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유식과 여래장사상의 원류, 법구경 수레의 비유(dhp1)와 그림자 비유(dhp2)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8. 19:17

 

유식과 여래장사상의 원류, 법구경 수레의 비유(dhp1)와 그림자 비유(dhp2) 

 

 

 

니까야 제1장 제1절은?

 

빠알리니까야라 하면 일반적으로 사부(四部)니까야를 말한다. 일차결집후 송출된 순서에 따르면 디가니까야, 맛지마니까야, 상윳따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이다. 이 사부니까야외 쿳다까니까야를 하나 더 추가하여 오부(五部)니까야라 한다.

 

쿳다까니까야에서 대표적인 경전을 들라면 숫따니빠따와 담마빠다(법구경)을 들 수 있다. 그래서 불자들에게 사부니까야와 숫따니빠따와 담마빠다는 매우 익숙하다. 그렇다면 이들 니까야에서 제1장 제1절이라고 볼 수 있는 경은 어떤  어떤 것일까?

 

웅대한 구성 철학적 내용

 

디가니까야에서 가장 처음에 나오는 경은 브라흐마잘라경(D1)’이다. ‘하느님의 그믈의 경이라 번역되어 있다. 긴길이의 경을 특징으로 하는 디가니까야에서 이 경은 62가지 사견(邪見)에 대한 것이지만 일부 사견에 대한 설명을 보면 우주적 스케일이다. 부분적 영원주의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언제 어느 땐가 오랜 세월이 지나가면, 세계가 생성되는 때가 있다. 세계가 생성될 때에 텅 빈 하느님의 궁전이 나타난다. 그 때 어떤 뭇삶이 수명이 다하고 공덕이 다하여 빛이 흐르는 하느님의 세계에서 죽어서 텅 빈 하느님의 궁전에 태어난다. (D1)

 

 

마치 유일신교의 창세기를 보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디가니까는 웅대하고 철학적 내용으로 구성된 긴 길이의 경이다. 이처럼 소설적 구성되어 있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홍보 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한다.

 

 심오하고 깊이 있는 가르침

 

맛지마니까에서 첫번째로 등장하는 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뮬라빠리야야경(M1)’이라 하여 우리말로 ‘근본법문의 경’이라 번역 되어 있다. 이처럼 교학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은 맛지마 니까야의 특징이다. 그 중 한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보여진 것을 보여진 것으로 여기고 보여진 것을 보여진 것으로 여기고 나서, 보여진 것을 생각하고 보여진 것 가운데 생각하고 보여진 것으로부터 생각하며 ‘보여진 것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보여진 것에 대하여 즐거워 한다. (M1)

 

 

인식작용에 대한 것이다. 사물을 보았을 때, 소리를 들었을 때 등 다섯가지 감각기관이 다섯가지 감각대상과 부딫쳤을 때 인식과정이다. 이처럼 첫번째 경에서부터 사유를 요하고 있는데 이는 맛지마니까야가 수행을 위한 가장 심오하고 깊이 있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힘들이지 않고 윤회의 바다를 

 

사부니까야 중에서 가장 방대한 상윳따니까야에서 처음 등장하는 경은 어떤 것일까? 모두 56개의 주제로 이루어진 모음 가운데 제1장 제1절이라고 볼 수 있는 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흐름을 건넜습니다. 벗이여,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흐름을 건넜던 것입니다.”(S1.1)

 

 

게송에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흐름을 건넜다”라 하였다. 여기서 거센흐름은 ‘윤회’를 뜻한다. 또 ‘머물고 애쓴다’는 것은 ‘잘못 인도된 의지와 노력은 운명적 파탄을 초래함’을 뜻한다. 따라서 올바른 수행을 통해서 힘들이지 않고 윤회의 바다를 건널 수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상윳따니까야는 힘들지 않게 괴로움과 윤회의 바다를 건널 수 있게 해주는 가이드라 볼 수 있다.

