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분노에 수반되는 쾌감 때문에” 미움의 뿌리를 뽑아 버려야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28. 14:32

 

분노에 수반되는 쾌감 때문에” 미움의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하루라도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루라도 가르침을 접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그래서 네 구절로 되어 있는 법구경과 숫따니빠따를 열어 본다. 비록 짤막한 사구게로 되어 있긴 하지만 그 안에는 심오한 가르침이 들어 있다.

 

치닫지도 않고 뒤쳐지지도 않아

 

숫따니빠따 뱀의 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o nāccasārī na paccasārī

sabba vitatham idan ti vītadoso,
So bhikkhu jahāti orapāra

urago jiṇṇamiva taca purāa.

 

치닫지도 않고 뒤쳐지지도 않아 ,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미움을 버린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stn12)

 

(Uragasutta-뱀의 경, 숫따니빠따 Sn1.1, 전재성님역)

 

 

 세번째와 네번째구절은 후렴과 같아서 우라가경 전체에서 볼 수 있는 정형구이다. 그러나 첫번째와 두번째 구절에 있는 내용은 모두 다르다. 그래서 사실상 두 개의 구절에 핵심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붓다고사의 주석을 보면

 

첫번째 구절 치닫지도 않고 뒤쳐지지도 않아가 있다. 맹목적으로 앞으로 달려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유유자적 따라가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럴 때 주석을 보아야 한다. 이 구절에 대하여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Yo nāccasārī na paccasārī :

 

여기서 붓다고싸는 영원주의[상견]때문에 치닫고 허무주의[단견] 때문에 뒤쳐지고 과거를 한탄하며 치닫고 미래를 기대하며 뒤쳐지고 과거[전제]에 매인 견해 때문에 치닫고 미래[후제]에 매인 견해 때문에 뒤쳐진다.’라고 말하면서 중도에 의해서 견해와 갈애와 교만으로 이루어진 희론을 넘어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25번 각주, Yo nāccasārī na paccasārī, 전재성님)

 

 

Yo nāccasārī na paccasārī구절에 대하여 5세기에 주석한 붓다고사에 따르면 상견과 단견, 전제와 후제 이렇게 두 종류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중도를 강조하고 희론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스스로] 어긋나지 않고 [남을] 어긋나게 하지 않아

 

하지만 전재성님은 이와 같은 붓다고사의 주석에 대하여 현대의 주석가의 견해를 들어 다음과 같이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그러나 노만은 God.135에서 이러한 해석이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어긋나지 않고 [남을] 어긋나게 하지 않아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다음 구절에 나오는 망상이나 희론에 관계된 것이다.

 

희론은 전도되거나 어긋난 지각을 원인으로 하는 것으로 MN.I.507에 의하면, 불에 닿으면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감관의 조건이 달라진 문둥병 환자에게는 즐겁게 느껴진다: 문둥병 환자는 즐겁다라고 전도된 지각을 얻는다. 희론은 잘못된 지각에 연유한다.

 

(25번 각주, Yo nāccasārī na paccasārī, 전재성님)

 

 

전재성님은 노만의 견해를 인용하여 붓다고사의 주석에 문제가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또 나까무라 하지메가 っても疾過ぎることなくまたれることもなく라고 번역한 것에 대해서도 이를 달려갈지라도 너무 빠르거나 뒤쳐지지도 않고의 뜻으로 번역한 것에 대해서도 지나친 의역이라 보고 있다. 그래서 현대 주석가인 노만이 “[스스로] 어긋나지 않고 [남을] 어긋나게 하지 않아라고 번역한 것을 소개 하고 있다.

