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승리자, 재가불자의 실천덕목 십복업사(十福業事)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7. 14:04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승리자, 재가불자의 실천덕목 십복업사(十福業事)

 

 

 

초기경전을 접하면 인식의 지평을 넓혀 준다. 가르침이 수천년전에 설한 것이 분명하긴 하지만 그 핵심가르침은 시대를 초월한다. 그래서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감동을 준다. 그리고 미래에도 감명을 줄 것이다. 이렇게 시대와 민족을 초월하여 감동하고 감명받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악행과 선행의 과보

 

법구경 15번과 16번 게송은 악행과 선행의 과보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극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에 게송 역시 단어만 바꾼 채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Idha socati pecca socati,        이다 소짜띠 뻿짜 소짜띠
P
āpakārī ubhayattha socati,      빠빠까리 우바얏타 소짜띠
So socati so vihaññati          
소 소짜띠 소 위한냐띠
Disv
ā kamma kiliṭṭham-attano.     디스와 깜마 낄릿탐 앗따노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슬퍼하니

이 세상에서도 슬퍼하고 저 세상에서도 슬퍼한다.

자신의 업의 더러움을 보고

비탄에 빠지고 통탄에 빠진다. (dhp15)

 

 

 

 

Idha modati pecca modati,        이다 모다띠 뻿짜 모다띠
Katapuñño ubhayattha modati,    
까따뿐뇨 우바얏타 모다띠
So modati so pamodati           
소 모다띠 소 빠모다띠
Disv
ā kammavisuddham-attano.     디스와 깜마위숫담 앗따노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기뻐하니

이 세상에서도 기뻐하고 저 세상에서도 기뻐한다.

자신의 업의 청정함을 보고

기뻐하고 그리고 환희한다. (dhp16)

 

 

 

 

15번 게송에서 socati‘mourns; grieves, 憂愁, 悲痛슬퍼하다의 뜻이다. 이와 대비 되는 단어가 16번의 modati이다. ‘Modati‘[mud + a] rejoices; is happy, 기뻐하다의 뜻이다. 무엇을 슬퍼하고 무엇을 기뻐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일생동안 지은 행위에 대한 것이다.

 

15번의 경우 돼지도살업자에 대한 게송이다. 이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악행하는 것 (Pāpakārī)’이라 하였다. Pāpakārī‘[adj.] sinful; wicked’의 뜻으로 죄에 가득찬의 뜻이다.

 

반면 16번의 경우 보시등의 공덕행을 한 재가신자에 대한 게송이다. 그래서 선행을 하는 것 (Katapuñño)’ 이라 하였다. Katapuñño‘Katapuñña+o’로서, Katapuñña‘one who has performed meritorious actions.’로 설명되어 있다. 이는 공덕행을 한 자의 뜻이다. 이는 Kata‘done; made; finished’이고 puñña‘merit, meritorious’의 의미이기 때문에, Katapuñña를 합성하여 Katapuñña가 됨으로서 공덕행자라 번역할 수 있다.

 

이렇게 악행자와 공덕행자를 극명하게 대비 시켜 게송이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악행자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자신의 업의 더러움을 보고(Disvā kamma kiliṭṭham-attano)라 하였고, 공덕행자에 대해서는 자신의 업의 청정함을 보고(Disvā kammavisuddham-attano)라 하여 극명하게 대비시켰다. 여기서 Disvā ‘having seen; having found’의 뜻으로 현재진행형이다. 이는 인연담에서 자신의 미래를 실제로 보고 있는 것에 대한 것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Disvā 가 현재진행형으로 보면서라 번역된다.

 

악행자는 자신이 지은 과거의 업이 더러운 것이다. 그래서 업의 더러움(kamma kiliṭṭham)’이라 하였다. 여기서 kiliṭṭha는 과거분사형으로 ‘become soiled or stained; was impured, 染汚されたる, 染着せる의 뜻이다. 지나간 과거에 지은 악행에 대하여 오염되었음또는 더러웠음으로 본 것이다.

 

반면 공덕행자는 자신이 지은 과거의 업이 청정한 것이라 하였다. 이는 kammavisuddham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visuddha는 과거분사형으로 ‘clean; pure; bright; stainless; sanctified, , 清浄, 의 뜻이다. 지난 과거의 행위가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하였음을 말한다.

