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매일매일 승리하는 삶을 위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10. 14:47

 

매일매일 승리하는 삶을 위하여

 

 

 

내일이 될지 오십년후가 될지 아무도

 

수백명이 식사 하는 곳이 카페테리아이다. 가격이 싸기 때문에 많이 몰리지만 가정식 식단을 기대하기 힘들다. 점식식사를 하던 중에 칠레지진사태에 대한 보도를 보았다. 전문가의 이야기 중에 의미 있는 문구가 있어서 스마트폰에 담았다. 메모기능이 있어서 터치하면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필기구가 없을 때 스마트폰은 매우 유용한 도구이다. 

 

지진전문가에 따르면 이곳에 진도8이상의 강진이 예상됩니다. 그러나 강진이 내일이 될지 오십년후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라 하였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인간의 운명은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음을 느꼈다.

 

만약 진도 8이상의 지진이 내일 온다면 아마도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50년후에 온다면 평화롭게 한 평생 살다가 갈 것이다. 이렇게 지진지역의 경우 강진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종말과도 같은 지진이 틀림없이 온다는 사실이다. 다만 내일이 될지 오십년후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강진이 언젠가는 온다는 그 사실자체만은 분명한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운명 또한 지진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누구나 죽음을 피해 갈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내일 올지 오십년후에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라고 패러디하여 말할 수 있다.

 

두 종류의 대조적인 삶

 

법구경 17번과 18번 게송은 이전의 15번과 6번 게송과 같은 맥락이다. 정형구에서 단지 단어와 몇 개의 구절만 바꾼 형태이다. 그래서 15번부터 18번까지 네 개의 게송을 한묶음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네 개의 게송은 공통적으로 임종과 관련 되어 있다. 한평생 삶과 그에 따른 과보에 대한 것이다. 서로 쌍으로 되어 있는 17번과 18번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Idha tappati pecca tappati,      이다 땁빠띠 뼷짜 땁빠띠
P
āpakārī ubhayattha tappati,     빠빠까리 우바얏타 땁빠띠
“P
āpa me katan”-ti tappati,   빠빵 메 까딴 띠 땁빠띠
Bhiyyo tappati duggati
gato.    비이요 땁빠띠 둑가띵 가또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괴로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괴로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괴로워한다.

내가 악을 지었다고 후회하고

나쁜 곳에 떨어져 한층 더 고통스러워 한다. (dhp17)

 

 

 

 

 

 

Idha nandati pecca nandati,      이다 난다띠 뻿짜 난다띠
Katapuñño ubhayattha nandati,   
까따뿐뇨 우바얏타 난다띠
“Puñña
me katan”-ti nandati, 뿐냥 메 까딴 띠 난다띠
Bhiyyo nandati suggati
gato.    비이요 난다띠 숙가띵 가또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한다.

내가 선을 지었다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한다. (dhp18)

 

 

 

 

게송에서 땁바띠(tappati) 난다띠(nandati)는 쌍으로 되어 있다. Tappatito burn, to be tormented, 燃燒, ける, 苦しむ, 惱む의 뜻으로 타는 듯한 괴로움을 말한다. 반면 nandati‘is glad; rejoices, , 歡喜의 뜻으로 즐거움을 말한다. 이렇게 대조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는 대조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7번 게송에서는 나쁜 곳에 떨어져 더욱더(Bhiyyo) 괴로워 할 것이라 하였고, 18번 게송에서는 좋은 곳에서 더욱더 환희 할 것이라 하였다.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15번에서 18번까지 한묶음으로 보았을 때 대조 되는 말이 있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게송

  

  

15

악행

Pāpakārī

두곳에서 슬퍼함

ubhayattha socati

 

업의 더러움

kiliṭṭham

비탄과 통탄에 빠짐

So socati so vihaññati

16

선행

Katapuñño

두곳에서 기뻐함

ubhayattha modati

 

업의 청정함

kammavisuddham

기뻐하고 환희함

So modati so pamodati

17

내가 악을 지었다

Pāpa me katan

나쁜 곳에 떨어짐

duggati gato

18

내가 선을 지었다

Puñña me katan

좋은 곳으로 감

suggati gato

 

 

표를 보면 분명하게 쌍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악행과 선행, 그리고 업의 더러움과 업의 청정함, 나쁜 곳과 좋은 곳 이렇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열등감에 가득찬 데와닷따

 

지금 임종을 맞이 하여 과거를 회상하여 보았을 때 자신의 일생에서 악행이 더 많다면 어떻게 될까? 두려움에 떨 것임에 틀림 없다. 자신이 지은 행위는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악을 지었다라고 후회하면서 나쁜 곳 즉, 악처에 떨어질 줄 아는 것이다. 이는 게송 17번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알 수 있다.

