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재가불자주제에 까분다고? 인터넷난동을 멈추어라!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1. 11:32

 

 

재가불자주제에 까분다고?  인터넷난동을 멈추어라!

 

 

 

홀가분함을 느낄 때

 

같은 건물 다른 층에 동종업계 사장님이 있다. 같은 업종이기 때문에 종종 마주치면 “요즘 어떻습니까?”라고 인사하며 지내는 사이다. 최근 그 사장님은 일감이 넘쳐 나는 모양이다. 베테랑직원 둘을 두면서 일을 하지만 다 소화하지 못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말이 도움이 사실 ‘하청’이나 다름 없다. 그런데 납기가 급하다 보니 주말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밤낮없기 일을 해야 한다는 것과 다름 없다.

 

안면도 있고 해서 도와 드리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급했는지 계속 재촉하는 것이다. 그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일감이 들어오면 수입이 늘어나서 좋긴 하지만 묶이게 된다. 오로지 그 일만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좋아하는 글쓰기역시 할 수 없다.

 

주말에는 개인적인 약속도 있어서 도저히 납기를 맞추기 힘들었다. 그래서 여러 이유를 들어 바쁘더라도 직원을 활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정중하게 말 하였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홀가분함을 느꼈다. 마치 해방된 듯한 기분과 함께 발걸음이 가벼웠다.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며

 

홀가분함을 느낄 때 가 있다. 무언가 묶인 것에서 벗어났을 때이다. 그것이 일이 될 수 있고, 사람도 될 수 있다. 나를 속박하고 있는 것에서 벗어났을 때 자유를 만끽한다. 그런 것이 자유로운 삶이라 할 것이다. 숫따니빠따에도 자유로운 삶에 대한 노래가 있다.

 

 

Āmantanā hoti sahāyamajjhe
V
āse hāne gamane cārikāya,
Anabhijjhata
serita pekkhamāno
Eko care khaggavis
āakappo

 

동료들과 지내거나 서있거나 가거나

또는 거닐면, 항상 요구가 많으니, 

남이 탐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stn40)

 

(Khaggavisāa sutta-무소의 뿔의 경, 숫따니빠따 Sn1.3,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자유로운 삶(serita)’ 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원하는대로 살고 남에게 종속되지 않는 삶을 말한다. 게송에서 첫번째와 두번째 구절을 보면 “동료들과 지내거나 서있거나 가거나 또는 거닐면, 항상 요구가 많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슨뜻일까? 인연담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이 시는 엑까밧지까 브라흐마닷따 라고 하는 연각불이 지은 것이다. 옛날에 엑까밧지까 브라흐마닷따 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는 매우 책임감이 강해서 어떠한 사람이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심지어 코끼리에 타고 있을 때나 말 등에 타고 있을 때라도 상담을 요청하면, 내려서 한 귀퉁이로 가서 상담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엑까바자까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그것이 싫어서 출가를 했다. 그러자 대신들의 재량권이 커졌는데도 대신들은 서로 통치하겠다고 싸웠다. 어느 날 두 대신이 한 지방을 두고 서로 다스리겠다고 싸웠다. 왕은 두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탐욕에서 오는 재난을 보고, 통찰하여 깨달음을 얻어 연각불이 되어 그 감흥을 시로 읊은 것이다.

 

(stn40 인연담)

 

 

대신들에게 통치 할 수 있도록 재량권을 주었는데 서로 다투었다고 한다. 이는 권력투쟁을 말한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공유하지 못한다는데 대신들이 사이 좋게 권력을 공유하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닭들도 헤게모니를 잡기 위하여 머리를 쪼는 닭싸움을 한다. 또 군대내 내무반에서도 하사와 병장간의 헤게모니 다툼이 일어난다. 또 조폭들간에도 영역다툼이 일어나고 헤게모니 다툼으로 번져간다. 헤게모니 다툼으로 인하여 아무리 작은 권력이라도 승리자를 정점으로 하여 위계질서가 성립된다. 동물의 세계이건 인간의 세계이건 이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다툼은 모두 탐욕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남이 탐내지 않는 무탐(無貪, Anabhijjha)’의 자유로운 삶을 추구 한다고 하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스런 사람들

 

가장 자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스님들일 것이다. 해마다 해제철이 되면 산문을 나서는 사진을 볼 수 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스런 사람들 같다. 바랑 하나 메고 산문을 나서는 순간 자유를 만끽 하는 듯한 기분이다. 마치 수년간의 병영생활을 마침과 함께 예비군복을 입고 위병소 정문을 나섰을 때 그 산뜻한 기분과 가벼운 발걸음과 같은 것이라 본다. 이와 같은 자유로운 삶에 대한 이야기가 무소의 뿔의 경에 많이 있다.

