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우리는 모두 바보이다!” 가죽끈에 묶여 있는 개 같은 인생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3. 18:52

 

 

우리는 모두 바보이다!” 가죽끈에 묶여 있는 개 같은 인생

 

 

 

어쩌다 축생으로 태어났을까?

 

은행에서 대기 하고 있다가 TV를 보았다. 케이블 채널의  동물농장이다. ‘아메리칸불리가족이라는 제목의 이 프로는 개새끼 일곱마리에 대한 것이다. TV에서 이제 갓 태어난 새끼개가 어미개의 젖을 맹렬히 빨아 먹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귀여운 강아지들을 보면서 그들은 어쩌다 축생으로 태어나게 되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축생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인상과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 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S35.235)”라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축생과 같은 ‘낮은 단계의 태어남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는 말이다.

 

마하시사야도는 빠띳짜사뭅빠다(십이연기) 법문집에 따르면  업의 법칙으로 중생은 죽은 뒤에 자신의 업에 따라 축생계나 천신계에서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반대로 사람이 동물이나 천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나 개나 소, 돼지 같은 축생으로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은 인간이 소나 돼지 등과 같이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을 부정한다. 비록 육도 중에 눈에 보이는 것이 인간과 축생일지라도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단멸론자의 경우 내세와 윤회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축생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죽으면 삶이 끝난다고 보는 단멸론자에게 있어서 내세와 윤회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것이나 검증되지 않은 것은 차라리 없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세와 윤회 이야기를 하면 증명하라고 한다.하지만 이런 요구는 모순이다. 역으로 내세와 윤회가 왜 없는지에 대하여 증명을 요구하면 그들이 답을 할 수 있을까?

 

축생이 인간이 된다는 가르침

 

초기경전에는 내세와 윤회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특히 인간이 동물로 되기도 하고, 반대로 축생이 인간이 되기도 하는 설법도 있다. 축생이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법다운 실천이 없고, 바른 실천이 없고, 착한 실천이 없고, 공덕 있는 실천이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만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 어리석은 자는 오랜 세월이 지나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인간의 몸을 얻는다면, 그때마다 비천한 가문 즉 짠달라의 가문, 사냥꾼의 가문, 죽세공의 가문, 수레공의 가문, 백정의 가문과 같은 가난하고 음식이 모자라고 곤궁하게 사는 가문에 다시 태어난다.

 

(Balapandita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우현경,맛지마니까야 M129 9, 전재성님역)

 

 

경에서 인간의 몸을 얻는다면이라 하였다. 이는 축생에서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한다. 경에서는 눈먼거북이의 비유를 들었다. 한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자 즉, 지옥이나 축생 등 악처에 떨어진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눈먼 거북이가 백년에 한번씩 떠 올라서 바다에 떠다니는 널판지 구멍에 머리를 내미는 것 보다 더 어려움을 말한다.

 

이렇게 축생에서 인간이 되긴 하였지만 그 지위는 매우 낮은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한번 축생의 세계로 떨어지면 인간 되기가 거의 불가능함을 말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TV에서 개의 새끼로 태어난 귀여운 일곱마리의 강아지는 다시 태어나도 강아지로 태어날 확률이 매우 높다.

 

심해의 생명체

 

종종 TV에서 자연다큐나 동물다큐 프로를 보면 다양한 생물들을 접할 수 있다. 특히 한번도 보지 못한 생물을 접하였을 때 매우 경이롭다. 바닷속 깊은 곳에 사는 심해의 생명체도 그 중 하나이다.

 

심해에는 햇볕이 들지 않는다. 빛이 보이는 바닷속은 불과 이삼십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빛도 들지 않는데 수백미터 이상 수 킬로 미터 저 심해에도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심해 생명체를 TV에서 본적이 있다. 아직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초대형 메기, 초대형 문어 등 심해 생명체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심해아귀가 있는데 그 형상을 보면 마치 악마처럼 무시무시하게 생겼다. 아마도 아귀의 세계가 있다면 이 심해아귀와 같이 생겼으리라 본다.