 

재가자에 적합한 

 

앙굿따라니까야는 일반적으로 재가자를 위한 설법이 많은 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앙굿따라니까의  제1장  제1절에 해당되는 경은 어떤 것일까?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여자의 형상처럼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다른 하나의 형상을 보지 못했다. (A1.1)

 

 

앙굿따라니까야를 열면 첫 스타트는 여자 이야기부터 시작 된다. 경에서 부처님은 “여자의 형상은 남자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A1.1)”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책의 발간사에서 최훈동 교수는 “앙굿따라니까야는 놀랍게도 남녀 간의 문제를 제일 먼저 다룹니다”라고 하면서 이는 극복하기 어려운 성욕에 대한 성찰이라 하였다. 또 마등가라는 여인이 나오는 능엄경이 이 앙굿따라니까야를 모티브로 한 것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이렇게 1장1절에서부터 여인이 등장하는 앙굿따라니까야는 기본적인 윤리, 수행, 바른 지혜를 강조 하고 있어서 재가자에 적합한 경전이라 알려져 있다.

 

단순하고 소박한 기르침

 

이처럼 사부니까야의 제1장 또는 제1장 제1절에 해당되는 경은 해당경전의 성격을 어느 정도 규정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첫번째 경의 내용만 보아도 어떤 내용이 전개 될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쿳다까니까야의 대표주자인 숫따니빠따와 법구경에서 제1장제1절에 해당되는 것은 어떤 내용일까?

 

일반적으로 숫따니빠따가 가장 고층적인 경전이라 한다. 이는 부처님 제세시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특히 교단이 성립 되기 이전에 대한 이야기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하고 소박한 기르침으로 돠어 있다.  또 고독한 수행자나 은둔자로서 내용도 보인다. 제1장 제1절에 해당되는 첫번째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뱀의 독이 퍼질 때에 약초로 다스리듯,

이미 생겨난 분노를 극복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stn1)

 

 

게송에서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유신견 등 다섯 가지 낮은 장애(오하분결)를 버리는 것을 말하고, 저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마음의 분노등 다섯 가지 높은 장애(오상분결)를 버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욕계, 색계, 무색계 어느 세계도 바라지 않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기조는 숫따니빠따 전반에서 유지 되고 있다.

 

단어 하나 하나에 심오한 의미가

 

법구경은 모두 423개의 게송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오부니까야에서 볼 수 있는 게송과 중복된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선별하여 놓은 것처럼 보인다. 비록 네 개의 구절로 된 짤막한 게송으로 되어 있지만 긴길이의 산문이 압축되어 표현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단어 하나 하나에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법구경의 제1장 제1절에 해당되는 게송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심오한 내용이다.

 

 

Manopubbagamā dhammā,           마노뿝방가마 담마

manoseṭṭhā manomayā,              마노셋타 마노마야
Manas
ā ce paduṭṭhena              마나사 쩨 빠둣테나

bhāsati vā karoti vā,            바사띠 와 까로띠 와
Tato na
dukkham-anveti         따또 낭 둑캉 안웨띠

cakka va vahato pada.         짝깡와 와하또 빠당

 

정신이(*435) 사실들의(*436) 선구이고

정신이 그것들의 최상이고(*438) 그것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439)이니

만약에 사람이 오염된 정신(*440)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르리.

수레바뀌가 황소의 발굽을(*443) 따르듯. (dhp1)

 

 

Manopubbagamā dhammā,           마노뿝방가마 담마

manoseṭṭhā manomayā,              마노셋타 마노마야
Manas
ā ce pasannena              마나사 쩨 빠산네나

bhāsati vā karoti vā,            바사띠 와 까로띠 와
Tato na
sukham-anveti          따또 낭 수캉 안웨띠

chāyā va anapāyinī.              차야 와 아나빠이니

 

정신이(*445) 사실들의 선구이고

정신이 그것들의 최상이고 그것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만약에 사람이 깨끗한 정신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르리.

