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연기법은 조건법, 왜 연기적 사유를 해야 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14. 17:15

 

 

연기법은 조건법, 왜 연기적 사유를 해야 하는가?

 

 

 

흐드러지게 핀 목련

 

서울과 수도권의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 관악산이다. 그래서 주말에는 줄을 이어 올라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관악산에는 등산코스가 여러 곳 있다. 그 중에 잘 알려져 않은 코스가 남사면에 위치한 비산동코스이다.

 

비산동 코스는 다른 코스와 달리 사람으로 북적이지 않는다. 등산로 입구에서 가게도 별로 보이지 않아 마치 한적한 시골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봄이 되어 다시 찾은 등산로 입구에서 눈길을 사로 잡은 것인 저 건너 편에 있는 목련이다. 지금은 말라서 호수라 볼 수 없지만 저 편 너머에 목련이 그야 말로 흐드러지게 피었다.

 

 

 

 

 

 

 

 

 

 

폐허의 비닐하우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하얀 목련의 아래에는 작은 비닐하우스가 하나 있다. 지금은 누구도 살지 않아 방치 되어 있다. 그러나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지나가는 등산객을 대상으로 하여 컵라면, 막걸리 등 간단한 먹거리를 팔곤 하였다. 더 이전에는 할아버지도 함께 있어서 오리나 닭을 키워 팔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보이지 않는다.

 

 

 

 

따스한 봄날씨에 찢겨진 비닐 하우스 옆에는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이제 절정을 지나 내리막길이어서일까 바닥에는 하얀 꽃잎이 뚝뚝 떨어져 있다. 이 목련을 누가 심었을까? 지난 19년간 이 호수와 비닐 하우스를 지켜 보았는데 아마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심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떠 났어도 목련의 자태는 위풍당당하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비닐하우스는 찢겨져 폐허로 변했지만 목련을 비롯하여 주변의 꽃나무들은 해가 갈수록 더욱 더 커지고 우람해졌다. 주인 없는 집에서 목련은 지금 절정을 구가 하고 있다.

 

매년 그 자리에서 꽃을 보지만 올해의 핀 꽃은 작년의 그 꽃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년의 나와 지금의 나가 같은 나로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똑 같은 나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같은 꽃으로 보고 같은 나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작년의 꽃이 올해의 꽃과 똑 같은 꽃이 아니라는 것은 조건이 변했기 때문이다. 작년의 나가 지금의 나와 똑 같지 않은 것 역시 조건이 변했기 때문이다. 목련이라는 꽃은 변함 없지만 그 사이에 조건이 바뀌어 지금의 결과가 된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연기의 법칙이 작용한 것이다.

 

원인조건결과라는 연기법에 어느 것 하나 적용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게 본다면 예전의 비닐하우스에 살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지금 보이지 않게 된 것은 그 사이에 조건이 바뀐 것이다.

 

연기법은 조건법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설하였다. 이런 연기법에 대하여 조건법이라고도 한다. 왜 조건법이라 할까? 조건이 성립하지 않으면 연기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연기법이란 무엇일까? 부처님은 연기에 대하여 먼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Paiccasamuppādañca vo bhikkhave, desissāmi1 paiccasamuppanne ca dhamme.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연기와 연생의 사실에 대하여 설하겠다.

 

(Paccaya (paccayuppanna) sutta-조건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0, 전재성님역)

 

 

연기와 연생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Paiccasamuppāda에 대하여 연기라 하였고, paiccasamuppanna에 대하여 연생이라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빠띳짜사뭅빠다와 빠띳짜사뭅빤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에 대하여 성전협 각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연기(緣起, Paiccasamuppāda)는 발생의 원리를 뜻하고, 연생(緣生, paiccasamuppanna)은 연기된 것, 즉 연기소생(緣起所生)을 뜻하는데, 한역에서도 일반적으로 줄여서 연생(緣生)이라고 한다.

 

(각주, 전재성님)

 

 

일반적으로 연기는 빠띳짜사뭅빠다(paiccasamuppāda)라는 용어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빳자야경(S12.20)에 따르면 빠띳짜사뭅빤나(paiccasamuppanna)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를 성전협에서는 연생이라 하였다. 한역에서 연기소생(緣起所生)’을 줄인 말이라 한다.

