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신통변화는 황당무계한 것일까? 여래십력과 사무외 그리고 삼명 육신통

담마다사 이병욱 2014. 2. 14. 19:15

 

신통변화는 황당무계한 것일까?  여래십력과 사무외 그리고 삼명 육신통

 

 

 

우주에 떨어지는 빗방울 숫자까지 아는 부처님

 

한국불자들이 애송하는 경전이 금강경이다. 조계종을 비롯하여 대부분 종단들의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는 것 역시 금강경이다. 그래서 금강경 강의나 금강경을 근거로 하여 법문하지 않는 스님이 없을 정도이다.

 

스님들과 불자들이 크게 의지하고 있는 금강경에 실지실견(悉知悉見)’이라는 말이 있다.여기서 실()자의 뜻은 또는 다하다의 뜻이다. 그래서 ()’이라 읽는다.

 

실지실견의 뜻은 다 알고 다 보다는 뜻이다. 누가 보는가? ‘여래실지실견(如來悉知悉見)’이라 하였으므로 “내(부처님)가 다 알고 다 본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구절에 대한 뜻풀이 하는 스님의 강의를 들어 보면 부처님은 이 지구상의 60억인구 뿐만 아니라 동식물도 다 안다고 한다. 또 직장에 있든 집에 있듯 부처님이 다 아시고 다 보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부처님은 모르는 것이 없어서 화엄경을 보면 “불자들이여, 또 비유를 들자면 큰 구름에서 큰 비를 내리는 것을 대천세계의 중생들은 그 수효를 알 사람이 없으며, 그 수효를 계산하려면 한갓 발광할 뿐인데, 대천세계의 주인인 마혜수라(摩醯首羅)만은 예외이다. 그는 과거에 닦은 선근의 힘으로 물 한방울까지도 분명히 안다. (화엄경, 여래출현품, 법정스님역)”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주에 떨어지는 빗방울 숫자까지 아는 것으로 설명된다.

 

금강경에 묘사된 부처님은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에서도 일체지자라로서 묘사되어 있다. 상윳따니까야와 맛지마니까야에서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 모든 상태에 오염되는 것이 없으니 일체를 버리고 갈애를 부수어 해탈을 이루었네. 스스로 알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하겠는가.(M26)”라는 게송에서 일체를 아는 자라 하여 일체지자에 대하여 표현되어 있다.

 

일체를 아는 부처님은 무엇을 알기에 일체지자라 하였을까? 마하야나에서처럼 우주에 내리는 빗방울 숫자까지 모두 알아서 일체지자라 하였을까?

 

부처님이 신통을 보여 주지 않자

 

부처님은 모르는 것이 없는 일체지자로 묘사 되어 있다. 그러나 가르침에 대하여 회의하는 자도 있었다. 맛지마니까야 사자후에 대한 큰 경(M12)’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쑤낙캇따]

“수행자 고따마는 인간의 상태를 뛰어넘지 못했고, 그에게는 고귀한 분이 갖추어야 할 앎과 봄에 관한 지극한 탁월함이 없다.(*265)  수행승 고따마는 단지 사유를 조작하여 자신의 말재주에 따라 추론하여 법을 설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설할 때에는,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로 이끌기 위한 것이라고 설한다.”

 

(Mahāsīhanādasutta- 사자후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2, 전재성님역)

 

 

각주에 따르면 수낙캇따는 승단에 입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이 그에게 아무런 신통을 보여 주지 않고 또한 사실의 기초에 대해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승단을 떠 났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경을 보면 수낙캇따는 부처님에 대하여 인간의 상태를 뛰어넘지 못했다.”라고 말하며 앎과 봄에 관한 지극한 탁월함이 없다.”라고 비방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이 부분과 관련하여 각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이 비판의 요지는 부처님이 곧바른 앎으로 깨달은 가르침이 아니라 단지 숙고하여 만들어낸 가르침을 설한다는 것이다. 그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이라는 목표를 신통을 성취하는 것보다 열등한 것으로 보았다.

