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인간이 아무리 밉기로서니,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dhp5)”
하루 한게송 외우기
게송외우기를 하고 있다. 하루에 한 게송을 목표로 한다. 법구경을 외우기로 선언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실천이다.
법구경에서 “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방일하여 행하지 않는다면/ 소치기가 남의 소를 헤아리는 것과 같이/ 수행자의 삶을 성취하지 못하리. (dhp19)”라는 시가 있다. 여기서 ‘방일하여 행하지 않는다면’ 이라는 말이 ‘실천’과 관련이 있다. 경전을 외우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음을 말한다. 이를 ‘남의 소’를 세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마찬가지로 법구경의 아름다운 게송을 단지 책을 통해서 이해만 하고 그친다면 이 역시 ‘남의 소’를 세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외워서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 언제든지 책을 보지 않고도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내 소’를 세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게송외우기는 실천이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이다. 그리고 습관 들이기이다. 매일 하루 한게송 외운다고 하였을 때 단지 하루에 한게송 외우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법구경 1품인 ‘쌍의품’을 외운다고 하였을 때 모두 20개의 게송이므로 20개를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되새김질’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떻게 되새김 하는가?
되새김하며 외우기
되새김이란 소나 염소 같은 동물이 한 번 삼킨 먹이를 게워 내어 다시 씹는 것을 말한다. 옛날 농촌에 산 사람들이라면 소가 일없이 되새김질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렇게 게송외우기도 되새김질이 필요하다.
1번 게송을 다 외우고 2번 게송을 새로 외운다고 할 때, 2번 게송을 외우기에 앞서 이미 외운 1번 게송 부터 되새김 해야 한다. 또 5번 게송을 외울 때 이전의 외웠던 1번부터 4번 게송을 되새김질 한 다음 5번 외우기로 들어 가야 한다. 그래서 5번 게송을 다 외웠을 때 1번부터 5번까지 모두 다 외게 되는 것이다. 만일 5번 게송외울 때 이전 게송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이전 것을 모두 다 외기 전에는 5번 게송으로 진도가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벽돌쌓기식 외우기를 하여 마지막 20번 게송에 이르렀을 때 이전 게송을 되새김 하기 때문에 20번 게송을 외움과 동시에 전게송을 전부 다 외게 된다. 그때 “아, 다 외웠구나”라고 스스로 알게 된다. 또 “해냈다!”라고 마음속으로 외치게 된다. 외우고 못외우고는 본인 자신이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되새김의 장점은 이전에 외웠던 것을 잊어 버리지 않는 것이다. 만일 되새김질 없이 외운다면 이전 것은 잊어져 가면서 현재것만 외우는 식이 된다. 이렇게 해서는 20개의 게송을 모두 다 외울 수 없다. 그래서 20번째 게송을 외울 때는 이미 이전 것을 되새김하여 기억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20개의 게송을 모두 다 외우게 된다.
이전에 이런 돠새김방법으로 1300여자의 천수경, 32품 5249자의 금강경을 외웠다. 그리고 17게송의 라따나경, 10개송의 멧따경, 12개송의 망갈라경, 9개송의 자야망갈라가타, 수 페이지에 달하는 초전법륜경을 외웠다.
뜻을 알고 외우면
빠알리어로된 게송 외우기는 쉽지 않다. 한문으로 된 것은 그나마 뜻을 대충 알 수 있지만 빠알리어의 경우 생소하기 때문에 ‘생짜’로 외우는 수밖에 없다. 마치 익히거나 말리거나 삶지 않고 날 것 그대로 먹는 것과 같다. 이렇게 생짜배기로 외우다보니 기억해 내기 힘들다. 수십번을 반복하여 외우지만 몇 시간 후에는 잘 기억 나지 않는다. 다시 들여다 보고 또 외우기를 수차례 반복하다 보면 마침내 외워진다. 그러나 생짜로 외우는 것 보다 뜻을 알고 외우면 더 외우기 쉽다. 이렇게 뜻을 알고 외우고자 빠알리어 분석을 해 보았다.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법구경 3번과 4번게송 그리고 5번과 6번은 증오와 원한에 대한 것이다. 이처럼 성냄을 뿌리로 한 마음이 법구경 첫 부분에 언급되어 있다. 이는 성냄으로 인한 폐해에 대하여 알려 주기 위함이라 보여 진다. 먼저 3번과 4번 게송이다.
3.
