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차라리 꿈이었으면!” 융의 분석심리학과 마음의 메커니즘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6. 14:32

 

차라리 꿈이었으면!” 융의 분석심리학과 마음의 메커니즘

 

 

 

새벽에 잠시 눈을 붙이다 꿈을 꾸었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다. 꿈에서 뭔일을 한거야?”라며 안타까워 하였다. 그래서 꿈이기를 바랬는데 꿈이었다. 이렇게 꿈속에서 꿈이기를 바래는 꿈을 꾼 적이 종종 있었다. 특히 어렸을 적이다. 어린아이로서는 불가항력적인 일을 당했을 때 차라리 꿈이었으면!”하는 마음이 드는데 실제로 꿈을 깨고 나니 꿈속에서 바램이 맞아 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꿈에서는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무의식의 마음이 지배하는 것이 꿈이다. 그래서 꿈은 숨겨져 있는 마음이 발현 되는 것이라 한다. 그러다보니 현실세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살인을 하는가 하면 도둑질도 하는 등 오계를 어기는 일이 서슴없이 벌어지는 것이다. 평소에는 억누루고 있었던 감정이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유감없이 발현된다. 그래서 꿈을 이해하면 앞날을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융심리학의 꿈의 이론

 

꿈과 관련 하여 가장 유명한 사람이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이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의사로서 꿈의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바 있다. 저서로서 우리말로 번역된 인간과 상징이 있다. 무의식에의 접근, 고대신화와 현대인, 개성화의 과정 등의 주제를 가진 이 책은 사진이나 그림을 곁들여 현학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내용은 거의 대부분 꿈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융심리학과 관련하여 이부영박사의 책이 있다. 한 때 스위스의 융연구소에서 수학한 바 있는 이부영박사는 분석심리학 탐구 시리즈를 발간하였다.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와 자기실현 이렇게 세 가지 제목을 가진 책이다. 이 책을 여러 차례 읽었다. 꿈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융심리학의 꿈의 이론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은?

 

사람이 꿈을 꾼다는 것은 현실세계에서 억눌려 있었던 것이 발현 된다고 알려져있다. 이를 무의식이라 한다. 그런데 융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집단무의식개념을 만들었다. 집단무의식은 개인의 무의식 보다 상위 개념으로서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무의식을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같으면 6.25전쟁을 경험한 바 있으므로 항상 전쟁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 설령 전쟁경험세대가 아닐지라도 TV 등 여러매체에서 끊임없이 상기 시키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리가 항상 상존하고 있다. 그것이 꿈에서 발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남침한 꿈을 꾼적이 있다. 6.25전쟁을 체험하지 못하였지만 적들이 쳐들어 오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꿈이 너무나 생생하여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였다. 이렇게 한국인들에게는 집단적으로 형성된 무의식이 심층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인류에게 원형(Archetypen)이 있는데

 

집단무의식이라는 말은 융이 창안한 신조어이다. 설명에 따르면 전인류에 공통되며 뇌의 선천적 구조에서 비롯되는 무의식(개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기억과 충동을 포함하는 정신의 일부분)의 한 형태라 하였다. 이런  집단무의식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개인적 무의식과는 구별되고, 원형(原型), 즉 보편적인 원초적 상()과 관념을 내포한다.”라 하였다. 이말은 무슨 뜻일까?

 

집단 무의식에는 한나라의 민족이 공유하는 무의식도 있지만 원초적으로 존재하는 원형(Archetypen)’있다는 것이다. 이 때 원형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원초적인 상과 관념이라 한다.

 

대극합일과 자기완성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집단무의식으로서의 원형이 좋은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것일 수도 있다. 융에 따르면 원형은 극과 극이 있어서 이분법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의식과 무의식, 남성성과 여성성,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정신과 신체, 높고 낮음, 우월기능과 열등기능, 합리와 비합리, 강함과 부드러움 등 같은 것이다. 이들의 특징은 이분법적이고 대극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대극적으로 되어 있을 때 온갖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스트레스나 히스테리 등 신경증적 현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융심리학의 특징은 이런 이분법적인 대극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융은 자기완성이라 하였다.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 될 때 자기 완성으로 본다.   남성성과 여성성 통합되는 것도 자기완성이고, 선과 악이 통합되는 것도 자기 완성으로 본다. 이렇게 모든 대극에 대하여 하나로 통합해 가는 과정 자체가 자기완성의 길로 가는 것으로 본다.

