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파워블로거라 하는데, 블로그의 영향력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2. 11:04

 

파워블로거라 하는데, 블로그의 영향력은?

 

 

 

블로그의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최근 불교닷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하도겸 칼럼'의 표현을 두고 촉발된 논란이 대형 포털로 옮겨갔다. 다음 파워블로거인 '진흙 속의 연꽃'(blog.daum.com/bolee591)은 26일 "'중놈과 땡중' 승가모독인가 표현의 자유인가, 글로서 정화불사를" 글에서 하도겸 필화를 다뤘다.

 

(포털로 번진 '중놈'과 '땡중' 논란, 불교닷컴 2014-02-28)

 

 

blog

 

 

지난 2 26“중놈과 땡중”승가모독인가 표현의 자유인가, 글로서 정화불사를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바 있다. 글을 인용한 기사에서 파워블러거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파워블로거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미디어다음에서 제공하는 블로그 서비스에서 글을 올리고 있으나 아직까지 미디어다음에서 선정한 파워블로그 명단에 들어간 적도 없고 또 파워블로거라고 부른 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힘을 뜻하는 파워를 집어 넣은 것은 그 만큼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여 진다.

 

종종 실린 글이 교계인터넷매체에 소개 되기도 한다. 또 오마이뉴스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는 기사에서 필명이 소개 되고 글의 내용이 인용되기도 한다. 그런 글들은 대부분 교계의 문제점에 대하여 비판한 것들이다. 그러나 교계비판에 대한 글은 극히 일부분이다. 대부분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글의 신뢰도

 

글에는 신뢰도가 있다. 일반적으로 논문에 대하여 신뢰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한다. 객관적으로 검증된 사실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인용한다. 그 다음으로 신문기사라 볼 수 있다. 기사는 철저하게 팩트(fact, 사실)’위주로 작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신뢰하는 편이다.

 

그러나 카페나 블로그, 게시판 등 인터넷에 올려진 수 많은 글들은 그다지 신뢰받지 못한다. 어떤 이는 읽을 가치도 없는 쓰레기로 취급하기도 한다. 왜곡된 주장이나 잘못 알려진 것에 대하여 검증없이 자신의 견해가 실려 작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블로그에 실려 있는 글 역시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될 것이다.

 

올린 글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흔한 오류는 문법이 틀린 경우이다. 아직까지 받침을 어떻게 처리 해야 하는지 햇갈릴 때가 많다. ‘집을 짓다’라고 하였을 때 ‘짖다’라고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짖다개가 짖다에 해당되나 급히 쓰다 보면 오류가 나기 쉽다.

 

또 어떤 경우 뜻이 바뀌어 있는 경우도 있다. 문맥상으로 보았을 때 반대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이 경우 글을 보시는 분들이 지적해 준다. 그러면 고맙다는 인사말과 함께 즉시 수정에 들어간다. 그래서 잘못 된 부분을 지적해 주는 분이 가장 고맙다.

 

아무도 지적해 주지 않았을 때 잘못된 문장이 인터넷바다를 떠 다닐 수 있다. 오른쪽 마우스버튼을 허용해 놓았기 때문에 누구나 스크랩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긁어 가는 것을 막도록 조치해 놓지 않는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은 많이 퍼가면 퍼갈수록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법상에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 ‘불교의 목적이 행복추구에 있는 것이라기 보다 열반에 있다’라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문구로 넷상에서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철저하게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원칙을 고수 한다. 이런 원칙의 고수에 대하여 공감을 표현하는 이들이 많다.

 

저 산이 관악산이라고 불러 달라고 한적이 없건만

 

한번도 파워블로거라고 불러 달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음에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것도 영향력 있는 교계신문사이트에서 그렇게 부르고 있다. 마치 창문 밖에 보이는 저 산이 한번도 관악산이라고 불러달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관악산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름을 부여 한다. 이름이 부여 되어야만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명칭은 비록 한 개인일지라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주민등록상의 이름으로 불리지만 직장에 가면 김대리, 이과장, 박부장 등으로 불리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 또는 아빠로 불리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Samaññā hesā lokasmi

nāmagotta pakappita-
Sammucc
ā samudāgata

tattha tattha pakappita-

 

세상의 이름이나 성은

명칭의 시설에 지나지 않으니,

그때 마다 통하는 명칭으로 생겨나

여기 저기 시설되는 것입니다.(stn648)

 

(Vāseṭṭhasutta-와셋타의 경, 숫따니빠따 Sn3.9, 전재성님역)

 

 

전재성님의 책에서는 이 게송에 대한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일본의 나까무라 하지메역과 이를 중역한 법정스님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としとして

けられているものは、にすぎない。

まれた)そのそのけられて、

約束めによってかりにけられてえられているのである。

 

(stn648,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역)

 

 

세상에서 쓰는 이름이나 성은

통칭(通稱)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태어난 그때마다

임시로 붙여져 전해지는 것이다.

 

(stn648, 법정스님역)

 

 

전재성님 역에서 “시설에 지나지 않으니”라는 말은 ‘pakappita’에 대한 번역이다. 이는 pakappeti의 과거분사형으로 ‘considered; designed; arranged, 分別した, えた, した, った’의 뜻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이름이 부여 되어 불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불리는 것은 이름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불리워지기 때문이다. 별명 같은 것도 이에 해당된다.

