이다. 냐나몰리는 끊임 없는 슬픔(continual sorrowing)”이라 하였으나, 초불연 번역에서는 단지 근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라고 번역하였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빠알리 원문을 찾아 보았다. 원문은 “anusocanapaccupaṭṭhāno”이다. 이 구문은 대념처경(D22)에서 소까에 대한 설명과 유사하다.  대념처경에서는 soko socanā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근심하고 근심해서의 뜻이다. 근심이라는 것이 한번 일어나는 것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심을 대상으로 계속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청정도론 원문에서 anusoca’라 하였을 것이다. 이를 빅쿠 냐나몰리는 ‘continual sorrowing’이라 영역하여 연이은 슬픔뜻으로 번역하였으나 초불연에서는 단지 근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라고만 하였다. 이는 소까에 대한 정확한 뜻이 될 수 없다.

 

슬픔에 대한 게송

 

청정도론에서는 소까(근심, 슬픔)에 대한 하나의 게송을 소개 하고 있다. 소까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잘 요약하고 있는 게송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Sattāna hadaya soko, visasallava tujjati;

Aggitattova nārāco, bhusava dahate puna.

Samāvahati ca byādhi-jarāmaraabhedana;

Dukkhampi vividha yasmā, tasmā dukkhoti vuccatī

 

(soko, 청정도론, 빠알리원문)

 

 

이에 대하여 빅쿠 냐마몰리는 다음과 같이 영역하였다.

 

 

Sorrow is a poisoned dart

That penetrates a being’s heart;

Setting up a burning there

Like burning with a red-hot spear.

This state of mind brings future pain (see XVII.273f.)

Such as disease, and then again

Ageing and death, so one may tell

Where for it is called pain as well.

 

(SORROW, 청정도론, 빅쿠냐나몰리역)

 

 

빅쿠 냐나몰리역을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슬픔은 독이 묻은 꼬챙이와 같다.

그것은 한 존재의 심장을 관통해 버린다.

붉고 뜨거운 창이 불에 타는 것처럼

거기를 태워버린다.

이 마음의 상태가 미래의 고통을 가져 온다.

질병, 그리고

늙어감과 죽음에 대하여, 누군가

이것은 고통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냐나몰리역을 직역해 본 것이다.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근심은 중생의 가슴을 찌르는 독화살이다.

벌겋게 타는 창으로 중생의 가슴을 지진다.

, 늙음, 죽음, 멸망 등 갖가지 괴로움을 가져 오나니

그래서 괴로움이라 한다.

 

(근심, 청정도론 2 553p,  초불연 대림스님역)

 

 

독묻은 화살에 맞은 것처럼

 

소까에 대한 핵심구문은 “Sattāna hadaya soko, visasallava tujjati”이다, 이는 뭇삶의 가슴속에 있는 슬픔이라는 것은 독묻은 화살에 맞은 것과 같다라는 뜻이다. Tujjati‘to be pierced’라는 뜻으로 관통하다또는 ‘to be struck’로서 강타당하다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슬픔이라는 것은 독이 퍼져서 고통을 받는 상태를 말한다.

 

독화살을 맞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화살을 누가 쏘았을까?”라고 따져야 할까? 말룽끼야뿟따경에 따르면 독화살은 맞는 즉시 뽑아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대로 내버려 두었을 때 독이 온 몸에 퍼져서 죽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까(슬픔, 근심)에 대하여 독화살에 맞는 것 같다고 하였다.

 

애간장이 탄다

 

다음으로 비탄이 있다. 빠알리어로 빠리데와라 한다. 이 비탄은 슬픔 또는 근심 보다 더 괴로운 상태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대념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Katamo ca bhikkhave paridevo: yo kho bhikkhave aññataraññatarena byasanena samannāgatassa aññataraññatarena dukkhadhammena phuṭṭhassa ādevo paridevo ādevanā paridevanā ādevitatta paridevitatta, aya vuccati bhikkhave paridevo.