“Akkocchi maṃ avadhi maṃ 악꼿치 망 아와디 망
ajini maṃ ahāsi me”, 아지니 망 아하시 메
Ye taṃ upanayhanti 예 땅 우빠나이한띠
veraṃ tesaṃ na sammati. 웨랑 떼상 나 삼마띠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나의 것을 약탈했다’라고
사람들이 이러한 적의를 품는다면
그들에게 원한은 사라지지 않는다. (dhp3)
4.
“Akkocchi maṃ avadhi maṃ 악꼿치 망 아와디 망
ajini maṃ ahāsi me”, 아지니 망 아하시 메
Ye taṃ na upanayhanti 예 땅 나 우빠나이한띠
veraṃ tesūpasammati. 웨랑 떼수빠삼마띠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나의 것을 약탈했다’라고
사람들이 이러한 적의를 품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원한은 사라진다. (dhp4)
3번과 4번이 같은 쌍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적의를 품는다면(dhp3)” “적의를 품지 않는다면(dhp4)” 식으로 되어 있다.
언어폭력과 신체폭력
3번 게송에서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Akkocchi maṃ avadhi maṃ)”라 되어 있다. 이는 언어폭력과 신체폭력에 대한 것이다. 오계중에서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에 해당된다. 신구의 삼업 중에 신체적으로 지은 악행에 대한 것이다.
‘욕하다’뜻의 빠알리가 Akkocchi이다. Akkocchi는 과거분사로서 ‘[aor. of akkosati] abused; reviled; scolded.。已臭骂’ 의 뜻이다. 욕설, 학대등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심한 모욕이나 수모를 당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학대받고 욕설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일어날까? 아마도 마음속으로부터 ‘증오’가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나를 때렸다고 한다면 또 어떤 생각이 들까?
때리다는 뜻의 빠알리어는 avadhi이다. Avadhi는 ‘[m.] boundary; limit, 边界,界限’라 되어 있다. 경계, 한계라는 뜻인데 ‘때리다’는 말과 맞지 않는다. 그런데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Avadhi는 ‘a + vadhati + I’로 구성되어 있다. vadhati 는 ‘vadh’를 뿌리로 하는데, vadh는 hiṁsa의 의미라 한다. 여기서 hiṁsa 는 ‘teasing; injury; hurting’의 뜻으로 폭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Avadhi는 신체적 폭력을 뜻하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누구든지 자신을 비난하면 싫어 한다. 더구나 조롱하거나 욕설을 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는 현실에서나 넷상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언어폭력을 가하는 것도 모자라 신체적 폭력까지 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Upanayhanti에 대하여
마음속에서 일어난 분노가 증오가 되고 원한으로 발전되어 폭발일보 직전까지 다다른다. 이때 부처님은 적의를 품지 말라고 하였다. 이때 적의라는 말이 upanayhanti이다. Upanayhanti는 ‘To tie or wrap up’이라 설명되어 있는데 이는 ‘묶는 것’을 말한다.
언어폭력과 신체폭력을 당한 것에 대하여 마음이 묶여 있는 것을 Upanayhanti라 한 것이다. 이를 전재성님은 ‘적의’라 번역하여 “사람들이 이러한 적의를 품는다면”이라 하였다. 그러나 직역한다면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에 묶여 있다면”이 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다른 번역자의 것을 보았다.
Ye taṃ upanayhanti(dhp3)
1) 사람들이 이러한 적의를 품는다면-(전재성님역)
2) という思いを抱く人には-(라는 생각으로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나까무라 하지메역)
3) 이러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법정스님역)
4) 快意從者-(한문)
5) for those who brood on this-(이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자는, 타닛사로 빅쿠)
괄호안의 번역은 편의상 번역해 놓은 것이다. 각 번역을 보면 대부분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당한 생각에 묶여 있다’라는 뜻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까무라 하지메는 ‘사로잡힌 사람’이라 하였고, 타닛사로 빅쿠는 ‘골똘히 생각하는 자’라 하여 비교적 원문에 가까운 번역을 하였다고 보여 진다.
증오와 원한의 대상 그 인간
나를 욕하고 때린 자를 생각하면 화가 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욱 더 화가 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반복적 원한’을 품는 것이라 하였다.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증오의 감정이 일어날 때 원한에 사무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의를 품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원한은 사라진다.”라 하였다. 이때 원한에 해당하는 단어가 ‘vera’이다. Vera는 ‘[nt.] enmity; hatred, 怨, 怨心, 怨恨, 敵意’의 뜻이다. 이는 적대감으로서 원한, 적의 등으로 번역 된다.