그림자가 자신을 떠나지 않(*453). (dhp2)

 

 

첫번째 게송을 보면 다른 게송과 달리 여섯 구절로 되어 있다. 네 개의 구절은 가르침에 대한 설명이고 두 개의 구절은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는 이후에 전개 되는 게송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전재성님의 담마파다-법구경에서는 단어에 대한 해석이 상세하게 되어 있다. 이는 붓다고사의 법구의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단어 하나에도 그 심오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각주에서는 주석을 근거로 하여 매우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법구경 1번과 2번 게송에 대하여 분석하여 보았다.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

 

법구경 1번 게송은 2번 게송과 쌍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쌍으로 된 게송을 묶어 놓은 것이 쌍의 품(Yamakavagga)’이다. 1번과 2번 게송은 악행과 선행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정신이 사실들의 선구이고 (Manopubbagamā dhammā)”라 하였을 때 정신(mano)’에 대한 해석이 악행일때와 선행일 때 다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435) mano:

 

DhpA.I.21에 따르면, 정신은 네 가지 수준에서 언급된 것이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과 미세한 물질계의 마음과 비물질계의 마음이다. 그리고 치유자에게서 일아나는 마음과 관련하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 가운데 특화 되고 한정지어진 정신으로 불만에 수반되는 적대성과 연결된 마음을 말한다.

 

(435번 각주, 전재성님)

 

 

마음에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마음 이렇게 세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마음이 있어야 세상도 있기 때문에 어느 존재로 태어나든지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1번 게송에서의 마음은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 즉 불선한 마음에 대한 것이다. 이는 2번 게송에서의 마노(마음)와 대비된다.

 

착하고 건전한 마음

 

2번 게송의 마노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445) mano:

 

DhpA.I.35에 따르면, 정신은 네 가지 수준에서 언급된 것이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착하고 건전한 마음과 미세한 물질계의 마음과 비물질계의 마음이다. 그리고 치유자에게서 일아나는 마음과 관련하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착하고 건전한 마음 가운데 특화 되고 한정지어진 것으로서의 정신으로 특별히 만족에 수반되는 지혜와 연결된 마음을 말한다.

 

(445번 각주, 전재성님)

 

 

2번 게송에서의 마노는 착하고 건전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지혜가 수반하는 마음이라 하였다.

 

이렇게 1번 게송에서의 마음은 악하고 불건전한 ‘악한 마음’이고, 2번 게송은 착하고 건전한 ‘지혜로운 마음’이다. 이처럼 대조적인 마음일 때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담마의 네 가지 의미

 

게송에서 공통적으로 사실로 번역된 담마(dhammā)’가 언급되어 있다. 한자어로 으로 번역된 담마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각주에서는 주석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436) dhammā :

 

DhpA.I.35에 따르면, 이 법구경에서의 담마는 네 가지 용법이 있다.

 

1) 덕성으로서의 담마(guadhammā) :

 

여기에 담마는 덕성을 의미하지만, 아담마(dhammā, 非法)는 그 반대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근심으로 이끄는 것을 말하고, 담마는 안락으로 이끈다.

 

2) 가르침으로서의 담마(desanādhammā) :

 

부처님께서 설한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말한다.

 

3) 경전구절로서의 담마(pariyattidhammā) :

 

부처님께서 설한 법문(sutta)이나 게송(geyya)을 제자가 공부의 대상으로 삼은 것을 말한다.

 

4) 물질적 질료나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닌 것으로서의 담마(nissattanijjivadhammā) :

 

여기에서는 비물질적인 존재의 다발[, khandha]이 있다. , 느낌(Vedanā), 지각(Saññā), 형성(Sakhārā)이 있다.

 

(436번 각주, 전재성님)

 

 

일반적으로 법이라 불리우는 담마에는 네 가지 구분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중에서 네 번째 항목이 1번과 2번 게송에서 말하는 사실(담마)에 해당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느낌이나 지각, 형성에 대하여 ‘쩨따시까’라 한다. 이를 ‘마음부수’ 또는 ‘심소’라 하는데 전재성님은 ‘정신적 사실’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게송에서는 “Manopubbagamā dhammā”라 하여 왜 마음이 앞서 가고 마음부수가 뒤따라 간다고 하였을까?

 

왜 마음이 앞서가는가?

 

 “Manopubbagamā dhammā”에서 pubbagamā는 ‘going at the head; preceding’의 뜻이다. 그래서 ‘마노가 담마를 이끈다’라는 뜻이 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마음이 먼저이고 마음의 작용이라 볼 수 있는 느낌, 지각, 형성등이 뒤따라 간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왕(마음)이 앞서 가면 대신(쩨따시까)들이 뒤따라 가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길게 설명하였다.