 

(265번 각주, 전재성님)

 

 

수낙캇따가 승단에 들어와서 회의한 것은 부처님이 신통을 보여 주지 않은 것이라 한다. 그래서 말로만 진리를 설하고 말재주로서 승단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것이다. 신통 등 특별한 무언가를 보여 주지 않는 부처님에 대하여 인간상태를 뛰어 넘는 것이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보통 사람 보다 더 뛰어난 존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진짜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인지에 대하여 회의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회의하는 자들은 부처님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그래서 회의론자들은 부처님은 현세적인 가르침을 펼치셨지 내세에 대해서는 말씀 하지 않으셨다.”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신통이나 신비, 초월적 경지에 대하여 부정한다. 심지어 업과 윤회도 부정한다. 그래서 육도에 대하여 회의하며 단지 방편으로 설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회의론자는 신통에 대하여 보여 주면 믿겠다고 한다. 수낙캇따도 그런 케이스라 보여 진다.

 

어리석은 수낙캇따가 유추하지 못한 것

 

수낙캇따의 비방에 대하여 사리뿟따가 이를 듣고 부처님에게 보고 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어리석은 쑤낙캇따는 분노하였고, 그 분노에 끌려서 그와 같이 말한 것이다. (M12)”라 하였다.  그리고 사리뿟따에게 “사리뿟따여, ‘나는 비방하리라.’고 생각한 어리석은 쑤낙캇따는 오히려 여래에 관해 칭찬을 했다. 사리뿟따여, 이와 같이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로 이끌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여래에 관해 칭찬하는 것이 된다.(M12)”라고 말씀 하셨다. 수낙캇따의 비방에 대하여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로 이끌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오히려 칭찬의 말로 본 것이다. 그러면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존]

“사리뿟따여, 어리석은 쑤낙캇따는 나에 관해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공양 받을 만한 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분, 명지와 덕행을 갖추신 분, 바른 길로 잘 가신 분, 세상을 이해하는 분,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분, 사람들을 길들이시는 분,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신 분, 부처님, 세상에 존귀하신 분이다.’라고 법에 따라 유추하지 못한다.(*266)”

 

(Mahāsīhanādasutta- 사자후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2, 전재성님역)

 

 

경에서 “유추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초불연에서는 “법을 추론 하는 지혜가 없을 것이다.”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각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다음 문단들은 부처님에 대한 쑤낙캇따의 비판에 대한 반박으로 제시된 것이다. 여섯가지 곧바른 앎 가운데 신족통, 천이통, 타심통이 우선 소개 되고 열 가지 여래가 지닌 여래의 힘(dasabala: 十力)에서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이 소개 되고 있다.

 

(266번 각주, 전재성님)

 

 

수낙캇따의 비방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낙캇따가 의문을 품고 있었던 신통에 대하여 설명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여래십호라 불리우는 열 가지 특징이 신통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분(정득각자)나 명지와 덕행을 갖추신 분(명행족)이 대표적이라 본다. 이는 신통지가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수낙캇따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정말일까?”하며 회의 하고 아무런 근거 없이 비방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열 가지 신통변화(신족통)이 있는데

 

경에서는 신통에 대하여 상세히 소개 되어 있다. 수낙캇따가 늘 의문시 하던 신족통, 천이통, 타심통 등 신통에 대하여 이야기와 부처님에게서 드러난다는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 등 열가지 힘(십력)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는 두 가지로 신통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신통변화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신통지에 대한 것이다. 먼저 신통변화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Ayampi hi nāma sāriputta sunakkhattassa moghapurisassa mayi dhammanvayo na bhavissati: " itipi so bhagavā anekavihita iddhividha paccanubhoti: ekopi hutvā bahudhā hoti. Bahudhāpi hutvā eko hoti. Āvībhāva tirobhāva tirokuḍḍa tiropākāra tiropabbata asajjamāno gacchati. Seyyathāpi ākāse. Pahaviyampi ummujjanimujja karoti. Seyyathāpi udake. Udakepi abhijjamāne gacchati seyyathāpi pahaviya. Ākāsepi pallakena kamati seyyathāpi pakkhīsakuo. Imepi candimasuriye eva mahiddhike eva mahānubhāve pāinā parimasati parimajjati. Yāva brahmalokāpi kāyena vasa vattetī "ti.