 

이렇게 게송은 지금 임종에 다다른 자가 앞으로 전개될 내세에 대한 것을 보면서동시에 과거의 지은 업을 본 것에 대한 내용이다. 그래서 개송에서는 저 세상(pecca)이 세상(Idha)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저 세상이라 번역된 pecca‘after death, 死后의 뜻으로 죽음 이후에의 의미이다.

 

15번의 경우 비탄에 빠지고 통탄에 빠진다(So socati so vihaññati)”라 하였다. 여기서 Vihaññati‘[vi + han + ya] to be vexed or grieved; suffers hardship, たれる, される, 腦害される의 뜻으로 고통을 겪는다의 의미이다. 반면 16번의 경우 기뻐하고 그리고 환희한다 (So modati so pamodati)”라 하였다. 여기서 pamodati‘[pa + mud + a] rejoices; enjoys; is glad, , する의 뜻으로 기쁨에 넘친다의 의미이다.

 

다른 번역자의 번역을 보면

 

두 게송에 대하여 다른 번역자의 것을 찾아 보았다. 나까무라하지메역과 거해스님역, 그리고 타닛사로빅쿠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いことをしたは、このえ、でもえ、ふたつのところでえる
自分れているのをて、え、む。


いことをしたは、このび、でもび、ふたつのところでぶ。
自分らかなのをて、び、しむ。

(Dhp15-16, 나까무라하지메역)

 

 

 이 세상에서도 그는 비탄에 빠지고

다음 세상에서도 그는 비탄에 빠진다.

이처럼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은

양쪽 세상 모두에서 괴로움을 겪는다.

그가 더욱 괴로운 것은

고통을 겪으며 자기 악행을 보고 되새기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도 그는 즐거워하고

다음 세상에서도 그는 즐거워한다.

이처럼 착한 행동을 한 사람은

양쪽 세상 모두에서 즐거워한다.

그가 더욱 즐거운 것은

즐거움을 누리며 자기 선행을 되새기는 것이다.

 

(Dhp15-16, 거해스님역)

 

 

Here   he grieves

       he grieves   hereafter.

In both worlds

the wrong-doer grieves.

He grieves, he's afflicted,

seeing the corruption

       of his deeds.

 

Here   he rejoices

       he rejoices  hereafter.

In both worlds

the merit-maker rejoices.

He rejoices, is jubilant,

seeing the purity

       of his deeds.

 

(Dhp15-16, 타닛사로빅쿠역)

 

 

나까무라하지메역과 타닛사로빅쿠역을 보면 대체로 빠알리원문에 가깝게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거해스님역을 보면 과도하게 의역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빠알리 원문에 실려 있지 않은 그가 더욱 괴로운 것은문구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한 의욕은 본문의 내용을 더 이해 하기 쉽게 만들어 준다. 그럼에도 원문에 실려 있지 않은 내용을 삽입한다는 것은 주석적 번역이라고 볼 수 있다.

 

돼지도살업자 쭌다와 관련된 이야기(Cundasukarikavatthu)

 

대게 쌍으로 되어 있는 개송에서는 인연담을 공유한다. 그러나 15번과 16번 게송이 쌍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연담이 각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15번 인연담이다.

 

15번 인연담은 돼지도축업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라자가하에서 55년간 돼지를 도살하여 시장에 내다 판 도살업자 쭌다(cunda)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인연담 제목이 돼지도살업자쭌다와 관련된 이야기라는 뜻으로 ‘Cundasukarikavatthu’라 한다.

 

인연담을 보면 요즘 세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기의 양을 더 많이 나오게 하려고 소에 물을 먹이는 것과 같은 행위를 말한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처럼 속이는 행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인연담에서는 이를 적나라하게 묘사하였는데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기근이 들면 차한대분의 쌀을 싣고 지방으로 가서 한두 되박 분량으로 마을의 돼지새끼를 사서 수레에 가득 싣고 돌아와 집 뒤에 외양간처럼 한 장소에 던져 넣으면, 그들은 온갖 사료와 분뇨를 먹고 큰다.