 

왜 부처가 출현하는가?

 

연기와 연생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먼저 연기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o ca bhikkhave, paiccasamuppādo? Jātipaccayā bhikkhave jarāmaraa uppādā vā tathāgatāna anuppādā vā tathāgatāna hitāva sā dhātu dhammaṭṭhitatā dhammaniyāmatā idapaccayatā.

 

"수행승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Paccaya (paccayuppanna) sutta-조건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0,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연기는 이미 원리로서 확립 되어 있는 법칙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가 출현하든 출현 하지 않든 이미 있어 온 법칙이라는 것이다. 다만 부처가 출현하여 이 연기법을 발견하였을 뿐이라 한다.

 

그러나 연기법도 잘 전승되지 않고 변질 되면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완전하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는 법이기 때문에 누군가 또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가 출현하는 것으로 본다. 과거불이 출현한 것도 연기법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연기법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전승되면 새로운 부처가 출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연기법의 정의 네 가지

 

경에서 연기법에 대하여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1)그 세계는 정해져 있고, 2)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고, 3)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고, 4)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각주를 참고로 하여 표를 만들었다.

 

 

No

연기(paiccasamuppāda)

   

1

그 세계는 정해져 있음

hitāva sā dhātu

그 조건의 속성이 정해져 있으며 조건 없는 태어남과 죽음은 결코 없음

2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음

dhammaṭṭhitatā

조건에 의해 발생한 현상이 존속함

3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음

dhammaniyāmatā

조건이 사실(dhamma)을 결정함.

4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함

idapaccayatā

늙음과 죽음 등의 구체적인(이러한) 것을 조건으로 함.

 

 

 

연기에 대한 네 가지 정의를 보면 공통적으로 조건이 들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어남과 죽음도 조건에 따른 것이고, 존속하는 것도 조건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네 번째 항을 보면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한다고 하였다. 그 구체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이어지는 경에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나는 것 같이(S12.20)”이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십이연기 정형구를 보면 알 수 있다.

 

십이연기정형구는 철저하게 조건에 따른다. 예를 들어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난다라 하였을 때 집착은 갈애가 조건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조건이 빳짜야(paccaya)이다. 그래서 연기라 하였을 때 빠띳짜사뭅빠다(paiccasamuppāda)’라 하는데 이는 조건지워져(paicca) 함께(sam) 일어나는 것(upāda)을 말한다. 이 것이 연기이다.

 

연생(緣生)이란 무엇일까?

 

다음으로 연생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 하였다.

 

 

Katame ca bhikkhave, paiccasamuppannā dhammā? Jarāmaraa bhikkhave, anicca sakhata paiccasamuppanna, khayadhamma vayadhamma virāgadhamma nirodhadhamma.

 

수행승들이여, 연생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늙음과 죽음은 무상한 것이고 유위적인 것이고 조건적으로 발생되는 것이고 부서지고 마는 것이고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며 소멸하는 것이다.

 

(Paccaya (paccayuppanna) sutta-조건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0, 전재성님역)

 

 

경에서 연생에 대하여 빠띳짜사뭅빤나(paiccasamuppannā)라 하였다. 여기서 paiccasamuppannāpaicca+samuppannā로 분해 할 수 있다. Samuppannā에 대한 빠알리 사전을 보면 ‘arisen, produced, 일어나다의 뜻이다. 이로 본다면 빠띳짜사뭅빠다(paiccasamuppāda)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빠띳짜사뭅빠나에 대한 설명을 보면 1) 무상한 것(nicca), 2) 유위적인 것(sakhata), 4) 조건적으로 발생되는 것(paiccasamuppanna), 5) 부서지고 마는 것(khayadhamma), 6) 사라지고야 마는 것(vayadhamma), 7) 소멸하는 것(virāgadhamma nirodhadhamma)이라 하였다.

 

 

이 구문과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연기된[緣而生] 법들인가?

비구들이여, 늙음-죽음은 무상하고 형성되었고[有爲]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이고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탐욕이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Paccaya (paccayuppanna) sutta-조건 경, 상윳따니까야 S12.20, 각묵스님역)

 

 

번역을 비교해 보면 초불연의 번역에서는 모두 일곱 가지가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여섯 가지의 성전협 번역 보다 한 가지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번에는 빅쿠보디의 영역을 보았다.