 

게송 17번에 대한 인연담은 데와닷따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과 사촌으로서 사끼야족의 왕자이었던 데와닷따의 악행에 대한 것이 인연담으로 소개 되어 있다.

 

인연담에 따르면 데와닷따가 저지른 악행은 크게 네 가지이다. 아자따삿뚜를 교사하여 왕의 죽음을 교사하고, 부처님을 죽이도록 사람을 고용하고, 바위조각을 던지고, 코끼리 날라기리를 풀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데와닷따가 이렇게 악행을 저지른 이유는 무엇일까? 열등감이 원인이라 본다.

 

데와닷따가 출가할 당시 사끼야족의 왕자들도 함께 출가 하였다. 데와닷따가 밧디야, 아누룻다, 아난다, 바구, 낌발라와 함께 왕족으로서 출가하였지만 다른 왕족과 달리 흐름에 드는 경지를 성취하지도 못하였고 이득과 명성도 얻지 못하였다. 다만 범부로서 신통력을 얻었을 뿐이다.

 

이처럼 열등감에 가득찬 데와닷따는 이득과 명성을 얻기 위하여 아자따삿뚜를 사주한다. 아자따삿뚜를 교사하여 그대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십시오. 나는 세존을 죽이고 부처가 될 것입니다.”라고 일종의 쿠데타 모의를 한 것이다.

 

아자따삿뚜는 실행에 옮겨 쿠데타가 성공한다. 그러나 데와닷따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였으나 실패로 돌아 간다. 깃자꾸따 산에 올라가 바위조각을 부수어 던졌으나 부처님 몸에 가벼운 상처만 주었을 뿐이다. 코끼리 날라기리를 풀어 놓았으나 코끼르는 부처님 앞에서 멈추었을 뿐이다. 이렇게 데와밧따는 틈만 나면 부처님을 해꼬지 하고 죽이려 하였다.

 

부처님과 만난 인연(因緣)으로

 

악행만 일삼은 데와닷따의 최후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인연담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 하여 놓았다.

 

 

데바닷따는 들것에서 일어나 두 발을 땅바닥에 내려 놓고 앉았다. 그러자 그의 발이 땅속으로 가라앉고, 차츰 발목을 비롯해서 무릎, 엉덩이, 가슴, 목까지 가라 앉았다. 마지막으로 땅위에 턱이 남았을 때에 그는 이 뼈들과 이 생명으로 나는 부처님, 인간 가운데 뛰어나신 님, 신들의 초월신, 인간을 길들이는 님, 모든 것을 보는 님, 백가지 덕성을 갖춘 님께 귀의 합니다.’라고 시를 읊었다.

 

여래는 사실상 만약 그가 출가하지 않고 재가에 있었으면, 중대한 죄악을 저지른 만큼, 확신을 가지고 미래의 존재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없지만, 그가 출가했기 때문에, 중대한 죄악을 저지른 것에 상관없이, 확신을 가지고 미래의 존재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 백천 겁이 끝날 무렵 데바닷따는 아띳사라라는 연각불이 될 것이다.’라는 사실을 알고 데바닷따를 출가시켰었다.

 

한편 데바닷따가 땅 속에 가라앉을 때, 아비지옥에 태어났다. 그는 이와 같이 그가 부동의 부처님께 죄악을 저질렀으므로 부동으로 괴로워해야 한다.’라고 괴로움을 겪었다.