 

자기(Selbst, Self)와 궁극적 실재(Reality)

 

이렇게 자기 완성이 된 상태를 무엇이라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이부영박사의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그리스도, (), 불성(佛性)과의 일치와 실현 등, 고등종교의 수행목표는 한결같이 융의 심리학적 견지에서 자기라고 부른 인간정신의 중심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으로서 이런 생각은 인류의 역사 속에 이미 오래 전부터 제시되고 체험되어 왔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자기와 자기실현 65p, 이부영교수)

 

 

융이 말하는 대극합일은 자기완성을 말한다. 이렇게 완성된 상태가 자기(Selbst, Self)’라 하였다. 그런데 자기라는 말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궁극적 실재와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궁극적 실재는 한 가지이지만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린 다고 한다. 마치 산의 정상에 올라가는데 있어서 길이 여럿 있지만 올라 가다 보면 모두 정상에서 만나는 것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대표적인 종교다원주의 학자인 길희성교수에 따르면 자신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일신 종교들의 하느님, 힌두교의 브라흐만, 도가의 도나 원기, 유교의 태극이나 천(하늘) 등이 예들이다. 그렇다면 이런 개념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연 그런 상징어들이 가리키고 지향하는 궁극적 실재 자체는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개념들의 배후에 있는 종교적 경험이 차이와 다양성을 면치 못한다면, 그런 경험들을 유발하는 궁극적 실재 자체는 혹시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종교 달라도 우리는 같은 산을 오르고 있다, 길희성 교수)

 

 

종교다원주의자들에 따르면 오늘날 고등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산정상론에서 같이 결국 같은 것이라 한다. 하느님, , 브라흐만, 불성 등으로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지만 알고 보면 하나의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다원주의자들은 영어로 ‘Reality’라 표현한다. ‘Reality’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현실,  실제, 사실이라는 뜻이다. ‘실제라는 뜻은 진실(truth)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리얼리티는 현실이고 진실이고 진리이고 실제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다원주의자들의 궁극적 실재나 융이 말하는 자기는 진리로서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존재론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융이 말하는 대극합일로서의 자기는 존재론적으로 볼 수 있다.

 

무의식의 의식화

 

한 때 융심리학에 심취하였다. 주로 이부영박사의 책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몇 번에 걸쳐서 읽었다. 주로 꿈을 통하여 꿈에서 보는 상징을 통하여 마음의 심리상태를 해석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꿈을 꾸고 나면 기억해내고 왜 내가 그런 꿈을 꾸었을까?”라고 골똘히 생각한 적도 있었다.

 

책을 통하여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의식에 대한 것이다. 특히 의식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무의식을 의식화 함으로써 자기완성으로 가는 것이라 하였다. 마치 80년대 대학생들의 의식화 작업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이렇게 무의식을 의식화 하는 것에 대하여 책에서는 여덟 단계로 설명하였다. 이부영박사의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설명 되어 있다.

 

 

 

유아기

 

 

 

 

 

청소년기

 

 

 

 

 

 중년이후

 

 

이것이 의식화단계이다. 책에서는 자아의 발달과 자기실현의 과정이라 설명되어 있다.

 

유아기의 무의식성

 

그림을 보면 첫 번째 단계가 유아기의 무의식성이다. 이에 대한 설명을 보면 자아는 깊고 넓은 바다 같은 무의식에서 태어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넓은 바다는 크기도 하지만 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있다. 이처럼 바다 같은 것이 무의식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처럼 바다 같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아이의 의식은 하나의 과 같을 것이다. 그래서 그림에서는 점으로 표현 되어 있다. 바다위에 떠 있는 하나의 나뭇잎과 같은 것이 유아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아에게 서서히 의식이 생겨난다. 그리고 의식이 점차로 확대해 나간다. 그러나 무의식의 바다가 너무 크기 때문에 파도가 한번 치면 쉽게 부서질 수 있다. 두 번째 그림이 바로 그런 케이스이다. 이에 대하여 책에서는 온갖 원초적인 충동과 신화적 환상세계 속에 동화 되었다가 차츰 현실세계를 의식하며 영토를 넓혀 나간다라고 표현 되어 있다.