 

 

즉, 느낌(Vedanā), 지각(Saññā), 형성(Sakhārā)이 있다. 이러한 것들을 아비달마에서는 정신적 사실, 즉 심소라 한다. 이러한 존재의 다발들은 정신을 선구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 즉, 의식이 느낌이나 지각이나 형성에 앞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신과 정신적 사실들은 동일한 토대와 동일한 대상을 가지고 선후가 없이 동시에 나타나는데, 어떻게 정신이 정신적 사실들을 앞서가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생성조건이라는 측면에서 답변이 주어질 수 있다.

 

여러 사람이 마을에서 함께 폭력사태를 일으킨 경우를 예로 들면, 그 가운데 그러한 행위의 원인이 된 자, 그 때문에 그러한 행위를 하게 만든 자가 선구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은 생성조건으로서 그러한 정신적 사실들에 앞서간다.

 

정신[의식: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정신적 사실들[심소: 느낌, 지각, 형성]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적 사실들이 일어나지 않아도 정신은 깨어 있을 수 있다.

 

(436번 각주, 전재성님)

 

 

색수상행식 오온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에 대하여 어느 스님은 순차적으로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 꽃(색)을 보면 아름답다고 느끼고(수), 그 꽃이 장미꽃인지 국화꽃인지의 판별작업에 들어가고(상), 그 꽃을 꺽고 싶다는 마음이 들고(행), 그 꽃이 마음에 든다고 해서 기억에 저장(식) 하는 식의 순서적인 인식과정 이다.

 

그러나 오온은 동시발생적으로 본다. 이는 각주에서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같은 토대를 갖기 때문이다. 마음은 심장을 토대로 하고 있는데 마음이나 마음부수 역시 심장토대이기 때문에 동시발생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앞서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마음으로 보고 있다. 동네에서 싸움판이 벌어졌을 때 원인 제공자가 있듯이 마음과 마음부수가 동시발생하지만 선두에서 이끄는 것을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각주 말미에 “정신적 사실들이 일어나지 않아도 정신은 깨어 있을 수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마음만 있을 뿐 느낌 등 마음부수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아 ‘열반’의 상태라 보여 진다.

 

다른 번역을 보면

 

두 번째 구절을 보면 ‘manoseṭṭhā manomayā’라는 빠알리구문이 있다. 그런데 번역을 보면 “정신이 그것들의 최상이고 그것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니”라 되어 있어 매우 길다. 왜 이렇게 길게 번역하였을까?

 

두번째 빠알리구문과 관련하여 다른 번역자의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とし、によってつくりされる(나까무라 하지메역)

2)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법정스님역)

3)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네.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는 지어간다. (거해스님역)

4) ruled by the heart, made of the heart. (타닛사로 빅쿠역)

 

 

네 개의 번역을 보면 비교적 짤막하게 번역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manoseṭṭhā에 대하여 (마음의 주인), 마음에서, 마음이 그들의 주인, ruled by the heart(마음으로 지배된)’등으로 번역 되어 있다. 이는 seṭṭhā‘foremost; excellent, 最上的, 最勝的의미 이기 때문에 manoseṭṭhā마음이 최상이다라고 번역될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유식학의 원류

 

manoseṭṭhā에 대한 각주를 보면 정신적 사실들[심소: 느낌, 지각, 형성]이 의식을 선구로 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DhpA.I.22)”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는 이어지는 문구인 manomayā에 대하여그것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석적 번역을 한 것에서 충분히 설명된다. 그렇다면 마노마야는 구체적으로 어떤 뜻일까?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439) manomayā :

 

마음에 의해서 찰나적으로 포착된 것(심속행지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사실들을 찰나멸의 관점에서 인식론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빠알리법구경의 manomayā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아이러니컬하게도 유식학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주석에는 물론 이러한 언급이 없다.