 

(Devadattavatthu-데바닷따와 관련된 이야기. 17번 게송 인연담, 전재성님역)

 

 

승단의 분열을 꾀한 데와닷따는 아비지옥에 떨어졌다. 그런데 인연담을 보면 마지막 순간에 부처님에게 귀의한 시를 읊고 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데와닷따가 한량없이 오랜 세월 동안 지옥고를 겪고 난후 연각불이 될 것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부처님과 만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법화경 방편품에서

 

불교에서는 인연(因緣)’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 법화경 방편품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아이들 장난으로

풀 나무 붓이거나

혹은 꼬챙이로

부처님 모양 그린 이들

 

이와 같은 여러 사람들

공덕을 점점 쌓아

큰 자비심을 갖추어 모두 성불하였나니

 

(법화경 방편품)

 

 

아이들이 모래 밭에서 놀 때 여러가지 모양의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한아이가 막대기로 부처님 형상을 그렸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법화경에서는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비록 아이가 장난으로 부처님형상을 그렸다고 할지라도 그 인연으로 언젠가는 성불하게 될 것이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법화경 방편품 게송을 보면 환희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찬탄하되 한마디만 하더라도 다 이미 성불했고라 하였다. 부처님 찬탄 게송 한마디만 해도 이미 성불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찬탄하는 게송 그 한마디가 인연이 되어 언젠가는 성불할 것이기 때문에 이미 성불한 것이나 다름 없다고 보는 것이다.

 

또 방편품에서는 마음이 산란하여 꽃 한송이 바친 것이나 어떤 사람이 불상 앞에서 합장하기 위하여 손 한번 들어도 성불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누군가 술을 마시고 법당에 들어가 합장하며 부처님하며 횡설수설 해도 그 인연으로 언젠가는 성불하는 것으로 볼 것이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작은 행위 하나에도 큰 의미를 두고 있다. 그 작은 인연으로 인하여 언젠가 불도를 이루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로 인연을 맺었다면

 

그런데 어떤 스님은 불교방송에서 법문을 할 때 늘 하는 말이 있다.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법문이다.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은 반드시 지옥고를 받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자신과 만남에 따른 인연으로 지옥고를 겪고 난 후 성불할 것이라 하였다.

 

누구라도 불교와 작은 인연을 맺었다면 이는 결국 성불로 갈 것이라 한다. 비록그가 승단을 비방하여 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게 될지라도 어떤 이유에서든지 불교와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인하여 결국 모두 성불하게 될 것이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화경 방편품과 어느 스님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법구경 17번 게송에서 인연담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데와닷따가 승단분열을 조장하는 중죄를 짓고 아비지옥에 떨어졌지만 불교와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인하여 한량없는 세월이 지난 후 연각불이 될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법화경에서 방편품에서 말하는 작은 인연이야기는 이미 초기불교에서 회자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크건 작건 불교와 한번 인연을 맺으면 그 인연이 씨가 되어 언젠가 크게 자라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인터넷시대에 블로그를 방문한 네티즌들 역시 인연을 맺은 것이다. 불자가 아닌 타종교인이라도 이 블로그를 통하여 인연을 맺었다면 그 인연공덕으로 언젠가 불자가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와 무관하게 앞서 가는 것

 

18번 게송의 인연담은 공덕행에 대한 것이다. 인연담은 여인 쑤마나와 관련된 이야기(Sumanadevivatthu)’이다. 수마나는 아나타삔디까의 막내딸인데 아버지처럼 보시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이렇게 선업공덕을 쌓은 수마나가 죽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보기에 헛소리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자신에게 아우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부처님에 말하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었다.

 

 

그대가 그녀의 아우였기 때문입니다. 장자여, 그대가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하였으나 그녀는 한 번 돌아오는 경지를 성취해서 길과 경지에서 그대의 딸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딸은 길과 경지에서 먼저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Sumanadevivatthu- 여인 쑤마나와 관련된 이야기, 게송18번 인연담, 전재성님역)

 

 

흔히 사람이 죽는데 있어서 순서가 없다고 한다. 일찍 태어났어도 태어난 순서대로 죽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출세에도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해에 입사한 동기라도 세월이 흐르다 보면 우열의 차이가 생겨서 지위가 달라진다. 심지어 후배가 발탁인사를 통해 앞서 가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자신 보다 지위가 높았을 때 나이와 관계 없이 대우 해 주는 것이 원칙이다.

 

인연담에서 아버지 아타타삔띠까는 흐름에 든 경지라 하였으니 수다원이다. 그런데 딸인 수마나의 경우 한번 돌아오는 경지라 하였으니 사다함이다. 도와 과의 경지에서 본다면 딸이 아버지 보다 상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수마나가 죽을 때 아버지에게 아우라 한 것이다. 헛소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과의 경지에서 보았을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앞서 가는데 있어서 나이와 무관한 것이다.