 

여섯 개의 게송을 보면

 

그런데 Yo nāccasārī na paccasārī문구가 들어 가는 게송은 우라가경에서 모두 여섯 개에 달한다. 이를 표현 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구절

두 번째 구절

세 번째 구절과

네 번째 구절

 

핵심어

1) 치닫지도 않고

뒤쳐지지도 않아

(전재성님역)

 

2) 달려갈지라도 너무 빠르거나 뒤쳐지지도 않고

(나까무라 하지메역)

 

3) [스스로] 어긋나지 않고 [남을] 어긋나게 하지 않아

(노만역)

모든 희론을 뛰어넘는 수행승은

(stn8)

희론

papañca

마치 뱀이

묵을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세상에서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수행승은 (stn9)

허망

vitatham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욕망을 버린 수행승은 (stn10)

욕망

lobha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탐욕을 버린 수행승은 (stn11)

탐욕

rāga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미움을 버린 수행승은 (stn12)

미움

dosa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어리석음을 버린 수행자는 (stn13)

어리석음

moha

 

 

 

Yo nāccasārī na paccasārī로 시작 되는 게송은 위 표와 같이 총 여섯 개임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구절의 키워드를 보면 희론(papañca), 허망(vitatham), 욕망(lobha), 탐욕(rāga), 미움(dosa), 어리석음(moha)에 대한 것이다. 탐진치 삼독을 포함하여 희론과 허망과 욕망이 추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핵심어가 있는데 붓다고사의 주석을 보면 ‘영원주의[상견]와  허무주의[단견]’, 그리고 ‘과거[전제]와  미래[후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중도에 의해서 희론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붓다고사의 주석은 모든 희론을 뛰어넘는 수행승은(stn8)”의 게송에만 적용 되고 나머지 다섯 게송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일까 노만은 “[스스로] 어긋나지 않고 [남을] 어긋나게 하지 않아라 하여 이러한 번역이 여섯 게송 전체에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라 보여 진다.

 

노만은 누구일까?

 

그런 노만은 누구일까? ‘K. R. Norman’을 키워드로 검색하자 위키백과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발견하였다.

 

 

K. R. Norman

 

Kenneth Roy Norman (born 1925) is a leading scholar of Middle Indo-Aryan or Prakrit, particularly of Pali. He saw military service in India and Malaya and studied classics at Cambridge University, and spent most of his career teaching Prakrit at Cambridge University.

 

He was a visiting professor at SOAS and Berkeley, and President of the Pali Text Society from 1981 to 1994. He is a Fellow of the British Academy.

 

(K. R. Norman, 위키백과)

 

 

노만은 1925년 생으로서 고대 부처님 당시 중부인도 언어인 프라크리트어를 전공하였는데, 특히 빠알어에 있어서 세계적인 석학이라 한다. 설명에 따르면 노만은 1981년부터 1994년 까지 13년간  빠알리성전협회(Pali Text Society: PTS) 회장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빠빤짜(희론)가 형성되는 과정

 

stn8에서 ‘모든 희론을 뛰어넘는다’ 하였다. 여기서 희론이라 번역된 빠알리어는 ‘빠빤짜(papañca)’ 라 한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망상’이라고 번역하였다.

 

희론, 망상으로 번역된 빠빤짜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문둥병 환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희론은 전도된 지각이라는 것이다.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빠빤짜가 형성되는 과정이 표현 되어 있다.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

 

(꿀과자의 경, 맛지마니까야 M17, 성전협 전재성님역)

 

 

시각, 청각 등 여섯 가지 감각능력에 따른 접촉으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접촉에 따라 발생된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데 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면 연기의 회전으로 되고, 이 느낌을 사유하였을 때 희론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접촉에 따른 느낌은 두 갈래 길로 갈라진다.

 

주석에 따르면 빠빤짜는 1) 갈애에서 만들어진 희론, 2) 견해에서 만들어진 희론, 3) 자만에서 만들어진 희론 이렇게 세 가지로 설명되어 있다.

 

허망(vitatham)에 대하여

 

Stn9에서 키워드는 허망(vitatham)’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이후 게송에서는 욕망, 탐욕, 미움,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허망을 뜻하는 위따탕(vitatham)’에 대한 각주를 보면 “Vitatham은 허망을 뜻하지만, ‘그러하지 않음(離如)’을 말하는 것이다.”라 하였다. 또 허망은 이여(離如)’라 하였다. 대체 이말은 무슨 뜻일까?