 

 

 

사진 :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 싫은 사람은

 

숫따니빠따 무소의 뿔경에는 공통적으로 네 번째 구절에서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ko care khaggavisāakappo)”라고 되어 있다. 그 어느 것에도 속박 되지 않아 홀가분 마음으로 살아 가는 자유로운 삶에 대한 것이다.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Khīḍḍā ratī hoti sahāyamajjhe
Puttesu ca vipula
hoti pema,
Piyavippayogañca jiguccham
āno
Eko care khaggavis
āakappo.

 

동료들 가운데 유희와 환락이 생겨나고,

자손이 있으면, 커다란 애착이 생겨나니,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 싫은 사람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stn41)

 

(Khaggavisāa sutta-무소의 뿔의 경, 숫따니빠따 Sn1.3, 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키워드가 동료(sahāya)와 자손(Putta)이다. 동료와 어울리면 먹고 마시고 잡담하는 등 즐기는 것으로 될 수밖에 없고, 자식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애착이 생겨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묶이는 것을 말한다. 게송에서 첫번째와 두번째 구절에 대한 인연담은 다음과 같다.

 

 

이 시는 에까뿟띠까 브라흐마닷따 라고 하는 한 연각불과 관련된 것이다. 그는 베나레스의 왕이었다. 그는 외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지극히 사랑하여 행주좌와에 항상 같이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유원에 나갔는데 외아들을 왕궁에 두고 나갔다. 바로 그날 외아들은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대신들은 그 사실이 왕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왕자를 화장한 뒤에 왕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왕은 유원에서 술에 취하여 왕자에 대한 생각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이튿날 아침에 왕은 목욕하고 식사시간에 왕자를 데려오라고 했다. 그제야 대신들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왕은 비탄해하였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앉아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라고 연기를 순관하고 역관해서 깨달음을 얻어 연각불이 되었다.

 

(stn41인연담)

 

 

왕이 대신들과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드는 등 여흥을 즐겼다. 그러는 사이에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 그것도 하나 밖에 없는 외동아들이다. 외동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는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라 하여 여덟 가지 괴로움의 범주에 속한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고통을 없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사랑하는 것을 만들지 않으면 될 것이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을 포기 하면 된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 싫은 사람 (Piyavippayogañca jigucchamāno)”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였다.

 

왜 공감(共感)하는가?

 

무소의 뿔의 경을 순차적으로 올리고 있다. 가장 고층 경전으로 부처님 원음이 생생하게 실려 있고 또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애송된다는 숫따니빠따의 문구를 읽어 보면 공감하기 때문이다.

 

지난 번 올린 글 중에 “차라리 홀로 가는 것이 낫다” 애착에서 생겨나는 위험이라는 제목이 있다. 애착이 모든 괴로움의 뿌리이기 때문에 애착에서 벗어나려면 사랑하는 자도 사랑하지 않는 자도 만들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글을 쓰는 이유는 부처님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가정을 가진 재가자일지라도 가르침을 접하면서 공감하는 것은 현실과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선불교처럼 동문서답과 같은 가르침도 아니고 마하야나처럼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내용도 아니다. 현실에서 겪고 있는 삶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공감(共感)’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는 출재가를 막론하고 전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히고 또한 공감하는 경전이라 볼 수 있다.