 

수행승들이여 비탄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이러저러한 불행을 만나고 이러저러한 괴로운 것에 접촉하면, 한탄하고 비통해 하고, 한탄하고 비통해하여 한탄에 빠지고 비통함에 빠진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비탄이라 한다.

 

(Mahāsatipaṭṭhānasutta-새김의 토대의 큰 경, 디가니까야 D22, 전재성님역)

 

 

비탄이라 번역한 ‘paridevoa’‘wailing; lamentation’애가, 비탄, 비탄의 소리의 뜻이다. ‘애간장이 탄다거나 애간장을 말린다고 하였을 때 이는 슬픔으로 인하여 간이 손상됨을 말한다.

 

간장에 대한 우리말이 이다. 우리말 에 한자어 이 이음동어로 합성되어 애간장이 탄다라 한다. 이는 몹시 답답하거나 안타까워 속이 끓는 듯하다는 말이다. 이렇게 애타는 듯한 마음이 빠리데와(parideva)이다.

 

이 빠리데와에 대한 설명을 보면 한탄하고 비통해 하고, 한탄하고 비통해하여 한탄에 빠지고 비통함에 빠지는 것이라 하였다. 비탄에 비탄을 거듭하는 것을 말한다. 아마도 진도여객선 침몰 학부모의 마음이 바로 애가 타는 마음과 같을 것이다.

 

너무 슬퍼서 통곡하는

 

청정도론에서는 빠리데와(비탄)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 되어 있을까? 먼저 빅쿠 냐나몰리의 영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Lamentation is verbal clamour on the part of one affected by loss of relatives and so on. It has crying out as its characteristic. Its function is proclaiming virtues and vices. It is manifested as tumult. It is suffering because it is a state of suffering due to formations and because it is a basis for suffering.

 

(LAMENTATION, 청정도론, 빅쿠냐나몰리역)

 

 

이를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비탄은 친척 등의 잃음에 따라 말로서 떠들썩함이다. 이것은 울음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의 기능은 미덕과 약한 도덕에 대하여 공표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동으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형성에 따른 고통의 상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고통이고, 고통의 근본이 이기 때문에 고통이다.

 

 

빅쿠 냐마몰리역을 직역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초불연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탄식은 친척등을 잃어서 겪는 것으로서 말을 하면서 우는 것이다. 이것의 특징은 통곡이다. 덕과 허물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혼동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형성됨에 기인한 괴로움(행고)이고, 또한 괴로움의 토대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탄식, 청정도론 2 553p, 초불연 대림스님역)

 

 

빠리데와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탄식으로 번역하였다. 성전협에서는 비탄으로 번역하였다. 사전에 따르면 비탄은 슬퍼하며 탄식함이라 되어 있고, 탄식은 근심이나 원망 따위로 한탄하여 숨을 내쉼이라 되어 있다. 영어로는 lamentation이다. 이는 ‘sigh for grief’ 슬픔의 한숨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청정도론에 따르면 우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고 하였다. 울고 불고 하는 것을 빠리데와라 하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 원문을 찾아 보았다.

 

 

Paridevo nāma ñātibyasanādīhi phuṭṭhassa vacīpalāpo. So lālappanalakkhao, guadosakittanaraso, sambhamapaccupaṭṭhāno. Dukkho pana sakhāradukkhabhāvato dukkhavatthuto ca.

 

(Paridevo, 청정도론 빠알리원문)

 

 

빠리데와(비탄)의 핵심 내용은 ‘lālappanalakkhao’이다. 이는 lālappa+alakkhi 이다. Lālappa‘talking much, excited or empty talk  冗語, 로 설명 되어 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excited or empty talk’라는 말이 있다. ‘과장하거나 공허한 말이라는 뜻이다. 일본어에서는 라 하여 울면서 하는 말이라 하였다. alakkhi‘misfortune; bad luck, 不幸로 불행을 뜻한다. 따라서 ‘lālappanalakkhao’는 자신의 불행에 대하여 한탄하며 우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청정도론에 표현 되어 있는 빠리데와(비탄)의 뜻은 통곡의 뜻이라 볼 수 있다.