 

아비달마에서는 유식적 관점과는 달리 비정신적인 물질현상의 실재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DhpA.I.23에 따르면, 여러가지 목제상품들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처럼, 정신적인 사실들[심소: 느낌, 지각, 형성]은 정신에서 생겨난 만큼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439번 각주, 전재성님)

 

 

manomayā에서 mayā는 fraud; deceit; magic; jugglery, , 幻術’의 뜻이다. 마술, 환술의 뜻이 마야(mayā)이다. 그래서 manomayā라 하면 ‘마음에서 만든 것’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이는 ‘순간포착’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인식론적’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비담마에 따르면 ‘인식과정 17단계’가 있다. 대상에 대하여 순간적으로 마음이 일어나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이중 순간포착에 해당되는 것이 ‘자와나’이다. 이를 ‘속행’이라 한다. 이는 강한 인식대상에 대해서만 일어난다. 

 

그런데 각주에 따르면 manomayā마음으로 만들어진 것,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후대 마하야나의 유식학과도 비슷하다고 한다. ‘일체유심조’라 하여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라고도 설명되는 유식학의 근원이 바로 법구경 1번과 2번 게송의  manomayā에서 시작된 것이라 보여 진다.

 

물질현상의 실재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 각주에서는 ‘목제상품’의 예를 들어 manomayā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비정신적인 물질현상의 실재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이는 마음부수의 실재성을 인정한다는 말과 같다. 실제로 부파불교시대 당시 설일체유부의 경우 이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법이 있다고 하여 이를 75법으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실재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동국대 김종욱 교수는 불교TV강좌에서 ‘영화필름’의 비유로 설명하였다.

 

영화는 필름이 있어야 볼 수 있다. 그러나 필름이 다 감기면 영화는 끝난다. 영화는 끝나지만 필름만 있으면 얼마든지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필름과 같은 것이 75법이라 하였다. 그러나 후대 대승운동이 일어나면서 설일체유부의 75법에 대하여 아공법유라 하여 비판한다. 즉 아공법유는 “고립된 실체성은 없다(무자성)”주장하고, 이를 ‘연기=관계성=무자성=공’으로 설명하였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아공법공(我空法空)사상이다. 아도 공하고 법도 공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각주에 따르면 실재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라 하였다. 이는 빠라맛따담마 (paramatta dhamma)라 불리우는 구경법에 대한 것이다. 이는 궁극적진리로서 법을 말한다. 그렇다면 궁극적진리로서의 법은 몇개나 될까. 초기불교의 아비담마교학에 따르면 모두 82가지이다. 이를 82법이라 한다. 82법을 보면 크게 물질과 정신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물질과 정신의 무더기인 오온으로 분해하고, 이를 다시 세분하여 12처와 18계로 구분한 것이다.

 

82법에는 열반도 포함된다.  열반도 구경법인 82법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경법은 설일체유부의 아공법유가 아닌 아공법공으로 보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는 구경법이 고유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탐욕은 ‘거머쥐려’ 하는 특징이 있고, 성냄은 ‘밀쳐내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추상적인 것을 제외한 71법은 모두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공상(共相)’이라 하고, 또한 각자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상(自相)’이라 한다.

 

이처럼 빠라맛따담마에는 공상과 자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승에서 말하는 아공법공과 같은 것으로 본다. 그래서 각주에서 물질현상의 실재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일어나고 소멸되는 특징에 대한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느낌, 지각, 형성 등 마음부수 역시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조건에 따라 소멸되기 때문에 물질현상의 실재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바왕가란 무엇인가?

 

세번째 구절에 paduṭṭhena가 있다. 이는 paduṭṭha‘done wrong, was corrupted’의 뜻으로 오염된이라고 번역된다. 그래서 ‘Manasā ce pasannena’사람이 오염된 정신으로라고 번역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 따르면 충동적인 탐욕 등의 침투적인 번뇌에 의해 오염된 것이라 설명되어 있다. 신구의 삼업에 따른 오염을 말한다.

