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수행자 보다 더 수행자 다운 삶을, 신재가심출가(身在家心出家)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19. 08:40

 

 

수행자 보다 더 수행자 다운 삶을, 신재가심출가(身在家心出家)

 

 

 

산에 가서 중이나 될까?”

 

언젠가 최인호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스님이 되고 싶다라는 제목의 책이다. 가톨릭신자이긴 하지만 마음으로는 불자 이었던 최인호님은 경허선사의 일대기인 길 없는 길을 쓰기도 하였다.

 

또 머리를 삭발하고 다니는 도올 김용옥님은 자신의 수필에서 밝힌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승복을 입고 강남대로를 활보 한 적이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유명인사들이 스님이 되고 싶고 스님흉내를 내고 있는 것임을 글로서 알 수 있었다.

 

누구나 한번쯤 승복을 입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그것은 걸림없는 삶을 살고 있는 출가수행자들의 자유로움 때문이라 본다. 그래서 자조적으로 하는 밀이 산에 가서 중이나 될까?”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는 가운데

 

하지만 출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 표시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내가 나중에 젊은 청년이 되어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지니고 다복하고 혈기왕성하여 인생의 청춘에 이르렀으나, 부모를 즐겁게 하지 않고, 그들이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는 가운데, 머리를 삭발하고 가사를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다. (M26)

 

 

부처님이 출가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부모와 가족이 눈물로서 만류하지만 이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떠나는 것이 출가이다.

 

또 하나의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그런데 한국에서 출가는 또 하나의 집으로 들어 가는 것이라 한다. 부모형제와 인연을 끊고 세상과 단절하여 깊은 산중으로 들어 갔지만 그곳에서 또 하나의 가족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은사와 상좌라는 부모자식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사형사제라는 또 다른 형제관계가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가족관계는 커다란 문중을 이루고, 문중끼리 똘똘 뭉치고, 문중의 힘으로 각종 이권에 개입하여 권력화 된다. 세상을 버리고 매정하게 부모형제와 인연을 끊고 출발하였지만 또 다른 세상을 만들고 또 다른 인연관계를 맺었다면 이는 출가가 아니라 다시 집으로 들어 가는 입가(入家)’가 될 것이다.

 

진정한 출가란?

 

그렇다면 진정한 출가란 어떤 것일까?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이다.

 

 

바라드와자 가문의 바라문은 세존의 앞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존자 바라드와자는 구족계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홀로 떨어져서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이 그러기 위해 올바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위없이 청정한 삶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

 

그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알았다. 마침내 존자 바라드와자는 거룩한 분 가운데 한 분이 되었다. (M7)

 

 

초기경전에서 본 출가이유는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삶을 구현해야 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무소유의 삶을 살아 갈 때 청정한 삶이 실현 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걸식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옷 세벌로 지내고, 거처를 갖지 않는 삶을 살아 가는 것이다.

 

이렇게 무소유와 청정한 삶을 살았을 때 마침내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사자후를 당당하게 외친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번뇌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청정한지는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다.

 

태국의 단기출가 부엇낙

 

초기경전에서 출가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괴로움의 소멸과 윤회의 종식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떠나는데 청정도론에서는 자따까를 인용하여 “풀잎 끝의 이슬이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듯이 인간의 수명도 그와 같습니다. 어머니, 저의 [출가를] 방해 하지 마십시요. (Ja.iv.122)”라고 되어 있다. 눈물로 매달리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출가 하는 이유는 세상의 삶이라는 것이 풀잎 끝의 이슬과도 같이 본 것이다.

 

하지만 태국에서는 출가가 일상화 되어 있다고 한다. 태국 남자들이 일생에 한 번은 경험한다는 단기출가 부엇낙이 그것이다. 그래서 종종 뉴스에 수 만명의 태국사람들이 집단으로 수계식을 받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출가가 자유로워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출가할 수 있고 또 환속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불교국가 태국에서는 출가라는 것이 생활의 일부라 한다.

 

 

 

 

 

 

 

 

 

 

태국 단기 출가 부억낫(불교포커스)

 

 

 

네 가지 출가유형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출가한다고 하면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해탈이나 열반, 출가에 대한 글을 쓰면 모두 다 출가하라는 말이냐?” 라든가, “왜 출가하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요샛말로 초딩 같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경전을 보고서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을 썼다고 하여 왜 출가하지 않느냐고 다그친다는 것은 마치 앙트와네트가 빵이 없으면 고기먹으면 되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초등학생이나 하는 말을 하는 것은 출가에 대하여 큰 의미를 두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머리를 깍고 가사장삼을 입어야만 출가로 볼 수 있을까?

