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할 줄 아는 삶,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을 위하여
경기가 좋지 않을 때 늘 듣는 말
경기가 좋지 않다고 한다. 사실 이런 말을 늘 듣는다. 어느 해이든지 경기가 좋았다는 말을 거의 듣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기가 침체 되어 있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부동산경기를 일으키는 것이라 한다. 아파트를 짓고 토목사업을 하는 등 건설경기를 일으키면 전산업분야로 파급되어 경기가 동반상승한다고 한다.
아파트를 많이 지어 분양하면 새로 입주 하게 된다. 이 때 가전제품을 많이 바꾼다. 그래서 가전수요가가 늘어나는 등 부동산경기를 활성화시키면 전반적으로 산업이 활성화 되기 때문에 정책당담자들이 늘 쥐고 있는 카드가 부동산경기 활성화이다.
요즘 TV를 보면 아파트전세값이 너무 올라서 전세난이라 한다. 또 전세값이 집값에 육박하여 차라리 집을 사고 말았다는 수요자의 인터뷰를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부동산 시장이 꿈틀 하니 지금 부동산을 구입하는 것이 적기라 한다.
하지만 매스컴에서 보도 될 때 이에 부하뇌동하면 크게 후회할 것이라는 말도 있다. 주로 정부주도의 부동산정책에 반발하는 민간연구소의 보고서가 그렇다. 그래서 저리의 은행융자를 받아 집을 장만 하였을 때 일시적으로 오르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다시 하락하고 말 것이라 한다. 그래서 막차 타지 말기를 경고하고 있다.
아파트 등 집을 장만할 때 제돈 주고 사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부분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구입한다. 요즘은 부동산경기 활성화를 위하여 각종규제를 풀고 또 한편으로 저리금융정책을 펴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을 사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런 정부방침에 따라 집을 구입하였을 때 빚쟁이가 되고 만다. 아무리 은행이자가 낮다 하여도 은행도 장사하는 곳이기 때문에 손해보는 장사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큰돈을 빌렸을 때 이자비용에 대한 지불을 감수 해야 한다.
빚잔치하였을 때
아파트 등 집을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르기를 기대해서 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부동산대세 하락기’에 있어서 정부정책만 믿고 돈을 빌려 집을 샀을 때 집값이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수입의 대부분이 이제부담으로 나갈 때 고민은 클 것이다. 그럴 경우 궁전 같은 집을 가지고 있지만 집값하락과 이자부담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서 집을 구입하였으나 과도한 욕심으로 인하여 결코 행복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빚잔치’는 결코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 중에 ‘빚 없는 행복’이 있다. 재가불자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실려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앙굿따라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Anaṇaṃ sukhaṃ ñatvāna
atho atthisukhaṃ sare,
Bhuñjaṃ bhogaṃ sukhaṃ
macco tato paññā vipassati.
[세존]
빚 없음의 행복을 이루고
소유의 행복을 새기리.
향유의 행복을 누리며
인간은 그것에 대해 지혜로 통찰하네.
(Anaṇasuttaṃ-빚 없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62, 전재성님역)
빚진자는 자유롭지 못하다. 돈을 빌려 빚잔치를 벌였다고 빌린 돈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갚지 못하면 ‘사기꾼’소리를 듣기 쉽다. 사람을 상대로 사기를 쳐야 사기꾼이라 말하지만, 빌린 돈을 제때에 갚지 못해도 사기꾼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빚 없는 것이 행복이다. (Anaṇaṃ sukhaṃ)’라 하였다. 여기서 행복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수카(sukha)의 번역이다.
세상을 살면서 빚이 없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이는 빚진 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부도가 나서 감당할 수 없는 빚진 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눈물겹다. 빚독촉에 시달려 자살을 하는가 하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잠적 하기도 한다. 마치 죄인처럼 살아 가는 사람들이 빚진 자들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빚잔치로 집을 구입한다면 행복시작이 아니라 괴로움의 시작으로 들어 간다고 볼 수 있다. ‘행복끝 고통시작’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법정스님의 소욕지족 소병소뇌(少欲知足 少病少惱)
행복은 소욕에서 오는 것이라 하였다. 또 행복은 현재 조건에서 만족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것을 사자성어로 말하면 ‘소욕지족(少慾知足)’이다. 그래서 ‘괴로움 끝 행복시작’이라 볼 수 있다.