나를 욕하고 때린자에게 적대감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적대감을 없애는 것은 쉽지 않다. 나에게 언어적 신체적 타격을 가한 자를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남편의 학대에 못이겨 여성의 집으로 피신한 사람은 남편을 ‘그 인간’이라 부른다고 한다. 인간이라는 말이 증오와 원한의 대상으로서 사용된 것이다.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다음으로 5번과 6번 게송이다.
5.
Na hi verena verāni 나 히 웨레나 웨라니
sammantīdha kudācanaṃ, 삼만띠다 꾸다짜낭
Averena ca sammanti, 아웨레나 짜 삼만띠
esa dhammo sanantano. 에사 담모 사난따노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윔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
6.
Pare ca na vijānanti 빠레 짜 나 위자난띠
mayam-ettha yamāmase, 마얌 엣타 야마마세
Ye ca tattha vijānanti 예 짜 땃타 위자난띠
tato sammanti medhagā. 따또 삼만띠 메다가
‘우리가 여기서 자제해야 한다.’라고
다른 사람들은 자각하지 못하니
이러한 것을 자각하면
그 때문에 다툼이 그친다. (dhp6)
때때로 그 인간이 생각 날 때 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와 같은 반복적인 원한을 그칠 것을 말하였다. 그래서 5번 게송을 보면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Na hi verena verāni sammantīdha kudācanaṃ)”라 하였다. 여기서 sammantīdha는 앞 게송에서 sammatī가 있는데 이는 ‘ceases; is appeased, 静まる, 寂止す’로 ‘그치다’의 뜻이다. 따라서 kudācanaṃ은 ‘sometimes; at any time, 有时’의 뜻이다.
‘Na hi verena verāni sammantīdha kudācanaṃ’에 대하여 현대적으로 해석해 보면 “때때로 그 인간이 생각 날 때 마다 원한에 사무쳐 화가 치민다고 하여 그인간이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구절에 대한 다른 번역자의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Na hi verena verāni sammantīdha kudācanaṃ(dhp5)
1)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전재성님역)
2)実にこの世においては、怨みに報いるに怨みを以てしたならば
-(실로 이세상에서는 원망을 갚으려고 원망으로써 하려 한다면, -나까무라 하지메역)
3)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에 위해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법정스님역)
4) 不可怨以怨 終以得休息-(한역)
5) Hostilities aren't stilled through hostility regardless -(적개심과 상관없이 적개심은 여전히 남아 있다. -타닛사로 빅쿠역)
괄호안의 번역은 편의상 번역해 놓은 것이다. 빠알리 원문에 세상을 뜻하는 말은 없지만 전재성님이과 나까무라하지메, 그리고 법정스님역에는 공통적으로 ‘세상’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이 게송의 요지는 적개심은 적개심을 일으킨다고 해서 그 적개심이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적개심을 내면 낼수록 적개심은 더욱 더 강화 되어 마음속에 더욱 더 견고 하게 자리 잡게 됨을 말한다.
그 인간이 아무리 밉기로서니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마음속에서 일아나는 적개심을 없앨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원한의 여윔으로 그치나니 (Averena ca sammanti)”라 하였다. 여기서 Averena는 Avera + ena 로서, 이때 Avera 는‘friendly. (nt.) kindness, 無怨(恨)的’의 뜻이다. 원한을 뜻하는vera에 부정을 뜻하는 a가 붙어 Avera는 무원(無怨)이 된다. 그래서 증오나 원한과는 정반대로 우호적이고 친절한 뜻이 된다.
이렇게 극적인 반전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마음속에서 일아나는 원한을 그만 두는 것이라 하였다. 이 ‘그만 두다’라는 말이 sammanti이다. 이는 sammati + anti로서 sammati에 대한 것을 보면 ‘ceases, 静まる, 寂止す, 休息す, 住む’의 뜻이다. 따라서 ‘Averena ca sammanti’는 “원한없음에 머문다”라 볼 수 있다. 더 이상 증오의 감정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 인간이 아무리 밉기로서니 그 인간의 좋은 면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입가에 ‘미소’를 지을 지 모른다. 이렇게 안좋았던 일 보다 좋았던 일을 떠 오르게 하였을 때 극적인 분위기 반전이 일어나 연민과 자애의 마음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이처럼 원한의 여읨으로 그치는 것에 대하여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 (esa dhammo sanantano)”라 하였다.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한번 바꿈으로써’ 실현 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원한은 원한의 여윔으로써 실현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모든 부처님, 연기법을 깨달은 님, 거룩한 님이 걸었던 길이다.(DhpA.I.51)”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dhamma)라는 것이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한다. 과거부처님, 연각승, 성문제자들이 모두 연기법으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빠알리원문과 동떨진 의역
dhp6은 ‘다툼 (medhagā)’ 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한 인연담에는 ‘꼬삼비비구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논쟁과 같은 다툼을 멈출 수 있을까?