 

출가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몸과 마음이 함께 출가하는 1) 신심구출가(身心具出家), 몸은 출가했어도 마음은 출가한 게 아닌 것인 2) 신출가심불출가 (身出家心不出家), 몸은 재가 생활을 해도 마음은 스님들보다 더 깊은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인 3) 신재가심출가(身在家心出家), 마음과 몸 둘 다 출가하지 못한 것인 4) 신심구불출가(身心具不出家) 이렇게 네 종류의 출가가 있다.

 

수행자 보다 더 수행자 다운 삶을

 

특히 2번항의 경우 몸은 출가했어도 마음은 출가한 게 아닌 것이다. 이는 스님들 중에도 왜 출가했는지 그 자각을 못하고 갈등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몸은 출가했지만 마음은 세상을 향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다. 출가하였어도 은사와 상좌, 사형사제를 맺어 문중이라는 또 하나의 패밀리를 형성하였을 때 몸만 출가한 셈이 된다. 겉으로는 삭발하고 승복을 입었지만 하는 행동은 세속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몸은 출가했어도 마음은 출가한 게 아닌 것이라 한다.

 

반면 재가에 머물러 있지만 마음은 이미 출가한 사람이 있다. 그래서 출가한 수행자 보다 더 수행자 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심출가자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출가라는 것이 반드시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어야만 출가자라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자라면 누구나 출가수행자라 볼 수 있다. 유발의 재가자일지라도 마음으로는 이미 출가한 것과 같기 때문에 심출가자라 볼 수 있다.

 

랏타빨라의 출가이유

 

출가하는데는 나름 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출가자의 출가이유를 들어 보면 백인백색이다. 그러나 초기경전에는 출가이유에 대하여 명확하에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출가이유로 가장 유명한 랏타빨라의 출가이유이다. 게송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세상에 부유한 사람들을 보건대

어리석어 재산을 얻어도 보시하지 않으니

탐욕스러워 재물을 쌓아두고

점점 더 감각적 쾌락을 열망합니다.

 

왕은 폭력으로 땅을 정복하고

바다에 이르기까지 전국토를 다스리며,

바다의 이쪽에 만족하지 않고

바다의 저쪽마저도 갖길 원합니다.

 

왕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갈애를 떨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아

불완전한 채로 몸을 버리니.

세상의 감각적 쾌락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친지들은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오! 나의 사랑하는 자는 죽었다.’라고 울부짖지만

수의로 그를 감싸서 운반하고는

장작더미를 모아 그곳에서 불태웁니다.

 

재산은 버려지고, 한 벌 수의만 입혀지고

불 꼬챙이에 찔리며 불태워지니

죽어 가는 자에게는 친족도

벗들도 친구들도 피난처가 되지 않습니다.

 

상속자가 그 재산을 가지고 가고

사람은 그 행위를 따라서 저 세상으로 가니

죽은 자에게 재산이 따라다니지 않으니

처자도 재산도 땅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돈으로 장수를 얻지 못하고

또한 재산으로 노쇠를 면할 수 없네.

 

인생은 짧고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현자는 말합니다.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죽음과 만나고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도 그렇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음에 얻어맞아 누웠으나

현명한 자는 죽음과 만나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재산보다 탁월하고

지혜로 궁극적인 목표를 이룹니다.

 

생에서 생으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모태에 들어 저 세상으로 가니

다른 곳에서 다른 곳으로 윤회합니다.

 

적은 지혜로써 그것을 신뢰하는 자

모태에 들어 저 세상으로 갑니다.

 

마치 도둑이 강도에 사로잡혀

악한 행위에 괴로워하듯이

사람들은 죽은 후에 다음 세상에서

악한 행위로 괴로워합니다.

 

감미롭고 즐거운 다양한 감각적 쾌락이

여러 가지 형색으로 마음을 교란시키니

감각적 쾌락의 묶임에서 재난을 보고

왕이여, 나는 출가를 택했습니다.

 

마치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청년이건 노인이건, 몸이 부수어지면 떨어지니

왕이여, 이것을 보고 출가했습니다.

진실한 수행자의 길이 보다 탁월합니다.

 

(랏타빨라 경-Raṭṭhapalasutta, 맛지마니까야 M82,전재성님역)

 

 

 

2014-03-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