 

그가 돼지를 죽일 때에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기둥에 묶고 고기를 부풀어 오르고 보드랍게 하기 위해 네모난 곤봉으로 때렸다. 그리고 는 돼지의 턱을 강제로 벌리고 입에 쇄기를 박아 넣고 , 동으로 만든 보일러에서 뜨거운 물을 꺼내 목에 붓는다.

 

뜨거운 물은 돼지의 창자에 들어가 똥을 싸게 하고 뜨거운 똥과 더불어 항문으로 나온다. 돼지의 창자에 조금의 똥이라도 남아 있으면, 오염되고 흐린 물이 나오지만, 돼지의 창자가 깨끗하면, 깨끗하고 맑은 물이 나온다. 나머지 끓는 물은 돼지의 엉덩이에 부어 물이 흐를 때 검은 피부를 벗겨낸다.

 

마지막으로 돼지의 머리를 날카로운 칼로 자른다. 피가 솟아나오면 그것을 접시에 담는다. 그리고 그 피를 바르면서 돼지를 굽는다. 그리고 처자식과 함께 둘러 앉아 그 고기를 먹는다. 만약에 고기가 남으면 내다 판다. 이렇게 그는 오십오년을 살았다.

 

(Cundasukarikavatthu-돼지도살업자쭌다와 관련된 이야기, 게송15번 인연담, 전재성님역)

 

 

인연담을 보면 돼지도살업자 쭌다의 악행이 상세하게 묘사 되어 있다. 돼지를 도축하여 먹고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양을 부풀리기 위하여 갖가지 방법이 비난 받을 만 하다. 이런 쭌다의 행위는 오늘날이라고 하여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는

 

종종 먹거리에 대한 고발프로를 보면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는듯한 장면을 볼 수 있다. 소에 물을 먹여 도축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검색하여 보니 물먹인 라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식용동물에 물을 먹이거나 주입하여 몸무게를 늘리는 방법이다. 1969년 기사로서 살아 있는 소 5백마리에 강제로 물을 먹여 가축시장에 내 놓은 소장수를 적발하여 경찰에 넘겼다는 것이다.

 

동물에 물을 먹여 파는 행위는 불법이다. 그리고 범죄행위이다. 그럼에도 도축장 주변에서는 이런 불법적 행위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범죄행위는 부처님 당시도 있었던 같다. 15번 게송 인연담에서 돼지 도축업자 쭌다의 적나라한 행위가 이를 잘 알려 준다.

 

재가불자가 가져서는 안되는 직업 다섯 가지

 

불교에서는 금하는 직업이 있다. 재가불자가 가져서는 안되는 직업으로서 다섯가지를 들고 있다. 불자로서는 가지지 말아야 할 직업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경전적 근거를 들 수 있다.

 

 

Pañcimā bhikkhave, vaijjā upāsakena akaraīyā. Katamā pañca:

Satthavaijjā, sattavaijjā, masavaijjā, majjavaijjā, visavaijjā.

Imā kho bhikkhave, pañca vaijjā upāsakena akaraīyā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재가의 신자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를 판매하지 말아야 한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무기를 파는 것, 사람을 파는 것, 고기를 파는 것, 술을 파는 것, 독극물을 파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재가의 신자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를 판매하지 말아야 한다.”

 

(Vaijjāsutta-판매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77, 전재성님역)

 

 

이것이 불자들이 가져서는 직업에 대한 것이다. 1)무기를 파는 것 (Satthavaijjā), 2)사람을 파는 것(sattavaijjā), 3)고기를 파는 것 (masavaijjā), 4)술을 파는 것(majjavaijjā), 5)독극물을 파는 것 (visavaijjā) 을 말한다. 문제는 이런 직업이 현대적으로 어떻게 해석 될 것인가에 대해서이다.

 

불교가 설자리는?

 

칼장사의 경우 오늘날 무기중개상, 무기 제작자, 현대전에 필수적인 첨단무기에 대한 프로그래머 등이 해당될 것이다. 특히 프로그래머의 경우처럼 무기를 제조하는 회사에 근무하는 경우 직접적으로 무기제작에 참여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뒷받침 하고 있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보면 칼장사의 범주에 들어 간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를 금한다면 불교에 귀의할 사람이 드믈 것이다. 다음으로 고기장사이다.

