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불자들이 삼보에 귀의하는 진정한 이유는?

담마다사 이병욱 2014. 2. 17. 16:31

 

 

불자들이 삼보에 귀의하는 진정한 이유는?

 

 

 

삐야왁가를 음악으로 만든다면

 

초기경전에서 게송은 노래의 가사와 같다. 네 구절로 이루어져 있는 게송에 곡만 붙이면 노래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네 구절된 게송이 여러 개 모이면 숫따(경)이 되고 왁가(품)이 된다.

 

숫따니파따에서 라따나경(Sn2.1)의 경우 모두 17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현대음악으로 만든 것이 황혜음(黃慧音, Imee Ooi)음악이다. 빠알리어로 된 가사에 곡을 붙여 만든 음악을 들어 보면 신심이 절로 나고 마음 또한 청정하게 되는 것 같다.

 

법구경의 경우 동일한 주제의 게송을 모아 놓은 것을 왁가()’라 한다. ‘삐야왁가(Piyavagga,16)’의 경우 사랑하는 자의 품이라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열 두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품을 읽어 보면 매우 아름다운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 음악을 만든다면 황혜음의 라따나경 못지 않은 훌륭한 음악이 될 것이다.

 

그런데 삐야왁가의 내용을 연상하는 대중가요가 있다. ‘사랑도 미움도’ 라는 노래이다. 80년대 말에 유행하던 유행가이다. 이  노래 가사를 근거로 하여 글을 쓴 것이 ‘사랑도 미움도, 읊으면 노래가 되는 게송’이다. 글에서 이 유행가는 삐야왁가의 여러 게송 중에 일부 구절을 채용하여 하나의 노래로 만들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누군가 ‘외눈’으로 본다면 이런 설명에 대한 오해를 할 수도 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법구경의 위치

 

법구경의 모든 게송에는 부처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초기경전의 내용이 함축 되어 있어서 게송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게송 그 자체의 문구만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5세기 붓다고사는 인연담 형식으로 주석하였다. 이렇게 전승되어 온 것이 담마빠닷타까타(Dhammapadatthakatha, 法句義釋)’이다. 그래서 거해스님역의 법구경이나 전재성님역의 법구경-담마파다에는 각 게송마다 인연담이 실려 있다. 이처럼 게송에 인연담이 있다는 것은 불자라면 상식에 속한다.

 

법구경에 실려 있는 423개의 게송을 보면 주옥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신통이나 신비 등 초월적 내용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애용되는지 모른다.

 

법구경에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네 개의 구절로 압축되어 있다. 그래서 수지독송하기 쉽게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현재 한국에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 스리랑카의 담마키띠빅쿠에 따르면, 스리랑카의 경우 빅쿠계(구족계)를 받기 이전에 법구경을 모두 외운다고 한다. 12세에 출가하여 20세 정도가 되면 비구계를 받는데 법구경을 모두 외워야 비구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법구경이 테라와다 불교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하나의 지향점이 있는데

 

대중가요 사랑도 미움도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보여 지는 법구경 사랑하는 자의 품이다. 그렇다면 이 품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함일까? 12개로 구성되어 있는 게송을 보면 마치 게송들이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론, 본론, 결론 식으로 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경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각 게송마다 인연담이 있어서 게송만의 독특한 가르침이 담겨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하나의 지향점이 있다. 그것은 서론에 해당 되는 첫 번째 게송에서 잘 나타나 있다. 첫번째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Ayoge yuñjam-attāna,

yogasmiñ-ca ayojaya,
Attha
hitvā piyaggāhī,

pihetattānuyogina

 

알맞지 않은 것에 자신을 바치고,

알맞은 것에 헌신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자에 매달려 목표를 버리는 자는

자기에 전념하는 자를 부끄러워 하네.

 

(법구경 Dhp209, 전재성님역)

 

 

 

 

Dhp209

 

 

 

첫 번째 구절에 “알맞지 않은 것에 자신을 바치고 (Ayoge yuñjam-attāna)”라고 되어 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알맞지 않은 것(Ayoga)’에 자신을 바친다는 뜻은 ‘가서는 안 될 곳’을 가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에 종사하는 것(Ayoniso manasikara)’을 말한다. 넓게 해석하면 ‘모든 형성된 것은 영원하고 즐겁다. 모든 것은 실체가 있다.’라고 전도된 생각을 가는 것을 말하고, 좁게 생각하면 ‘여러가지 부적절한 행실’에 종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협의의 ‘여러가지 부적절한 행실’은 어떤 것일까? 각주에 따르면 1) 매춘부가 있는 곳에 가는 것, 2) 남편이 죽거나 남편이 멀리 떠나 있는 여자가 있는 곳에 가는 것, 3) 결혼 적령기에 도달하지 않고 가정에서 지내는 여자가 있는 곳에 가는 것, 4) 성적으로 흥분되고 도착된 거세된 남자가 있는 곳에 가는 것, 5) 수행녀가 있는 곳에 가는 것, 6) 술취한 사람이 자주 가는 술집 이렇게 여섯 가지라 한다.