 

비탄에 대한 게송

 

통곡에 대하여 대념처경에서는 ādevanā로 표현 되어 있다. Ādevanā‘lamenting; crying; deploring’로서 소리 내어 울다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소까(슬픔) 보다 더 강화 된 것이 빠리데와(비탄)임을 알 수 있다.

 

빠리데와(비탄)에 대하여 청정도론에 소개 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Ya sokasallavihato paridevamāno,

Kaṇṭhoṭṭhatālutalasosajamappasayha;

Bhiyyodhimattamadhigacchatiyeva dukkha,

Dukkhoti tena bhagavā paridevamāhā

 

(빠리데와(비탄) 게송)

 

 

Now, when a man is struck by sorrows dart and he laments

The pain he is already undergoing he augments

With pain born of dry throat and lips and palate, hard to bear.

And so lamenting too is pain, the Buddha did declare.

 

(빠리데와(비탄) 게송, 냐나몰리역)

 

 

탄식이라는 화살에 찔린 자가 비탄하면서

목과 입술과 입천장이 마르는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은 더욱 더해간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탄식을 괴로움이라 하셨다.

 

(빠리데와(비탄) 게송, 초불연 대림스님역)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있는데

 

근심, 비탄, 고통, 우울, 절망이 있다. 고통과 우울은 어떤 것일까? 대념처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1) dukkha(고통)

 

Katamañca bhikkhave dukkha: ya kho bhikkhave kāyika dukkha kāyika asāta kāyasamphassaja dukkha asāta vedayita, ida vuccati bhikkhave dukkha.

 

수행승들이여, 고통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신체적인 고통, 신체적인불쾌, 신체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괴롭고 불쾌한 느낌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를 고통이라 한다.

 

 

2) domanassa(우울)

 

Katamañca bhikkhave domanassa: ya kho bhikkhave cetasika dukkha cetasika asāta manosamphassaja dukkha asāta vedayita, ida vuccati bhikkhave domanassa.

 

수행승들이여, 우울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정신적인 고통, 정신적인 불쾌, 정신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괴롭고 불쾌한 느낌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를 고통이라 한다.

(Mahāsatipaṭṭhānasutta-새김의 토대의 큰 경, 디가니까야 D22, 전재성님역)

 

 

성전협 번역을 보면 dukkha에 대하여 고통’, domanassa에 대하여 우울이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육체적 고통(dukkha)’정신적 고통(domanassa)’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고통이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 것으로 나누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분하면 모두 여섯 가지 고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울고, 가슴을 치고

 

이와 같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에 대하여 어느 고통이 더 고통스러운 것일 것? 청정도론에 따르면 정신적 고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정신적인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자들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울고, 가슴을 치고, 앞으로 뒹굴고, 빙글빙글 뒹굴며, 거꾸로 떨어지고, 칼을 휘두르고, 독을 마시며, 밧줄로 목을 매달고, 불에 들어간다.

 

(탄식, 청정도론 2 555p, 초불연 대림스님역)

 

 

육체적 고통이 단지 육체적 괴로움으로 나타나는 것에 비하여 정신적 고통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울 듯 하는 것이라 하였다. 더구나 가슴을 치고 뒹구는 행위를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극단적인 고통에 대하여 빅쿠 냐나몰리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For those who are gripped by mental pain tear their hair, weep, thump their breasts, and twist and writhe; they throw themselves upside-down,12 use the knife, swallow poison, hang themselves with ropes, walk into fires, and undergo many kinds of suffering.

 

(GRIEF, 청정도론, 빅쿠냐나몰리역)

 

 

빅쿠 냐나몰리는 둑카에 대하여 pain이라 하였고, 도마낫사에 대하여 grief라고 번역하였다. Grief는 슬픔, 재난의 뜻이다. 마치 재난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에 대여 도마낫사(정신적 고통)이라 한 것이다.