게송에서는 “우리가 여기서 자제해야 한다 (mayam-ettha yamāmase)”라 되어 있다. 그러나 빠알리 원문을 보면 번역의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 구절에 대한 다른 번역자의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mayam-ettha yamāmase(dhp6)
1) “우리가 여기서 자제해야 한다.” –(전잭성님역)
2) “われらは、ここにあって死ぬはずのものである” – (우리는 여기서 죽어야 하는 것이다. –나까무라하지메역)
3)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언젠가 죽어야 할 존재” – (법정스님역)
4) 務自省身-(한역)
4) “we're here on the verge of perishing” –(우리는 여기 고통을 초래하는 가장자리에 있다, -타닛사로빅쿠역)
Mayam은 인칭대명사로서 ‘we’의 뜻이다. 그래서 공통적으로 ‘우리는’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yamāmase는 죽음과 관련이 있다.
Yamāmase는 ‘yamā + āmase’로서, Yamā는 ‘the ruler of the kingdom of the dead’의 뜻으로 ‘죽음의 왕’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āmase는 ‘āmasi + e’로서, āmasi는 ‘touched; pated; rubbed’의 뜻이다. 그래서 yamāmase는 ‘죽음의 왕이 강탈해 가다’의 뜻이 된다. 전체문장 mayam-ettha yamāmase를 직역한다면 “우리를 죽음의 왕이 강탈해간다”라는 뜻이 된다.
mayam-ettha yamāmase의 의미 1,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mayam-ettha yamāmase구절에 대하여 두 가지 뜻이 있다고 본다. 첫번째는 우리모두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말한다. 그래서 나까무라하지메는 “우리는 여기서 죽어야 하는 것이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고, 법정스님 역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언젠가 죽어야 할 존재”라 하였다. 그러나 타닛사로 빅쿠는 “우리는 여기 고통을 초래하는 가장자리에 있다”라 하여 의역하였다.
이구문과 관련하여 전재성님은 “우리가 여기서 자제해야 한다”라고 하여 빠알리원문과 동떨어지게 의역하였다. 그러나 각주에서는 '우리는 사라진다. 우리는 괴멸한다. 즉, 항상 틀림없이 죽음에 다가선다.'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언젠가 죽는다. 그 죽음이 내일이 될지 1년후가 될지 10년후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모두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마치 한여름밤에 “웽~”하고 날아다니는 모기가 “딱” 하고 맞았을 때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누구나 죽는 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적개심이나 증오, 원한의 감정이 부질없다는 것이다.
mayam-ettha yamāmase의 의미 2, 악처로 이끄는 반복적 원한
두번째는 반복적인 원한을 품으면 악처에 떨어짐을 말한다. 이는 야마라는 말이 죽음의 대왕이라는 말도 되지만 그곳이 바로 지옥과 같은 악처임을 뜻한다. 증오의 감정을 품는 것 자체가 해로운 마음으로서 이 해로운 마음을 대상으로 재생의 마음이 일어나 악처에 떨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또 원한에 사무치면 우발적이든 의도적이든 악업을 저지를 수 있다. 이는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의 특징이다. 아미담마에 따르면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은 두 가지가 있다.
1) 불만족이 함께 하고, 적의와 결합되고 자극없는 마음 하나
2) 불만족이 함께 하고, 적의와 결합되고 자극있는 마음 하나
여기서 불만족(domanassa)은 성냄에 뿌리박은 정신적인 느낌에 대한 것이다. 또 적의(patigha)는 불만족한 느낌을 바탕으로 하여 적대감이나 악의, 그리고 짜증내는 마음으로 스펙트럼이 넓다. 이런 적의가 반복되면 원한(vera)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법구경에서는 주로 vera(원한)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 마음에서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자극과 관련된 것이다. 자극 없는 마음에 대해서는 우발적 살인으로 설명되고, 자극있는 마음은 계획적인 살인으로 설명된다. 중요한 사실은 반복적인 원한은 끔찍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mayam-ettha yamāmase라 하여 “우리는 죽음의 왕이 강탈해간다”뜻이 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악처에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6번 게송 mayam-ettha yamāmase구절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우리모두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에 부질없는 원한의 마음을 그치자는 것이다. 두번째로 반복적인 원한은 악처로 이끌기 때문에 여기서 그치자는 것이다.