 

이후 게송(Dhp210~216)에서는 사실상 여섯 가지 부적절한 행실에 대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프롤로그에 해당되는 Dhp209에서는 알맞지 않은 것에 자신을 바치고라 하여 이후 전개 되는 게송에 대하여 예고 하고 있다.

 

게송에서 세 번째 구절을 보면 ‘목표’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Attha의 번역어이다. 사전에 따르면 ‘works for welfare’라 되어 있다. 복지를 위하여 노력한다로 번역 될 수 있다. “목표를 버는 자는 (Attha hitvā)”이라 하였을 때 이는 세 가지 배움(삼학)을 버리는 자라고 각주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목표는 계정혜 삼학임을 알 수 있다.

 

계정혜 삼학을 닦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궁극적으로 실현 해야 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품에서 결론부에 해당되는 게송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218번 게송이다.

 

 

Chandajāto anakkhāte,

manasā ca phuo siyā,
K
āmesu ca appaibaddhacitto,

uddhasoto ti vuccati.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의욕하고

정신적으로 충만하여

감각적 욕망에 마음이 묶이지 않은 님이

흐름을 거슬러 가는 님이라 불리운다.

 

(법구경 Dhp218,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첫 번째 구절을 보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의욕하고 (Chandajāto anakkhāte)”라 번역 되어 있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의욕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 구절은 각주를 보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열반’이라 하였다. 이는 주석에 따른 것이다.

 

각주에 따르면 정의 될 수 없는 것열반이라 하였다. 이는 이러 이러 하게 만들어 진 것이라는 등으로 서술 될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 그렇다면 번역에서 왜 의욕(Chanda)’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을까?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열반에 의욕을 일으킨다는 것은 (출세간적) 실천욕구를 일으켜, 용맹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Dhp.A.III.289)”라고 설명되어 있다. ‘의욕또는 열의라고 번역되는 마음부수 찬다(Chanda)’가 열반을 실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서론에 해당되는 209번 게송에서 목표는 결론 부분에 해당되는 218번 게송에 따르면 열반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법구경에서 하나의 품은 여러 개의 독립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대부분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연담을 누가 만들었을까?

 

법구경에서는 각 게송마다 인연담이 있다. 그래서 초기경전에 관심 있는 불자라면 누구나 인연담에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인연담에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전재성님의 법구경 해제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인연담에 대한 글이 있다.

 

 

이 법구의석은 자따까 즉, 본생경보다 오래 된 것이다. 아주 질서 있게 짜여진 도입부의 시에 따르면, 싱할리 원본의 고대의소에서 꾸마라 깟사빠 장로의 요청으로 빠알리어로 번역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붓다고싸의 저술이라 볼 수 없다.

 

(법구경 해제, 전재성님)

 

 

일반적으로 법구경의 주석과 인연담은 붓다고사가 편집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해제글에 따르면 붓다고사의 작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법구경 인연담은 자따까 보다 더 오래 된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법구경에서 보는 인연담은 보다 오래된 원본에 근거하기 때문이라 한다. 다만 붓다고사가 싱할리어로 된 삼장을 빠알리로 다시 옮기는 과정에서 여러 전승되어 온 원본과 주석을 참고하여 편집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인연담은  어떻게 구성 되어 있을까?

 

법구경 인연담이 실려 있는 책은 거해스님의 법구경과 전재성님의 법구경-담마파다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들 인연담을 보면 재미 있는 이야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드러나게 위한 것이다. 그래서 법구의석에 표현된 인연담 형식의 주석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1) 이야기와 관계된 게송의 인용

2) 이야기와 관계된 사람의 언급

3) 현재의 인연 이야기

4) 게송

5) 게송의 단어에 대한 주석

6) 청자의 정신적 이익에 대한 언급

7) 전생의 인연 이야기

8) 현재의 인연 이야기와 전생의 인연 이야기 사이의 인물의 일치

 

 

이렇게 여덟 가지로 인연담이 구성되어 있다.