 

사리뿟따여, 어리석은 쑤낙캇따는 나에 관해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의 정신적 능력을 즐긴다. 그는 하나에서 여럿이 되며, 여럿에서 하나가 된다.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자유로운 공간처럼 집착 없이 담을 통과하고 성벽을 통과하고 산을 통과해서 간다. 물속에서처럼 땅속을 드나든다. 땅 위에서처럼 물에서도 빠지지 않고 걷는다. 날개 달린 새처럼 공중에서 앉은 채 움직인다. 손으로 이처럼 큰 위력을 지니고, 이처럼 큰 능력을 지닌 달과 해를 만지고 쓰다듬는다. 하느님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육신으로 영향력을 미친다.’라고 법에 따라 유추하지 못한다.

 

(Mahāsīhanādasutta- 사자후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2, 전재성님역)

 

 

수낙캇따는 부처님의 신통에 대하여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신통이 없이 법을 설하는 것에 대하여 단지 말재주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비방하였다. 그런 수낙캇따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리석은 쑤낙캇따라 하였다. 이는 ‘moghapurisassa’에 대한 번역어이다. 최대의 수치스런 욕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쓸모 없는 인간 수낙캇따’라 번역 하였다. 이렇게 부처님이 거친 표현을 한 것은 부처님의 열 가지 신통변화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에 따라 유추하지 못한다.(성전협)” “추론하는 지혜가 없을 것이다(초불연)”이라 하였다.

 

열 가지 신통변화를 표로 만들어 보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열 가지 신통변화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열 가지 신통변화(신족통)

No

    

 

1

하나에서 여럿이 됨

 

2

여럿에서 하나가 됨

 

3

나타나기도 함

어두움을 광명으로 만드는 것 등

4

사라지기도 함

광명을 암흑으로 만드는 것 등

5

통과해서 감

벽이나 산을 아무런 장애없이 통과

6

물속에서처럼 땅속을 드나듬음

 

7

물에서도 빠지지 않고 걸음

 

8

공중에서 앉은 채 움직임

 

9

달과 해를 만지고 쓰다듬음

 

10

하느님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육신으로 영향력을 미침

 

 

 

 

  

난도빠난다용왕을 신통으로 제압하는 목갈라나 존자

Yangon, Myanmar (General Photos)

사진 : http://www.pbase.com/taboo5/image/73748627

 

 

 

열 가지 신통변화를 보면 신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이 중에 아홉 번째 항목인 ‘달과 해를 만지고 쓰다듬음’이 있다. 이 항목이 신통변화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달과 해를 어루만지다는 이야기에 대하여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초기경전에는 분명히 “손으로 이처럼 큰 위력을 지니고, 이처럼 큰 능력을 지닌 달과 해를 만지고 쓰다듬는다. Imepi candimasuriye eva mahiddhike eva mahānubhāve pāinā parimasati parimajjati.(M12)”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렇게 부처님이 말씀 하셨음에도 믿지 못한다면 수낙캇따와 같은 회의론자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최대의 욕이라 볼 수 있는 ‘모가뿌리사(moghapurisa)’라 하여 ‘어리석은 자’ 또는 ‘쓸모 없는 인간’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통변화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한 것일까?

 

그렇다면 회의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통변화라는 것이 황당무계(荒唐無稽) 한 것일까? 부처님은 터무니 없고 허황되고 믿을 수 없는 말을 한 것일까? 난도빠난다 용왕 길들인 이야기에서 몸을 크게 만드는 신통이 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신통변화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업에서 생긴 것을 의지하여 업에서 생기지 않은 것을 늘린다.(Vsm12.104)”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청정도론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즉 업에서 생긴 물질을 의지하여 업에서 생기지 않은 물질을 증대시킨다는 뜻이다. 업에서 생긴 것은 마음과 온도에서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업에서 생긴 것은 항상 감각기능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그 업에서 생긴 것을 그와 같이 늘리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설한 대로 늘리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의 상속에서 업에서 생긴 물질과 업에서 생기지 않은 물질이 마치 혼합된 것 처럼 일어난다 해도 실제로 혼합된 것이 아니다. 마치 한 파인트 분량의 우유를 여러 파인트 분량의 물에 부었을 때 비록 우유가 완전히 섞여 모든 곳에 분명히 있지만 그 우유가 많아진 것이 아니다. 오직 물이 많아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업에서 생긴 것과 업에서 생기지 않은 것이 마치 혼합된 것 처럼 일어난다 해도 업에서 생긴 것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신통의 힘으로 마음에서 생긴 것과 그것의 영향으로 온도에서 생긴 것이 늘어나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청정도론, 12.118. pm397)

