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나는 근거 없는 비난을 참아 내리라” 부처님의 아힘사(ahimsa)

담마다사 이병욱 2014. 2. 20. 16:42

 

나는 근거 없는 비난을 참아 내리라 부처님의 아힘사(ahimsa)

 

 

 

아힘사(ahimsa)의 뜻은

 

사람들은 누구나 폭력을 싫어 한다. 신체적 폭력이든 언어 폭력이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폭력을 싫어 한다. 이는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폭력의 반대말이 비폭력이다. 그런데 비폭력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하다. 그것은 비폭력이라는 말의 대명사가 마하트마 간디이기 때문이다.  간디가 말한 비폭력은 아힘사의 번역어이다. 아힘사에 대한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

 

 

이에 간디는 사상만을 연구하기보다 실천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간디는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지향하는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중에서도 인생의 과업으로 삼고 집중했던 것은 비폭력을 의미하는 ‘아힘사’이다. 아힘사는 자이나교, 불교, 힌두교에서 강조한 아힘사는 살생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himsa’와 금한다는 뜻의 부정접두사 ‘a’의 합성어이다. 아힘사는 불살생(不殺生), 불상해(不傷害) 그리고 비폭력을 뜻한다.

      

(종교 평화를 말하다-비폭력 평화주의자 간디[2] “비폭력 ‘평화’의 목적은 ‘인류의 구원’”, 천지일보 2013-07-18)

 

 

비폭력을 아힘사라 한다. 살생을 뜻하는  himsa에 부정 접두어 a가 붙어서 ahimsa라 하는데 원뜻은 불살생의 의미이다. 그러나 간디가 비폭력 저항운동을 하면서 아힘사라는 말이 비폭력의 뜻하는 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초기경전에는 불살생과 비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불교에서 강조 하는 오계 중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불살생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Sabbe tasanti daṇḍassa,

sabbe bhāyanti Maccuno,
Attāna
upama katvā,

na haneyya na ghātaye.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 (Dhp129, 전재성님역)

 

 

법구경 단다왁가(Daṇḍavagga, 10)에 있는 게송이다. 여기서 단다(Daṇḍa)’‘a stem, stick’의 의미로 막대기라는 뜻이다. 회초리, 몽둥이라는 뜻을 가진 단다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폭력이라 번역하였다. 그래서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Sabbe tasanti daṇḍassa)”라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하여 나까무라 하지메도 すべての暴力におびえ라 하여 전부의 사람들은 폭력을 두려워 하고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타닛사로 빅쿠는 All tremble at the rod,라 하였다. 이는 몽둥이의 뜻을 가진 the rod으로 번역한 것이다.

 

몽둥이는 누구나 두려워 하는 것이다. 몽둥이로 맞으면 몸에 상해를 입고 잘못 하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 (sabbe bhāyanti Maccuno)”라 하여 죽음과 동의어로 쓰였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

 

그러나 모든 존재가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 (sabbe bhāyanti Maccuno)”라 하여 어법상 모든을 뜻하는 말 삽베(sabbe)’ 가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예외가 있다는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아라한은 예외라 한다. 마치 모두 모여라라고 하였을 때 왕자들과 대신들을 빼고 모이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한다. 왜냐하면 아라한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자아에 대한 실체적 관념이 사라져 죽어야 하는 존재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사랑스럽기 때문에

 

누구나 폭력을 두려워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몽둥이(폭력)을 두려워 할까?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Sabbe tasanti daṇḍassa,

sabbesa jīvita piya,
Att
āna upama katvā,

na haneyya na ghātaye.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삶은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그들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 (Dhp130, 전재성님역)

 

 

사람들이 몽둥이를 무서워 하는 이유가 있다. 게송에 따르면 자신의 삶이 사랑스럽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은 제외 된다. 주석에 따르면 번뇌 다한 자는 사람과 죽음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아라한은 때리면 맞는다고 한다. 한대 맞았다고 해서 복수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탐욕과 성냄 등 모든 번뇌가 사라진 아라한에게 있어서 더 이상 증오의 감정이 일어 날 수 없기 때문이다.