소욕지족에 대한 네어버 검색을 해 보니 국어사전 단어로서 ‘소욕지족 소병소뇌(少慾知足 少病少惱)’라 소개 되어 있다. 아는 ‘적은 것으로 넉넉할 줄 알며, 적게 앓고 적게 걱정하라’는 뜻이다. 더 검색을 해 보니 법정스님의 글에 나온 것이라 한다. 소욕지족 소병소뇌에 대한 법정스님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소욕지족 소병소뇌(少欲知足 少病少惱)
"소욕지족 소병소뇌少欲知足 少病少惱"
'적은 것으로써 넉넉할 줄 알며,
적게 앓고 적게 걱정하라."
저는 물의 은혜를 많이 입습니다.
그래서 늘 "물보살님! 감사합니다."하고 합장기도를 올립니다.
어디 고마운 존재가 물뿐이겠습니까?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흙과 공기와 바람과 햇빛 모두 고마은 존재입니다.
이런 자연현상들이 하나라도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가난의 의미를,
맑은 가난인 청빈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맑은 가난이란 많이 갖고자 하는 욕망을 스스로,
자주적으로 억제하는 일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맑은 가난은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맑은 가난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갖고자 하는 욕망을 스스로 억제하기 때문에
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또 무엇을 갖고자 할 때,
갖지 못한 사람들의 처지를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만 다 차지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서로 얽혀 있고 서로 의지해 있습니다.
내 이웃이 갖지 못하고 있는데
나만 많이 갖는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닙니다.
날마다 4만 명에 가까운 어린이들이 먹지 못해 죽어 가고 있습니다.
또 세계 전역에서 10억 명의 사람들이 하루 1달러,
우리 돈 천 원으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이것이 이 지구별의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무엇을 갖고자 할 때
갖지 못한 사람들의 처지를 배려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개인만이 아니고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크고 더 높고 더 많은 것을 가질수록
우리는 행복한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가치의 척도는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은가에 달려 있습니다.
조금 모자란 것에 만족하는 삶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이런 생활 태도를 갖지 않는 한,
이런 생태윤리를 지니지 않는 한,
세상은 더욱 나빠지고 삶은 더욱 힘들어집니다.
아쉬움과 궁핍을 모르면 고마움을 모르기 때문에 불행해집니다.
돈이나 재물이 인간의 할 일을 대신하게 되면
그곳에는 인간이 존재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기상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금세기 안에 지구 기온이
지금보다 섭씨 5도에서 8도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상태로 산다면,
히말라야를 비롯한 빙하들이
앞으로 40년 안에 모두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살기가 아주 고통스러워집니다.
빙하가 녹으면 녹은 물이 어디로 갑니까?
해수면이 높아집니다.
해수면이 높아지면 태풍이나 홍수 등으로 인해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다 매몰됩니다.
이 지구상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우리 후손들까지 살아 있으려면,
현재의 생활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보다 겸손한 태도로 지구환경을 생각하면서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맑은 가난의 미덕을 하루하루 실천해야 합니다.
덜 쓰고 덜 버려야 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넘치고 있습니다.
삶의 질은 결코 물질적인 풍요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어떤 여건 아래서도 우리가 잠들지 않고 깨어 있다면
삶의 질은 얼마든지 향상될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가,
또 우리만 살고 말 것이 아니라
우리 후손들까지도 어떻게 하면 잘 살게 할 수 있을 것인가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받아 쓰고 있는 것은
우리 조상대에 허물지 않고 가꾸어 온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 법정 스님 법문집<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에서-
스님은 글에서 핵심적인 구절은 “주어진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것”과 “조금 모자란 것에 만족하는 삶”이라 볼 수 있다. 이 구절이 바로 ‘소욕지족 (少欲知足)’을 가장 잘 표현 하는 말이라 보여 진다. 지금 있는 것에 만족하여 산다면 허황된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소욕(少欲)이 된다. 그래서 스스로 족함알 알게 되어 지족(知足)이 된다.
