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술은 안되지만 곡차는 된다? 불음주계는 폐기 되었나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13. 20:42

 

 

술은 안되지만 곡차는 된다? 불음주계는 폐기 되었나

 

 

이 한장의 사진

 

작년 언론에 크게 보도 된 사건이 있었다. 스님들이 밤샘술판을 벌인 사건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한국불교 장난해? 조계종 승려들의 밤샘 술판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신문과 방송에서 떠들썩 하게 보도 되었다.

 

한겨레 신문에서 특종 보도한 이 사건은 한장의 사진이 주목 받았다. 탁자위에 술과 안주가 가득하고 삭발한 스님들이 술잔을 들고 담소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 한장의 사진이 보도사진 부문에 있어서 이달의 사진으로 선정되어 대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떠들썩 하게 만들었던 스님음주사건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스님들에게 음주는 문제될 게 없다

 

최근 스님술판사건과 관련하여 불교포커스에서 컬럼을 보았다. ‘몇 개의 음주 사건, 곡차를 옹호한다’라는 제목으로 올려진 기사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만약, 징계를 받지 않거나 받는다 해도 시늉정도인 경우를 극단적으로 몰고가면 스님들의 음주는 문제될 게 없다는 궤변론이 당당해진다. 출가자의 삭발염의는 독특한 스타일의 하나로 전락할 것이며, 음주 사건이 벌어진 2013년 10월과 11월은 율장과 종법이 마침내 작동을 멈춘 시기로 기록될 것이며, 그 기억을 다시 꺼내지 못하도록 금기어 목록을 만들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몇 개의 음주 사건, 곡차를 옹호한다, 불교포커스 2014-01-22)

 

 

불교에 불음주계가 있다. 출가자나 재가불자나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스님들이 그것도 중진스님들이 밤샘술판을 벌였어도 처벌 받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컬럼니스트는 앞으로 스님들이 술마시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 할 수 없을 것이라 하였다. 문서견책정도의 가벼운 처벌이나 처벌하는 시늉만 하였을 때 이제 승가에서 술마시는 행위는 더 이상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조계종에서 공식적으로 밤샘술판 사건에 대한 징계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지난해 20월에 술판사건이 일어난 이래 5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가 내려져 있지 않는 것이다. 이쯤 되면 오계에서 불음주계는 삭제 되어야 할 것이다.

 

감관을 수호하지 않고

 

법구경에서 7번과 8번 게송은 감관에 대한 것이다. 감각기관을 단속하지 않았을 때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음을 말한다. 7번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7.

Subhānupassi viharanta        수바누빳싱 위하란땅

indriyesu asavuta,            인드리예수 아상위땅
Bhojanamhi amattaññu
,          보자남히 아맛따늉

kusīta hīnavīriya,            꾸시땅 히나위리양
Ta
ve pasahati Māro            땅 웨 빠사하띠 마로

vāto rukkha va dubbala.       와또 룩캉와 둡발랑

 

아름다움에 탐닉하여

감관을 수호하지 않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모르고

게을러 정진이 없으면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꺽어 버리듯,

악마가 그를 쓰러뜨리리. (dhp7)

 

 

7번 게송은 다른 게송과 달리 여섯 구절로 되어 있다. 그래서 육구게라 볼 수 있다.

 

여인의 신체를 명상주제로 한다면

 

게송을 보면 크게 감관을 수호 하지 않는 것, 식사 절제를 하지 않는 것, 정진하지 않는 것 이렇게 세 가지이다. 그 중에 감관을 수호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아름다움에 탐닉 하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아름다음에 탐닉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아름다음에 탐닉하는 것에 대하여 Subhānupassi viharanta이라 하였다. 여기서 수바(Subhā)는 ‘[adj.] lucky; auspicious; pleasant. (nt.), welfare; beauty. , 淨的, 美好的, 幸福的의 뜻이다. 게송에서는 수바가 아름다운의 뜻으로 쓰였다. 그리고 viharanta에서 viharanta‘living ; abiding; dwelling, , 住法의 뜻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아름다운 것을 계속생각하며 머물다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Subhānupassi viharanta: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자는 원하는 대상에 정신활동을 기울여 아름다운 손톱과 손가락, 손과 발, 다리와 허벅지, 엉덩이와 배, 가슴과 목, 입술과 치아, 입과 코, 눈썹과 이마, 머리카락과 몸털, 피부와 안색과 몸의 윤곽에서 오는 인상과 연상을 명상주제로 취하는 습관을 가진 자를 말한다.(DhpA.I.74)

 

(468번 각주, Subhānupassi viharanta, 전재성님)

 

 