 

 

주석에 따르면 업에서 생긴 것과 업에서 생기지 않은 것이 마치 혼합된 것 처럼 일어난다 해도 업에서 생긴 것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 파인트 분량의 우유를 여러 파인트 분량의 물에 부었을 때라고 하여 우유의 비유를 들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신통변화라는 것이 업에서 생긴 물질을 의지하여 업에서 생기지 않은 물질을 증대시킨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가진 열 가지 힘이 있는데

 

회의론자들에게 열 가지 신통변화를 뜻하는 신족통은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회의론자들이 또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여래의 열가지 힘이라 불리우는 십력에 대한 것이다. 십력 역시 신통변화 못지 않게 초월적이이다. 그러나 십력은 열 가지 신통변화와 달리 신통의 지혜라 한다. 왜 지혜라 하였을까? 이는 경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십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존]

 

“사리뿟따여, 여래에게는 열 가지 힘이(*267) 있는데 그 힘을 갖춘 여래는 최상의 지위를 선언하고 대중 가운데 사자후를 토하며 하늘의 수레를 굴린다. 열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Mahāsīhanādasutta- 사자후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2, 전재성님역)

 

 

부처님에게는 부처님(여래)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한다. 이를 열 가지 힘이라 한다. 이 열 가지 힘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Srp.II.43~44에 따르면, 여래의 힘에는 신체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의 두 가지가 있다. 여래의 신체적인 힘은 코끼리의 힘과 비교된다. 하품의 코끼리 깔라바까에서부터 상품의 코끼리 찻단따에 이르기까지 열 가지 종류의 코끼리가 하품에서 상품으로 올라갈수록 각각 10배씩 강해지는데, 여래의 신체적인 힘은 최상품 코끼리의 10배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여래의 열 가지 정신적인 힘에 관한 것이다. 한역은 구사론 27권에서 살펴 볼 수 있다. 1) 처비처지력,  2) 업이숙지력, 3) 편취행지력, 4) 종종계지력, 5) 종종승혜지력, 6) 근상하지력, 7) 정려해탈등지지력, 8) 숙주수념지력, 9) 사생지력, 10) 누진지력.

 

(267번 각주, 전재성님)

 

 

부처님에게는 보통사람을 능가하는 부처님에게서만 볼 수 있는 힘이 있는데, 그것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뉜다고 하였다. 경에 언급된 것은 정신적 힘이다. 이를 십력이라 한다. 이 십력에서 핵심은 숙명통과 천안통과 누진통이다.

 

십력을 표로 만들어 보면

 

경에서 표현된 십력에 대하여 표로 만들어 보았다.

 

 

여래의 열 가지 힘(십력)

No

십 력

경의 문구(M12)

 

1

처비처지력

조건을 갖춘 경우와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를 여실히 안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앎

2

업이숙지력

과거, 미래, 현재의 업보에 관해 조건과 원인을 살펴 여실히 그 과보를 분명히 안다.

 

3

편취행지력

모든 운명으로 인도하는 길에 관해 분명히 안다.

 

4

종종계지력

많은 세계로 구성된 다양한 세계의 세계에 관해 분명히 안다.

 

5

종종승혜지력

다른 뭇 삶들의 여러 가지 경향에 관해 분명히 안다.

 

6

근상하지력

뭇 삶들의 능력의 높고 낮음에 관해 분명히 안다.

 

7

정려해탈등지지력

선정, 해탈, 삼매, 성취에 대해서 오염과 청정과 벗어남을 분명히 안다.