 

어느 법우님이 인터넷카페에서 퍼온 글

 

그런데 재가자의 글쓰기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어느 경우 비판을 넘어 비난과 비방을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근거 없는 비방이다. 이런 경우 차라리 중상모략에 가깝다. 그것은 한마디로 글을 쓰기 못하게 하려는 고약한심보로 보여 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치 초등학생이나 하는 소리를 듣는 듯한 글을 보았다. 어느 법우님이 인터넷카페에서 퍼온 글이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연꽃님>이 언제까지 <앵무새>처럼 같은 소리를 울지 모르겠지만
저도 매번 반박을 해 드리지요. 앵무새가 지칠지 제가 지칠지 두고 보면 알겠지요.

출가를 해서 번뇌를 끊고 해탈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붓다의 가르침이라면
그토록 경전 귀절 한마디도 <맹목적으로 따르는 분이라면> 내일이라도 출가를 할 듯 합니다.
언제 처자식 다 버리고 출가를 할지 <두고 보겠습니다>.

<재가자 주제에> 출가를 하는 것이 진정한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울부짖는 모습도 우습지만>
그렇게 <울가를 울부으면서> 진작 자신은 출가를 안 하는 <인격의 이중성>은 참으로 귀신도 곡할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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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님은 위와 같은 SS의 예의 없는 어법 또는 어투에 동의하십니까? 설명을 바랍니다. __()__
DH님이 못 하겠으면, 같은 WB사의 책임자-급이신 HG님이 혹시 이 글을 보시거든 대신 답하셔도 됩니다. __()__

 

(I법우님, http://blog.daum.net/bolee591/16155842)

 

 

 

anger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은 여럿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피함으로써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에서 피함에 의히여 끊어지는 번뇌가 이에 해당된다.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피하면 되는 것이다. 안보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악의적인 비난이나 비방글이 있는 곳에 가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본문에 누군가 글을 남겨 주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번뇌가 생겨난다.

 

재가불자주제에 까분다고?

 

댓글을 보면 대단히 악의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매우 유치함을 알 수 있다. 마치 일본에 대한 글을 쓰면 친일파가 되고, 평등에 대한 글을 쓰면 친북좌파로 모는 것과 같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하여 게송의 내용 대로 글을 썼다 하여 왜 출가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것은 초등학생들이나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근거 없는 비방을 일삼는 자는 앵무새, 얼간이, 외눈박이, 개망나니, 심지어 이중인격자, 외도, 단멸론자 등 이 세상에 태어나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온갖 말을 한다. 또 올린 글에 대하여 다 틀렸다다든가, “헛소리 하지말라든가, “망발 하지말라든가, “왜곡하지 말라등 온갖 함담을 한다. 

 

그는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이는 올려진 글을 보면 일 수 있다. 재가자가 주제넘게 글을 쓴다는 것이다. 묵묵히 수행정진하는 스님도 가만 있고 학문연구에 매진 하는 학자도 함부로 글을 올리지 않는데 재가자가 조금 안다고 까분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극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 고약한 심보라 본다. 그래서 스스로 블로그 문을 닫게 자극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극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케이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폭탄을 맞았을 때

 

초전법륜경에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라 하였다. 특히 후자에 대하여 한자사자성어로 원증회고(怨憎會苦)’라 한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만나기 싫어도 만나는 경우가 있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나에게 닥쳤을 때이다. 그것이 사람일 수도 있고 병과 같은 질병일 수도 있다. 이렇게 바라지 않았던 것이 현실화 되었을 때 한마디로 폭탄을 맞은 것과 같다.

 

집에 폭탄이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한마디로 쑥대밭이 될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마주 하였을 때 마치 폭격을 맞은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종종 서부영화를 보면 평화로운 가정 장면이 있다. 아내와 아들딸이 있는 전형적인 농가의 모습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찾아 든다. 불청객이다. 그런데 마음씨 좋은 주인은 이 불청객에 대하여 호의를 배푼다. 그러나 불청객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주인을 협박하여 묶어 두고 아내와 딸을 차례로 겁탈한다. 한 순간에 평화롭던 가정이 불청객에 의하여 쑥대밭이 된 것이다.