 

허망이라는 말은 금강경에서도 나온다. 여리실견분에서 “범소유상개시허망(凡所有相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게송에서이다. 이는 "무릇 있는 바의 형상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깨달음(如來)을 보리라."라는 뜻이다. 또 금강경 대미를 장식하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라 하여 “일체의 있다고 하는 것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로 번역된다. 

 

그런데 숫따니빠따에서도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Yo nāccasārī na paccasārī sabba vitathamidanti ñatva,  stn9)” 라 하였다. 그렇다면 금강경에서 말하는 허망과 숫따니빠따에서 말하는 허망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Vitatham은 허망을 뜻하지만, ‘그러하지 않음(離如)’을 말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이에 대해 연기법은 허망하지 않은 것(不離如性 : avitathatā)이다.

 

(28번 각주, Vitatham, 전재성님)

 

 

이 각주를 보면 주석의 근거를 들지 않았다. 그런 것으로 보아 전재성님의 개인적 견해로 보여 진다.

 

마하야나에서는 일체현상이 허망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허망에 대하여 연기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법적으로 보았을 때 허망은 허망하지 않는 것이라는 역설이 성립 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불리여성(不離如性)’이라 한 것이다.

 

성전협에서는 그러하지 않음(離如)’으로

 

불리여성(不離如性)’에서 가운데 두 글자를 따면 이여(離如)’가 되어 우리말로 그러하지 않음의 뜻이 된다. 이처럼 허망에 대하여 그러하지 않음의 뜻으로 설명한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은 경전적 근거를 들고 있다.

 

 

Avijjāpaccayā bhikkhave sakhārā" iti kho bhikkhave, yā tatra tathatā avitathatā anaññathatā idappaccayatā, aya vuccati bhikkhave, paiccasamuppādo.

 

수행승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는 것과 같이 수행승들이여, 여기서 여실한 것, 허망하지 않은 것, 다른 것이 아닌 것,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연기라고 한다.

 

(Paccaya sutta-조건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0, 전재성님역)

 

 

조건의 경에서 부처님은 연기와 연생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특히 연기법에 대하여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S12.20)”이라 하였다.

 

이런 연기법에 대하여 1) 여실한 것(tathatā), 2) 허망하지 않은 것(avitathatā), 3) 다른 것이 아닌 것(anaññathatā), 4)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idappaccayatā)이라  하여 네 기지를 들었다.

 

여기서 두 번째의 허망하지 않은 것(avitathatā)이 숫따니빠따의 Vitatham에 대한 설명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Vitatha‘false; untrue, , 의 뜻이지만 초기불교에서는 不異如性, 의 뜻을 가진 허망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의 avitathatā와 동의로 보는 것이다.

 

현상이 허망한 것(Vitatha)’임에 틀림 없지만 이를 연기법적으로 보았을 때 결코 허망하지 않은 것(avitathatā)이 되는 것이다.

 

초불연에서는 거짓이 아님으로

 

위 구절과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1) 진실함(tathatā), 2) 거짓이 아님(avitathatā), 3)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님(anaññathatā), 4) 이것의 조건 짓는 성질(idappaccayatā) 이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두 번째 거짓이 아님(avitathatā)이라 번역 하였는데, 각주에 따르면 조건들이 모일 때 단 한순간이라도 그 [조건]으로부터 법들이 생기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이 아님(avitathatā)이라 했다.”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avitathatā에 대하여 ‘허망하지 않은 것(성전협)’과 ‘거짓이 아님(초불연)’으로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Avitathatā에 대한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면 영어설명은 없고 한자어로 不異如性,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해석이라 보여 진다. 

 

빅쿠보디는 ‘inerrancy (잘못이 없음)’으로

 

위 구절에 대한 빅쿠 보디역을 보면 “Thus, bhikkhus, the actuality in this, the inerrancy, the nototherwiseness, specific conditionality”라 되어  있다. 문제의 avitathatā에 대한 것이 ‘inerrancy’이다. inerrancy는 ‘잘못이 없음’의 뜻이다. 이inerrancy로 번역한 avitathatā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inerrancy (avitathatā) means that once its conditions have reached completeness there is no nonoccurrence, even for a moment, of the phenomenon due to be produced from those condition.

