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오취온타령과 견해에 대한 집착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1. 23:43

 

 

오취온타령과 견해에 대한 집착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행위를 하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업이라 볼 수 있다. 신체적으로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는 사라지고 없지만 마음 속에 업으로서 남아 있다. 이렇게 남아 있는 업을 떠 올릴 때마다 사람들은 고통을 받을까 슬픔을 느낄까?

 

유행가 중에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라는 가사가 있다. 대게 사랑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노래이다. 결국 행위는 간 곳이 없지만 기억만은 남아서 괴롭다는 뜻이다.

 

슬픔이란?

 

슬픔에 관한 이야기가 초기경전에 많이 보인다. 대표적으로 십이연기에서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라는 복합어이다. 이는 슬픔(soka), 비탄(parideva), 고통(dukkha), 근심(domanassa), 절망(upāyāsā)으로 번역 된다. 슬픔부터 시작하여 절망까지 점차적으로 상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슬픔이라 번역된 소까(Soka)에 대하여 근심이라 하였다. 이렇게 번역서 마다 용어가 다른다. 초불연에서 번역한 청정도론에서 소까에 대한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As regards sorrow, etc., sorrow is a burning in the mind in one affected by loss of relatives, and so on. Although in meaning it is the same as grief, nevertheless it has inner consuming as its characteristic, its function is completely to consume the mind. It is manifested as continual sorrowing. It is suffering because it is intrinsic suffering and because it is a basis for suffering.

 

(CHAPTER XVI , THE FACULTIES AND TRUTHS , 48.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 빅쿠 냐나몰리 와 빅쿠 보디역)

 

 

근심 등에서 근심이란 친척 등을 잃어서 겪는 것으로서 마음이 불타는 것이다. 이것은 뜻으로는 정신적 고통이다. 하지만 이것의 특징은 속이 타는 것이다. 속이 완전히 타는 역할을 한다. 근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고통에 기인한 괴로움이고, 또한 괴로움의 토대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청정도론 2 16 48, soka, 초불연 대림스님역)

 

 

소까에 대하여 초볼연에서 근심으로 번역한 청정도론에 따르면 속이 타는 것이라 하였다. 이것은 고통에 기인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영역을 보면 소까에 대하여  sorrow라 번역하였다. Sorrow슬픔, 비통, 애도, 유감, 울적함뜻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빠알리어 소까는 슬픔이라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할 듯 하다.

 

소까는 둑카와 동의어

 

청정도론에서는 소까에 대하여 게송으로도 정의 하였다. 영역과 대림스님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Sorrow is a poisoned dart

That penetrates a being’s heart;

Setting up a burning there

Like burning with a red-hot spear.

This state of mind brings future pain (see XVII.273f.)

Such as disease, and then again

Ageing and death, so one may tell

Where for it is called pain as well.

 

(CHAPTER XVI , THE FACULTIES AND TRUTHS , 48.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 빅쿠 냐나몰리 와 빅쿠 보디역)

 

 

근심은 중생의 가슴을 찌르는 독화살이다

벌겋게 타는 창으로 중생의 가슴을 지진다.

, 늙음, 죽음, 멸망 등 갖가지 괴로움을 가져오나니

그래서 괴로움이라 한다.

 

(청정도론 2 16 48, soka, 초불연 대림스님역)

 

 

영역에서는 육구게로 되어 있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사구게로 번역해 놓았다. 이 영역에 대하여 육구게로 번역해 보았다.

 

 

슬픔은 중생의 마음을 관통하므로

독이 묻은 화살과 같다.

벌겋게 달아 오른 창처럼

거기에서 타오른다.

계속되는 질병 같고

늙음과 죽음같아서

누군가 고통과 다름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영역을 번역해 보니 소까는 둑카와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유행가에서 슬픔만 남았네라 하였을 때 이는 고통만 남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숫따니빠따에서는 둑카라는 말보다 소까라는 말을 사용한 게송이 많이 보인다.

 

 

Socati puttehi puttimā 
Gomiko gohi tatheva socati,
Upadh
īhi narassa socanā
Na hi so socati yo nir
ūpadhīti.

 

[세존]

“자식이 있는 이는 자식으로 인해 슬퍼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슬퍼합니다.