 

 

 

 

deep sea devil fish

 

 

그런데 나레이션에 따르면 아직까지 심해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1%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저 바다 깊숙한 곳 심연에 어떤 생명체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심해에 대하여 알려진 것이 없다면 지구 밖에 있는 우주생명체 역시 알려진 것이 없다. 저 별들에 어떤 생명이 살고 있는지, 생명체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다. 또 시선을 아래로 돌려 보면 땅속이나 습지에 사는 생명체는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마음이 있어서 존재한다

 

오로지 인간의 세계에서 인간들끼리 부대끼며 살다 보니 인간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이 많은 생명체가 있다고 하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축생계의 생물들처럼 그렇게 다양한 어떠한 다른 종류의 생물도 보지 못했다. 수행승들이여, 그 축생계의 생물들조차 마음에 의해서 다양해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렇지만 마음은 그 축생계의 생물들 보다 다양한 것이다.

 

(Dutiya gaddulabaddha sutta-가죽끈에 묶임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100,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매우 다양한 생명체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축생의 형상이 이렇게 다양한 것은 모두 마음의 산물로 보고 있다. 마음에 따라 업이 형성되어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가 탄생 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존재의 탄생의 뿌리에 놓인 것은 마음의 상태(cittabhava)’라 하였다. 왜냐하면 탄생에 도달한 존재는 탄생과 동일한 마음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의 상태는 탄생에서 성취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명체는 마음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마음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음이 있는 존재에 대하여 정신기능이 있다고 하여 유정물이라 한다. 반면 나무나 식물은 정신기능이 없기 때문에 무정물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정신기능이 있는 유정물이 윤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축생계는 정신능력이 낮기 때문에 인간을 뛰어 넘어 더 높은 경지에 올라 가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도 축생으로 있다가 인간의 태어났을 때 매우 낮은 지위로 태어남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유정물은 태어남을 거듭한다. 존재에게 마음이 있어서 대상에 대한 집착이 있는 한 어떤 존재로든지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세세생생 윤회하게 되는데 초기경전에서 윤회에 대한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Anamataggoya bhikkhave sasāro.

Pubbākoi na paññāyati

avijjānīvaraāna sattāna

tahāsayojanāna

sandhāvata sasarata.

 

수행승들이여,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

 

(Gaddulabaddha sutta-가죽끈에 묶임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9, 전재성님역)

 

 

이 정형구는 제15상윳따인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에서 사용되고 있다. 경에서 뭇삶이라고 번역된 것은 빠알리어 삿따(sattā)에 대한 것이다.

 

삿따는 살아 있는 존재 (living being)를 뜻하고, 한문으로 중생이라 번역되어 있다. 생류라고도 한다. 또 한가지 뜻은 ‘attached or clinging to’라 하여 집착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존재(living being), 생류(a creature)’가 삿따(sattā)인 것이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을 포함하여 축생 등 정신기능이 있는 존재들이 윤회함을 알 수 있다.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윤회에 대하여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시작을 알 수 없는이라는 말이 ‘anamatagga’이다. 이는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anu+na+mata+agga로 분해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영어설명은 ‘one whose beginning is unknown’이다. ‘시작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anamatagga에 대하여 ‘ana(이중부정)+mata(man을 뿌리로함)+agga’로 분해 하였다.

 

이렇게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풀과 나뭇가지의 경(S15.1)’에서는 어머니의 어머니로소급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나뭇잎을 따다가 족보를 만들듯이 어머니의 어머니 무한소급하였을 때, 헤아림이 끝나기 전에 이 세상의 나뭇잎은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을 것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단지 생물학적으로 시작을 알려고 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유일신교에서는 최초의 시작점을 정하였다. 창조주가 이 세상을 창조 하였다면 시작점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적으로 따졌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괴겁기간에 존재들은 어디에 가 있을까?

 

anamatagga에 대하여 붓다고사의 주석에 따르면 백천년을 헤아리더라도 시작은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커다란 바다가 마르고 닳아서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는 뭇삶에게 괴로움의 종식이 있다고 나는 설하지 않는다.