 

본말이 전도된 법구경 인연담

 

그런데 인연담 위주로 법구경을 접한다면 본말이 전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위험성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해제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베다 시대부터 힌두 주석가들은 설명적인 이야기를 주석에 첨가하길 즐겨했다. 브라흐마나 문헌에는 색다른 흥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베다나 산스크리트 문헌의 주석에서 저자들의 주요한 관심사는 문헌의 단어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좋은 이야기들이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는데 어학적인 논의보다 탁월하다는 것을 발견한 이래, 저자들은 주석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도입하는 것을 스스로 허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경전해석에 허구적 이야기를 도입하는 데는 신중을 기했다. 단지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의 도입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빠알리 경전의 주석가들의 경향은 이와 정반대이었다. 언어적인 설명은 크기에서나 중요성에서나 줄어 들었지만, 이야기의 도입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법구의석에 와서는 법구경의 경전 자체의 해석은 이차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주석의 말미로 밀려났다.

 

(법구경 해제, 전재성님)

 

 

해제글을 보면 인연담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법구의석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 비판하고 있다. 처음에는 단지 경전 문구의 해석에 대한 편으로 이야기가 되입 되었으나 나중에는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의 게송은 이차적인 것이 되어 버려서 인연담을 소개 하고 난 뒤에 말미에 취급하는 정도가 된 것이다.

 

거해스님의 법구경에는 인연담이 소개 되어 있다. 그러나 게송에서 표현 된 단어에 대한 해설은 보이지 않는다.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짧은 내용이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법구경을 보면 인연담이 법구의석에 표현 된 것을 직역하였고 더구나 단어나 문구에 대한 상세한 해석을 볼 수 있다. 이는 해제글에서 역자는 이러한 경과 주석의 역전 현상을 바로 잡아 어디가 주석은 주석으로 처리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위주로 경전의 권위를 바로 잡아 집필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인연담 위주로 법구경을 파악하는 것에 대한 경계의 말이라 볼 수 있다.

 

인연담 위주로 파악하면

 

법구경 사랑하는 자의 품(Piyavagga, 16)’에는 모두 12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게송마다 인연담이 있다. 그런데 인연담 위주로 게송을 접하다 보면 전체를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마치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사랑하는 자의 품에는 모두 12개의 게송이 있다. 그런데 12개를 하나의 주제로 묶어 놓은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말씀 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만일 인연담 위주로 개별적으로 게송으로 파악하였을 때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듯한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래서 품 전체로 파악해야 한다.

 

삐야왁가(16) 구성을 보면

 

법구경 16번 째 품인 삐야왁가에 대하여 검색을 하였다. 그 결과 일본사이트((17)涅槃慈悲(慈愛)ダンマパダ16 するもの)에서 이 품에 해당되는 해석을 발견하였다.

 

설명에 따르면 Dhp209는 삐야왁가 전체의 방향을 제시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Dhp210-216 Dhp209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에 해당되고, Dhp218-220은 결론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서론, 본론, 결론 순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은 것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삐야왁가에 실려 있는 게송을 분류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 분

  

비고1

비고2

Dhp209

사랑하는 자에 매달려

목표를 버리는 자

열반을 포기하는 자

서론

Dhp210

사랑하는 자를 만나지 말라.

사랑하지 않는 자도 만나지 말라.

세간의 상식과 가치관을 완전히 부정함

본론

Dhp211

사랑하는 자를 만들지 말라

Dhp212

사랑하는 것에서 떠나라

Dhp213

애착에서 떠나라

Dhp214

쾌락에서 떠나라

Dhp215

욕망에서 떠나라

Dhp216

갈애에서 떠나라

Dhp217

가르침에 입각하여 진리를 실천

 

팔정도실천

 

결론

Dhp218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의욕함

열반실현

  

 

사랑하는 자에 매달려 목표를 버리는 자

 

도입부에 해당 되는 209번 게송에서는 사랑하는 자에 매달려 목표를 버리는 자에 대한 것이다. 이는 가족이나 연인 등 사랑하는 사람에 속박되어 가르침을 포기하는 자를 말한다. 그런 자에 대하여 자기에 전념하는 자를 부끄러워 하네.( pihetattānuyogina, Dhp209)”라 하였다. 이는 각주에 따르면 부적절한 행위 때문에 승원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세속으로 돌아가는 자라 하였다.