 

유아기의 신화적 환상체험

 

유아기에 있어서 말을 알아듣고 말을 하는 단계가 되면 의식도 성장하게 되는데 이에 대하여 영토를 넓힌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유아기에서 의식의 영토가 확장된다.

 

하지만 유아기의 의식은 불안정한 것이다. 마치 나일강이 범람하면 모든 것을 쓸어 버리듯이 무의식의 바다에서 폭풍이라도 일면 이제 갓 의식이 생겨난 유아의 마음을 쓰러뜨릴지 모른다. 그래서 유아기에는 신화적 환상체험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종의 신비체험이라 볼 수 있다. 아직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는 것에 대한 경외감 또는 두려움이다. 이런 경험은 누구나 겪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랐다. 전기도 들어 오지 않는 오지에서 초등학교에 들어 가기 이전인 유년시절에 본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동쪽 하늘에서 갑자기 여러 대의 물체가 나타나 굉음과 함께 날아 가는 것이었다.

 

그 때 당시 시골에서 자동차 구경하기도 힘들었는데 갑자기 하늘을 날아 다니는 물체를 보자 그것이 무엇인지 어리둥절하였다. 아마 옛날 사람들이 UFO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면 저것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과 같은 것이라 본다.

 

어린 시절 갑자기 나타난 물체가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날아 다니는 물체는 비행기이었다. 아마 ‘C123’ 수송기이었으리라 본다. 얼룩덜룩한 무늬의 몸체에 낮게 비행을 하며 굉음과 함께 편대를 이루어 날아 가는 모습이 너무 생생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유아기의 의식은 거대한 무의식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꿈을 통하여 무의식과 접하였을 때 신화적 환상체험을 하는 것이라 하였을 것이다.

 

마음의 타락을 느낄 때

 

청소년기에 대한 그림을 보면 페르조나(Persona)’가 형성되고 의식이 강화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페르조나는 가면을 뜻한다. 가면은 자신을 숨기는 것과 같기 때문에 페르조나가 형성 되었다는 것은 거짓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현상에 대하여 순수하게 받아 들인 것과 반대로 자신이 점차 타락해 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초등학교 사학년 때라 본다. 점차 자신이 타락해 가고 있음을 느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마음속에서 나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안 것이다. 예를 들어 시기 하고 질투 하고 미워하는 악하고 부정적인 마음 같은 것이다.

 

불선한 마음이 일어날 때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아도 스스로 알 수 있다. 이처럼 불선한 마음이 일어날 때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 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대로 내 버려 두었다. 그러다 보니 점차 마음의 짐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다시 옛날로 되돌아 가려 하였으나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학년이 높아질수록 더욱 더 강화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때인가 마음이 타락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청소년기의 그림자

 

불선한 마음을 가졌다고 해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궁핍하다고 하여 남의 돈을 훔치는 것은 나쁜 행위인 줄 알기 때문에 실행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미 훔치고 있다.

 

이렇게 마음의 타락이 일어나자 초등 이전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 가는 것이 점차 어려워 짐을 느꼈다. 결정적으로는 청소년기로 접어 들면서이다. 변성기가 시작되면서 몸의 변화가 시작 되면서 마음의 타락은 점차 심해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초등이전의 순수한 마음을 그리워 하는 것이다. 이런 불일치에 대하여 이부영 박사의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청소년기는 그림자가 유난히 짙어지는 시기이다. 친구 사이에도 싫고 좋음이 뚜렷하며 모든 것은 선과 악으로 분명히 구분된다. 자아의식이 밝고 긍정적인 이상상만을 치열하게 구현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의식적 인격과 무의식적 인격 사이에 긴장과 분리가 생기는 것이다.

 

(자기와 자기실현 51p, 이부영교수)

 

 

글에서는 의식적 인격무의식적 인격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여기서 의식적 인격이라는 것은 그러면 안되는데라는 것과 같고, 무의식적 인격은 안되는 줄 알면서도그렇게 해버린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두 가지 인격의 불일치로 인하여 마음의 괴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무의식적 마음에 대하여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그림자가 늘 따라 다니듯이 마음에도 마음의 그림자가 있어서 늘 따라 다니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해서 그 그림자를 남 보듯이 할 수 있을까?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융 심리학에서 그림자의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마음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무의식적인 나의 마음을 그림자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없는 듯이 보이지만 늘 따라 다니는 마음의 그림자를 남 보듯이 할 수 없다. 마치 징징거리며 따라 오는 동생을 멀리 할 수 없듯이 마음의 그림자를 결코 분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그림자를 이해 하는 것이 결국 의식화 작업이고 또 자기 완성으로 가는 길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마음의 메커니즘에서 그림자에 해당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이부영 박사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그림을 볼 수 있다.