 

남미 ‘안데스’에 대한 다큐를 본 적이 있다. 16세기에 일어 났던 피사로의 안데스정복에 대한 이야기이다. 1532년 180명으로 중무장한 피사로 군대가 잉카제국에 도착한다. 황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온 것이다. 잉카제국의 왕은 피사로 군대를 환대한다. 잉카의 전설에 따르면 하얀 백인과 같은 신이 찾아와서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사로군대는 환대를 원수로 갚는다. 그래서 본래 목적인 금을 갖기 위하여 잉카의 왕을 포로로 잡는다. 그러자 잉카의 신민들은 왕을 구하고자 무려 11톤이나 되는 금을 바쳤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잉카왕은 살해 되고 잉카제국은 멸망한다. 불과 180명으로 중무장한 낯선 불청객들에 의하여 평화롭던 천년제국이 하루 아침에 ‘쑥대밭’이 되어 버린 것이다.

 

평화롭던 가정이 불청객에 의하여 쑥대밭이 된 것은 탐욕때문이다. 또 천년왕국 잉카제국이 고작 180명의 중무장한 군대로 쑥대밭이 된 것 역시 탐욕때문이다. 이런 불청객들은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초전법륜경에서 말하는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이다.

 

품위 있는 글을 쓰고자

 

글을 쓰면서 매일 구업(口業)’을 짖고 있다. 그런 구업이 악업이 아닌 선업(善業)이 되기를 바라면서 글을 올리고 있다. 그래서 가급적 품위 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지켜 보고 있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안면 있는 이들이 그렇다.

 

안면 있는 이들에게 모든 것이 노출 되어 있다. 글을 통하여 내면적인 것이 알려져 있고 또 외모로서 외면적으로도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안과 밖에 매칭 되다 보니 일거수일투족에 대하여 다 알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함부로 글을 못쓴다.

 

그러나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이 노출 되어 있다. 인터넷시대에 누구나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읽어 보았을 때 부끄러움이 없는 글을 쓰고자 노력한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 태어나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앵무새, 얼간이, 외눈박이, 개망나니, 이중인격자 등 악의적인 말을 들었을 때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하였다. 속된 말로 말려 들기 때문이다. 또 다른 말로 낚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의적 비난이나 비방을 밥먹듯이 한다면 스스로 낚인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언어적으로 악업을 지으면 그 과보를 피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언어폭력이 일상화 된 자에게 연민을 보낸다. 

 

유치원생이나 하는 말

 

자유롭게 살고 있다. 비록 수입이 적다고 하더라도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와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에 공감한다. 더구나 애착이 있으면 애착이 생기고, 애착에 따라 괴로움이 생겨난다.(stn36)”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사귐에서 오는 두려움(stn37)”이나 자식과 아내에 대한 기대는 뻗은 대나무가 서로 엉킨 것과 같다(stn38)”구절 역시 공감한다. 그래서 사슴이 초원을 거닐 듯 현명한 자라면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stn39)”이라는 말에 또한 공감한다.

 

비록 처자식을 부양하고 있는 자라 할지라도 마음 만은 언제나 자유로운 삶을 동경한다. 그런데 이런 류의 글을 썼다고 하여 언제 처자식 다 버리고 출가를 할지 <두고 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유치한 발상이다. 초등학생들이 아니라 유치원생이나 하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인터넷난동을 멈추어라!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은 괴로움이다. 피해서 괴로움을 없애게 할 수도 있지만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앵무새가 지칠지 제가 지칠지 두고 보면 알겠지요.”라고 말하면서 ‘함 해보자!’식으로 나온 경우를 말한다.

 

불청객은 그 성향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주인은 불청객을 따뜻한 마음으로 맞이 해준다. 그러나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말이 있듯이 불청객은 평화롭던 가정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천년왕국을 하루 아침에 짓밟아 버린다. 모두 탐욕에 뿌리박은 탐욕, 사견, 자만의 마음 때문이다. 또 성냄에 뿌리박은 증오, 질투, 인색, 후회의 마음 때문이다. 이렇게 탐욕과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으로 인하여 세상은 오염되어 간다.

 

한사람의 도인이 출현하면 향기가 나고, 하나의 사기꾼이 출현하면 악취가 풍긴다고 하였다. 넷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냄에 뿌리 박은 한사람의 증오와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오염된다면 불청객이나 다름 없다. 부처님의 향기가 가득한 곳이 더 쑥대밭 되기 전에 난동을 멈추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인터넷난동을 멈추어라!

 

 

 

2014-03-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