집착의 대상으로 인해 사람에게 슬픔이 있으니,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습니다.(stn34)

 

(Dhaniyasutta-다니야의 경, 숫따니빠따 Sn1.2, 전재성님역)

 

 

자식과 재산에 집착하였을 때 슬픔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집착할 대상이 없을 때 슬픔이 없을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집착이라는 빠알리어는 우빠디(Upadhīhi)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괴로움과 슬픔은 집착에서 시작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괴로움과 슬픔은 집착에서

 

집착은 십이연기에서 정형구에서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S12:2)”로 표현 되어 있다. 그런데 분별의 경(S2.2)에서는 집착에 대한 정의가 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Katamañca bhikkhave upādāna?

Cattārimāni bhikkhave, upādānāni:

kāmūpadāna,

diṭṭhūpādāna,

sīlabbatūpādāna,

attavādūpādāna.

Ida vuccati bhikkhave upādāna.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집착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집착,

즉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

실체의 이론에 대한 집착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집착이라고 한다.

 

(Vibha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 전재성님역)

 

 

집착은 갈애와 유사하다. 그러나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된 것을 집착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뗄레야 뗄 수 없다.

 

한번 들러 붙으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집착이라 한다. 이런 집착은 필연적으로 업으로서의 존재를 야기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십이연기 정형구에서는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 우리들은 모두 집착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오취온이란 무엇인가?

 

초천법륜경에서는 pañcupādānakkhandhā’라 한다. 이를 오취온이라 한다. pañcupādānakkhandhā pañca()+upādāna()+khandhā()’이기 때문이다.  색수상행식 오온에 집착 되어 있는 존재를 말한다. 이렇게 집착 되어 있기 때문에 세세생생 윤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 또는 다섯가지 취착무더기라 번역되는 빤쭈빠다나칵다 (pañcupādānakkhandhā, 五取溫)’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경전적 근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탁월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번뇌의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물질의 집착다발이라 한다.

 

(존재의 다발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22.48, 전재성님역)

 

 

이것은 오온중에 물질에 대한 것이다. 이후 수상행식에서는 단지 단어만 바뀌어 반복 된다. 이렇게 번뇌의 집착이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오취온이라 하였다.

 

아라한의 경우 다섯가지 다발(오온)’은 번뇌와 집착이 없는 순수한 다발이다. 그러나 아라한이 아닌 타인의 경우 오온은 번뇌와 집착의 대상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 번뇌의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경에서는 미래에 속하는 것이든~”라 하여 여러가지 경우를 열거 하고 있다. 주석에 따르면 오온이 순수한 다발이든 집착다발이든 욕계, 색계, 무색계와 관계 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는 한 삼계를 벗어 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렇게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것이 집착이다. 그런데 위방가경(S12.2)에 따르면 네 가지 종류의 집착이 있다고 하였다. 1)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kāmūpadāna), 2) 견해에 대한 집착(diṭṭhūpādāna), 3)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sīlabbatūpādāna), 4) 실체의 이론에 대한 집착(attavādūpādāna)을 말한다. 이중 견해에 대하여 집착하는 자들이 있다. 인터넷시대에 오취온타령을 하는 자들이 대표적이다.

 

견해에 대한 집착(diṭṭhūpādāna)의 사례

 

오취온타령을 하는 자들이 있다. 오온과 오취온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어 보면서 오취온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팔정도 뿐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니까야 경전을 부정한다. 이렇게 오취온 타령을 하는 자들 대부분은 단멸론자들이라 보면 틀림 없다.

 

 

니까야의 맹신에 빠진 분
OO님
오온이 어떻게 오취온을 만드는지 말하지 못할바엔
불교가 어떻다 말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나는 분명히 팔정도를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무아경을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이말이 무엇을 뜻하죠?     아라한입니다
.

.
니까야 가 지금 니꺼야로 변질 돼 있습니다

 

(댓글)

 

 

‘종’으로 시작 되는 필명이 남겨 놓은 글이다. 니까야가 니꺼야로 변질 되었다고 말하면서 경전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취온과 팔정도를 이해하였으니 자신은 아라한이라 한다.

 

오취온 타령을 하는 자들은 특징이 있다. 대부분 자신의 감각적 인지에 의존하고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과학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는 것은 모조리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윤회도 부정된다.