 

역전된 스승과 제자 이야기

 

도와 과의 경지에서 비록 나이가 적어도 장로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아라한이 되었다면 장로로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이런 예가 청정도론에 있다.

 

 

여기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딸랑가라에 주하던 담마딘나 장로는 무애해를 증득하였고, 번뇌가 다한 대인이었고, 큰 비구대중의 지도자였다고 한다.

 

그 분은 어느 날 자신이 낮 동안에 머무는 장소에 앉아서 '웃짜왈리까에 주하시는 우리의 스승이신 마하나가 장로께서 사문의 할 일을 해 마치셨을까 아닐까'라고 생각하다가 그가 아직 범부임을 보고 '내가 가지 않으면 범부로서 일생을 마치실 것이다'라고 알고는 신통으로 허공을 날라 낮 동안에 머무는 장소에 앉아계시는 스승의 곁에 내려앉았다.

 

절을 올리고 의무를 행한 뒤 한 옆에 앉았다.

 

'담마닌다여, 어떻게 이렇게 때 아닌 때에 왔는가?'

 

'스승님이시여, 질문을 드리려 왔습니다.'

 

'물어보게. 아는 대로 대답하겠네.'라고 스승이 대답하자 그는 천 가지나 되는 질문을 하였다.

 

장로는 묻는 것마다 걸림 없이 대답했다.

 

'스승님이시여, 스승님의 지혜는 매우 깊습니다. 언제 이 법을 증득하셨습니까?'

 

'60년 전에 증득하였네.'

 

'스승님이시여, 삼매를 닦습니까?'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네.'

 

'스승님이시여, 그렇다면 한 마리의 코끼리를 만들어 주시길 청합니다.'

 

스승은 흰 코끼리를 만들었다.

 

 '스승님이시여, 이제 이 코끼리가 귀를 치켜세우고, 꼬리를 뻗쳐서, 코를 입에다 박고, 무서운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스승님을 향하여 달려오도록 만들어 주실 것을 청합니다.'

 

스승은 그렇게 만든 뒤 힘껏 달려오는 코끼리의 무서운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가려 하였다.

 

번뇌 다한 장로는 손을 펴서 스승의 가사 자락을 붙잡고서 '스승님이시여, 번뇌 다한 자에게도 두려움이 있습니까?' 라고 했다.

 

스승은 그때 자신이 범부임을 알고서 '담마딘나여, 나를 좀 도와주시게.'라고 말하고서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이시여, 스승님을 도와드려야지 하고 왔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면서 명상주제를 설했다.

 

장로는 명상주제를 들고 경행처에 올라 세 번째 발걸음에 이르러 최상의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스승은 성을 잘 내는 성미였다고 한다. 이러한 비구들은 광명 때문에 흔들린다.

 

(청정도론, 20장 도와 도 아님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 111-113)

 

 

역전된 스승과 제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자가 먼저 아라한이 된 케이스다. 그러나 스승은 여전히 깨닫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자 제자가 스승에게 깨닫게 해준다는 이야기이다.

 

스승은 제자가 자신 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스승이 제자에게 나를 좀 도와주시게라고 말하며 제자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스승과 제자 사이일지라도 제자가 먼저 깨달으면 위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나이가 많고 적음에 따 상하고저를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두 가지

 

사람들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한다. 지금 이 젊음이 지금 이 청춘이 영원히 계속되리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누리고 있는 행복이 또한 영원하게 계속 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어느 누구도 이 젊음과 청춘, 그리고 행복이 영원히 계속 되게 하기를 보장해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어서 죽어야지라는 말이다. 특히 TV에서 손자와 함께 살고 있는 형편이 어려운 조손(祖孫)가정에서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다. 이렇게 빨리 죽고 싶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죽어서 좋은 곳에서 태어나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아마도 대부분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났으면하는 바램일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죽게 되면 미안하지만 다음 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영원주의 아니면 허무주의이다. 지금 이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영원주의와 지금 이 고통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픈 허무주의에서 벗어 나지 못한다. 그래서 죽으면 영원히 즐겁게 살 수 있는 천국을 바라고, 또 죽으면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로 본다.