 

그러나 2번 게송에서는 ‘Manasā ce pasannena’라 되어 있다. 여기서 pasanna‘clear, bright’의 의미이다. 그래서 사람이 깨끗한 정신으로라고 번역된다. 이렇게 오염된 마음과 깨끗한 마음이 있다. 그런데 각주에서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440) paduṭṭhena :

 

충동적인 탐욕 등의 침투적인 번뇌에 의해 오염된 것을 말한다. 자연스런 마음은 존재상속의 마음(bhavangacitta, 유분심)이다. 그것은 오염되지 않는다.  마치 맑은 물이 푸른 색과 같은 물감에 흘러들어 물들고 푸른 물로서 구별되게 된다. 그러나 다른 맑은 물이나 물감이 섞이기 전의 맑은 물은 구별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이 충동적인 탐욕 등의 침투적인 번뇌에 의해 오염된다. 그러나 새로운 마음(nava citta)이나 존재상의 마음(bhavangacitta)은 오염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다가오는 번뇌에 의해서 오염된다.(AN.I.10)’고 말씀 하셨다.

 

(440번 각주, 전재성님)

 

 

각주에서는 바왕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왕가란 무엇인가? 아비담마에 따르면 일생동안 변하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면 얼굴이 죽을 때 까지 형태를 유지하듯이 마음 역시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타고난 성향은 바뀌지 않음을 말한다. 또 소로 태어 났으면 소로 일생을 마칠 뿐이지 도중에 개나 사람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이처럼 한존재의 일생의 마음에 대하여 바왕가의 마음이라 한다.

 

그런데 마치 어린아이가 태어 난 순간의 마음이다. 그런데 삶의 과정에서 오염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춘기가 되었을 때 본격적으로 오염되기 시작하여 늙어 죽을 때 까지 탐욕, 성냄 등 온갖 오염원으로 태어난 순간의 마음이 오염됨을 말한다.

 

그럼에도 태어난 순간의 마음 즉, 일생의 마음이라 볼 수 있는 바왕가의 마음은 죽는 그 순간까지 유지 된다. 따라서 바왕가의 마음은 태어난 순간의 마음이나 삶의 과정에서 마음이나 죽는 순간의 마음이나 한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다음 생에서는 또 다른 바왕가의 마음이 생겨 나는데 예를 들어 사람이 소로 태어난다면 소로서 일생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바왕가의 마음은 일생의 마음이고 한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삶의 과정에서 오염되었다는 것은 신구의 삼업으로 악행을 지었음을 말한다. 그래서 2번 게송에서는 ‘Manasā ce pasannena’라 하여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함을 말한다.

 

여래장사상의 원류

 

여기서 깨끗함을 뜻하는 pasanna는 빛나는(bright)의 뜻도 있어서 앙굿따라나까야에서 말하는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빛나는 마음에 대한 앙굿따라니까야의 경전구절은 다음과 같다.

 

 

Pabhassaramida bhikkhave citta,

tañ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upakkiliṭṭhan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로 오염된다.(A1:49)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라 하였을 때 빛나는 것에 해당되는 빠알리어가 Pabhassaramida이다. 이는 Pabhasa가 ‘light; splendor, 光輝,’의 뜻으로 빛남을 뜻한다. 이처럼 마음이 빛난다고 하는 것은 탐진치와 같은 오염원을 제거 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얼룩진 거울을 닦으면 깨끗하고 빛나는 거울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구절은 후대 마하야나의 여래장사상의 단초가 되었다고 한다. 능가경에서 “여래장은 청정한 모습을 지녔지만, 객진번뇌에 의해 오염되어 부정하다”라는 말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라 한다. 여기서 ‘객진번뇌’라는 말은  게송에서 ‘다가오는 번뇌’와 같은 뜻으로 이해된다고 한다.

 

경에서 ‘마음은 빛나는 것’이라 하였다. 이 때 빛나는 마음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심본정설이나 자성청정심과 다른 것이라 한다. 빠알리 주석에 따르면 마음(citta)은 바왕가의 마음(bhavangacitta, 유분심)를 말한다. 이를 ‘잠재의식’이라고도 하는데, 한 존재에 있어서 존재를 특징지우는 마음의 흐름을 말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법구경 1번 게송과 2번 게송에서는 후대 마하야나에 영향을 준 것이 두 개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는 manoseṭṭhā manomayā구절에서 manomayā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의 뜻으로 후대 유식학의 근거가 된다고 보여진다. 또 하나는 Manasā ce paduṭṭhena구절에서 paduṭṭhena마음의 오염이라 하여 후대 여래장사상의 기원이 된 것이라 보여진다. 이렇게 본다면 manoseṭṭhā manomayā Manasā ce paduṭṭhena에는 마하야나의 두 개의 핵심사상에 대한 발원지와 같다고도 볼 수 있다.