 

 

 

 

마음의 구조

 

 

 

이것이 마음의 메커니즘(구조)이다. 마음이 둥근 공처럼 생긴 것이라고 볼 때 마치 양파껍질을 까듯이 한 꺼플씩 벗겨 보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운전대만 잡으면 욕지거리를

 

그림을 보면 가장 바깥 껍질이 의식이다. 의식이 있을 때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한다. ‘도둑질하면 안된다든가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는 등을 아는 것이다. 이는 학생은 학생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 다워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면을 하나씩 쓰고 살아 간다. 학생의 가면, 아버지의 가면 같은 것이다.

 

그런데 가면이 여러 개인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집에서는 아버지의 가면을 쓰고, 회사에 가면 예를 들어 과장이라는 가면을 쓴다. 이렇게 가면을 쓰면 어떻게 될까? 가면에 걸맞는 행위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가장으로서 역할을 해야 함을 알고, 또 관리자로서 지켜야 될 품위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이런 가면을 벗어 던져 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런 것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될 때가 있다. 평소 점잖은 양반이 운전대만 잡으면 욕지거리를 한다든가, TV 에서는 도덕군자처럼 말하지만 성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등장 할 때 같은 것이다. 이는 의식과 무의식의 부조화로 보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의 동반자

 

형의 뒤를 자꾸 따라 갈려는 것과 같은 것이 그림자이다. 이 그림자를 인정하고싶지 않지만 엄연하게 자신의 것이다. 숨기고 싶어도 끝까지 따라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자를 부정하면 할수록 더 끈질기게 따라 붙는 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천덕꾸러기 같은 또 다른 나를 인정해 달라는 말과 같다. 그런 그림자는 무의식에서 나타난다.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림자이다. 그래서 부정하고 억누르고자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림자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런 그림자는 의식에서 한꺼플먼 더 벗기면 나타난다. 이와 같은 마음의 그림자에 대하여 융은 개인적 무의식이라 하였다.

 

그런데 마음의 구조에 대한 그림을 보면 의식과 개인무의식, 집단무의식을 보면 작은 원모양이 여럿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콤플렉스(Complex)’라 하였다. 마치 작은 공모양의 수 많은 콤플렉스가 의식과 무의식 가리지 않고 형성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콤플렉스(Complex)란 무엇인가?

 

콤플렉스란 무엇일까? 단순하게 사전적 의미로 본다면 복잡한, 단지, 종합의, 복합의의 뜻이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는 현실적행동이나 지각영향을 미치는 무의식감정적 관념’으로 설명된다. 일반적으로 열등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콤플렉스에 대하여 이부영 교수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무의식에는 무엇이 있는가? 무수한 콤플렉스가 있다. 태어난 뒤 그 사람이 살아온 개인적인 생활 속에서 억압된 것, 잊어버린 것들로 구성된 개인적인 무의식과 이미 태어나기 이전에 결정된 인간 행태의 보편적이며 원초적인 조건인 원형들로 구성된 집단적 무의식이 있다.

 

(아니마와 아미무스 32-33p, 이부영 교수)

 

 

무의식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콤플렉스를 언급하고 있다. 콤플렉스는 한 존재의 삶의 과정에서 억압 된 것이라 한다. 이는 우리말로 ()’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무의식 저편의 응어리

 

한은 특히 우리나라 사람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한많은 이세상 야속한 님아~”로 시작되는 한오백년 노래도 있다. 이런 한의 사전적 의미는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이라 설명된다. 바로 이 한이 콤플렉스이다.