불교의 소욕지족의 삶
불교의 소욕지족의 삶은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는 것이다. 또 조금 모자란 것에 만족하는 삶을 말한다. 그래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Atthamhi jātamhi sukhā sahāyā
Tuṭṭhī sukhā yā itarītarena
Puññaṃ sukhaṃ jīvitasaṅkhayamhi
Sabbassa dukkhassa sukhaṃ pahāṇaṃ.
일이 일어났을 때는 벗이 행복이고
어떠한 것에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고
목숨이 다할 때는 공덕이 행복이고
일체의 괴로움을 버리는 것이 행복이다.
(Dhp331, 전재성님역)
事がおこったときに、友だちのあるのは楽しい。
(大きかろうとも、小さかろうとも)、どんなことにでも満足するのは楽しい。
善いことをしておけば、命の終るときに楽しい。
(悪いことをしなかったので)、あらゆる苦しみ(の報い)を除くことは楽しい。
(Dhp331, 나까무라 하지메역)
일이 생겼을 떄 벗이 있음은 즐겁고
만족은 어떤 경우에나 즐겁다
착하게 살면 죽는 순간에도 즐겁고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즐겁다
(Dhp331, 법정스님역)
A blessing: friends when the need arises.
A blessing: contentment with whatever there is.
Merit at the ending of life is a blessing.
A blessing: the abandoning of all suffering
& stress.
(Dhp331, 타닛사로빅쿠역)
법구경 331번 게송은 행복(sukhā )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벗, 지족, 공덕, 이고’에 대하여 네 가지 수카를 노래 하였다. 이 수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행복’이라 하였고, 나까무라하지메는 ‘楽しい(즐거움)’이라 하였고, 법정스님 역시 ‘즐거움’이라 하였다. 타닛사로빅쿠는 blessing이라 하여 ‘축복’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수카에 대하여 다양한 번역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이든지 만족하는 삶
331번 게송에서 두 번째 구절을 보면 “어떠한 것에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다 (Tuṭṭhī sukhā yā itarītarena)”라 하였다. 여기서 itarītara는 ‘whatsoever; any’의 뜻이다. Tuṭṭhī는 ‘pleasure; joy’의 뜻이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어떠한 것에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라 하였고, 나까무라하지메는 크든 작든 어떤 것이든지 만족하는 것이 즐거움이라 하였다. 타닛사로 빅쿠 역시 무엇이든지 만족하는 것이 축복이라 하였다. 이렇게 행복은 크건 작건 간에 무엇이든지 만족하는 삶을 말한다. 이를 한자성어로 말한다면 ‘소욕지족’이 될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구절은 소욕지족의 삶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깟사빠존자의 소욕지족
소욕지족의 삶은 모든 수행자에게 적용되는 삶의 방식이다. 또 재가자에게도 해딩된다. 굳이 행복지수 공식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욕심을 줄이면 편안해진다. 가진 것이 없어서 불편한 점은 있지만 현재 있는 조건에 만족한다면 가장 행복한 상태라 볼 수 있다. 이런 소욕지족의 실천자로 깟사빠 존자를 들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깟사빠상윳따(S16)이 있다. 소욕과 지족의 삶을 산 존자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Santuṭṭhoyaṃ bhikkhave, kassapo itarītarena cīvarena, itarītaracīvarasantuṭṭhiyā ca vaṇṇavādī, na ca cīvarahetu anesanaṃ appatirūpaṃ āpajjati, aladdhā ca cīvaraṃ na paritassati. Laddhā ca cīvaraṃ agadhito1 amucchito anajjhāpanno ādīnavadassāvī nissaraṇapañño paribhuñja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여기 이 깟사빠는 어떠한 의복에도 만족한다. 그는 어떠한 의복에도 만족하는 것을 칭찬한다. 그래서 그는 의복 때문에 삿되거나 부적절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는 의복을 얻지 못해도 동요되지 않고 의복을 얻어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탐닉하지 않고 미혹되지 않고 위험을 직시하고 여읨을 생각하며 그것을 받는다.”