 

윤회가 부정된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법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결국 부처님의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잘못된 견해에 집착하는 것이 견해에 대한 집착(diṭṭhūpādāna)’이라 볼 수 있다.

 

열 가지 사견이란?

 

견해에 대한 집착은 무엇일까?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사견에 대한 집착

 

또 다른 종류의 집착은 사견에 대한 집착(diṭṭhi-upādāna)입니다. 이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집착의 범주에 있는 것147을 제외한 모든 사견을 포괄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견은 집착으로 간주됩니다. 이제 사람들이 꽉 잡혀 있는 열 가지 사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① 첫 번째 사견은 보시란 좋은 업을 짓는 행위가 아니고 단지 돈만 날리는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선행의 가치와 과보를 부정합니다만 사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보시행은 보시자를 기쁘게 하고 보시 받는 자를 물질과 정신으로 이롭게 하고 심지어는 굶주린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데 도움이 되기 합니다. 보시자는 평판이 좋고 큰 존경을 받습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천신계에 태어납니다. 이렇게 죽은 뒤에 받는 보상을 회의론자들에게 납득시키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업의 세속적 과보는 신통력을 가진 아라한과 다른 성자들은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통력의 하나는 하늘 눈[天眼]입니다. 이러한 하늘 눈[天眼]으로 보시자가 천신계에서 잘 살고 있는 것과 악행을 일삼은 비보시자는 악처에서 고통을 겪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한 광경은 신통력을 얻지는 못했지만 깊은 삼매를 얻은 일부 수행자들도 볼 수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광경을 상상의 산물이라고 치부해버리겠지만 저 세상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를 수긍하는 것은 이야기의 신빙성에 더 무게를 싣는 것입니다.

 

② 두 번째 사견도 또한 큰 규모의 보시가 가져오는 업의 이익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③ 세 번째 사견은 새해를 맞이하여 손님을 대접하고 선물을 주는 등의 행위가 가져오는 업의 이익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 사견은 본질에 있어서 첫 번째 사견과 같습니다. 이는 당시 외도(外道)들이 무익하다고 치부해버린 고대 인도에서 성행하던 작은 보시행을 가리킵니다.

 

④ 네 번째 사견은 도덕적인 선행이나 악행이 가져오는 업보를 부정하는 견해(akiriya-diṭṭhi)입니다. 사람이 현생에서 짓는 행위에 대해 받는 업보와 다른 세속적인 과보에 대한 증거가 많이 있으며, 신통력으로 그것을 입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감각적 쾌락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욕망에 그냥 내맡겨 두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물질적 향상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되는 도덕적 가치와 이상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업의 법칙을 부정하는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논리를 제시합니다. 최종적인 분석결과 이는 그들이 감각적 쾌락을 지나치게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⑤ 다섯 번째와 ⑥ 여섯 번째 사견은 어렸을 때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아준 부모에게 입은 은혜에 표하는 공경이나 경의, 후원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쩌다가 성관계를 맺어서 애를 가졌고 책임감에서 애를 키운 것이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감사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를 돌보아 드리는 게 선행도 아니며 부모에게 못되게 구는 것도 죄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끔찍한 견해로 이러한 사견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아이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⑦ 일곱 번째 사견은 인간계와 축생계를 제외한 다른 중생계를 부정합니다. 이 사견은 동물이 인간으로 재생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부정합니다.

 

⑧ 여덟 번째 사견은 인간이 천신계나 축생계, 또는 지옥에 재생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죽으면 삶이 끝난다는 단멸론(斷滅論)을 가르칩니다.

 

⑨ 아홉 번째 사견은 화생(化生)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태에 들지 않고 완전히 성장한 성체를 지니고 나타나는 천신, 범천, 아귀, 아수라등과 같은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선하거나 악한 유령과 만났다는 보고가 있고 유령, 천신, 범천 등을 불러올 수 있는 무당과 심령술사가 있으며, 이들은 때로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에게 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견해는 지지할 수 없습니다.

 

⑩ 열 번째 사견은 이 세상과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을 설하고 자신들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문이나 바라문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스스로의 실제적이고 남다른 경험을 토대로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독자적으로 설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들의 모든 가르침은 다 추측과 공론이어서 거짓이며 삿된 것임을 뜻합니다.

