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꼬리붙잡고 늘어지기 사례 두 가지, 삽베(sabbe, 일체)와 앗따(atta, 자아)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때
글쓰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었다. 아침에 일찍 출근하여 가장 먼저 블로그의 관리자 모드에 들어가 통계자료를 확인 한다. 그리고 올려진 댓글을 본다. 다양한 견해의 댓글이 올라 오지만 ‘즉답’을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따로 메모해 놓고 숙고의 기간을 갖는다.
그 다음에 MS WORD를 띄어 놓고 하얀 여백과 마주 한다. 이때 폰트는 바탕체로 하고 사이즈는 12로 세팅해 놓는다. 이렇게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자판을 때린다. 서두를 어떻게 풀어 가느냐에 따라 그 날의 글이 술술풀리기도 하고 꽉 막히기도 한다. 그러나 서설이 너무 길면 지루하므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해야 한다.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는데
경전을 근거로 한 글을 올리면서 종종 지적을 받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와 ‘모든’에 대한 것이다. 왜 ‘나’와 ‘모든’인가? 그것은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글에서 나라고 표현 하였을 때 어떤 이는 ‘아뜨만식 자아가 아니냐?’고 비판한다. 또 어떤 이는 ‘모든’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다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그렇다고 하여 글을 쓸 때마다 ‘여기서 나는 오온으로서 나이다’ 라든가, ‘여기서 모두 다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해야 할까?
글을 쓸 때마다 ‘나’와 ‘모든’에 대하여 일일이 해명하고 규정하고 선언하는 일은 귀찮고 피곤한 일이다. 그리고 글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다. 만일 누군가 경전에 쓰여 있는 ‘나’라는 것에 대하여 시비를 건다면 나에 대한 해명을 일일이 했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초전법륜경에서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akuppā me cetovimutti, S56.11)”라는 부처님의 아라한선언이 있다. 이때 나를 뜻하는 ‘메(me)’에 대하여 ‘이는 자아로서의 나가 아니라 오온으로서 나이다’라고 문구마다 일일이 선언해야 한다는 것은 문장의 흐름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귀찮은 일이 된다.
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Evaṃ me sutaṃ)”라 하였을 때 메(me)에 대하여 누군가 ‘불교에서는 오온을 말하는데 왜 아뜨만을 뜻하는 나로 표현하였는가?’라고 시비건다면 이에 대하여 일일이 대꾸한다는 것도 역시 번거로운 일이 된다.
이처럼 글을 쓸 때 ‘나’와 ‘모든’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이들이 종종있다. 먼저 ‘모든’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삽베(sabbe)에 대하여
글을 쓸 때 ‘모두’ 또는 ‘다’라는 말을 사용하였다면 누군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할 것이다. 누군가 “스님들이 고액의 도박을 하고 밤샘술판을 벌였다”고 하였을 때 또 누군가는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누군가 ‘그 지역 사람들은 다 사기꾼이다’라 하였을 때 누군가는 ‘다 그런 것은 아니다’라 반박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유행가 중에 ‘남자는 다 그래’라 하였을 때 누군가 ‘남자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all)’에 대하여 경전에서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Sabbe tasanti daṇḍassa,
sabbe bhāyanti Maccuno,
Attānaṃ upamaṃ katvā,
na haneyya na ghātaye.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939)
그들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 (Dhp129,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모든’을 뜻하는 말이 ‘어느 누구나’와 ‘모든 존재들’이다. 이 ‘누구나’와 ‘모든’에 대한 빠알리어가 ‘삽베(Sabbe)’이다. 이때 Sabbe 의 뜻은 빠알리서전 PCED194에 따르면 ‘sabba의m. pl. nom. Acc’로 되어 있다. 이는 ‘남성명사, 복수, 명사, 대격(목적격)’의 뜻이다.