 

폭력을 일삼는 자들

 

폭력을 일삼는 자들이 있다. 깡패나 조폭들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법 보다 주먹이 더 가깝다. 조폭의 경우 각목을 들고 설치는 것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다. 몽둥이를 들고 집단 난투극을 부리는 장면을 보면 무자비하기 그지 없다. 이렇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세존]

“대왕이여,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이든 신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며 정신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겠습니까? 그들은 미워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삐야경-Piyasutta-사랑스런 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4(1-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빠세나디왕에게 폭력을 행사는 자들의 특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공통적으로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몽둥이를 휘두른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악한 자는 자신이 믿지 않더라도 자기가 자신의 적이다. 선한 자는 반대로 자신의 친구이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자기자신을 적으로 삼기 때문에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신구의  삼업으로 선업을 짓는 자이다. 그래서 자기자신은 자기자신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다. 이런 자는 신구의 삼업으로 악업 짓기를 밥먹듯이 하는 자이다. 깡패나 조폭이 이에 해당된다. 인터넷 시대라면 언어폭력을 저지르는자 들이다. 이런 자들은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다. 왜 그런가?

 

폭력을 일삼는 깡패나 조폭들이 폭력을 행사 할 때 무자비하다. 한 마디로 맞을 짓을 했기 때문에 맞아야 된다고 보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러다 보니 패도 무자비하게 팬다. 이런 폭력 앞에 자비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폭력을 일삼는 자들은 공통적으로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적으로 삼기 때문에 무자비한 폭력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삼는 자들은 공통적으로 악업을 짓는다. 신구의 삼업 자체가 악업인 것이다. 악업을 일삼는 자들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들은 미워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S3:4)”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기자신을 미워 하기 때문에 남들 또한 미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S3:4)”라고 하였다. 이를 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

(piyo atta)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

(apiyo atta)

신구의 삼업으로 선업을 짓는 자

신구의 삼업으로 악업을 짓는 자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의 친구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 의 적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다. 자기자신을 적으로 여기기 때문에 타인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사이코패시 (Psychopathy)

 

깡패나 조폭들의 심리상태는 피도 눈물도 없다고 한다. 쳐다 보았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폭력을 행사한다든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여 피가 낭자하도록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자신이 사랑스럽다면 결코 남에게 상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폭력을 일삼는 자가 있다면 사이코패시 (Psychopathy)’ 라 볼 수 있다. 이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뜻한다. 폭력을 행사하고도 전혀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자를 말한다.

 

사이코패시 양심과 수치심이 없다. 자신에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든지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되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 한다. 이는 현실에서 몽둥이를 휘두르는 자들 뿐만 아니라 넷상에서 언어 폭력을 가하는 자들도 해당된다.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자

 

몽둥이를 든 자들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다. 자신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적과 같다. 그래서 어떤 악행이든지 서슴없이 한다. 설령 그것이 죄악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이는 인과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행위에 대한 두려움을 안다면 결코 폭력을 행사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남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고 해코지 하고 고통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법구경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Paradukkhūpadānena

attano sukham-icchati,
Verasa
saggasasaṭṭho

verā so na parimuccati.

 

누구든 타인에게 고통을 주며

자신의 행복을 구하는 자는

원망에 얽힘에 매이나니,

원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Dhp291,전재성님역)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자가 있다. 그것이 신체적인 것인든 언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고통을 주며 쾌감을 느끼는 자들이 있다. 남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자들이다. 일종의 변태이고 사이코패시이다.

 

게송에서는 원망에 얽힘에 매이나니 (Verasasaggasasaṭṭho)”라 하였다. 주석에 따르면 학대를 학대로 갚고 공격을 공격으로 갚고 증오를 증오로 갚는 자를 말한다.(DhpA.III.451)”라 하였다. 마치 눈에는 눈, 코에는 코 하는 식으로 보복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증오를 증오로 갚는 자라 하였는데 이는 한 번 미운놈은 영원히 미운놈이 된다. 그래서 제거해야 될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미움과 증오에 얽매이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비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자비심은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타인에게 결코 고통을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한을 사고 두려움에 떨 것

 

타인에 대한 자비심은 불살생, 비폭력 정신으로 구현된다. 그래서일까 오계 중에 불살생 항목이 가장 먼저 나온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a gahapati, pāātipātī pāātipātapaccayā diṭṭhadhammikampi bhaya vera pasavati, samparāyikampi bhaya vera pasavati, cetasikampi dukkha domanassa paisavedayati,2 pāātipātā paiviratassa eva ta bhaya vera vūpasanta hoti.