 

 

And what, bhikkhus, are the dependently arisen phenomena?

Aging-and-death, bhikkhus, is impermanent, conditioned,

dependently arisen, subject to destruction, vanishing, fading away, and cessation

 

(Condition, CDB  S12.20, 빅쿠보디역)

 

 

세 종류 번역을 비교해 보면

 

이 세 종류 번역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았다.

 

 

No

연생의 특징

전재성님역

각묵스님역

빅쿠보디역

1

anicca

무상한 것

무상함

impermanent

2

sakhata

유위적인 것

형성되었음有爲]

conditioned

3

paiccasamuppanna

조건적으로 발생되는 것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

dependently arisen

4

khayadhamma

부서지고 마는 것

부서지기 마련인 법

subject to destruction

5

vayadhamma

 

사라지기 마련인 법

vanishing

6

virāgadhamma

사라지고야 마는 것

탐욕이 빛바래기 마련인 법

fading away

7

nirodhadhamma

소멸하는 것

소멸하기 마련인 법

cessation

 

 

 

연생(paiccasamuppannā)에 대하여 총 일곱개의 항목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전재성님역을 보면 하나가 빠져 있다. 탈역일까? 이에 대하여 네 번째와 다섯번째를 보면 khayavaya가 있다. 두 단어에 대하여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Khaya:

waste; destruction; decay; consummation of., 盡滅, 滅盡

 

vaya:

age; loss; decay; expenditure.衰老衰退

 

 

khayavaya 모두 쇠퇴(decay)’라는 뜻을 가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중복되어서 일까 성전협에서는 부서지고 마는 것이라고 두 곳 모두 하나로 하여 번역 되어 있다. 그러나 CDB와 초불연에서는 모두 다 번역되어 있다. 그래서 khayadhamma에 대하여 부서지기 마련인 것(subject to destruction)’이라 하였고, vayadhamma에 대하여 사라지기 마련인 법(vanishing)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성전협의 번역에 탈역(脫譯)’이 있음에 틀림 없다.

 

이상한 번역 탐욕이 빛바랜다(viraga)’

 

여섯 번째 항에 virāgadhamma가 있다. 이를 사라지고야 마는 것(성전협), 탐욕이 빛바래기 마련인 법(초불연), fading away(CDB)’ 으로 번역하였다. 같은 빠알리어를 두고 왜 이렇게 번역차이가 나는 것일까?

 

Virāga에 대하여 빠알리사전을 보면 ‘dispassionateness; absence of desire. 離貪, , 遠離, 離欲라 되어 있다. 이는 탐욕(greed)을 뜻하는 rāga에 분리를 뜻하는 vi가 붙어서 Virāga는 이욕(離欲)이 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사라지다의 뜻으로 하였고, 각묵스님은 탐욕이 빛바래다는 뜻으로 낭만적이면서도 주석적 번역을 하였다. 빅쿠보디는 ‘fading away’라 하여 사라지다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경에서는 늙음과 죽음에 대하여 무상 등 일곱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어지는 경을 보면 이는 십이연기에 대한 것이다. 태어남, 존재, 집착, 갈애, 느낌 등이 무상하고 유위적이고 조건발생적임을 말한다. 그런데 virāgadhamma에 대하여 초불연 방식대로 탐욕이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라 번역하였을 때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접촉을 예로 든다면 초불연 방식대로 번역한다면 감각접촉은 무상한 것이고탐욕이 빛 바래기 마련인 법이며..”라고 이상한 번역이 되고 만다. 감각접촉, 느낌, 갈애, 늙음-죽음 등이 어떻게 탐욕이 빛바래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virāgadhamma에 대하여 사라지고또는 ‘fading away’로 하면 번역이 자연스럽다. 예를 들어 접촉(느낌, 갈애, 늙음-죽음 등)은 무상한 것이고사라지고야 마는 것이며...”라고 되어 매끄럽다.