 

8

숙주수념지력

그의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억한다.

숙명통

(윤회)

9

사생지력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 삶들을 관찰한다.

천안통

(업과 과보)

10

누진지력

번뇌를 부수어 번뇌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잘 알고 깨달아 성취한다.

누진통

(사성제)

 

 

 

열 가지 힘중에서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그리고 열번 째의 힘에 대하여 숙명통,천안통, 누진통이라 한다. 이는 ‘윤회’와 ‘업과 과보’, 그리고 ‘사성제’에 대한 것이다. 특히 이 세가지 능력에 대하여 ‘삼명’을 갖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삼명 육신통’을 갖춘 부처님에 대하여 위짜라나삼빤나(vijjācaraasampanna)라 하여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명행족)’이라는 칭호가 붙여 진 것이다.

 

열가지 힘을 바탕으로 하여

 

부처님은 보통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이런 능력으로 인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 정득각자가 된 것이다. 만일 이런 능력이 없이 깨달았다고 한다면 말로서 또는 말재주로서 진리를 설한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사리뿟따여, 여래에게는 이와 같은 여래의 열 가지 힘이 있는데 그 힘을 갖춘 여래는 최상의 지위를 선언하고 대중 가운데 사자후를 토하며 하늘의 수레를 굴린다.

 

사리뿟따여,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아서 나에 관해 이와 같이 ‘수행자 고따마는 인간의 상태를 뛰어넘지 못했고, 그에게는 고귀한 분이 갖추어야 할 앎과 봄에 관한 지극한 탁월함이 없다. 수행승 고따마는 단지 사유를 조작하여 자신의 말재주에 따라 추론하여 법을 설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설할 때에는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로 이끌기 위한 것이라고 설한다.’라고 말하며, 그 말을 버리지 않고, 그 마음을 버리지 않고, 그 견해를 놓아버리지 않으면, 던져지듯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사리뿟따여, 예를 들어 계율을 갖추고, 삼매를 갖추고, 지혜를 갖춘 수행승은 지금 여기에서 궁극적인 지혜를 성취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그 말을 버리지 않고 그 마음을 버리지 않고 그 견해를 놓아버리지 않으면, 던져지듯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나는 말한다.

 

(Mahāsīhanādasutta- 사자후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2, 전재성님역)

 

 

편의상 세 문단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 문단을 보면 열 가지 힘에 의하여 최상의 지위에 올랐음을 말하고 있다. 이때 사자후를 토했다고 하였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S56.11)”라고 선언한 대목과 일치한다. 열 가지 힘 중에 누진통에 해당되는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여 청정에 이르렀을 때 더 이상 태어남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S56.11)”라는 앎과 봄이 생겨나 사자후를 토한 것이다.

 

두번째 문단의 경우 회의론자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능력을 의심하여 단지 말장난으로 진리를 설한 것으로 보는 수낙캇따류의 삿된 견해를 가진 회의론자들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라 하였다.

 

세 번째 문단에서는  열 가지 신통변화와 열 가지 신통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계율을 갖추고, 삼매를 갖추고, 지혜를 갖춘 수행승은 지금 여기에서 궁극적인 지혜를 성취한다.”라고 하여 계정혜 삼학으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부처님이 진리를 선포한 것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검증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진리를 선포 하였는데, 그 대상은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이라 하여 초전법륜경에 잘 표현 되어 있다. 그런데 초전법륜경을 보면 진리 선포를 유예 하는 장면도 있다. 부처님이 깨달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사성제)에 대한 앎()과 봄()이 일어 났지만 이를 바로 선포 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에서는 신들 등 여덟 대상에 대하여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하게 깨달았다고 선언하지 않았다.(S56.11)”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성제에 대하여 세 번에 걸쳐서 앎과 봄이 일어 났을 때 진리임을 확신하고 사자후를 토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열 가지 힘을 바탕으로 하여 진리를 선언한 것이다.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처님이 자신 있게 사자후를 토한 것은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네 가지 두려움 없음으로 표현 되어 있다. 그 중에 첫 번째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 Sammāsambuddhassa te paijānato ime dhammā anabhisambuddhā "ti, tatra vata ma samao vā brāhmao vā devo vā māro vā brahmā vā koci vā lokasmi sahadhammena paicodessatīti nimittameta sāriputta na samanupassāmi.