사전에서 sabba는 ‘[adj.] all; every; whole; entire, 形】 所有的,每一的,全部的’의 뜻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sabba는 말은 전체, 전부 등으로 표현 되어서 문자적으로 예외가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누구나 폭력을 두려워 하거나 모든존재들이 죽음을 두렵다고 볼 수 있을까?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
게송에서는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고 하였다. 또 ‘모든 존재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문구만 놓고 본다면 누구 하나 예외 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 마찬가지로 폭력과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누구일까? 각주에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939) sabbe bhāyanti Maccuno :
DhpA.III.49에 따르면, 모든 존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 여기서 어법은 예외가 없음을 인정하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모두 모여라.’라고 북소리로 집합을 알리면, 왕자들과 대신들을 빼놓고는 모두 모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두가 폭력과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더라도, 다음의 네 가지 즉, 혈통이 좋은 말, 혈통이 좋은 코끼리, 혈통이 좋은 황소, 거룩한 님은 예외로 하고, 모두가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거룩한님[아라한]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그에게는 자아에 대한 실체적 관념이 사라져서 죽어야 하는 존재를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혈통이 좋은 존재들은 자아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해서 그들 자신에게 적대할 존재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
(939번 각주, 전재성님)
군대에서 ‘집합’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 “모두 집합해!”라고 말하였을 때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집합을 명령한 사람 보다 더 높은 사람도 집합대상에 포함될까?
누군가 “모두 집합해!”라고 하였지만 예외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게송에서”모두가 폭력과 죽음을 두려워한다.”라 하였을 때 이는 문자적인 선언일 수 있다는 말이다.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자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폭력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을리 없다. 따라서 모든 또는 모두라 하였을 때 이는 어법상에 해당됨을 말한다.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글이나 말에서 모두, 전체, 일체, 전부라고 표현 되어 있지만 이는 어법상이고 실제로는 예외가 있음을 말한다. 누군가 ‘그 학교는 깡패학교다’라 하였을 때 이는 어법상일 뿐 전체학생이 깡패라는 것은 아니다. 또 ‘스님들이 도박을 하였다’라고 하였을 때 모든 스님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스님들이나 학자들의 글보기가 가뭄에 콩나듯 하다.”라고 글을 썼을 때 이에 대하여 “다 그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이는 어법상에 불과한 것에 대하여 시비 거는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라는 말은 어법상 예외가 없음을 말한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폭력을 무서워 하지 않는 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시비를 예상하여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라고 가정법을 사용하여,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문구를 추가하여 일종의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글을 쓰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다음으로 자아에 대한 것이다.
앗따(atta)에 대하여
초기불교에서 나를 뜻하는 자아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초기경전을 보면 종종 나에 대한 표현이 등장한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Evaṃ me sutaṃ)”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또 부처님은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Attadīpā attasaraṇā, S22.43)” 라 하였다.
여기서 자신에 대한 빠알리어가 atta이다. 이 atta에 대한 빠알리사전을 보면 'self, ego, personality,soul; oneself, 我’로 표현 되어 있다. 자기, 에고, 성격, 영혼, 자기자신의 뜻이다. 이렇게 앗따(atta)로 표현된 문구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자들이 있다. 불교는 무아의 종교이고 자아는 오온에 대한 것이라고 아는 자들이다.
마치 하룻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른다고 교리에 대하여 맛을 본 자가 앗따라고 표현된 문구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 들어간 문장은 틀렸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건다면 경전 자체가 성립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초기경전을 보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Evaṃ me sutaṃ)”라든가 “자신을 섬으로 하고(attadīpā)”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빠알리사전에서는 atta에 대하여 ‘self, ego’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문장으로 부연 설명해 놓았다.
Atta :
self, ego, personality, is in Buddhism a mere conventional expression (voh±radesan±), and no designation for anything really existing
(빠알리사전 PCED194)
빠알리서전에 따르면, 불교에서는 ‘자기자신, 자아, 성격’이라고 번역된 앗따(atta)에 대하여 단지 관습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부처님이 나 또는 자신이라 말한 것은 진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지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
빠알리사전에서 정의된 앗따(atta)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아라한따경(S1.25)이 바로 그것이다. 경에서는 하늘사람이 “나는 말한다(Ahaṃ vadā)”고 라고 아라한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번뇌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자아관념이 남아 있을 리 없건만 대화하는 것을 들으니 ‘나 (Ahaṃ)’라는 주어를 넣어 말을 한다는 것이다. 마치 오온에 대하여 막 알기 시작한 자가 ‘나’라는 말이 들어간 글을 보고서 시비를 거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o hoti bhikkhu arahaṃ katāvī
Khīṇāsavo antimadehadhārī,
Ahaṃ vadāmītipi so vadeyya
Mamaṃ vadantītipi so vadeyya
Loke samaññaṃ kusalo viditvā,
Vohāramattena so vohareyyāti.