(Santuṭṭhisutta-만족의 경, 상윳따니까야 S16.1, 전재성님역)
두타제일이라 칭송받는 깟사빠 존자에 대한 부처님의 칭찬이다. 그런 깟사빠존자는 어떤 의복에도 만족한다고 하였다. 비록 묘지에 버려진 옷으로 누더기 옷을 입었을지라도 만족한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깟사빠 존자는 의복에 대한 만족 뿐만 아니라 이른 바 사대필수품이라 불리우는 탁발음식, 와좌구, 필수의약품에도 만족한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깟사빠의 이와 같은 행위에 대하여 “그러므로 가르침을 받으면 그대들은 그렇게 되고자 실천해야 한다.( S16.1)”라고 강조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가르침이 법구경에서 “어떠한 것에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dhp331)”이라는 구절의 원형으로 보인다. 이는 다름 아닌 소욕지족이라 본다.
만족(Santuṭṭhi)은 어떤 뜻일까?
그렇다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만족(Santuṭṭhi)’은 어떤 뜻일까?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Srp.II.161에 따르면, 세 가지 유형의 만족이 있다. 1) 좋거나 거친 어떠한 것을 얻든, 소득에 따른 만족(yathalabhasantosa), 2)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만족하는, 기력에 따른 만족(yathabalasantosa), 3) 사치스런 것을 피하고 필수적인 것만을 취하는, 분수에 따른 만족(yathasaruppasantosa)이 있다.
(525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서는 소득에 따른 만족, 기력에 따른 만족, 분수에 따른 만족 이렇게 세 가지 만족이 있다고 하였다. 소유가 많고 적음을 떠나 지금 여기에서 주어진 조건에 만족한다면 바로 그것이 행복이고 즐거움이라는 뜻이다.
자애경(Sn1.8)에서
경에서 만족이라고 번역한 것이 빠알리로 산뚯티(Santuṭṭhi)이다. 만족을 하는 것이 행복이라 하였다. 그런데 산뚯티라는 단어가 들어간 경이 있다. 자애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Santussako ca subharo ca 산뚯사꼬 짜 수바로 짜
appakicco ca sallahukavutti 압빠낏쪼 짜 살라후까웃띠
Santidriyo ca nipako ca 산띠드리요 짜 니빠꼬 짜
appagabbho kulesu ananugiddho, 압빠갑보 꿀레수 아나누깃도
만족할 줄 알아서 남이 공양하기 쉬워야 하며,
분주하지 않고 생활이 간소하며,
몸과 마음 고요하고 슬기로우니,
가정에서 무모하거나 집착하지 말지이다. (stn144)
(Karaniya Metta Sutta- 자애경, 숫따니빠따-Sn 1.8, 전재성님역)
첫 번째 구절을 보면 “만족할 줄 알아서 (Santussako)”라는 말이 있다. Santussa는 Santussati + a인데, Santussati의 뜻은 ‘contented, pleased, or happy’의 뜻이다. 이는 깟사빠경에서 산뚯티(Santuṭṭhi)와 어근을 공통으로 갖는 말이다. 이렇게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사는 자가 진정한 수행자이며 동시에 행복한 자라는 뜻이다.
행복에 대한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누구나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하여 산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행복에 대한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는 것이다. 정치인이라 하였을 때 극좌에서 극우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듯이 마찬가지로 행복(sukha)이라는 말 역시 오욕락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매우 광범위하다. 그래서 단지 “불교의 목적이 행복입니다”라고 말한 다면 오도 되기 쉽고 오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행복을 추구한다. 그런 행복은 세속에서 말하는 오욕락이 아님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고득락이라 하여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다”는 뜻의 사자성어를 접하였을 때 모르는 사람들은 불교가 단지 즐거움이나 행복을 추구 하는 종교로 오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욕락도 행복이다. 그런데 법구경 에서는 "일체의 괴로움을 버리는 것이 행복이다. (Sabbassa dukkhassa sukhaṃ pahāṇaṃ, dhp331)”라 하였다. 이는 이고(離苦)가 행복이라는 말과 같다. 더 나아가 열반도 행복이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열반 그 자체에 대하여 행복이라 볼 수 없다. 마음이 있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는데 열반은 마음을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청정한 삶을 완성한 번뇌 다한 아라한의 삶 그 자체가 행복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331번 게송에서도 "일체의 괴로움을 버리는 것이 행복이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행복의 범주는 매우 넓다. 따라서 이고득락이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는 취지로 여러 차례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럼에도 이를 이해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치 행복을 부정하는 것처럼 비난하기도 한다.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본문을 꼼꼼이 읽어 보지 않고 건성건성 제목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라 볼 수 있고, 또 한가지는 단세포적 사고방식을 가진 경우라 볼 수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사고수준이 요즘말로 ‘초딩’순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마음으로 조작된 행복
이 세상 사람들은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그래서 누구나 행복해지고자 한다. 이세상의 모든 종교도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초기경전에 수카에 대하여 수 많은 언급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 하신 행복은 오욕락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이를 싸잡아 불교는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이다라거나 이고득락이 불교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못 된다. 왜 그런가? 열반을 제외한 행복이라는 것은 ‘마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어떤 것일까?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조건에 따라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있어서 느끼게 된다. 그러데 행복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런 느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조건에 따라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영원한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심지어 삼매에 의하여 성취된 행복에 대해서도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장자여, 또한 수행승이 희열이 사라진 뒤,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신체적으로 행복을 느끼며 고귀한 님들이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행복하다고 하는 표현하는 세 번째 선정에 듭니다.
