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늙으면 무엇에 의지해야 하나? 실라(계행) 삿다(믿음) 빤냐(지혜) 뿐냐(공덕)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24. 12:58

 

 

 

늙으면 무엇에 의지해야 하나? 실라(계행) 삿다(믿음) 빤냐(지혜) 뿐냐(공덕)

 

 

 

늙었을 때 무엇에 의지해야 하나?

 

상윳따니까야에 늙음의 대한 품이 있다. 이름 하여 자라왁가 (Jarāvagga)’라 한다. 이러한 늙음에 대한 품이나 경은 법구경과 숫따니빠따에서도 볼 수 있다. 늙음의 품 첫 번째와 두 번째 게송은 쌍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Sīla ajarasā sādhu saddhā sādhu adhiṭṭhitā,
Paññ
ā narāna ratana puñña corehi'hāriyanti.

 

(Ajarasāsutta, S1.52)

 

 

[세존]

“계행은 늙지 않아서 좋고

믿음이 좋은 의지처이며

지혜가 인간의 보물이고,

공덕이 도둑이 빼앗기 어려운 것이네.”

 

(Ajarasāsutta-늙지 않아서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2, 전재성님역)

 

[세존]

“계행은 늙지 않아야 좋고

믿음은 확고해졌을 때 좋고

통찰지가 인간들의 보배이며

공덕은 도둑들이 훔쳐가지 못하도다.”

 

(Ajarasāsutta -늙지 않음 경, 상윳따니까야 S1.52, 각묵스님역)

 

 

[The Blessed one:]

 

“Virtue is good by not decaying;

Faith is good when made secure;

Wisdom is the precious gem of humans;

Merit cannot be stolen by thieves.”

 

(Undecaying, S1.52, 빅쿠보디역)

 

 

 

Young / Old

 

 

 

데와따(하늘사람)무엇이 늙지 않아서 좋고, 무엇이 좋은 의지처이고, 무엇이 인간의 보물이고, 무엇이 도둑이 빼앗지 못하는 것인가?”라고 묻는 게송에 대한 답이다.

 

계행은 쇠퇴하지 않아야 좋고

 

게송에서 ‘Sīla ajarasā’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하여 “계행은 늙지 않아야 좋고라는 식으로 번역 되었다. 계행이 어떻게 늙거나 늙지 않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늙지 않음으로서의 뜻은 실패하지 않음으로서의 뜻이라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주석을 설명 해 놓았다.

 

 

계행에서 실패하면(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스승과 은사라도 그를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 가는 곳마다 그를 내치게 된다. (SA.i.93)

 

(238번 각주, 초불연 각묵스님)

 

 

한글 번역을 보면 ajarasā에 대하여 ‘늙지 않는’의 뜻으로 하여 ‘계행은 늙지 않는다’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어감상 어색하다. 그런데 빅쿠보디의 번역을 보면 ‘not decaying’로 되어 있어서 쇠퇴하지 않는다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런 번역이 합리적이라 본다. 그래서 ‘Virtue is good by not decaying’구절은 계행은 쇠퇴하지 않아야 좋다의 뜻이 된다.

 

계행(sīla), 믿음(saddhā), 지혜(paññā), 공덕(puñña)

 

게송은 계행(sīla), 믿음(saddhā), 지혜(paññā), 공덕(puñña) 이렇게 네 가지에 대하여 소개 되어 있다. 이 네 가지는 출가자 뿐만 아니라 재가자에게도 해당된다. 이 네가지에 대하여 한 단어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성전협

초불연

CDB

계행(sīla)

늙지 않

늙지 않

not decaying

(쇠퇴하지 않음)

믿음(saddhā),

의지처

확고한 신념

made secure

(안전하게 만듦)

지혜(paññā)

보물

보배

the precious gem

(소중한 보석)

공덕(puñña)

도둑이

빼앗기 어려움

도둑이

빼앗기 어려움

cannot be stolen

(훔쳐 가지 않음)