 

부처님의 당부사항

 

그런데 경에서 말미에 아주 중요한 사항이 언급 되어 있다. 일종의 부처님의 당부사항 같은 것이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견한 듯이 말씀 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거룩한 제자들은 이 연기와 연생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써 관찰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전생에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없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어떻게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되었는지’ 숙세로 거슬러 올라가 가거나

 

‘나는 내세에 있을지, 나는 내세에 없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을지, 나는 내세에 어떻게 있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될 것인지’ 내세로 달려가거나

 

‘나는 현세에 있는지, 나는 현세에 없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는지, 나는 현세에 어떻게 있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되는지’ 현세에 의혹을 갖게 되거나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제자는 있는 그대로 이 연기와 연생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서 잘 관찰하기 때문이다.

 

(Paccaya (paccayuppanna) sutta-조건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0, 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마치 나를 찾는 수행을 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삼세에 걸쳐서 16가지 의문에 대하여 부처님 당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로 대표 되는 외도사상을 배격하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오늘날 나를 찾는 수행에 대하여 따끔한 충고를 하는 듯 보인다.

 

존재의 근원을 찾는 수행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는 어디서 왔을까?” 등의 존재의 근원을 찾는 수행은 무익함을 말한다. 그래서 말룽끼야뿟따경(M63)에서도 나를 찾는 형이상학적 견해에 대하여 말룽끼야뿟따여, 내가 왜 그것을 설명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유익하지 않고, 청정한 삶과는 관계가 없으며, 멀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멈추고 삼매에 들고 올바로 원만히 깨닫고 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M63)”라 하였다. 지금 당면한 괴로움의 소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모든 번뇌의 경(M2)’에서는 나를 찾는 수행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활동을 기울이고,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할 것들에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발생되는 번뇌이다. (M2)”라 하여, 나를 찾는 수행이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이라 하였고, 또 쓸데 없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과 함께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알려고 하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와 연생의 사실(dhamma)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심과 함께 존재의 근원을 찾아 나서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질문자체에 문제가 있는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하는가?”

 

잘못된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질문 자체가 잘 못 되었는데 대답을 하면 역시 잘 못 된 것이기 때문에 이럴 경우 응답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전생에 있었는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일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아윤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초기불교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수 많은 사람들의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무아윤회이다. 요지는 윤회의 주체 없이 어떻게 행위와 도덕적인 책임이 가능한가?”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도둑이 자기자신을 현재의 상태로 만든 영혼이나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하는가?”라고 의문하는 것은 질문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저지른 책임감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영혼의 존재를 믿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무아윤회에 대하여 아무리 그럴듯한 답을 하여도 회의론자들은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하는가?”라고 의문하는 것은 질문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럴 경우 차라리 무기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연기적 사유란 무엇인가?

 

팍구나가 누가 존재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부처님은 이런 질문 자체가 잘 못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왜 그럴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일깨워 주었다.

 

 

[세존]

“그와 같은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존재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람이 존재한다.’라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존재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존재가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난다.

 

(Moiyaphagguna1sutta-몰리야팍구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12,전재성님역)

 

 

팍구나는 부처님에게 이것저것 질문한다. 그때 마다 하는 말이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섭취합니까?” “누가 느낍니까?” “누가 갈애합니까?”와 같이 항상 ‘누가’를 붙인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런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질문이 잘못되었으니 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존재합니까?”라고 말하지 말고 “무엇 때문에 존재가 생겨납니까?”라고 묻는 것이 바른 질문이라고 충고한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적으로 사고 하라는 말과 같다. 누군가 나는 왜 여기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무엇이라 할까? 수 많은 이야기가 오갈 것이다. 그러나 연기의 가르침을 아는 불자라면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습니다”라고 조건발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연기적으로 사유할 것을 말씀 하셨다.

 

여러가지 조건이 결합하여 지금 여기에

 

관악산 등산로 입구에서 또 하나 본 것이 있다. 그것은 매혹적인 하트모양의 꽃이다. 매년 초봄 이 맘 때쯤 그 자리에서 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자리로 가 보았다. 역시 올해도 그 자리에서 매혹적인 꽃이 피어 있다.

 

 

 

 

 

 

 

 

 

 

 

하지만 이 꽃은 작년의 꽃이 아니다. 꽃모양은 같지만 올해에 핀 꽃이다. 여러가지 조건이 결합하여 지금 여기에서 하트모양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꽃이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어느 것 하나 조건에 따라 발생하지 않은 것이 없다.

 

 

 

 

2014-04-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