그는 이와 같이 ‘이 세 번째 선정도 만들어진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것이든 만들어지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압니다. 그는 그것에 입각해서 번뇌의 부숨을 성취합니다.
(앗타까 시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11.16,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3선정에서 성취된 행복(sukha)라는 것도 만들어진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결국 무상하고 소멸되고 말 것이라 하였다. 조건에 따라 만들어진 것은 조건이 다 하면 소멸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 꼰단냐가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nti, S56.11)”라며 법의 눈이 열린 장면이 표현 된다.
삼매에서 얻어진 행복은 세속에서의 오욕락과 비할 바가 아니라 한다. 그래서 수행자들이 산중에서 홀로 사는 것도 세속의 행복과 견줄 수 없는 지고의 행복을 맛보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그런 행복은 조작된 것이라 하였다. 삼매에서 얻어진 행복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으로서, 이를 한다디로 말하면 행복한 느낌이 될 것이다. 그래서 행복에 대하여 일시적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세속의 오욕락이든 삼매에서 맛보는 행복이든 그런 일시적 느낌에 대하여 목숨을 걸 필요가 있을까?
정견(正見)과 사견(私見)
사람들은 느낌에 목숨을 건다. 노인의 성문제를 다룬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제목이 있듯이 즐거운 느낌에 올인한다. 또 빚잔치를 벌여 보다 높은 평수의 아파트 구입에 올인한다. 또 황제와 같은 근사한 행복한 밥상을 마주한다. 과연 이런 행복은 얼마나 오래 갈까? 느낌에 목숨을 걸지만 그 때 뿐이다. 한 번 행복을 느끼고 나면 그 느낌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런 즐거운 느낌에 목숨을 건다.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한자어로 ‘행복’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즐거움이라 한다. 이처럼 행복 또는 즐거움 이라 번역되는 말을 빠알리어로 ‘수카’라 한다. 그런데 수카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는 것이다. 오욕락도 수카이고, 삼매의 경험도 수카이고, 열반도 수카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고득락이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고득락에 대하여 ‘이고득열반’이나 ‘괴로움을 소멸하는 것’이라고 써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이의를 제기한다면 ‘초딩’수준의 사고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또 ‘해탈’이나 ‘열반’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고 하여 “모두 출가하라는 말이냐?”라고 비난한다면 단세포적 반응으로서 ‘유치원생’이나 하는 말이라 볼 수 있다. 또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을 썼을 때 “재가자 주제에”라고 비방한다면 이는 단지 반대를 위한 반대이고, 또 성냄에 뿌리박은 시기와 질투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떼 쓰는 아이와 같고 간난아이의 ‘옹알이’같은 것이다. 더 나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방한 것이 된다. 따라서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은 그 어떤 주장도 초딩수준의 말, 유치원 수준의 사고, 간난아이의 옹알이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은 말은 모두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삿된 견해로 흐르기 쉽다. 그래서 경전에 근거하는 말은 정견(正見)이 되고, 경전에 근거 하지 않는 말은 사견(私見)이 된다.
2014-03-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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