 

오늘날 이 견해는 종교를 조롱하는 사람들에 의해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부처님과 아라한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하지만 이 견해에 근거하고 있는 논리는 자기 당착적이고 파멸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견해를 지니고 있는 사람도 역시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해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똑같은 사유를 통하여 우리는 이 견해를 부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하시사야도의 빠띳짜사뭅빠다-십이연기, 열가지 사견)

 

 

 

grasping

 

 

 

법문집에서 diṭṭhūpādāna에 대하여 사견에 대한 집착으로 번역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법문집에서는 열 가지 사견에 대하여 소개 하고 있다.

 

이 열 가지를 보면 현재 인터넷상에서 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거의 일치 한다. 마하시사야도가 50년대와 60년대에 법문하였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이전 농업국가이었던 미얀마에서도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단멸론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시대와 나라를 구분하지 않고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단멸론자들은 늘 있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끊임 없이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하여 불자들을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그러건 말건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부처님 당시부터 지혜있는 자들에 의하여 전승되어 왔듯이 앞으로도 전승될 것이기 때문이다.

 

위 글 후미에서 마하시사야도는 열 가지 견해에 대하여 종교를 조롱하는 사람들에 의해 공감을 얻고 있다고 하였다. 오취온타령을 하며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과 같은 단멸론자를 말한다. 그런데 이런 삿된 견해를 가진 자들은 자기 당착적이고 파멸적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삿된 견해를 지니고 있는 사람도 역시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해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똑같은 사유를 통하여 부정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열 가지 정견이란?

 

열 가지 사견은 결국은 업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어떤 견해가 바른견해일까? 열 가지 바른 견해는 열 가지 사견에 대하여 반대 되는 견해이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조목조목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첫 번째 바른 견해는 보시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보시자는 적어도 보시 받는 사람들이 칭찬합니다. 그렇게 보시를 받은 사람들은 보시자를 칭찬하고 보시자가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줄 것입니다. 보시자는 좋은 임종의 표상을 지닌 채 평온하게 죽어서 천신계나 인간계의 좋은 생으로 태어납니다. 좋은 재생을 통하여 언젠가 보시자는 성스러운 도와 열반에 이를 것입니다. 부처님, 벽지불, 아라한의 목표에 이르는 기나긴 정신적인 여정을 시작한 보살과 다른 사람들은 대개 보시행과 함께 했습니다.

 

보시의 과보는 일부 사람들의 물질적 번영을 보아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업, 농사 등의 똑같은 일을 하는데 결과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번창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나아지는 점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힘들이지 않고서도 성공을 이루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힘들게 일하고도 번영하지 못합니다. 다른 요소가 같다면 사람들의 재산 형성이 각기 다름은 의심할여지 없이 전생의 보시여부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2) (3)의 견해는 업의 법칙을 믿는 사람은 아낌없이 보시하거나 손님 접대, 선물을 주는 것과 같은 작은 보시행에서 오는 업의 과보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4) 이러한 세 가지 바른 견해는 도덕적 과보, 즉 업의 법칙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선행이나 악행에 따라 대접받는다는 것은 삶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부모와 스승의 지도에 따라 올바른 삶을 사는 사람은 인기를 얻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성공을 이루며 장성했을 때 성공한 신사가 됩니다. 이와 유사하게 전생에 이룬 선업으로 좋은 집안에 태어나 건강, 재산, 신체적인 아름다움, 참된 친구와 같은 축복을 얻습니다. 악업의 나쁜 효과는 병약함, 가난, 용모의 추함 등입니다.

 

(5) (6)의 견해는 업에 대한 믿음은 또한 부모님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부모님은 임신한 순간부터 아이를 잘 보살핍니다. 어머니는 태안에 있는 아기를 위해 모체의 건강과 먹는 음식, 동작에 특별히 주의합니다. 만약 어머니가 좋은 불교신자라면 아이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주고자하는 마음에서 포살일을 지키며 부처님과 법과 승가를 생각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부모는 아이의 물질적 요구를 챙겨줘야 하고 교육을 시켜서 성년이 되면 살아갈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의 부모님을 공경하고 돌봐드리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리고 이는 헤아릴 수 없는 이익을 주는 선업입니다. 자기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아무리 못해도 자기 자식에게 공경을 받을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 부모를 박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식들이 멸시할 것입니다.