 

장자여,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자는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침으로써 현재의 삶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의 세상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속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일을 삼감으로써 그 원한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Añcabhayaverasutta- 다섯 가지 두려운 원한의 경, 상윳따니까야 12:41, 전재성님역)

 

 

다섯 가지 두려운 원한의 경(S12.41)’은 오계에 대하여 설명 되어 있다. 폭력을 행사는 자나 생명을 해치는 자의 심리 상태에 대하여 잘 표현 되어 있다. 폭력이나 살생을 가한 자는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 하였다.

 

지금 누군가 살인을 하였다는 완전범죄로 은폐 되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양심은 속일 수 없다. 그래서 마음 한 구석에서는 늘 불안하고 두려워 한다. 설령 그가 인과를 부정하는 자라 할지라도 문득문득 떠어르는 잔혹한 행위마저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꿈속에서 끔찍한 장면이 떠 오른다면 이미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아무 곳에도 숨을 곳이 없다. 비록 완전범죄를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삼계에 안주 할 수 있는 곳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 있는 생명에게 폭력을 가하고 해치면 상대방으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고 또한 동시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두려움에 떨 것이라 하였다.

 

사회에서 생매장 시키는 가장 강력한 방법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도 폭력을 많이 받았다. 이는 신체적인 폭력이 아니라 언어적 폭력, 정신적인 폭력이다. 근거 없이 비방하고 비난 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부처님이 수모를 당하는 장면이 있다자야망갈라가타’에서 볼 수 있자야망갈라가타 다섯 번째 게송을 보면 거짓 임신녀이야기가 나온다. 이교도 중에 요정과 같이 아름다운 ‘찐짜 마네위까’라는 여인을 시켜 거짓 임신녀로 만든후,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뱃속의 아이가 부처님의 아이임을 말하면서 모욕을 주는 장면에 대한 것이다. 이는 법구경 인연담 176번에 실려 있다.

 

 

 

 

자야망갈라가타 5 게송에서 위까

 

 

 

그렇다면 거짓임신녀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대하였을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학대를 학대로 갚고 공격을 공격으로 갚고 증오를 증오로 갚았을까? 게송에 따르면 성자의 제왕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섭수하셨네. (Santena  soma-vidhinā  jitavā  munindo)”라 하였다. 부드러움과 고요함으로 일관한 것이다.

 

이교도들은 부처님을 중상모략하고자  거짓임신녀까지 동원하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여자관계를 폭로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부처님당시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 없다. 사회에서 생매장 시키는 방법 중에 가장 효과가 뛰어난 것이 여자관계이기 때문이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천박한 자들

 

이와 같은 중상모략과 비방, 비난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대하였을까?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Aha nāgo va sagāme

cāpāto patita sara
Ativ
ākya titikkhissa,

dussīlo hi bahujjano.

      

코끼리가 전쟁터에 나아가면

활에서 화살이 쏟아져도 참아내듯,

나는 근거 없는 비난을 참아내리라.

사람들은 대부분 계행을 지지키 않으니. (Dhp320, 전재성님역)

 

 

세 번째 구절에서 근거 없는 비난 (Ativākya)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중상모략이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Ativākya : DhpA.IV.3에 따르면, 여덟 가지 천박한 행동에 의해서 야기 되는 위범에 대한 용어이다. 1)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2) 듣지 않은 것을 들었다고 말하고, 3) 기억하고 있지 않은 것을 기억한다고 말하고, 4)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5) 본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2) 들은 것을 듣지 않았다고 말하고, 3) 기억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4) 알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Ativākya 각주, 전재성님)

 

 

근거 없는 비난은 모두 여덟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행위에 대하여 모두 천박한 행위에 따라 야기 되는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근거 없이 비난이나 비방, 중상모략을 일삼는 자들은 한마디로 천박한 자들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은 근거 없는 비난에 대하여 참아내리라. (titikkhissa)라 하였다. 어떻게 참는 것일까? 각주에 따르면 위와 같은 부당한 말을 참아 내리라는 뜻이라 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자야망갈라가타 5번 게송에서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섭수하셨네 (Santena  soma-vidhinā)라고 하여  거짓임신녀를 대하는 태도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비난과 비방, 중상모략에 대하여 일체 대응 하지 않았다. 만일 부처님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증오를 증오로갚는다면 동급이 되고 말 것이다. 왜 이렇게 대응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마지막 구절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계행을 지지키 않으니 (dussīlo hi bahujjano)”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주석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은 천박해서 개인적인 선호에 따라, 숙고가 없이 말을 지껄이고 다툼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나의 중요한 할 일은 참아 내는 것이다.(DhpA.IV3)”라고 되어 있다.