[세존]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거룩한 수행승이
‘나는 말한다.’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고 하여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 (S1.25)
부처님은 나라는 표현에 대하여 세상에서 통용되는 말이고 관습적으로 부르는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지는 자만(māna)
이렇게 부처님이 설명해 주었음에도 하늘사람은 시비를 계속 건다. 그래서 번뇌 다한 아라한이 ‘나는 말한다’라고 세상에서 통용되는 나를 붙여 말하는 것에 대하여 ‘망상(Māna)’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런 것 아닌가 하고 의구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망상이라 한 것은 ‘마나’를 말한다.
마나는 ‘conceit, pride’의 뜻으로 우리말로 ‘자만’ 또는 ‘아만’으로 번역된다. 중생을 윤회하게 하는 열 가지 장애(samyojana, 족쇄)가 있는데 마나는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만약 아라한에게 “내가 아라한인데”라는 자만이 남아 있다면 결코 그를 번뇌 다한 자라 볼 수 없다.
그런데 하늘사람은 아라한들이 “나는 말한다”라고 말한 것을 듣고서 아라한에게 아직도 ‘마나’가 남아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아라한에게 망상(마나)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냐?’고 거듭 시비를 건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설명한다.
Pahīṇamānassa na santi ganthā
Vidhūpitā mānaganthassa sabbe,
So vītivatto maññanaṃ sumedho
Ahaṃ vadāmītipi so vadeyya
Mamaṃ vadantītipi so vadeyya,
Loke samaññaṃ kusalo viditvā
Vohāramattena so vohareyyā'ti.
[세존]
“망상을 버린 자에게 속박이 없으니
망상의 모든 속박은 남김없이 부서졌네.
개념지어진 것을 넘어서는 현자는,
‘나는 말한다.’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해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 (S1.25)
부처님은 먼저 아라한에 대하여 자만이 부서진 자라고 선언하였다. 중생을 윤회하게 하는 열 가지 장애 중에서 아라한이 되어야 소멸되는 것이 자만이다. 이렇게 자만이 소멸된 자에게 있어서 ‘내가 말한다’라고 하였을 때 이는 “내가 아라한인데”라는 프라이드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번뇌 다한 자가 ‘나는 말한다’하였을 때, 이 때 나라는 것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관습적인 명칭에 불과 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말꼬리붙잡고 늘어지기
글을 쓸 때 ‘가정법’이나 ‘예외조항’을 언급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이라든가, ‘일부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모두 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비판이나 비난을 두려워 하여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는 것이나 다름 없다. 법구경에서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dhp129)”라고 되어 있는데,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하기 위하여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폭력을 두려워한다.”라고 표현한다면 속된말로 멋대가리 없는 말이 되어 게송으로서 가치가 없게 된다.
또 ‘내가 말한다’등과 같이 나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하여, 무아의 종교인 불교에서 아뜨만식 표현을 한다고 비난하는 자들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여기서 말하는 나는 오온으로서 나를 말한다’라고 부연설명한다면 이 또한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는 것이나 다름 없다. 예를 들어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오온으로서 나를 말한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멋대가리 없는 문장이 될까.
초기불교에서 마음이라 하였을 때 이는 조건지어진 마음을 뜻한다. 또 식이 윤회한다고 하였을 때 이는 조건되어진 식이 윤회함을 뜻한다.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할 때 식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재생연결식임을 말한다. 마찬가지로‘일체(sabbe)’ 또는 ‘자아(atta)’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하여 부연설명하거나 별도로 선언하는 것은 문장의 흐름에 큰 방해가 된다.
이처럼 ‘삽베(모든 것)’ 와 ‘앗따(나)’라는 말이 단지 세상에서 통용되는 말이고 관습적인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시비를 거는 자가 있다면 이는 말꼬리붙잡고 늘어지기식이라 볼 수 있다.
2014-03-1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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