 

수레의 비유

 

1번과 2번 게송에서는 전반부에 담마에 대한 교학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리구 후반부에는 비유를 들어 알기 쉽게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1번 게송에서는 수레의 비유, 2번에서는 그림자의 비유로 되어 있다. 이 두개의 비유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수레의 비유를 보면 cakka va vahato pada라 되어 있다. Cakka‘a wheel, , 車輪으로 바퀴의 뜻이다. Vahacarrying; leading, ; 이끈다는 뜻이다. Pada‘foot; foot-step, ; 足跡의 뜻으로 흔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cakka va vahato pada바퀴의 흔적으로 이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빠알리 원문에는 그 어디에도 황소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전재성님은 수레바뀌가 황소의 발굽을 따르듯이라 번역하였다. 이 부분에 대하여 다른 번역자는 어떻게 하였을까?  나까무라 하지메는 車をひく(牛)の足跡に車輪がついてゆくように라 하여 역시 소가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수레를 이끄는 소의 족적에 차륜이 따라 가듯이라 하였다.  법정스님은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라 하였고, 거해스님은 마치 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라 하였다. 또 타닛사로 빅쿠는 as the wheel of the cart the track of the ox that pulls it.”라 하여 the ox (황소)가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번역자들이 원문에 소를 뜻하는 말이 없음에도  를 넣어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수레의 비유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443) cakka va vahato pada :

 

DhpA.I.25에 따르면, 수레바퀴는 수레의 굴대에 연결된 견인용 황소의 발을 따른다. 황소는 하루나 닷새나 열흘이나 보름이나 한 달 동안 멍에를 져야 한다.

 

황소는 수레를 거꾸로 돌리거나 거기서 벗어 날 수 없다. 황소가 앞으로 벗어나려고 하면, 멍에가 황소의 목을 조른다. 뒤로 벗어나려고 하면, 바퀴가 황소의 엉덩이 살을 도려 낸다.

 

이와 같이, 신체적-정신적 고통은 오염된 정신 때문에 세 가지 잘못을 저지른 사람 지옥 등, 그가 가는 어느 곳이든지 의 뒤를 따른다.

 

(443번 각주, 전재성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멍에를 매고 있는 황소를 보지 못한다. 농촌에 있어도 멍에를 매고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이런 황소의 모습을 보는 것은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각주에서 설명된대로 한번 멍에를 매면 뒤로 갈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 황소의 비참한 운명이라 하였다.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업을 지었을 때 그 악업에 대한 과보가 마치 멍에를 매고 수레를 끄는 황소처럼 항상 따라다닐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실감나게 게송을 설명하고 있다.

 

그림자의 비유

 

다음으로 선업을 하였을 때 받는 과보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chāyā va anapāyinī 라 하여 그림자의 비유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chāyā ‘shade; shadow , , 日蔭의 뜻이고, anapāyinī ‘which does not leave’의 뜻이다. 따라서 chāyā va anapāyinī 그림자가 떠나지 않는다  뜻이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453) chāyā va anapāyinī :

 

DhpA.I.25에 따르면, 그림자는 몸과 연결 되어 몸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서면 서고, 앉으면 앉는다. 부드럽거나 거칠거나 모욕을 주는 어떠한 명령으로도 그림자를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림자는 몸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청정한 정신이 앞서 가면, 열 가지의 착하고 건전한 행위에 기초한,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와 관련된 즐거움 등과 같은 정신적-신체적 즐거움이 그림자가 자신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따라온다.

 

(453번 각주, 전재성님)

 

 

그림자는 항상 따라다닌다. 단 빛이 있을 때만이다. 그것도 환한 대낮에 더 선명할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깨끗하다(clear )는 뜻의 빠알리어가 pasanna인데, 이 단어는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빛나다 (bright)’의 뜻도 있다. 그래서 오염원을 제거 하면 마음이 깨끗이 될 뿐만 아니라 빛나게 된다. 그래서 선업공덕을 쌓으면 마치 그림자처럼 항상 따라 다닌 다는 것이다.