 

빅쿠 냐나몰리 they throw themselves upside-down이라 하였는데, 이는 그들 자신을 엉멍진창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거꾸로 떨어지고라 하였다. 이 설명과 관련하여 청정도론 빠알리원문은 다음과 같다.

 

 

Cetodukkhasamappitā hi kese pakiriya kandanti, urāni paipisanti, āvaṭṭanti, vivaṭṭanti, uddhapāda papatanti, sattha āharanti, visa khādanti, rajjuyā ubbandhanti, aggi pavisantīti ta nānappakāraka

 

(Domanassa, 청정도론 빠알리원문)

 

 

빠알리 원문에 uddhapāda가 있다.  빅쿠냐나몰리의 각주에 따르면 Be(미얀마본)에서만 보이고 Ee(TPS) Ae 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uddhapādauddha+pāda이다. uddhahigh up의 뜻이고, pādaStep, stride; footprint, trace’의 뜻이다. 따라서uddhapāda은 발이 위로 들린 상태를 말한다. 땅에서 떼굴떼굴 구르는 상태를 표현 한 것이다. 이처럼 정신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것이다. 더구나 독을 마시는 것 같고, 밧줄로 목을 매단 것 같고, 불에 들어간 것과 같다고 하였다.

 

절망이란 무엇인가?

 

근심, 비탄, 고통, 우울, 절망에서 마지막으로 절망에 대한 것이다. 절망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먼저 대념처경에 정의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o ca bhikkhave upāyāso: yo kho bhikkhave aññataraññatarena byasanena samannāgatassa aññataraññatarena dukkhadhammena phuṭṭhassa āyāso upāyāso āyāsitatta upāyāsitatta, aya vuccati bhikkhave upāyāso.

 

수행승들이여, 절망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이러저러한 불행을 만나고 이러저러한 괴로운 것에 접촉하면, 실망하고 낙담하고 실망에 빠지고 낙담에 빠진다. 이를 절망이라 한다.

 

(Mahāsatipaṭṭhānasutta-새김의 토대의 큰 경, 디가니까야 D22, 전재성님역)

 

 

 

grief

 

 

 

근심, 비탄, 고통, 우울, 절망에서 절망이 가장 나중에 설명 되어 있다. 이는 점차로 괴로움의 강도가 올라 가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절망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우빠야사(upāyāsa)’라 한다.

 

Upāyāsa‘tribulation; grief’의 뜻이다. 시련, 고난, 슬픔, 재난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근심, 비탄, 고통, 우울, 절망은 모두 같은 말이라 볼 수 있다. 다만 더욱 나중으로 갈수록 고통이 더욱 더 가중 되는 것을 말한다.

 

Upāyāsa에 대하여 성전협과 초불연에서 모두 절망으로 번역하였다. 빅쿠 냐나몰리는 ‘despair’라 번역하였다. Despair절망하다 단념하다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빠사야는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울어 보아도 소용없고 뒹군다고 해도 해결 되는 것이 아닌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안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Upāyāsa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을 보면 , , 絶望으로도 설명 되어 있다. 그래서 Upāyāsa번뇌로도 번역된다. 이는 숫따니빠따 에서 당신의 모든 번뇌는 소멸되었습니다.(stn542)”라 하였을 때 번뇌에 해당되는 단어가 Upāyāsa인 것이다. 이는 Upāyāsaupa + āyāsa의 결합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Āyāsatrouble; sorrow의 뜻이므로 슬픔이 극에 달했을 때, 더 이상 슬퍼할 것도 없는 상태를 절망이라고 볼 수 있다.

 

절망에 대한 게송

 

이런 절망에 대한 게송이 있다. 청정도론에 소개된 절망송은 다음과 같다.

 

 

Cittassa ca paridahanā, kāyassa visādanā ca adhimatta;

Ya dukkhamupāyāso, janeti dukkho tato vutto

 

(Upāyāsa(절망), 청정도론 빠알리원문)

 

 

So great the pain despair imparts

It burns the heart as with fever’s flame;

The body’s function it impairs

And so despair borrows from pain its name.