 

Etampaha sāriputta nimitta asamanupassanto khemappatto abhayappatto vesārajjappatto viharāmi.

 

사리뿟따여, 수행자든 바라문, 신, 악마, 하느님이든 이 세상의 어떤 자이든, 나에 대해 ‘올바로 깨달은 자라고 그대가 주장하더라도, 그 가르침들은 올바로 깨달아진 것이 아니다.’라고 나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가르침에 견주어 안다.

 

사리뿟따여, 나는 여전히 근거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나는 도달한 안온에 머물러 있고 도달한 두려움 없음에 머물러 있고 도달한 공포 없음에 머물러 있다.

 

(Mahāsīhanādasutta- 사자후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2, 전재성님역)

 

 

첫 번째 두려움 없음올바로 깨달은 자’, 즉 정등각자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위없는 깨달음에 대하여 누군가 그것이 올바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고 비난한다고 할지라도 비난 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고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한 초불연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대가 정등각자라고 천명하지만 이러한 법들은 완전히 깨닫지 못했다.’라고 하면서 그 [법]에 관해 어떤 사문이건 바라문이건 신이건 마라건 범천이건 혹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근거 있는 말로 나를 질책할 이런 표상을 보지 못한다.

 

사리뿟따여, 나는 이런 표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안은을 얻고 무외를 얻고 담대함을 얻어 머문다.

 

(M12, 초불연 대림스님역)

 

 

두 번역을 비교하면 “근거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성전협)”와 “표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초불연)”에 차이가 있다. 이는 nimitta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달라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MDB에서는 “seeing no ground for that”이라 되어 있다. Nimitta에 대한 PCED194에서는 ‘mark, sign; image; target, object; cause, condition. ,因相, 前兆, 瑞兆, , 特相, 占相, 現相, , 界標, 標識, 理由라 되어 있다. 따라서 문맥으로 보면 이유의 뜻이 강하다. 깨달음에 대하여 비난하려면 그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근거를 대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견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근거도 대지 못하는 비난에 대하여 두려워 하지 않음을 말한다.

 

네 가지 두려움 없음에 대하여 표를 만들면

 

경에서 두려움 없음이라 번역한 ‘vesārajjani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담대함’이라 번역하였다. 그리고 MDB에서는 ‘fearlessness’라 하였다. 이와 같은 두려움 없음(무외)은 모두 네 가지이다. 이를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네 가지 두려움 없음(사무외)

구 분

경전의 문구(M12)

 

정득각무외

‘올바로 깨달은 자라고 그대가 주장하더라도, 그 가르침들은 올바로 깨달아진 것이 아니다.’라고 나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가르침에 견주어 안다.

올바로 깨달은 자

누영진무외

‘번뇌를 부순 자라고 그대가 주장하더라도, 그대에게 그 번뇌들이 부수어진 것은 아니다.’라고 나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가르침에 견주어 안다.

번뇌를 부순 자

설장법무외

‘그대가 장애가 되는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것들을 수용하는 자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다.’라고 나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가르침에 견주어 안다.

장애가 되는 사실

설출도무외

‘그대가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설한다 해도 그것이 그 가르침을 실천한 자를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로 이끌지 못한다.’라고 나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가르침에 견주어 안다.

가르침의 결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 중에 세 번째 ‘설장법무외’ 가 있다. 경에서 “그대가 장애가 되는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것들을 수용하는 자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다.”라 하였는데 이는 무슨 말일까? 이에 대하여 성전협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한 초불연 각주를 보면 주석을 근거로 하여 ‘장애 가 되는 사실(법)’에 대하여 ‘음행’이라 하였다. 바라이죄, 승잔죄, 조죄, 단타죄, 회과죄, 악작죄, 악어죄 등 일곱 가지 ‘범계무더기’를 말한다. 그래서 초불연에서는 “ ‘그대가 설한 장애가 되는 법들을 수용하더라도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라고 번역 되어 있다. 