 

하지만 이는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삿된 견해로 보기 때문이다. 죽는다고 하여 영원히 산다거나 단멸한다고 하는 견해는 모두 연기법에 어긋난다. 자신이 지은 행위가 남아 있는 한 미안하지만 내생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무지막지한 누적의 힘

 

사람의 수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에 있어서 기대수명이 80대라 하지만 이는 그 때 가보야 알 수 없다. 마치 지진학자가 이곳에 진도8이상의 강진이 예상됩니다. 그러나 강진이 내일이 될지 오십년후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라고 말하였듯이,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내일 올지 오십년후에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에서는 지각판이 이동하기 때문이다. 모든 현상이 무상하듯이 땅속 밑에 있는 지각판도 무상한 것이다. 그래서 지각판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비록 그 움직임이 매우 미미하다고 할지라도 이런 움직임이 누적 될수록 엄청난 지진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런 현상을 알고 있는 지진학자는 지진지역에서 마치 세상에 종말이 오는 듯한 진도8 이상의 대지진이 틀림 없이 올 것이라 한다. 다만 내일이 될지 오십년후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은 매일 업을 지으며 살아 간다. 그런데 그 업이 쌓이고 쌓이면 어떻게 될까? 어느 때 인가 큰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마치 돈을 은행에 매일 일정 금액 예금하면 이자가 붙고 더구나 복리로 계산된다면 엄청난 금액이 될 것이다. 또 피로가 누적되면 결국 일어나듯이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업이든 나쁜 업이든 매일매일 누적되고 쌓이고 쌓인다면 임종순간에 큰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선업이 누적되면 원금에 복리가 붙어 커다란 금액이 되는 것 같고, 반대로 악업이 누적되면 작은 피로가 쌓여 죽음에 이르는 병과 같이 작용할 것이다. 이 모든 결과는 임종순간에 태어 날 곳을 결정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should have p.p)”

 

임종순간에는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이라도 죽고 나면 자신의 힘으로 손가락하나 까닥 할 수 없다. 아무리 천문학적인 재산을 가진 자라도 죽은 순간 가져 가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재산을 축적하기 위하여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만 가져 간다.

 

임종순간에는 지난 과거의 악업과 선업이 성적표로서 작용하게 된다. 그래서 임종순간에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신이 지은 행위를 보면서 오로지 내생의 과보만 받을 순간만 남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때가 임종순간이다. 과거를 회상하며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라며 과거완료분사형 ‘should have p.p’로 표현 해 보았자 이미 늦은 것이다.

 

임종에 이르러 자신의 업의 더러움을 보고 비탄에 빠지고 통탄에 빠진다. (dhp15)”라고 생각하면 실패한 인생이다. 인생의 패배자로서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악처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악을 지었다고 후회하고 나쁜 곳에 떨어져 한층 더 고통스러워 한다. (dhp17)”라 하였다.

 

반면 자신의 업의 청정함을 보고 기뻐하고 그리고 환희한다. (dhp16)”라고 하였을 때 이는 인생을 성공으로 산 것이다. 인생의 승리자로서 그래서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선처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선을 지었다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한다. (dhp18)”라 하였다.

 

이렇게 법구경에서는 임종순간에 있어서 현생의 삶과 내생의 삶 이렇게 두 세상의 삶을 동시에 보여 준다. 그렇다면 인생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악업을 소멸할 것인가?

 

기독교에서는 회개라는 것이 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참회와 유사한 것이다. 자신의 죄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신앞에서 회계하고 나면 천국에 태어 날 수 있음을 말한다. 불교에는 참회가 있다. 역시 자신의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깊이 깨닫고 반성함을 말한다.

 

이렇게 회개 하고 참회 한다고 하여 지었던 죄가 없어지는 것일까? 한번 지은 행위는 과보를 받지 않는 결코 소멸 되지 않는다. 비록 회개하고 참회한다고 하여 지었던 악행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지은 악행을 소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악업을 소멸하기 위한 더 큰 공덕행을 지어야 함을 말한다. 이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소금덩어리의 경(A3.99)’에서와 같이 갠지스강에 소금덩이를 넣으면 짠 맛이 나지 않듯이, 강물 같은 공덕을 지었을 때 과거에 지은 악행이 묽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죽음에 이르러 회개하거나 참회 하는 것은 이미 늦은 일이다. 평소에 공덕행을 쌓아야 한다. 어떻게 쌓아야 하는가?