초기불교에는 흙의 까시나 등40가지 사마타 명상주제가 있다. 그런데 여인의 신체부위를 대상으로 하여 사마타명상을 하면 어떻게 될까? 청소년이 좋아 하는 연예인의 사진을 코팅하여 벽에 붙여 놓고 매일 쳐다 보듯이 수행자가  여자의 눈이나 코, 가슴 등 신체의 특징 부위를 대상으로 집중수행하였을 때 어떤 생각이 일어날까? 틀림없이 감각적 욕망에 불타 불건전한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음식을 절제 해야 하는 이유

 

세번째 구절에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모르고 (Bhojanamhi amattaññu)”가 있다. 여기서 Bhojanamhi는 Bhojana+ amhi로서, Bhojana는 ‘food; meal, 食物, , ’의 뜻이다. 또 amattaññu은 amattaññu+u으로, amattaññu는 not ‘knowing any bounds (in the taking of food), intemperate, 不知量の, 適量らざる’의 뜻이다. 직역하면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 한계를 적당한 양을 모른다”의 뜻이다.

 

주석에서는 올바른 생활을 위하여 음식절제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상윳따니까야 수레의 비유에 대한 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neva davāya na madāya na maṇḍanāya na vibhusanāya, yāvadeva imassa kāyassa hitiyā yāpanāya vihisūparatiyā brahmacariyānuggahāya, iti purāañca vedana paihakhāmi, navañca vedana na uppādessāmi, yātrā ca me bhavissati anavajjatā ca phāsuvihāro cā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 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불편했던 경험을 제거하고 새로운 고통을 초래하지 않겠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리라.

 

(수레의 비유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239, 전재성님역)

 

 

음식은 단지 이 몸을 유지 하기 위하여 먹는 것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먹는 것을 즐긴 다면 이미 수행자이기를 포기 한 것과 같다.

 

수행보다 음식에 더 열중하는 듯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음식에 대하여 관대한 것 같다. 사찰음식이라 하여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 하고 있기 때문이다.

 

탁발의 전통이 없는 한국불교에서 사찰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사찰음식의 대중화라는 명목으로 사찰음식을 널리 보급 하고 있다.

 

스님이 직접 요리를 하고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기도 한다. 그래서 종단에서는 음식점을 직접 운영하기도 한다.

 

또 불교박람회에서 본 사찰음식을 보면 화려 하기 그지 없다. 수행자가 잘 먹기 위하여 출가하지 않았을 텐데, 갖가지 진귀한 사찰음식을 보면 수행보다 음식에 더 열중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2013불교박람회

 

 

맛을 탐하는 자는 눈, , 코 등 오감을 수호하지 못한다.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오감이 총동원 되기 때문이다. 결국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에 절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정진의 힘이 약함을 말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하듯

 

네번째 게송에서는 게을러 정진이 없으면 (kusīta hīnavīriya)”이라 하였다. 여기서 kusīta ‘indolent; lazy, 懈怠的, 怠惰的의 뜻이다. Hīnavīriya는 Hīna와 vīriya의 결합어이다. Hīna가 ‘low; inferior’의 뜻이고, vīriya는 vigour; energy; effort의 뜻으로 정진을 뜻한다. 그런데 hīnavīriya는 ‘lacking in energy’라 되어 있다. 따라서 kusīta hīnavīriya를 직역하면 “게을러 열정이 없다”는 뜻이 된다. 수행에 대한 열정이 없다는 것은 정진력이 결여 된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정진이란 무엇을 말할까?

 

정진하면 용맹정진을 연상한다. 잠도 자지 않고 몇 날 몇 일을 육단심으로 밀어 붙이는 것 것을 말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정진은 이와 다르다. 팔정도에서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정의 되어 있다.

 

 

Katamo ca bhikkhave, sammāvāyāmo: idha bhikkhave, bhikkhu anuppannāna pāpakāna akusalāna dhammāna anuppādāya chanda janeti vāyamati viriya ārabhati citta

 

paggahāti padahati. Uppannāna pāpakāna akusalāna dhammāna pahānāya chanda janeti vāyamati viriya ārabhati citta paggahāti padahati. Anuppannāna kusalāna dhammāna uppādāya chanda janeti vāyamati viriya ārabhati citta paggahāti padahati. Uppannāna kusalāna dhammāna hitiyā asammosāya bhiyyobhāvāya vepullāya bhāvanāya pāripūriyā chanda janeti vāyamati viriya ārabhati citta paggahāti padahati, aya vuccati bhikkhave, sammāvāyāmo.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정진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1)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악하고 불건전 것들은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하고,

 

2) 이미 생겨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버리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하고,

 

3)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하고,

 

4)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증가시키고 확대시키고 계발시키고 충만하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정진이라고 한다.