 

 (7), (8), (9)번 견해는 이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 화생(化生)으로 생겨난 천신과 같은 중생에 대한 바른 견해입니다. 이러한 바른 견해에도 또한 업의 법칙에 대한 믿음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업의 법칙으로 중생은 죽은 뒤에 자신의 업에 따라 축생계나 천신계에서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반대로 사람이 동물이나 천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어느 정도까지는 증명할 수 있지만, 관찰하는 수행자는 신통력이나 위빠사나 지혜, 또는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마타 선을 수행하면 수행자는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죽어서 새로운 존재가 된 사람의 모습 따위를 분수 있는 하늘 눈[天眼]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통력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마타나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추론의 힘에 의존해야 합니다. 여기저기에 자신들의 전생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불전(佛典)에는 태어남을 기억하는 지혜(jātissara-ñāa)를 얻은 사람으로 나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람, 동물, 유령, 귀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전생을 이야기 합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해보면 이러한 전생의 이야기는 죽은 다음에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거나 반대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고, 또 어떤 중생들은 곧바로 화생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가리킵니다.

 

여기서 현자가 제시한 내생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한 사람은 업과 내생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고 또 다른 사람은 그러한 믿음을 부정한다고 가정해 봅니다. 업과 내생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보시와 지계와 같은 선업을 짓지 않을 것이며 악업 짓기를 삼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는 욕망에 자신을 내맡겨 버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이 존경하고 찬탄할 만한 어떠한 덕성도 없습니다. 만약 자신의 믿음과 반대로 업과 내생의 법칙이 사실이라면 그는 악처에 떨어질 것이며 윤회를 하면서 많은 생 동안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반면에 업과 내생을 믿는 사람은 악업을 삼가고 선업을 지을 것이며, 설사 업이나 내생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덕성으로 인해 칭찬과 높은 명성을 얻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선업을 관찰하면 기쁨이 생길 것입니다. 선한 시민으로써 그는 평화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이익은 분명코 그가 현생에서 가지는 업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내생이 사실이라면 그는 내생의 행복을 보장받습니다. 어쨌든 내생에 대한 믿음은 현생이나 내생에서 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부』「무희론경(無戱論經 Apannaka sutta)(M60)에서 부처님이 권하신 절대 오류가 없는 사유 방법입니다.

 

 (10)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한 최상의 지혜를 선언할 수 있고 자신의 가르침을 믿도록 할 수 있는 거룩한 덕성을 지닌 부처님과 아라한, 또는 성자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도 또한 업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왜냐하면 아라한과 부처님들의 영적인 성취는 본질에 있어 업과 다르지 않은 스스로의 바라밀에 부분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바라밀을 계발하는 것은 일종의 배움입니다. 마치 아이가 교육 잘 받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많은 것을 배우는 것처럼 보살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지혜를 구하고 바라밀을 닦아야 합니다.

 

어떤 부모와 어른들은 자기 아이를 영화관이나 극장에 데리고 가는 반면 다른 부모와 어른들은 파고다와 절에 데리고 갑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은 좋거나 좋지 못한 습성을 기르게 되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거나 삶의 숭고한 것을 경험합니다. 좋은 습성과 좋은 수련은 일종의 바라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종교적인 삶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커다란 열정과 노력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합니다. 이러한 아이의 종교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나 어떤 사람의 영적인 삶에 대한 남다른 사랑은 전생의 바라밀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싯달타 태자는 수많은 겁()에 걸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삶을 거치면서 보시, 지계, 출리 등과 같은 바라밀을 완성하고 점진적으로 계발함으로써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한 생에서 쉽게 이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태자가 깨달음을 얻고자 호화로운 왕궁과 가족을 버릴 때, 그 의지를 다지게 한 것은 바로 축적해온 잠재업력, 즉 바라밀이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환멸을 이야기하지만 위대한 보살의 출가는 고사하고 모든 재산을 다 버리고 비구가 되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보살은 지혜를 얻기 위해 여러 전생을 거치면서 꿋꿋하게 열과 성을 다해 다른 바라밀도 닦았습니다. 그 결과 마지막 생에 보살은 삶의 본성과 연기 등을 혼자서 성찰하고 깨달았습니다. 보살이 마침내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보살의 바라밀 때문이었으며, 벽지불과 아라한의 영적인 성취가 있게 된 것도 바라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업에 대한 믿음으로 정신적인 진보에 큰 뜻을 품은 사람은 아라한, 벽지불,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업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부처님과 다른 성자들의 최상의 지혜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습니다.