 

(Upāyāsa(절망), 청정도론, 빅쿠 냐나몰리역)

 

 

절망은 마음을 태우기 때문에

몸을 억압하기 때문에

극심한 괴로움을 더해가나니

그래서 괴로움이라 한다.

 

(Upāyāsa(절망), 청정도론 2 555p, 초불연 대림스님역)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

 

온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진도여객선 침몰사건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고는 끊임 없이 일어난다. 과거에도 일어 났고 미래에도 일어 날 것이다. 그러나 또 이와 같은 사고가 언제 일어 날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일어 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진도여객선 침몰사고와 같은 인재는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고성제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으로 설명된다. 이에 대한 대념처경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Katamo ca bhikkhave appiyehi sampayogo dukkho: idha yassa te honti aniṭṭhā akantā amanāpā rūpā saddā gandhā rasā phoṭṭhabbā dhammā, ye vā panassa te honti anatthakāmā ahitakāmā aphāsukakāmā ayogakkhemakāmā, yā tehi saddhi sagati samāgamo samodhāna missībhāvo, aya vuccati bhikkhave appiyehi sampayogo dukkho.

 

수행승들이여, 사랑스럽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원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형상들, 소리들, 냄새들, 맛들, 감촉들, 사실들이 있거나, 또는 불행을 원하는 자들, 불익을 원하는 자들, 불편을 원하는 자들, 불안을 원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러한 것들과 만나고 교류하고 합류하고 결합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사랑스럽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이라고 한다.

 

(Mahāsatipaṭṭhānasutta-새김의 토대의 큰 경, 디가니까야 D22, 전재성님역)

 

 

사랑스럽지 않는 것 (appiyehi)’과 만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세상에서 원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사랑하지 않는 것, 원하지 않는 것과 만나면 불행하다.

 

사건이나 사고도 사랑스럽지 않은 것

 

압삐예히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원하지 않는 중생들이나 상카라들()이다라고 하였다. 상카라들에 대하여 빅쿠 냐나몰리는 ‘formations (inanimate things)’라 하였다. Inanimate가 생명 없는 것을 뜻하므로 사건이나 사고사랑스럽지 않은 것(appiyehi)’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압삐예히에 대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Disvāva appiye dukkha, pahama hoti cetasi;

Tadupakkamasambhūta-mathakāye yato idha.

Tato dukkhadvayassāpi, vatthuto so mahesinā;

Dukkho vuttoti viññeyyo, appiyehi samāgamo

 

(사랑스럽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 청정도론, 빠알리원문)

 

 

The mere sight of an unloved thing

Brings firstly mental suffering.

And suffering of body too

Through touching it can then ensue.

And we therefore may recognize.

Since meeting the unloved gives rise

To either kind of pain, that

He decided pain its name should be.

 

(사랑스럽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 청정도론, 빅쿠 냐나몰리역)

 

 

싫어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첫 번째로 마음에 괴로움이 일어난다.

그들의 행위로 생긴 괴로움이

그다음에 몸에도 일어난다.

이것은 두 가지 괴로움의 토대이기 때문에

대성자께서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괴로움이라 하셨다.

 

(사랑스럽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 청정도론 2 556p, 초불연 대림스님역)

 

 

사랑스럽지 않는 것과 만남은 사람 뿐만이 아니라 사물도 될 수 있고 현상도 될 수 있다. 사건이나 사고 역시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만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괴로움이라 하였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슬픔

 

원하지 않는 만남으로 인하여 헤어지는 슬픔과 괴로움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사랑스런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대념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Katamo ca bhikkhave piyehi vippayogo dukkho: idha yassa te honti iṭṭhā kantā manāpā rūpā saddā gandhā rasā phoṭṭhabbā dhammā, ye vā panassa te honti atthakāmā hitakāmā phāsukakāmā yogakkhemakāmā mātā vā pitā vā bhātā vā bhagini vā jeṭṭhā vā kaniṭṭhā vā mittā vā amaccā vā ñāti sālohitā vā, yā tehi saddhi asagati asamāgamo asamodhāna amissībhāvo, aya vuccati bhikkhave piyehi vippayogo dukkho.