 

누구나 의식에서 일어난 것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 ‘한이 맺혔다고 하였을 때 자신에게 얼마나 한이 많은지는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심층의 무의식에 남아 있는 응어리(콤플렉스)를 알아 내기는 어렵다. 잊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부모로부터 를 맞았다거나 학대를 받았을 때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또 누군가로부터 폭행이나 성폭행을 당한 경우 커서 잊어 버릴 수 있지만 역시 무의식의 영역에서 응어리로 남아 있다. 이처럼 마음속 깊은 곳 의식하지 않는 영역에서 콤플렉스로 남아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조건만 맞으면 발현 되는 것이다. 융은 그런 응어리가 꿈에서 상징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무의식에 남아 있는 콤플렉스는 마음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알 수 없는 마음의 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의 그림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잊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여 잊더라도 결코 잊혀 지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로 남아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 히스테리 등 신경증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마음의 그림자에 대한 실체를 인정하고 이를 의식화 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내면 심층에 있는 응어리를 하나씩 의식화 하였을 때 점차 자기완성이 되고 궁극적으로 자기와 합일이 된다는 것이 융심리학이다.

 

콤플렉스의 타파

 

흔히 사춘기라는 말이 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인이 되는 시기를 말한다. 몸은 성인이지만 마음이 아직 따라 가지 못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불일치로 인하여 반항의 시기라고도 한다. 그런데 융심리학에 따르면 이런 청소년기의 인격불일치는 무의식을 의식화 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과정으로 본다는 것이다.

 

청소년기의 반항은 오래 가지 않는다. 의식화가 진행됨에 따라 의식의 영토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차 의식화가 무의식 내면으로 확장 된다. 그림에서는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단계로 표현 되었다.

 

중년이후에는 의식의 확장에 따른 자기인식이 촉진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지식과 경험이 풍부해져서 지혜가 생겨 나는 것도 무의식에 대한 의식화가 진행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콤플렉스의 타파라 볼 수 있다.

 

의식에서 확인 할 수 있는 한()이라는 응어리를 타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안 잊고 살았던 무의식의 응어리를 깨는 것은 쉽지 않다. 이에 대하여 융은 꿈의 상징으로 나타나는 것에 주목한다. 그래서 무의식을 의식화 함에 따라 점차 자기실현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말한다.

 

동양사상의 영향을 받은 융심리학

 

융심리학은 마음의 구조에 대하여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을 넘어 집단무의식 개념을 도입하고, 더구나 무의식을 의식화 함으로서 자기완성을 이룰 수 있다는 이론은 매우 놀라운 이론이다.

 

융심리학의 궁극적 목표는 자기실현이다. 이를 대극의 통합으로 실현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자기완성된 상태에 대하여 자기(Selbst, Self)’라 하였다. 그런데 융이 말하는 자기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궁극적 실재(Reality)’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60년대 이후  종교다원주의자들이 1875년에서 1961년까지 산 칼 융의 분석심리학의 영향도 받았으리라고 추측된다.

 

칼 융은 불교와 도교, 힌두교 등 동양의 종교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와 같은 동양사상이 융의 이론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특히 융의 집단무의식과 유사한 유식의 제8식인 아뢰야식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보여진다. 그러나 융의 책에서는 아직까지 아뢰야식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줄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융이 동양사상에 심취하였다면 아뢰야식에 알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 없지만 책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초기불교 입장에서 보았을 때

 

융의 분석심리학의 궁극적 목표는 자기완성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자기를 찾는 것인데 이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이나 선불교에서 참나를 찾는 것과 유사하다고 본다. 그러나 초기불교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융의 자기완성론은 수용하기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융의 자기 완성하는 과정을 보면 주로 꿈을 분석하는 것 위주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융의 대표적 저작이라 볼 수 있는 인간과 상징(Man and his symbols)’을 보면 처음 무의식을 접근하는데 있어서 꿈의 상징을 통한 해석으로 보고 있다. 융연구소에서 수학한 바 있는 이부영 교수의 세 가지 저서 역시 꿈의 상징에 대한 분석이다.

 

이렇게 융의 분석심리학은 꿈을 통하여 무의식을 탐구함으로서 자기완성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접근방법이 대승불교에서 수용할 수 있을지 모르나 초기불교에서는 받아 들이기 어려운 것 같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꿈에 대하여 거의 말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의 꿈에 대한 이야기

 

초기경전에서 꿈과 관련된 이야기가 매우 드믈게 몇 개 있다. 숫따니빠따에서 꿈속에서 만난 사람을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 다시 볼 수 없듯, (stn807)”바라문들은 성적 교섭에 빠지는 일을 꿈속에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stn293)”라는 구절이 있다. 꿈이라는 것이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에서 꿈과 관련 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7가지의 꿈 7백가지의 꿈이 있는데, 84십만 대우주기 사이에 어리석은 자도 슬기로운 자도 유전하고 윤회한 뒤에 괴로움의 종극에 이른다. (S24.8)