 

또 하나의 이름 별명(別名)

 

중학교 다닐 때 여선생님이 있었다. 그 선생님은 별명짓기에 가히 천재적인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외모와 행동을 보고서 즉석에서 별명을 짓는 것이다. 주로 동물에 대한 것이 많았다. 이렇게 한번 별명이 지어지면 그때부터 이름 대신에 주로 불리웠다.

 

회사 다닐 때 몬다이상이 있었다. 일본어를 알아야 업무가 원할하게 진행 되기 때문에 일본어 배우는 열풍이 불었는데 그 친구는 이제 갓 일본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런데 말끝마다 문제가 있다는 뜻의 몬다가 아리마쓰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다녔다. 그래서 그 친구에 대하여 몬다이상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별명은 또 하나의 이름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명칭에 대하여 그때 그때 붙여 주는 것이라 하여 여기 저기 시설되는 것입니다.(tattha tattha pakappita, stn648)”라 하였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불리워지는 명칭

 

창문 밖의 저산이 언제 관악산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관악산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어떤 사람이 사기꾼이라고 불러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를 보면 사기꾼이라고 한다. 이렇게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불리워지는 것이 명칭이다. 와셋타경(Sn3.9)에서 이어지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무지한 사람에게

그릇된 견해가 오랜 세월 잠재됩니다.

무지한 사람은

‘태생에 의해서 바라문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stn649)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나,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아닌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인해 바라문인 자가 되기도 하고,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아닌 자도 되는 것입니다. (stn650)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로 인해 장사치가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고용인이 됩니다. (stn651)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전사가 되며,

행위로 인해 제관이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왕이 됩니다. (stn652)

 

현자들은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그 행위를 봅니다.

그들은 연기를 보는 님으로서,

행위와 그 과보를 잘 알고 있습니다. (stn653)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로 인해서 존재합니다.

뭇 삶은 달리는 수레가 축에 연결되어 있듯이

행위에 매여 있습니다. (stn654)

 

 

게송을 보면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여기서 행위라고 한 것은  ‘Kamma’에 대한 번역어이다. Kamma는 영어로 ‘action’이라 번역 되는데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kamma

: (Sanskrit: karma): 'action', correctly speaking denotes the wholesome and unwholesome volitions (kusala- and akusala-cetana) and their concomitant mental factors, causing rebirth and shaping the destiny of beings.

 

 

행위를 뜻하는 깜마는 선한 행위와 불선한 행위 모든 것에 해당되는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하여 전문술어로 꾸살라 쩨따나아꾸살라 쩨따나라 하였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쩨따나 (cetana) ‘라는 말이다.

 

왜 의도가 중요할까?

 

쩨따나는 ‘의도’라 번역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52가지 마음의 작용(마음부수) 중의 하나로서 모든 마음에 공통적으로 일어난다. 참고로 모든 마음에 공통으로 일어나는 마음부스는 접촉(팟사), 느낌(웨다나), 지각(산냐), 의도(쩨따나), 집중(에깍가따), 생명기능(지위따인드리야), 작의(마나시까라) 이렇게 일곱 가지이다.

 

그렇다면 왜 의도가 중요할까? 이는 존재로 하여금 재생의 원인이 되는 행위를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또 존재의 운명(destiny)을 형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행위에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그런 행위는 불선한 것도 있지만 선한 것도 있다. 그래서 선업을 지으면 선처에 나고 불선업을 악처에 재생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의도에 따른 행위의 과보는 지금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로 인해 장사치가 되고..(stn651)”라고 하였다.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전사가 되며, 행위로 인해 제관이 되고.. (stn652)”라 하였다. 농부는 농부가 되고자 하는 현재의 의도적 행위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기꾼은 어떨까?

 

피치 못하게 사기꾼이 되는 경우

 

농부는 자신을 농부라고 소개할 수 있다. 기술자 역시 자신을 기술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선한행위에 대한 과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둑놈과 사기꾼은 다르다.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불선한 행위에 대한 과보로 부여된 명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도둑놈이 되고 사기꾼이 되는 경우도 있다. 돈이 없을 때이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하다 나라의 경제상황이 좋지 않아 부도가 나버렸을 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에게 도둑놈또는 사기꾼이라는 명칭을 붙여 줄 것이다. 이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이다. 한번도 도둑놈이나 사기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공감하는 글을 쓰고자

 

한번도 파워블로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향력 있는 교계신문사이트에서 파워불로거라고 소개 한 것 대하여 부끄럽고 창피하게 생각한다. 보통불자의 일상적인 글쓰기로서 B급 삼류글쓰기를 지향하는 입장에서 과분한 명칭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종종 매스컴에서 필명과 함께 올린 글이 인용 되는 것을 보면 인터넷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작은 생각 하나에 대하여 올린 글이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이슈화 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정책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아젠다로서 활용될 수 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한다면 더욱더 신중하게 글을 써야 한다. 또 가급적이면 품위있고 격조 있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글쓰기는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이다. 경전을 바탕을 한 글쓰기를 하였을 때 대부분 공감하기 때문이다.

 

 

 

2014-03-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