 

(Vibha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8, 전재성님역)

 

 

이것이 정진이다. 정진은 선법과 불선법을 구별하는 것부터 시작 된다. 재미 있게 말한다면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법이라고 생각 되면 증장시키고 불선법이면 처내는 것이다. 이런 정진은 좌선만 해당 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1) 걷기, 2) 서있기, 3) 앉기, 4) 눕기라 하였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말한다. 이런 정진력이 결여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태풍과 같은 번뇌

 

다섯번째 게송에서는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꺽어 버리듯 (vāto rukkha va dubbala)”이라 하였다. 정진력이 없는 자를 연약한 나무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바람을 감각기관에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 vāta는 바람의 뜻이고, rukkha는 나무, dubbala‘feeble; weak, 弱的, 薄弱的의 뜻으로 약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vāto rukkha va dubbala을 직역하면 약한 나무에 바람이 분다의 뜻이 된다. 마치 풍전등화와 같은 모습이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vāto rukkha va dubbala:

 

강력한 폭풍은 허약한 나무를 공격해서 경사면으로 굴러 떨어지게 한다. 그러한 바람은 과일과 열매를 떨어 뜨려 파괴하고 크고 작은 가지를 꺽어버리고 나무를 쓰러뜨린 뒤에 뿌리째 뽑아 위로 오게하고 가지는 밑으로 향하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번뇌속에서 악마는 그에게서 생겨나 사람을 공격한다. 강한바람이 약한 나뭇가지와 꽃을 떨어뜨리듯, 악마는 그가 사소한 잘못을 저지르도록, 사소한 계율을 어기도록 유도한다.(DhpA.I.75-76)

 

(473번 각주, vāto rukkha va dubbala, 전재성님)

 

 

종종 강력한 태풍이 불 때가 있다. 그 때 나무가 뿌리째 뽑힌 것을 본다. 이처럼 강력한 태풍과 같은 것이 번뇌이다. 한번 번뇌의 태풍이 불면 모든 것을 흽쓸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번뇌와 관련하여 탁발승과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했기 때문에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고양이의 경, S20.10, 전재성님역)

 

 

감각기관에 대한 사띠가 확립 되지 않은 채로 탁발하러 나갔을 때에 대한 이야기이다. 알아차림 없이 여인을 보았을 때 처음에는 작은 번뇌일지 모르지만 자꾸 여인의 모습을 연상하게 되면 큰 번뇌로 발전하게 된다. 마치 구름이 모여 태풍이 형성되듯이 번뇌가 그를 지배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 한다.

 

사소죄(nissagiya), 승단잔류죄 (saghādisesa), 승단추방죄 (pārājika)

 

게송에서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꺽어 버리듯,악마가 그를 쓰러뜨리리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나무와 범계행위를 비교 하여 설명하였다.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작은 가지 넘어 뜨리는 것처럼:

사소죄(nissagiya) : 거부되어야 할 사소한 죄

 

“여러분, 나는 책망받아야 마땅한,

비난을 받을 만한 악한 업을 지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원한다면, 그 대가를 달게 받겠습니다.”( A4:242)

 

 

2) 큰 가지를 부러뜨리는 것처럼:

승단잔류죄 (saghādisesa): 대중에 참회하고 승단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죄

 

여러분, 나는 몽둥이로 맞아야 하는,

비난을 받을 만한 악한 업을 지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원한다면, 그 대가를 달게 받겠습니다.”( A4:242)

 

 

3) 뿌리 뽑아 뿌리와 가지를 뒤집는 것처럼

승단추방죄 (pārājika): 승단에서 추방하는 죄

 

“이 자는 머리가 잘릴 만한,

비난 받을 만한 악업을 지었구나.” ( A4:242)

 

 

각주에서는 세 가지 죄가 언급 되어 있다. 그러나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는 네 가지로 되어 있다. 책망받아 마땅한 고백죄(pāidesanīya), 재가 든 자루로 맞아야 하는 참회죄(pācittiya), 몽둥이로 맞아야 하는 승단잔류죄(saghādisesa), 머리가 잘릴만한 승단추방죄(pārājika) 이렇게 네 가지를 말한다.

 

바람이 바위산을 무너뜨리지 못하듯

 

법구경 8번 게송은 7번과 쌍으로 되어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8.