 

 

이 견해는 부처님당시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빠꾸다 깟짜야나가 한 말이다. 빠꾸다 깟짜야나는 도덕부정론자이다. 생명을 해치거나 주지 않는 것을 빼앗아도 죄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경에서 꿈의 이야기가 나온다. 도덕부정론자가 말하는 일곱가지 꿈과 칠백가지 꿈이라는 것은 영혼의 최종 해탈 이전에 전개 되는 꿈의 상태를 뜻한다고 주석서에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해탈 하기 위해 청정범행을 하거나 닦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실타래를 던지면 풀려질 때까지 굴러 가는 것처럼, 많은 꿈을 꾸다가도 아침이 되면 저절로 눈이 떠져 깨어나는 것처럼 닦지 않아도 언젠가는 해탈 할 수 있음을 말한다.

 

보살 한 분만이 꿀 수 있는 꿈

 

꿈과 관련하여 앙굿따라니까야에 꿈의 경이 있다. 하지만 이 경은 칼 융이 꿈의 상징을 분석하여 자기완성에 이른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꿈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경의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Tathāgatassa bhikkhave, arahato sammā sambuddhassa pubbeva sambodhā anabhisambuddhassa bodhisattasseva sato pañca mahāsupinā pāturahesu. Katame pañca.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오신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는 예전에 아직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커다란 꿈이 나타났다.

 

(Mahāsupina sutta-커다란 꿈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96, 전재성님역)

 

 

경에서 부처님은 다섯 가지 꿈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부처님이 보살로 삶을 살던 시절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한 이후 꿈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보살의 삶을 살 때 꿈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경을 근거로 하여 표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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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꿈

커다란 땅은 그의 커다란 침상이었고, 산의 제왕 히말라야산은 그의 베게 였고, 동쪽바다에는 그의 왼손이 놓였고, 서쪽바다에는 그의 오른 손이 놓였고, 남쪽바다에는 그의 양발이 놓였다.

커다란 땅,

히말라야산, 바다

두 번째 꿈

띠리야라는 풀의 종류가 그의 배꼽에서 솟아서 천공에까지 이르렀다.

띠리야라는 풀

세 번째 꿈

흰 벌레들이 검은 머리를 했는데 발에서 기어올라 무릎까지 덮었다.

흰 벌레들

네 번째 꿈

네 마리의 다양한 색깔을 띤 새가 사방에서 와서 발 아래 떨어져 모두 흰색으로 변했다.

네 마리의 다양한 색깔

다섯 번째 꿈

똥으로 이루어진 산을 아주 높이 올라가면서 몸에 똥을 묻히지 않았다.

똥으로 이루어진 산

 

 

 

꿈의 내용을 보면 길조임에 틀림 없다. 이런 꿈에 대하여 주석서에 따르면 오로지 한 분만이 꿀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범부는 물론 전륜왕, 상수제자, 벽지불도 꿀 수 없고 오로지  일체지를 지닌 보살 한 분만이 꿀 수 있는 것이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떻게 차별화 되는가?

 

초기경전을 보면 꿈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꿈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꿈속에서 만난 사람을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 다시 볼 수 없듯(stn807)”라든가, 또는 꿈속에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stn293”처럼 꿈이 단지 비유로 사용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자기완성에 이르는 길로서 꿈의 상징에 대한 분석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는 의식 너머 무의식 세계를 탐구 하는데 있어서 꿈의 상징을 분석자료로서 활용하였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이처럼 융이 꿈의 분석을 통하여 무의식을 의식화 함에 따라 자기실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라 볼 수 있는 해탈열반의 실현에 있어서 융의 사상과 다르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과 열반의 실현은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부터 시작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꿈의 상징과 그에 따른 분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자기라는 말은 그리스도, (), 불성(佛性)과의 일치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그 자기라는 범주안에 열반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융의 자기론과도 다른 것이고, 종교다원주의주들의 궁극적 실재론과도 다른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로지 열반을 실현하여 성취 될 수 있는 것이기에 차별된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독특하고 차별적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을 불교인들은 진리로 받아 들인다.

 

 

 

2014-04-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