 

돌이여 떠 올라라” “기름이여 가라앉아라

 

수레의 비유와 그림자의 비유를 보면 악행과 공덕행에 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빠알리니까야에서여기서 악행은 ‘빠빠(Pāpa)’로 표현 되고, 공덕행은 ‘뿐냐(Puññā)’로 표시된다. 또 빠빠는 무거운 것, 공덕행은 가벼운 것으로 표현된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아씨빤다까뿟다의 경(S42:6)’에서 돌과 기름의 비유를 보면 알 수 있다.

 

오계를 지키지 않고 악행만 일삼다가 죽은 자가 있다. 그의 가족들이 천상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천도기도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돌의 비유를 들어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돌은 물에 가라 앉기 때문에 아무리 천도재를 수십번 올려 준다고 해서 결코 선처에 태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반면 오계를 준수하고 공덕행을 지은 자가 죽었다. 이에 대하여 시기하고 질투 하는 자가 ‘지옥에나 떨어져라’ 하며 저주기도를 올렸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기름의 비유를 들어 “버터여, 기름이여, 잠겨라, 버터여, 기름이여, 잠겨라”라고 저주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기름은 물에 뜨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저주기도를 해도 절대로 물 아래로 가라 앉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악행을 저지르면 무거운 돌과 같아서 물아래로 가라 앉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 아래는 것은 인간아래의 세상으로서 지옥과 같은 악처이다. 반면 공덕행을 하면 가벼운 기름과 같아서 물위로 뜰 수 밖에 없다. 그 위라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천상과 같은 선처이다.

 

돌은 무겁기 때문에 물에 가라앉고 기름은 가볍기 때문에 물에 뜬다. 마찬 가지로 수레의 비유에서 악행은 무거운 것이기 때문에 멍에를 맨 소와 같다고 하였다. 반면 그림자의 비유에서 공덕행은 가볍기 때문에 그림자와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옭아 매는 멍에는 물밑으로 가라 앉는 돌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악행에 대한 과보를 뜻하고 동시에 아래 세상의 악처로 이끈다. 반면 걸림없는 그림자는 물위로 뜨는 기름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공덕행에 대한 과보를 뜻하고 인간 이상의 선처로 인도한다.

 

두 개의 비유를 정리하면

 

법구경 1번과 2번은 쌍으로 되어 있다. 악업과 선업에 대한 것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수레와 그림자로 바유하였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수레의 비유(dhp1)

그림자의 비유(dhp2)

게송

수레바뀌가 황소의 발굽을 따르듯

(cakka va vahato pada)

그림자가 자신을 떠나지 않듯

(chāyā va anapāyinī)

설명

황소는 수레를 거꾸로 돌리거나 거기서 벗어 날 수 없다. 황소가 앞으로 벗어나려고 하면, 멍에가 황소의 목을 조른다. 뒤로 벗어나려고 하면, 바퀴가 황소의 엉덩이 살을 도려 낸다.

그림자는 몸과 연결 되어 몸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서면 서고, 앉으면 앉는다. 부드럽거나 거칠거나 모욕을 주는 어떠한 명령으로도 그림자를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림자는 몸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보

신체적-정신적 고통은 오염된 정신 때문에 세 가지 잘못을 저지른 사람 지옥 등, 그가 가는 어느 곳이든지 의 뒤를 따른다.

 

청정한 정신이 앞서 가면, 열 가지의 착하고 건전한 행위에 기초한,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와 관련된 즐거움 등과 같은 정신적-신체적 즐거움이 그림자가 자신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따라온다.

요약

-악업을 하면 멍에를 맨 것 같음.

-멍애때문에 벗어날 수 없음.

-벗어날 수 없어서 고통스러움.

-선업을 하면 마음이 깨끗하고 빛남.

-빛이 나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님.

-걸림이 없어서 부담이 없음.

 

 

 

 

빠알리챈팅

 

다음은 빠알리법구경 1번과 2번 개송에 대한 빠알리챈팅이다. 스리랑카의 위사라드 스리마 라뜨나야까(V.S. Ratnayaka)의 음성이다.

 

 

 

 

 

 

 

법구경 1번과 2번 게송 빠알리어 음악챈팅

 

 

 

 

2014-03-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