 

(마하시사야도의 빠띳짜사뭅빠다-십이연기, 열가지 정견)

 

 

이렇게 열 가지 정견은 열 가지 삿된 견해와 반대 되는 말이다. 그런데 사견은 한마디로 업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더구나 과학의 시대에 오취온타령을 하며 업의 법칙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는 반세기 이전 미얀마에서도 그런 것 같다. 법문집에서  지금은 과학적 지식이란 미명하에 업의 법칙을 비판하는 책들로 인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단멸론이 설득력을 얻어 갈 때

 

단멸론자들은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내밀어 증명을 요구하였을 때 답변을 못하면 아닌 것으로 간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단멸론이 점차 설득력을 얻어 가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우려한다.

 

 

경전 말씀대로 사견은 대체로 갈애에 뿌리를 두고 있고 물질에 대한 인류의 증대하는 갈망과 함께, 업에 대한 회의주의는 점점 커져가는 것 같습니다. 이들 사견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은 선한 사람들에게 달렸습니다.

 

(마하시사야도의 빠띳짜사뭅빠다-십이연기, 52 바라밀과 업)

 

 

오취온타령하며 업보를 부정하는 자들이 과학의 시대에 힘을 얻어 갈 때 회의론자들이 점차로 늘어 갈 것이라 한다. 그런 우려는 마하시사야도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에서도 볼 수 있다. 경전에 의존하는 것을 비판하고, 주석서와 논장을 경시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런 사견에 맞서는 것은 선한 자들, 즉 지혜로운 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오취온과 윤회

 

한 번 들러 붙으면 여간해서 떨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떨어지지 않는 상태를 집착이라 한다. 빠알리어로는 ‘upādānā’이다. 우빠다나는 영어로는 ‘grasping; attachment; fuel’의 뜻이다. 모두 달라 붙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이렇게 달라 붙어 있다 보니 업으로서의 존재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어로 연료라는 뜻으로 fuel라 하였을 것이다.

 

집착은 갈애를 조건으로 한 것이다. 또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된 것이 집착이라 한다. 그래서 갈애와 집착은 같은 뜻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갈애는 느낌을 조건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좋고 싫음 등의 느낌이 있어야 갈애가 생겨 나고 집착으로 발전 될 수 있다. 그래서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라고 한다. 느낌에서 갈애로 발전하면 이미 늦기 때문이다.

 

더구나 집착으로 발전하였다면 업의로서의 존재를 유발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오온 즉, 색수상행식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을 오취온이라 한다. 이렇게 오온에 집착하게 되면 윤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라는 복합어대로 슬픔(soka), 비탄(parideva), 고통(dukkha), 근심(domanassa), 절망(upāyāsā)에 이르게 된다.

 

이미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흔히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집착 단계는 이미 늦은 것이다. 집착 이전인 갈애에서 스톱해야 한다. 그런데 갈애단계에서 멈추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애 이전인 느낌에서 알아차려야 함을 말한다. 모든 수행은 알아차림이다. 느낌에서 갈애로 발전하지 않게 하는 것이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라 한다. 이렇게 슬픔의 화살을 뽑았을 때 마음의 평안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Abbuhasallo asito,

santi pappuyya cetaso.
Sabbasoka atikkanto,

asoko hoti nibbutoti.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stn593)

 

(Sallasutta-화살의 경, Sn3.8, 전재성님역)

 

 

화살의 경에서 번뇌의 화살을 뽑아 버리라고 하였다. 그런 번뇌는 어떤 것일까? 게송에서는 asito’라 하였다. 주석에 따르면 갈애집착을 말한다. 이미 지나간 것도 해당 될 것이다.

 

지난 일에 대하여 괴로워하는 것도 일종의 집착이다. 그렇게 하였을 때 슬픔이 일어난다. 그런 슬픔은 괴로움과 동의어이다. 그래서 게송에 따르면 이미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않았을 때 더 이상 슬픔은 생기기 않을 것이라 한다.

 

 

2014-04-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