 

 

이 네 가지 사항을 보면 모두 천상에 태어날 조건에 해당된다. 천상, 특히 욕계 천상에 태어나려면 믿음과 지계와 보시 이렇게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고 한다. 이때 믿음에 대한 것이 삿다이고, 지계에 대한 것이 실라’, 보시에 대한 것이 뿐냐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에다 하나 더 추가하여 빤냐가 있다. 이 지혜가 추가 된다면 욕계천상이 아니라 범천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범천은 색계와 무색계를 아우르는 말로서 전재성님은 하느님의 나라라고 번역 하였다. 따라서 계행(sīla), 믿음(saddhā), 공덕(puñña)을 갖추면 욕계천상에 태어나고, 여기에다 지혜(paññā)를 갖추면 욕계천상 보다 더 수승한 범천에 태어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범천은 욕망을 여읜 세계이기 때문에 남녀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청정한 자들이 태어나는 곳이 범천이고, 수행자들이 태어나는 곳이 범천이라 한다.

 

믿음은 의지처인가? 믿음은 확고한 신념인가?

 

성전협과 초불연 번역의 차이가 두 번째 구절 믿음에서 다르다. 성전협에서는 믿음이 의지처라 하였으나, 초불연에서는 믿음은 확고한 신념’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아마도 saddhā sādhu adhiṭṭhitā 구절에서 adhiṭṭhitā에 대한 단어 때문이라 보여진다.

 

PCED194에 따르면 adhiṭṭhitā는 ‘determined; undertaken.。決意せる, 受持せる,’의 뜻이다. 이는 데와따가 ki su sādhu adhiṭṭhita라고 물어 보는데 초불연에서는 “무엇이 확고해 졌을 때 좋습니까?”라고 번역 하였다. 성전협에서는 “무엇이 좋은 의지처 입니까? “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빠알리어 adhiṭṭhita에 대한 영어해석 보다 일본어 해석, 受持せる(수지하다)’를 채택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그래서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또는 무엇에 의지해야 합니까?”라는 뜻이 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saddhā(믿음)이라 하였다.

 

성전협의 번역을 보면 “믿음이 좋은 의지처이며”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초불연의 경우 “믿음은 확고 해졌을 때 좋고”라 되어  adhiṭṭhita 에 대하여 ‘확고’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빅쿠 보디는 ‘when made secure’라 하여 안전하게 만들었을 때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믿음을 의지처로 보는 두 가지 이유

 

믿음에 대하여 의지처로 보아야 할지, 믿음에 대하여 확고한 신념으로 보아야 할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믿음으로 번역된 빠알리어 삿다 (saddhā)’는 일반적으로 확신에 찬 믿음으로 알려져 있다. 맹목적으로 믿는 맹신과 다른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의 믿음은 이해와 합리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초불연의 믿음은 확고해 졌을 때 좋고라는 번역이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또 한편 삿다는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을 들 수 있다. 불자가 된다는 것은 불법승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은 커다란 의지처가 된다. 삼보를 믿는 다는 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과 담마와 성스런 상가에 대하여 귀의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의지처가 되고 피난처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게송에서 계행(sīla), 믿음(saddhā), 지혜(paññā), 공덕(puñña) 이렇게 네 가지가 언급되었을 때 특히 나이가 들어 인생을 마감할 나이인 노년에 이르렀을 때 믿음은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도 흔들림없는 확고한 믿음이다. 이때 믿음은 커다란 의지처가 된다.

 

믿음에 대하여 의지처로 보는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노잣돈의 경(S1.79)’을 들 수 있다. 경에서 데와따가 무엇이 노잣돈이고~”라고 물어 보자, 부처님은 믿음이 노잣돈이고~”라 말씀 하신다. 여기서 믿음 역시 삿다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이 든 노인에게 있어서 믿음은 든든한 노자돈과 같은 의지처가 됨을 알 수 있다.

 

 

 

 

2014-03-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