 

(CDB 54번 각주, 빅쿠보디)

 

 

‘inerrancy (잘못이 없음)’라고 번역한 것에 대하여 ‘한순간이라도 현상이 조건에 따라 발생하지 않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초불연에서 각주에서 “조건들이 모일 때 단 한순간이라도 그 [조건]으로부터 법들이 생기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이 아님(avitathatā)’이라 했다.”라고 설명한 것과 일치한다.

 

허망에 대한 개념의 차이는 왜?  

 

이렇게 허망의 뜻인 위따땅(vitatham)에 대하여, 성전협에서는 그러하지 않음(離如)’으로, 초불연에서는 거짓이 아님으로, 빅쿠보디는 ‘inerrancy (잘못이 없음)’으로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마하야나에서 말하는 허망과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허망이 다르다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범소유상개시허망이라 하여 단지 현상이 허망한 것이라 하였으나 초기불교에서는 조건 발생하여 소멸하기 때문에 현상이 허망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연기법적으로 보느냐 보지 않느냐에 따라 현상을 보는 눈이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잡아 먹을 듯이 눈을 부릅뜨고

 

Stn12에서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미움을 버린 수행승은이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미움이라고 번역한 빠알리어가 도사(dosa)’이다.

 

도사는 일반적으로 성냄또는 ()’이라 번역된다.  이때 한자어 ()’은 사전에 따르면 부릅뜰 이라 한다. 한자어 모양에 눈목자가 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보면 성내어 눈을 크게 뜸이라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성냄과 관련된 많은 단어들이 있는데 도사는 이미 화가 나서 행위로서 나타난 상태라 볼 수 있다. 이는 오장애에서 악의(malevolence)’의 뜻으로 번역되는 빠알리어 뱌빠다(byāpāda)와 다른 것이다.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마치 부르르 떨 며 진노하는 것이 도사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영어로 ‘anger, corrupting’로 번역된다.

 

부르르 떨듯이 눈을 크게 치켜 뜨고 죽일 듯이 화내는 자를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일 듯이 화내는 것을 보면 모두 도망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노하면 이제까지 쌓아 올린 인간관계가 파괴 된다. 그래서 영어로 ‘corrupting(부패, 타락, 손상)’이라 번역하였을 것이다.

 

분노에 수반되는 쾌감 때문에

 

이 도사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욕먹은 자를 다시 욕하고, 매맞은 자를 다시 때리면 즐거움이 생겨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분노에 수반되는 쾌감 때문에 남을 미워하고 성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뿌리에는 독이 있다. 따라서 수행자는 미움을 버려야 한다. (Srp.I.41)

 

(34번 각주, stn12 dosa, 전재성님)

 

 

 

 

Sadist-Masochist

 

 

주석을 보면 때리는 즐거움에 대한 것이다. 자꾸 때림에 따라 쾌감을 얻는 것이다. 마치 성적 대상을 학대함으로써 성적인 만족을 얻는 이상 성욕자 즉, ‘사디스트(sadist)’와 유사한 것이다. 그래서 자꾸 화내는 사람은 화를 잘 낸다. 특히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우월한 위치에 있을수록 화를 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 한다. 종종 뉴스에 대통령이 진노하였다든가 격노하였다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성냄(dosa), 질투(issa), 인색(macchariya), 후회(kukucca)의 공통점은?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뿌리에 독이 있다고 하였다. 그 독은 다름 아닌 분노를 말한다. 이런 분노는 모든 악하고 불건한 것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분노에 대하여 뿌리와 같은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분노(성냄)을 뿌리로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성냄과 관련된 해로운 마음이 있다. 모두 성냄을 뿌리로 하고 있는데 1) 성냄(, 도사, dosa), 2) 질투(, 잇사, issa), 3) 인색((), 맛차리야macchariya), 4) 후회(惡作, 꾸꾹짜, kukucca) 이렇게 네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의 요소이다.

 

지금 남이 잘 되는 것에 대하여 시기하고 질투한다면 역시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과거에 대하여 후회 하는 것 역시 성냄을 뿌리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 때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하며 자신에게 성을 내는 것이다.