 

속퇴한 자가 나중에 승원에 남아 있는 자를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보다 높은 계행()을 지니고, 보다 높은 마음()을 지니고, 보다 높은 지혜()를 지닌 이를 보았을 때 부러운 마음이 들 것이다. 그래서자기에 전념하는 자를 부끄러워 한다.”라고 한 것이다.

 

삐예히(piyehi)와 아삐예히(appiyehi)

 

일본어 사이트에서 210번과 211번 게송은 가족이나 연인에 대한 것이라 한다. 특히 연인관계라 하였다. 이는 사랑하는 자 (piyehi)’사랑하지 않는 자 (appiyehi)’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까무라 하지메역을 보면 する(사랑하는 사람)’しない(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였다. 법정스님역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미운사람이라 하여, appiyehi 에 대하여 미운사람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거해스님역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사랑치 않는 사람이라 하였다. 타닛사로 빅쿠는 dearundear라 하였다. 이렇게  piyehiappiyehi에 대하여 대부분 번역자가 사랑하는 사람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piyehiappiyehi의 뜻은 광범위하다. piyehi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으로만 번역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초전법륜경 고성제에서 팔고에 대한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다.

 

고성제에서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S56.11)’구절이 있는데, 전재성님 번역에 따르면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라 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여러 가지를 지칭하는 으로 바뀐 것이다. 왜 그럴까?

 

남의 일이라고 생각 되던 것들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최근 법우님을 만났다. 해외성지순례 단골 멤버들이다. 법우님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모였는데 준비 해 간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인터넷을 주문한 숫따니빠따이다. 성전협에서 발간된 것으로 하드커버로 되어 있는 최신판이다. 가격은 45천원에 달한다.

 

책을 주문한 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생일선물로 주기 위하여 구입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모임을 갖자고 연락이 와서 빈손으로 가기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주문한 책을 가지고 갔다. 식당에서 일하는 분에게 주기 위해서이다. 여러 차례 법우님 식당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때 안면을 튼 사이이다. 더구나 블로그에 올려진 글을 열심히 본다고 하기에 선뜻 책을 들고 간 것이다.

 

법우님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한가지 이상 고민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경우가 그렇다. ‘치매가 대표적이다. 요즘 기대수명이 높아지고 오래 살다 보니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질병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치매이다.

 

한 법우님의 어머니에게 치매가 왔다고 하였다. 이전까지는 전혀 자신의 집에 이런 상황이 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이 현실로 닥치자 남의 일이라고 생각 되던 것들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고 하였다.

 

치매와 같은 질병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최악의 질병이라 불리우는 치매를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의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 현실화 되었을 때 이는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appiyehi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 가는(Paisotagāmi)

 

사랑하는 자의 품에서 본론에 해당되는 것이 210번부터 216번 까지 게송이다. 이 게송에서 핵심어는 사랑하는 자, 애착, 쾌락, 욕망, 갈애 이다. 그래서 이를 모두 버려라하였다. 이런 것들에 집착하면 슬픔과 두려움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버려라 하였을 때 단순히 생각한다면 현실 도피로 보여 질 것이다. 단지 괴롭기 때문에 또는 슬픔이 생겨 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한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염세적이거나 현실도피적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적극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것이다. 이는 결론부에 해당되는 218번 게송에서 흐름을 거슬러 간다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흐름을 거슬러 가는 것은 역류도이다. 세상의 흐름이 애착, 쾌락, 욕망, 갈애라면 이와 반대로 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갔을 때 정신적으로 충만하여 감각적 욕망에 마음이 묶이지 않는(Dhp218)”이라 하였다. 이런 역류도는 210번에서 217번 게송과 대조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210번에서 217번 게송에서 계속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것은 사랑하는 자를 만나지 말라(Dhp210)” “사랑하는 자를 만들지 말라(Dhp211)” “사랑하는 것에서 떠나라(Dhp212)” “애착에서 떠나라(Dhp213)쾌락에서 떠나라(Dhp214)욕망에서 떠나라(Dhp215)갈애에서 떠나라(Dhp216)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는 세간의 상식과 가치관을 완전히 부정하는 말이다. 그래서 역류도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면 세상의 흐름과는 거꾸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청원경에서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왜 내가 지금 설해야 하나.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흐름을 거슬러가 오묘하며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

어둠의 무리에 뒤덮인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하네.( S6:1)

 

 

라고 말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게송에서 흐름을 거슬러가 (Paisotagāmi)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역류도(Paisotagāmi)’이다. 그렇다면 역류도는 반드시 출가자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 목표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세간에 대한 것이다. 재가자를 위한 세간적 가르침도 있지만 기본적인 가르침은 출세적 가르침이다. 그래서 어느 경을 보아도 한 곳에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이다.