 

고기장사의 범주는 매우 넓다. 옛날에는 도축업자로 한정 되었으나 요즘은 정육점, 다양한 육류 가공업 등으로 확장 됨에 따라 과연 고기장사의 범주를 어디까지 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마트에서 고기를 파는 행위나 소시지를 만들어 파는 것까지 고기장사로 보아 가져서는 안될 직업으로 분류한다면 불교는 설자리를 잃을 것이다.

 

불법적인지 합법적인지

 

다섯가지 금하는 직업에 대한 기준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오계 준수로 볼 수 있으나 현대적 직업 개념으로 보았을 때 판단 기준이 애매모호한 것도 있다. 특히 고기장사 같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생류에 대한 마음을 내는 것으로 판단 할 수 있으나 15번 게송 인연담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부처님 당시 돼지도살업자 쭌다는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살아 있는 돼지에 물을 먹여 몸무게를 불리는 등의 행위를 말한다.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불법적 행위를 한 것이다. 그래서 범죄행위에 해당된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고기장사 하는 사람들이 불법적 행위만 하지 않는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본다. 생계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고기장사를 하지만 합법적이라면 허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무기장사에 해당되는 직업에 종사하더라도 단지 방어용으로 본다면 허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불자들이 가져서는 안될 직업 다섯가지에 대하여 그것이 불법적인지 합법적인지에 대한 판단이 먼저 서야 할 것이다. 그래서 범죄행위에 해당되는 불법이라면 그만 두어야 하고, 법과 양심에 비추어 문제 없다면 허용될 수 있다고 본다.

 

여법한 재가신도와 관련된 이야기(Dhammikaupasakavatthu)

 

16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은 재가신도의 공덕행에 대한 과보이야기이다. 빠알리어로 ‘Dhammikaupasakavatthu’로서 이는 여법한 재가신도와 관련된 이야기라는 뜻이다. 여기서 Dhammika‘righteous, 如法, 法師의 뜻으로 여법한으로 번역 된다.

 

그러나 16번 인연담에서는 담미까에 대하여 ‘A householder of Sāvatthi who led a very holy life’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담미까는 공덕행을 하는 재가신도의 표상처럼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여 담미까가 사람의 이름은 아니다. 그럼에도 거해스님의 인연담을 보면 재가 신자 담미까 이야기라 하여 담미까가 마치 사람 이름처럼 사용되고 있다.

 

불교에서는 남자신도를 우빠사까(upasaka)’라 한다. 또 여자신도를 우빠시카(upasika)’라 한다. 이를 한자어로 우바새와 우바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청신사와 청신녀라 부른다. 모두 삼보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공덕행을 하는 불자들을 말한다.

 

인연담에 따르면 사왓티의 여법한(dhammika) 남자신도(upasaka)는 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백명이나 되는 여법한 우빠사까가 있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들 오백명의 담미까들은 정기적으로 대중공양을 하였다. 정기적으로 식권으로 분배 되는 죽, 식권으로 분배 되는 음식, 반월의 음식, 신월의 음식, 초대의 음식, 포살의 음식, 안거의 음식을 정기적으로 제공한 것이다. 아마도 오백명이나 되는 부자들이 돌아 가며 대중공양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승가 뿐만 아니라 빈민들에게도 무료로 음식을 나누어 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대중공양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TV를 보면 종종 무료 급식소 이야기가 나온다.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이 돋보인다. 노숙자나 밥을 굽는 가난한 노인들이 주 대상이다. 이렇게 무료로 따뜻한 밥 한끼를 대접하는 것은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커다란 공덕을 짓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오백명의 담미까도 역시 마찬가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게송에서는 어느 여법한 재가신자의 이야기가 인연담으로 소개 되어 있다.

 

어느 천상을 선택하였을까?