 

이런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은 마음의 독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하였다. Stn12에서는 “미움을 버리고 (vītadoso)”라고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마음의 독과 같은 성냄을 뿌리째 뽑아야 함을 말한다.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의 뿌리를 뽑으면 더 이상 화낼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세존]

“분노를 끊어 편안히 잠자고

분노를 끊어 슬프지 않네.

참으로 하늘사람이여,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를 죽이는 것을 성자는 가상히 여기니,

그것을 죽이면 슬프지 않기 때문이네.” (S1.71)

 

 

게송에서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이라 하였다. 이는 욕먹은 자를 다시 욕하고, 매맞은 자를 다시 때리면 즐거움이 생겨난다.”라고 설명된다. 여기서 독이 욕과 분노를 뜻하고, 꿀은 쾌감을 뜻한다. 그래서 갖은 욕설과 함께 남을 괴롭히는 자는 괴로움을 당하는 자를 보고서 쾌감을 느낀다. 마치 성도착증 환자인 사디스트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분노의 뿌리를 뽑아 버리라고 하였다.

 

분노가 없게 되면 향유할 쾌락도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편안하게 잠을 잘 자고 결코 슬픔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경전을 무시하는 자들

 

오늘날 인터넷은 세상의 축소판이다. 거기에는 착하고 건전한 사람도 있는 가 하면 악하고 불건전한 자도 있다. 취중(醉中)’에 인터넷 하는 자도 있고 심지어 마약을 복용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온갖 부류의 인생을 볼 수 있는 것이 사이버세상이다. 이런 가상세계에서 불자라고 하여 모두 다 똑같다고 볼 수 없다.

 

기독교와 달리 불교에는 이단논쟁이 없다. 그래서일까 온갖 견해가 난무한다. 하나의 경전에 대하여 해석이 다르다 보니 서로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다툰다. 심지어 경전을 무시하는 부류도 있다.

 

어떤 이는 경전에 쓰여 있다 해서라고 시작 되는 깔라마경을 예를 들면서 경전에 쓰여 있는 것을 다 믿지 말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오취온 타령팔정도 타령으로 날을 보낸다. 또 어떤 이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잘 살면 되지하며 행복론타령을 한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입맛대로 왜곡하는 자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공통적으로 자신의 감각적인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신의 깜냥으로 이해 되지 않으면 모조리 부정해 버린다. 주로 회의론자와 단멸론자에게서 볼 수 있다.

 

가르침은 잘 전승되어 왔고 전승되어 갈 것

 

불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하나마경에 따르면 불법승삼보에 귀의 하고 오계를 준수하는 것이라 하였다. 특히 삼보에 귀의 하는 자가 불자라 하였다. 그 삼보 중에 담마가 있다.

 

담마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이다. 그것이 팔만사천법문이라 하여 사부 또는 오부 니까야로 전승 되어 왔다. 그리고 이를 주석한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이다. 이들 논장도 빠알리삼장에 포함 되어 전승되어 왔다.

 

그럼에도 논장과 경장을 무시한다면 더 이상 불자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빠알리삼장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회의론자와 단멸론자가 많다. 오취온타령하는자나 행복론타령을 하는 자 역시 마찬가지라 본다.

 

그런데 오취온타령과 행복론타령을 하는 자 중 상당수는 사디스트와 같다는 것이다. 자신의 뜻대로 안된다고 하여 마구 성질을 내고 욕설을 퍼붓는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함으로써 쾌감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빠알리 삼장을 무시하는 자들은 진정한 불자가 아니라고 보면 틀림 없다.

 

회의론자와 단멸론자에게 있어서 아비담마와 청정도론 등 논장은 무용지물이다. 온처계근제연으로 표현 되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오취온타령’이나 행복론타령에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마치 구구단만 아는 자가 미적분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 부정하는 것과 같다.

 

경전에 쓰여 있는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 회의론자나 단멸론자들이 경을 왜곡하든지 말든지 올바른 지혜로 관찰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르침은 잘 전승되어 왔고 앞으로도 전승되어 갈 것이다.

 

 

 

2014-04-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