 

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것이다. 이는 사랑하는 자의 품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이 217 218번 게송이다. 특히 218번 게송에서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의욕하고라는 구절에서 말해 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열반을 지칭한다.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은 명백히 열반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왜 열반을 지향해야만 하는가?

 

법구경에 대하여 동방의 성서라 한다. 이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가장 많이 애송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월, 신통 등이 빠진 법구경 게송을 보면 출세간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런 출세간적 내용이 반드시 출가자에게만 한하는 것일까?

 

만일 부처님 가르침이 출세간적인 것에 한한다면 재가자가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보시공덕을 쌓고 계를 지키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이나 부모를 봉양하고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가르침 등으로 한정되고 말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불교가 아니더라도 타종교나 타가르침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출재가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적용 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열반도 그렇다.

 

부처님은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여 가르침을 펼치시지 않으셨다고 본다. 물론 경에 따라 재가의 가르침에 대한 것도 있지만 부처님의 궁극적 가르침의 목적은 열반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가수행자나 재가수행자 모두 열반이 최종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는 불법승 삼보에 의지 하는 것 자체가 최종적으로는 열반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 생에서 열반을 달성하지 못한다고 죽는 다고 할지라도 그 수행과 노력의 과정 자체가 훌륭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 뜻으로 경전이 기술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서로 연계되어 있는 가르침

 

이처럼 출재가를 막론하고 열반을 지향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목적이다. 이는 출재가를 막론하고 전세계인들에게 가장 애송되는 법구경 게송에서도 볼 수 있다.

 

 

깨달은 님과 가르침과

참모임에 귀의한 님은

올바른 지혜로써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본다.

 

괴로움, 괴로움의 발생,

괴로움의 초월,

괴로움의 지멸로 이끄는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이 있다. (Dhp 190-191, 전재성님)

 

 

불자가 된다는 것은 삼보에 귀의 하고 오계를 준수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삼보에 귀의 하는 것이 불자의 첫 번째 조건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깨달은 님과 가르침과 참모임에 귀의한 님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본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불자가 되어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열반을 실현 해야 말한다. 그래서 사성제을 알고 팔정도를 닦아야 함을 말한다.

 

이 게송에서 괴로움괴로움의 발생이 있다. 이는 고성제와 집성제를 말한다. 이는 애착, 쾌락, 욕망, 갈애 등 게송 210번에서 216번에 해당된다. 이런 망상과 착각이 아닌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괴로움의 초월이고 괴로움의 지멸에 이르는 팔정도이다. 이와 같이 초월과 지멸에 대한 것이 217번과 218번 게송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사랑하는 자의 품에서는 사성제의 진리가 녹아 들어가 있다.

 

불자들이 삼보에 귀의하는 진정한 이유는?

 

법구경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애송되는 경전이다. 스리랑카 빅쿠들이 구족계를 받기 전에 반드시 암송해야 할 정도로 독보적인 경전이다. 그러나 423개에 달하는 게송은 서로 연결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고구마 줄기 캐듯이 하나의 게송은 다른 게송과 관련 되어 있고 또한 사부니까와 연관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게송에 대한 인연담 위주로 파악하려 한다면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외눈으로 경전을 보는 것과 같다. 비록 인연담이 방편으로서 훌륭한 것임에 틀림 없으나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아니다. 따라서 경전이 아니라 하나의 불전문학과도 같은 것이다.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로 보이는 것이 법구경 인연담 이다. 그렇다고 하여 인연담을 폄하 하는 것은 아니다. 교화를 위한 훌륭한 방편이긴 하지만 인연담 위주로 해설 되었을 때 본말이 전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인연담 말미에 게송이 위치함으로서 경전의 내용이 평가 절하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법구경을 대해야 하는가?

 

인연담은 인연담일 뿐이다. 그래서 인연담은 참고만 하는 것이다. 그 대신 품 전체에서 게송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서로 연결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사부니까야의 다른 경과도 연계 되어 있다. 그래서 사부 니까야 자체가 마치 그물코 처럼 연결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한 가지 지향점은 하나이다. 그것은 열반에 포커스가 맞추어진다는 것이다.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열반을 추구하여야 한다. 바로 이것이 불자들이 삼보에 귀의하는 진정한 이유라 본다.

 

 

2014-02-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