Asubhānupassi viharanta       아수바누빳싱 위하란땅

indriyesu susavuta,           인드리예수 수상위땅
Bhojanamhi ca mattaññu
,        보자남히 맛따늉

saddha āraddhavīriya,         삿당 아랏다위리양
Ta
ve nappasahati Māro         땅 웨 납빠사하띠 마로

vāto sela va pabbata.         와또 셀랑 와 빱바땅

 

아름다움에 탐닉하지 않고

감관을 잘 수호하여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알고

믿음을 지니고 힘써 정진하면

바람이 바위산을 무너뜨리지 못하듯

악마가 그를 쓰러뜨리지 못하리. (dhp8)

 

 

8번 게송에서 7번과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면 다섯번째 구절인 바람이 바위산을 무너뜨리지 못하듯 (vāto sela va pabbata, dhp8)”이다. 이는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꺽어 버리듯 (vāto rukkha va dubbala, dhp7))구절과 쌍을 이룬다.

 

바위산은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끄덕 하지 않는다. 설령 태풍이 불어도 바위산이 통째로 뽑히지 않는다. 각주에 따르면 “번뇌의 형태로 나타난 악마가 그러한 사람에게 나타나더라도 그에 비해 허약하기 때문에 그를 이길 수 없다.(DhpA.I.76)”라 하였다.

 

번뇌다한 자는 아무리 번뇌가 몰아 쳐도 바람에 끄덕 없는 바위산과 같은 것이다. 번뇌가 소멸된 자에게 마라는 상대가 되지 않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승가는 바람에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계를 받고 이삼십년이 지나면

 

종종 동국대정각원 토요법회를 본다. 미디어붓다사이트에서 제공되는 정각원 법회를 보면 그 동안 몰랐던 사실에 대하여 많이 알게 된다. 어느 스님은 법회에서 함께 출발하였던 도반스님들에 대하여 “10년 지나면 반 나갑니다. 15년에서 20년 지나면 거기에서 또 반이 없어집니다.”라고 말하였다. 예를 들어 어느 해 100명의 스님이 탄생하였다면 10년 후에 50명이 되고 거기서 또 10년이 지나면 25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출가한지 20년이 지나면 남게 되는 도반스님은 1/4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스님은 네 번째 생에는 장가를 들고 싶다라고 하였다.

 

스님들이 출가하여 끝까지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것 같다. 이는 시골절에서 살며 불교포커스에 연재를 하고 있는 어느 스님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선방에서 만난 어느 선배스님은 처음 사미계를 같이 받은 수계도반이 20명이었는데 30년이 지나고 나니 겨우 3명이 남았다고 한다. 6명은 저 세상 사람이 되었고, 나머지는 환속하거나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수계도반들은 9명이었는데 3명은 환속을, 나머지 6명은 각자의 처소에서 기도하고 참선하고 간경하고 사찰의 소임을 보고 있다.

 

(출가했었던 사람, 시골절 주지의 귀사일기 9, 불교포커스 2013-09-26)

 

 

글에 따르면 출가당시 20명이었던 것이 30년이 지난후에 보니 고작 3명 남았다는 것이다. 대부분 환속한 것이다.

 

불가의 공공연한 비밀

 

환속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게송에서와 같이 감각기관을 수호 하지 못해서라고 본다. 또 음식절제가 안되어서라고 본다. 이런 음식에는 먹는 것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승가에서 말하는 곡차를 말한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은어가 있다. 그것은 곡차이다. 그러나 불교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들은 녹차와 처럼 정신을 맑게 해주는 차의 종류인줄 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것이 곡차이다.

 

곡차는 불가에서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는 비밀에 속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비밀은 이제 일반국민들도 아는 것 같다.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곡차가 술을 뜻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인터넷국어사전에서도 곡차[穀茶,麯茶,曲茶]’ 에 대하여 승려들의 은어로, ‘술’을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 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로 보아 이제 곡차라는 말은 비밀도 아닌 술을 뜻하는 보통명사가 된 듯 하다.

 

술은 안되지만 곡차는 된다?

 

승가에서 스님들이 곡차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실이 작년 한겨레신문 기자에 의하여 세상에 폭로 되었다. 그래서 신문과 방송, 인터넷에서 회자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종단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술마시는 것은 그다지 큰 범계로 보는 것 같지 않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승가에 음주문화가 일반화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게송에서는 사소한 계율을 어기는 것부터 무너진다고 하였다. 이를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꺽어 버리듯(dhp7)”이라 하였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한국의 스님들은 바라이죄를 지어도 추방당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사실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님으로 꿋꿋하게 살아 가는 것을 보면 바람이 바위산을 무너뜨리지 못하듯(dhp8)” 이라는 구절이 연상된다. 이 모두가 곡차에서 시작 된 것은 아닐까? 한국불교에서 술은 안되지만 곡차는 허용되기 때문이다.

 

 

 

 

 

2014-03-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