 

게송에서 자신의 업의 청정함을 보고 (Disvā kammavisuddham-attano)”라 하였는데, 여기서 보고라는 뜻의 ‘disvā’현재진행형이다. 무엇을 보았길래 현재진행형일까? 이는 인연담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순간에 여섯 천상계에서 온갖 장식으로 치장한 천 마리의 씬두(sindhu)산 준마가 이끄는 백 오십 요자나 길이의 여섯 수레가 다가왔다. 거기에 서있는 하늘사람들이 ‘우리가 하늘나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

 

(Dhammikaupasakavatthu-여법한 재가신도와 관련된 이야기, 법구경 16번 게송인연담, 전재성님역)

 

 

재가신도가 본 것은 온갖 치장을 한 천상의 꽃마차 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여섯 대가 온 것이다. 왜 여섯 대일까? 그것은 욕계천상이 여섯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 바로 위의 사천왕천(cātu-māha-rajikā)부터 시작하여 삼십삼천(tāvatisa),  야마천(yāmā), 도솔천(tusitā), 화락천(nimmāna-rati), 타화자재천(paranimmita-vasa-vatti) 이렇게 여섯 천상이다.

 

그렇다면 임종에 이른 공덕행자는 어떤 천상을 골랐을까? 인연담에 따르면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라고 하였다. 이는 도솔천을 말한다. 도솔천은 깨달은 님들의 부모와 모든 미래의 님들이 사는 곳이라 하였다. 부처님의 생모인 마야부인이 도솔천에 태어 났고, 미래의 부처님으로 오실 멧떼이야(미륵불)보살 역시 도솔천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악행(Pāpa) 공덕행(puñña)

 

두 개의 게송은 업과 과보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악행을 하면 악처로 떨어지고, 반면 선행을 하면 천상에 태어난 다는 지극히 당연한 가르침이다. 이와 같은 악인악과와 선인선과는 주로 재가자들을 위한 가르침으로 본다. 그래서일까 인연담에 등장하는 인물은 도살업자와 공덕행자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한 두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생동안 해 왔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과보는 임종에 이르러 나타나는데 특히 내세에 대한 것이 표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임종직전에 나타난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에 따른 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이세상에 살다 죽으면 저세상에서 살게 된다. 그런데 게송에 따르면 임종직전에는 두 곳 모두 경험이 가능함을 말한다. 현생에 지은 업을 회상하면 내세에 태어날 곳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생 악행을 저지른 자는 이 세상에서도 슬퍼하고 저 세상에서도 슬퍼한다 (Idha socati pecca socati, dhp15)”라 하였고, 반대로 평생 공덕행을 한 자는 이 세상에서도 기뻐하고 저 세상에서도 기뻐한다. Idha modati pecca modati, dhp16)”라 하였다.

 

악행(Pāpakārī)’ 공덕행(Katapuñño)’ 에 대한 내용을 주석을 참고로 하여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악행(Pāpa)

공덕행(puñña)

다섯 가지 악행(오계와 반대 되는 것). 또는  열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십악업도)

보시, 지계와 같은 착하고 건전한 행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행위

1)살생, 2)투도, 3)사음, 4)망어, 5)양설, 6)기어, 7)악구, 8)탐욕, 9)진애, 10)사견

1)보시, 2)지계, 3)수행, 4)공경, 5)봉사, 6)공덕의 회향, 7)전수, 8)공덕의 성취에 대한 즐거운 회상, 9)가르침의 청취, 10)견해의 확립

 

 

 

표에서 악행(Pāpa)은 기본적으로 오계를 지키지 않는 행위를 말한다. 이를 확장하면 열 가지 악업이 된다. 이는 다름 아닌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악한행위에 대한 것이다.

 

공덕행(puñña)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짓는 착하고 건전한 행위라 하였다. 그런데 열 가지 내용을 보면 십악업과 반대되는 십선업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아닌 십복업사(十福業事)’를 말한다. 세간의 행복을 가져 오는 열가지 공덕행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복업사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puññakiriyavatthu’라 한다.

 

재가불자가 실천해야 할 덕목, 십복업사(十福業事)

 

십복업사는 재가불자가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그렇다면 십복업사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지난 2013테라와다 불교 신행과 실천 수행 세미나(2013 11 23, 한국불교역사문화박물관 2층 국제회의실)’에서 이자랑 교수의 논문 한국불자의 신행과 역할을 참고 하여 표를 만들었다.