 

(Gaddulabaddha sutta-가죽끈에 묶임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9,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바다의 예를 들었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수미산, 광할한 대지를 들고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일곱개의 태양의 출현에 대한 경(A7:66)’에 잘 설명되어 있다.

 

경에서는 바다가 다 마르고, 수미산이 불에 타버리고, 대지가 파괴 된다고 할지라도 존재의 괴로움은 결코 소멸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겁화가 일어나 우주가 수축하면 인간은 물론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욕계천상 등 색계 초선천까지 모조리 파괴 되었을 때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우주가 모조리 파괴 되었을 때 뭇삶들 역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남아 있는 한 어떠한 존재로든지 다시 태어남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는데 괴겁기간에 모든 존재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이에 대하여 아직까지 경전적 근거는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위 경에 따르면 바다, 수미산, 대지가 모두 소멸 된다고 할지라도 괴로움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것으로 보아  무명과 갈애가 남아 있는 한 어떤 존재로든지 다시 태어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어남은 괴로움이라 한다. 어떤 존재로 태어나든 태어남이 있는 한 괴로움은 항상 함께 하는 것이라 하였다.

 

기둥에 단단히 묶인 개

 

초기경전에서 모든 뭇삶(생류, 중생)들은 집착에 따라 존재한다고 하였다. 잡착하기 때문에 업으로서 존재가 생겨남을 말한다. 이와 같이 집착된 존재에 대하여 부처님은 가죽끈에 묶인 개가 견고한 막대기나 기둥에 단단히 묶여(S22.100)”라 하여 개와 가죽끈의 비유를 들었다.

 

대부분 개를 묶어 놓는다. 목줄을 하여 도망가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개의 행동반경은 가죽끈의 길이에 한정된다. 가죽끈 길이 내에서는 자유이지만 그 이상 벗어 날 수 없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Srp.II.327에 따르면, ‘개는 원환에 의존하는 바보이다. 가죽끈은 견해와 같고 기둥은 자신의 몸과 같다. 가죽끈으로 묶인 개가 기둥을 따라 맴도는 것처럼 견해와 갈애로 자신의 몸을 묶은 범부는 자신의 몸을 따라 윤회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개와 가죽끈 비유 각주, 전재성님)

 

 

 

 

 

 

 

Dog strap

 

 

 

주석에 따르면 가죽끈은 견해와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둥은 자신의 몸과같은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스스로 묶어 놓는 견해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집착된 마음이라 하였다.

 

오온이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여기는 한 결코 오온이라는 기둥에 묶여 있기 때문에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는 물질에 감겨 따라 돌고, 느낌에 감겨 따라 돌고, 지각에 감겨 따라 돌고, 형성에 감겨 따라 돌고,  의식에 감겨 따라 돈다. (S22.95))”라 하였다. 마치 개 목줄의 길이만틈만 행경이 허용 되듯이 마찬가지로 오온에 집착하는 한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개의 신세와 다를 바 없음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바보이다!

 

윤회에 대하여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시작을 알 수 없다면 끝도알 수 없을 것이다. 유일신교처럼 처음이 명확하면 종말이라 하여 반드시 끝맺음이 있지만 불교에서는 시작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끝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도 끝도 윤회 하는 것에 대하여 연기법적으로 설명된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라 밑도 끝도 없이 윤회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뭇삶들은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삼사라의 바다에서 유전한다. 때로는 인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축생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천신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마치 우물의 두레박 처럼 삼계와 육도를 왔다리 갔다리한다. 이렇게 나라는 존재에 매여 있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개의 가죽끈으로 비유하였다.

 

기둥에 묶여 있는 개가 가죽끈의 행경 내에서만 자유가 있지만 그 이상은 허용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오취온)한 개와 다름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죽끈에 묶여 있는 개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개는 원환에 의존하는 바보이다.(S22.95)”라 하였다. 그렇다면 오온에 집착되어 있는 우리들 역시 바보들임에 틀림 없다. 가죽끈에 묶여 있는 개 같은 인생인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외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바보이다!”라고.

 

 

 

2014-04-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