 

수행승들이여, 사랑스러운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원하고, 마음에 드는 형상들, 소리들, 냄새들, 맛들, 감촉들, 사실들이 있거나, 또는 행복을 원하는 자들, 이익을 원하는 자들, 편안을 원하는 자들, 안온을 원하는 자들,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형님, 아우, 친구, 동료, 친척이 있는데, 그러한 것들과 만나지 못하고 교류하지 못하고 합류하지 못하고 결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사랑스러운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이라 한다.

 

(Mahāsatipaṭṭhānasutta-새김의 토대의 큰 경, 디가니까야 D22, 전재성님역)

 

 

청정도론에 따르면 사랑스러운 것과 헤어지는 것에 대하여 중생들이나 상카라들에서 멀어지는 것이다.”라 하였다. 원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근심,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또 불운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랑스러운 것과 헤어지는 것은 괴로움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슬픔의 화살을 맞아

 

사랑스러운 것과 헤어지는 것에 대한 괴로움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설명되어 있다.

 

 

Ñātidhanādiviyogā,

Sokasarasamappitā vitujjanti;

Bālā yato tato ya,

Dukkhoti mato piyavippayogo

 

(사랑스러운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 청정도론, 빠알리원문)

 

The dart of sorrow wounds the heart

Of fools who from their wealth must part or kin.

Which roughly should be grounds enough

For counting the loved lost as suffering.

 

(사랑스러운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 청정도론, 빅쿠 냐나몰리역)

 

 

친척과 재산 등을 잃어버려 근심의 화살에 맞아

어리석은 자들은 괴로워하나니

그래서 좋아하는 자들과 헤어짐을

괴로움이라 했다.

 

(사랑스러운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 청정도론 2 556p, 초불연 대림스님역)

 

 

 

나의 소유,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열 두가지 괴로움에 대하여 한마디로 요약하였다. 그것은 다섯가지 집착다발이 괴로움이다.(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pi dukkhā. D22)”라 하였다. 다섯가지 집착다발이란 무엇일까?

 

집착다발은 우빠다나칸다(upādānakkhandhā)의 번역어이다. 이를 한자어로 취온(取溫)이라 한다. 우빠다나가 ‘grasping; attachment’로서 들러붙는다는 뜻이고, khandhā‘bulk, the trunk of the body’ 의 뜻으로 무더기의 뜻이다. 따라서 우빠다나칸다(upādānakkhandhā)는 무더기에 대한 집착이라 하여 취온이라 한다.

 

우리 몸과 마음은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 이렇게 다섯 가지 무더기 또는 다발로 보기 때문에 이를 한자어로 오취온(五取溫)’이라 한다. 이 오취온은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 등이 나의 소유, 나의 자아라는 유위법적 사유의 근본구조 속에서 나타날 때 성립된다. 이런 오취온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오온중에 느낌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느낌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탁월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번뇌와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느낌의 집착다발이라 한다. (S22.48)”

 

 

여기 느낌이 있다. 그 느낌은 즐거운 것도 있고 괴로운 것도 있다. 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덤덤한 느낌도 있다. 이런 느낌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은 그 느낌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현상이 무상하듯이 느낌 역시 무상한 것이다. 그럼에도 느낌에 집착하고 느낌에 목숨거는 것은 그 느낌이 자신이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뻐도 내가 기쁘고, 슬퍼도 내가 슬픈 것이다.

 

느낌이라는 것이 나의 느낌이 아니고 단지 조건지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안다면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기뻐도 조건이 기쁜 것이고, 슬퍼도 조건이 슬픈 것이 된다.

 

느낌은 단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물질도 그렇고, 지각도 그렇고, 형성도 그렇고, 의식도 그렇다. 어느 것 하나 연기의 작용에서 어긋 나는 것은 없다.

 

 

2014-04-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