 

 

No

주석서

UJ

  (UJ)

1

보시

보시

(dana)

보시하기 전에는 기뻐하고, 줄 때는 마음이 청정하며, 주고나서는 만족해야 함

2

지계

(sila)

오계수지

3

수행

수행

(bhavana)

범부의 종성을 버리고 성자의 종성을 얻기전까지 수행함

4

공경

공경

(apacayana)

나이가 많거나 덕이 있어 공양할 만한 사람, 혹은 스승의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명하고자 하는 의지

5

봉사

작무

(veyyavacca)

수행자나 성직자 혹은 연장자를 위해 여러가지 의무행을 하거나, 혹은 병자를 간호 하고자 하는 의지

6

공덕의 회향

공덕의 시여

(pattidana)

하나의 등불이 수 많은 등을 만들어 낼 수 있듯이, 다른 이에게 공덕을 주어도 자신의 복은 쇠퇴 하지 않고 오히려 점점 증대됨

7

전수

공덕의 수희

(pattanumodana)

질투하는 일 없이 함께 기뻐 하는 의지

8

공덕의 성취에 대한 즐거운 회상

문법

(聞法, dhammadavana)

자신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자 하는 청정한 마음에 의해 이익이 되는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의지

9

가르침의 청취

설법

(dhammadesana)

이익이 없음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숙지한 가르침이 해탈의 원인이 될 것을 목적으로 설법을 지속하는 자의 의지

10

견해의 확립

견정업

(見正業, ditthijjukamma)

보시는 공덕이 있다라는 등의 방식으로 발생한 정견에 의해 견해를 올바르게 하는 것

 

 

법구경 각주에 표기된 용어와 UJ(Upasakajanalankara)를 번역한 용어가 약간 다름을 알 수 있다. 내용은 UJ를 근거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성자의 족성을 얻는 것

 

표에서 세 번째 항을 보면 수행(bhavana)이 있다. 내용을 보면 범부의 종성을 버리고 성자의 종성을 얻기 전까지 수행함이라 되어 있다. 이는 무슨 말일까? 다름 아닌 계보를 바꾼다는 것이다. 옛날 상놈에서 양반으로 족보가 바뀌듯이 수행을 통하여 범부에서 성자의 족성을 얻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출재가 할 것 없이 누구나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열반을 성취하여야 한다. 따라서 괴로움을 소멸하고 윤회를 종식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한다. UJ에서도 “40개의 명상주제와 온() 등의 4()에 대해 수행하고 사유함으로써 발생한 안지(appanna)에 아직 도달하지 않은, 종성을 마지막으로 하는 의지가 수행이다.”라고 함으로써 재가자도  수행을 해야함을 강조하였다. 재가불자일지라도 누구나 수행을 통하여 사쌍팔배의 성자의 대열에 들어 갈 수 있음을 말한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승리자

 

게송에서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슬퍼하니 이 세상에서도 슬퍼하고 저 세상에서도 슬퍼한다.(dhp15)”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패배자를 말한다. 악행을 지어 임종직전에 자신이 지은 업의 더러움을 보았을 때 이는 이 세상에서 패배자를 뜻한다. 또 임종직전에 태어날 곳의 표상이 악처인 것을 보고 통탄에 빠진 다면 저 세상에서 패배자를 뜻한다. 이렇게 악행을 평생동안 저지른 자는 이 세상과 저 세상, 양 세상에서 패배자이다.

 

게송에서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기뻐하니 이 세상에서도 기뻐하고 저 세상에서도 기뻐한다.(dhp16)”라 하였다. 이는 승리자를 뜻한다. 평생 공덕행을 지어 임종직전에 이르러 자신이 지은 업의 청정함을 보았을 때 그는 이 세상에서 승리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임종직전에 태어날 곳의 표상을 보고 환희 하였다면 그는 또한 저 세상의 승리자이다. 그래서 UJ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실천도는

현세와 내세로 일컬어 지는 두 세계에서

형벌과 악취의 두려움을 부수어버렸기 때문에

두 세계의 승리라 부른다. (UJ.p225)

 

 

 

2014-04-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