 

낚이지 않으려면

 

천박한 자에게 대응하면 똑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천박한 자의 특징은 즉흥적이라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고 즉흥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이처럼 숙고 없이 말을 하고 행위를 하였을 때 필연적으로 악업을 지을 수밖에 없다.

 

이는 다름 아닌 인과를 모르는 것이다. 인과를 모르기 때문에 계행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근거 없이 비난과 비방을 일삼고 중상모략하는 자들은 계행이 엉망이라는 말과 같다. 행위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에 그 어떤 짓도 서슴없이 하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싸움을 걸어 올 때 거기에 말려 든다면 요새 말로 낚였다!”라고 볼 수 있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에 대한 비난과 비방, 중상모략 장면이 수 없이 등장한다. 그때 마다 부처님은 침묵으로 고요함으로 대하였다. 천박한 자들이 싸움을 걸어 올 때 넘어 가지 않는 방식이라 보여 진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낚이지 않을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법구경 게송이 말해준다.

 

Sace neresi attāna,

kaso upahato yathā,
Esa pattosi nibb
āa,

sārambho te na vijjati.

 

깨어진 놋쇠그릇처럼

그대 자신이 동요하지 않으면,

그것이 열반에 이른 것이니

격정은 그대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Dhp134, 전재성님역)

 

 

비난에 대하여 깨어진 놋쇠그릇처럼 (kaso upahato yathā동요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렇게 대응하는 것이 낚이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왜 깨어진 놋쇠그릇처럼 동요하지 말라 하였을까?

 

그렇다면 왜 깨어진 놋쇠그릇처럼 동요하지 말라 하였을까? 이에 대한 각주는 다음과 같다.

 

 

DhpA.III.58에 따르면, 언저리가 잘리고 깨어져 땅위에 놓인 놋쇠그릇이 손이나 발이나 막대기로 쳐도 동요하지 않고 소리내지 않는 것처럼, 그대는 자신을 동요하지 않게 하고 고요하게 할 수 있다.

 

(깨어진 놋쇠그릇 각주, 전재성님)

 

 

깨어진 놋쇠는 쓸모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곳에나 버려져 있다. 아무도 쳐다 보지 않는다. 그래서 막대기로 쳐도 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비난이나 비방에 대하여 마치 깨어진 놋쇠그릇 처럼 동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가진 다면 열반에 이른 것이나 다름 없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각주에 따르면 명상수행을 하는 자로서 열반을 지금 당장 얻지는 못해도 열반을 얻은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런 경우 그대에게는 그대는 계행이 부족하다. 당신들 모두 계행이 부족하다.’라는 등의 앙갚음을 하는 언어의 특징을 갖는 앙갚음이 사라진다. (DhpA.III.58)”라 하였다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Dhp320에서 비난하는 자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대부분 계행을 지지키 않으니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Dhp134의 주석에는 이 구절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비난, 비방, 중상모략을 일삼는 자들에 대하여 계행등의 이유를 들어 반응을 보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계행이 엉망인 자에게 굳이 그대는 계행이 부족하다는 등의 언어적 표현을 할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만일 그대는 계행이 부족하다. 당신들 모두 계행이 부족하다.” 등의 말을 한다면 상대방에게 말려 드는 것이다. 싸움을 걸어 망신을 주고 싶어 하는 상대에게 낚이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 어떤 비난이나 비방, 중상모략에 대해서도 마치 깨진 놋쇠그릇처럼 동요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자야망갈라가타에서 거짓 임신녀에게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섭수하셨네 (Santena  soma-vidhinā)라고 되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비난과 비방, 중상모략을 일삼는 천박한 자들에 대하여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대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2014-02-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