 

지금 40대라면 기대수명이 80대이므로 앞으로 살날이 40년 가량 남았다. 40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아무 하는 일 없이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즐거움만 누리다 갈 것인가? 마치 매일매일 저축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40년 후가 되면 원금에다 복리를 합한 것 만큼 큰 금액이 되는 것처럼, 매일매일 선업을 쌓는다면 마치 40년 후에는 엄청난 공덕을 쌓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여기에서 선업공덕을 쌓을 필요가 있다.

 

죽음에 대한 명상

 

기대수명이 있긴 하지만 기대수명대로 사는 것을 누가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 동안 지은 업이 있기 때문에 누적된 업의 힘이 어떻게 작용할지 몰라 그야말로 죽음이 내일이 될지 삽십년 후가 될지 사십년 후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1.

수행승들이여, 이 수행승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이와 같이

 ‘내가 하루 밤낮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라고 닦는다.

 

2.

수행승들이여, 이 수행승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이와 같이

‘내가 하루 낮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라고 닦는다.

 

3.

수행승들이여, 이 수행승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이와 같이

‘내가 한끼 탁발음식을 먹는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라고 닦는다.

 

4.

수행승들이여, 이 수행승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이와 같이

‘내가 네 다섯모금을 씹어 삼키는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라고 닦는다.

 

5.

수행승들이여, 이 수행승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이와 같이

‘내가 한모금을 씹어 삼키는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라고 닦는다.

 

6.

수행승들이여, 이 수행승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이와 같이

‘내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라고 닦는다.

 

(Pahama maraasati sutta-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 1, 앙굿따라니까야 A6:19,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여섯 가지 케이스가 있다. 가장 긴 것이 첫 번째 항목인 하루 밤과 하루 낮이다. 단 하루 살더라도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한한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단 하루 동안 살수도 있음을 말씀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후 말씀 에서는 점점 짧아 진다. 그래서 하루 낮 동안으로, 그리고 한끼 먹을 동안으로, 다섯 모금을 삼킬 동안으로, 한모금을 삼킬 동안으로 짧아 진다. 최종적으로 숨을 내쉬고 들이 쉬는 동안으로 짧아 진다.

 

사람이 숨을 들이 쉬었다고 내쉬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바로 그 상태를 죽었다고 한다. 이렇게 숨을 내쉬고 들이 쉬는 동안에도 정신활동을 기울이라 하였다. 이는 임종순간에도 알아차리라는 말과 같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유지하였를 때 다시는 몸을 받지 않을 것이라 한다.

 

인간의 수명은 보장 되지 않는다. 천상처럼 수명이 보장 되지 않음을 말한다. 따라서 누적된 업의 힘이 작용하였을 때 죽음이 내일이 될지 수십년 후가 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하루, 아니 지금 숨쉬는 이 순간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매일매일 승리하는 삶을 위하여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되돌아 보았을 때 선행보다 악행이 더 많다면 죽음은 두려울 것임에 틀림 없다. 특히 자신의 업에서 더러움을 보았을 때이다. 그런 업은 하루 이틀 또는 일이년에 형성된이 아니다. 수십년 동안 일생동안 형성된 것이다. 아니 이 생 이전에 수 없는 전생에 형성된 것인지 모른다. 그런 업이 누적 되었을 때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 할 것이다.

 

사람들은 제 수명대로 살지 못하고 대로 산다고 하였다. 업이 누적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누적 되면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네 가지 힘 중에 중력이 가장 미약하다. 그런데 중력이  누적되면 블랙홀을 만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중력은 우주를 수축시키고 붕괴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지금 매일 짓고 있는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짓고 있는 업이 비록 미약한 것일지라도 이것이 축적되면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래서 자기자신을 집어 삼켜버릴지 모른다.

 

잠자리에 누웠을 때 마치 임종순간에 지나간 일생을 회상하듯이 오늘 하루를 돌아 보아야 한다. 만일 오늘 하루 자신의 업의 청정함을 보았다 (Disvā kammavisuddham-attano, dhp16)”라고 생각한다면 오늘 하루는 승리한 것이 된다. 이렇게 매일매일 승리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오늘 하루를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산다는 것과 같다. 매일매일 승리하는 삶을 살아 갈 때 결국  승리하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

 

 

 

2014-04-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