대통령이 격노했다는데
네 개의 게송을 보면 공통적으로 빠알리어 ‘웨라(vera)’에 대한 것이다. 이는 적개심이나 증오 또는 원한으로 번역된다. 마음속에서 문듣문득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 표출되는 성냄과는 다르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일으킨다면 에스컬레이트(상승)되어 어떻게 발전 될지 모른다. 분노가 상승되면 어떤 결과를 일으킬까?
종종신문에서 ‘대통령이 격노했다’라는 표현을 본다. 무언가 심사가 뒤틀려 성냄으로 표출 된 것이다. 그런데 보통사람도 아니고 일국의 운명을 쥐고 있는 최고통치자가 분노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보통사람이 분노하면 “그인간”에 대한 것으로 그칠지 모른다. 그럼에도 적개심이 반복되면 어떤 일을 저지를 지 모른다. 만약 회사사장이 분노 했다면 어떻게 될까? 회사에 대하여 자신의 왕국으로 생각하는 회사의 사장이 격노하였다면 회사직원들은 ‘안절부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일국의 통치자가 분노하면 어떻게 될까?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 통치자의 격노로 인하여 전쟁이 발발하였다면 수 많은 인명이 희생 되고 그 동안 이루어 왔던 것은 쑥대밭이 되고 말 것이다.
분노가 일어나면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다. 대화를 하다 화를 낸 사람이 문을 박차고 나가는 장면을 본다. 이제까지 맺어 왔던 인관관계마져 파괴 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거래선이 있는데 자꾸 짜증나게 한다고 하여 화를 벌컥 낸다면 어떻게 될까? 그 길로 다시는 주문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한번 화를 내면 이제까지 지은 공덕이 모두 파괴된다. 그런데 국가를 통치하는 자가 격노한다면 어떻게 될까? 부시가 격노하여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다. 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시설은 초토화 되었다. 이렇게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다. 전쟁이 일어난 요인이 여럿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에 통치자의 분노도 한몫 했을 것이다.
따귀치기놀이
반복적인 원한은 증오를 키운다. 그리고 증오는 증오를 먹고 자란다. 이전에 올린 ‘베트남참전기념탑을 바라보며’라는 글에서 어느 남쪽베트남 장교는 “증오심 없이는 싸울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마치 ‘따귀치기놀이’와 같은 것이다.
따귀치기놀이는 처음에는 재미로 할지모른다. 그러나 반복되면 증오가 생겨나 살인으로 발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동료가 죽어 나갈 때 증오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무자비하게 보복을 한다. 그래서 증오심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을 것이라 하였을 것이다.
증오가 증오를 낳고 반복적인 원한은 결국 악처에 떨어지게 말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개송에서는 “mayam-ettha yamāmase(우리는 죽음의 왕이 강탈해간다)”라 하였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지금 여기서 멈출 것이다. 그래서 “Averena ca sammanti(원한의 여읨으로 그친다)”라 하였다.
“이것이 오래된 진리이다.(esa dhammo sanantano)”
지금 그 인간만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데 게송에서는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윔으로 그치나니”라 하였다. 사실 이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것이 오래된 진리 (esa dhammo sanantano)”라 하였다. 이처럼 싱거워 보이고 밋밋해 보이는 말이 어떻게 진리가 될 수 있을까?
부처님이 진리라고 한 것에 대하여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진리는 다름 아닌 ‘연기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기법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 지금 반복적인 원한으로 악업을 짓게 되면 어떻게 될까? 틀림 없이 악처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마음을 180도 돌려서 더 이상 원한의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틀림 없이 선처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을 아는 것이다. 과거의 부처님들도, 연각승도, 부처님의 성스런제자들도 모두 이 연기법으로 깨달았다가. 그래서 게송에서 “이것이 오래된 진리이다.(esa dhammo sanantano, dhp5)”라 한 것이다.
2014-03-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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