 

네 번째 두려움 없으은 ‘설출도무외’라 한다. 이는 가르침의 결과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실천하면 괴로움이 소멸되어 완전한 열반에 든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하고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숫따니빠따에서도 볼 수 있다. 왕기사가 홀로 명상에 잠겨 있다가 “우리의 친교사는 정말로 완전한 열반에 드신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아직 완전한 열반에 드시지 않은 것일까?(Sn2.12)”라고 의심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는 이 세상에서 정신과 육신에 대한 갈애를 끊어버렸다. 오랜 세월 잠재하던 악마의 흐름을 끊어버린 것이다. 태어남과 죽음을 완전히 건너뛰었다.(stn355, Sn2.12)” 라고 확인 시켜 주었다.

 

“정말 정득각자일까?”

 

네 가지 두려움 없음을 보면 회의론자들이 의심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위 없는 깨달음 이루신 부처님에 대하여 “정말 정득각자일까?”라고 의심하고, 번뇌가 다하였다고 하였는데 “진짜 번뇌가 부수어진 분일까?”라고 의심하는 것이다. 또 음행과 관련하여 “정말 음행은 장애가 될 수 없는 것일까?”라고 의심하고, 열반과 관련하여 “진짜 열반이란 가능할까?”라고 의심하는 것이다.

 

의심을 하면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모두 의심한다.  수낙캇따 역시 마찬가지 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신통을 보이지 않는 부처님을 믿을 수 없었고 또 진리를 설하는 것에 대하여 말장난 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삿된 견해가 일어나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부정하는 회의론자가 된 것이다.

 

그 어떤 근거도 내 놓지 못하면서

 

오늘날 회의론자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터넷 시대에 업이나 윤회에 대하여 부정하는 자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회의론자들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 한 것 외에는 믿지 않는다. 따라서 신통변화나 신통지에 대하여 있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것이라 간주한다. 그러다 보니 경전이 후대에 삽입 되었다든가 조작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증명할 어떤 근거를 내 놓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경에서도 부처님은 “나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가르침에 견주어 안다.(M12)”라고 하였다. 이처럼 근거 없이 부처님 말씀을 비난 하고 다니는 자들은 삿된 견해를 가졌기 때문에 “던져지듯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M12)”라 하였다.

 

삼명 육신통으로

 

삿된 견해를 가진 회의론자들은 부처님의 진정한 능력을 모르기 때문이다. 신통지를 바탕으로 하여 정등각자가 된 사실 자체를 모르거나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초야에 숙명통을 얻어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가 생겨낳고,  중야에 천안통을 얻어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가 생겨났고, 후야에 누진통을 얻어 번뇌가 다한 경지에 이른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어떤 근거를 제시 하지 못하면서 업, 윤회, 신통 등 자신의 인지로 알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부정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삼명 육신통으로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는 다름 아닌 사마타와 위빠사나이다. 그래서 삼명 육신통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삼명 육신통

No

 

 

수행

삼명

1

신족통(神足通, iddhi-vidha)

10가지의 신통변화

 

사마타

(사선정,

오신통)

 

2

천이통(天耳通, dibba-sota)

 

신성한 귀의 요소 의 지혜

 

 

3

타심통(他心通, paracitta-vijāhana)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

 

 

4

숙명통(宿命通, pubbenivāsa-anussati)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

 

첫번째 명지

(초야)

5

천안통(天眼通, dibba-cakkhu)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

첫번째 명지

(중야)

6

누진통(漏盡通, āsavakkhaya-ñāa)

번뇌가 다한 경지

위빠사나

첫번째 명지

(후야)

 

 

표를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하다. 부처님은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으로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선정 상태에서 숙명통 등 오신통의 지혜가 생겨 났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으로 모든 번뇌가 소멸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힘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정득각자가 된 것이다. 또 초야, 중야, 후야에 숙명통과 천안통과 누진통이 열려 세 가지 명지가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에 명지와 덕행을 구족하신 분이라 하여 명행족이라 한다. 불자들이 법회에서 명호 하는 여래십호는 이렇게 삼명육신통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 된 것이다.

 

 

 

2014-02-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