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가르침의 기적을 보여 준 부처님

담마다사 이병욱 2014. 2. 15. 12:39

 

가르침의 기적을 보여 준 부처님

 

 

 

각묵스님의 인터넷영상강의

 

인터넷시대와 함께 불자들은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는 행운을 가졌다. 그래서 이전의 신행행태와는 차원이 다르게 접급하게 되었다. 이는 빠알리니까야가 우리말로 직역 되어 나온 것 뿐만 아니라 수행방법 또한 도입 되어서 이제 불자들은 부처님이 말씀 하시고자 한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런 가르침의 선봉에 선 분이 각묵스님이라 본다.

 

각묵스님은 빠알리니까야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 뿐만 아니라 부처님 보급에도 매우 열정적이다. 그래서 방송이나 각종기고문을 통해서 원음을 알려 왔다. 아마 초기불교를 접한 불자치고 스님의 동영상이나 음성파일 강의를 들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스님이 항종 강조 하여 말한 것이 온처계근제연이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 이십이근, 사성제, 십이연기의 준말이다. 이렇게 한글자로 대표된 한자어로 온처계근제연을 기억 해 두면 교학에 대한 체계가 잡혀 있을 것이라 한다.

 

세상을 불쌍히 여겨

 

온처계근제연으로 대표 되는 교학체계에 대한 실천수행벙법에 대한 것이  삼십칠조도품이다. 37가지 깨달음이 되는 수행법들의 집합적 명칭이다. 그래서 주제별 모음으로 되어 있는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이 삼십칠조도품에 대한 설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처님이 교학과 수행체계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전재성님의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부처님은 이것들에 관하여 ‘내가 곧바른 앎(abhiñña)으로 그대들에게 가르치는 것들’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완전한 열반을 예고 하면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이것들에 대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많은 뭇삶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뭇삶의 안락을 위하여.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유익과 행복을 위하여, 청정한 삶이 세상에서 오래 지속되도록, 내가 너희들에게 곧바른 앎으로 가르친 것들 – 예를 들어 네 가지 새김의 토대, 네 가지 노력, 네 가지 신통의 기초, 다섯 가지 능력, 다섯 가지 힘, 일곱 가지 깨달음 고리, 여덟 가지 고귀한 길 – 을 잘 배우고 공부하여 닦고 수행해야 한다.(DN.II. 119-120)’고 설했다.

 

(상윳따니까야 해제, 전재성님)

 

 

전재성님은 상윳따니까야 해제에서 삼십칠조도품이 나오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특별히 당부한 말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뭇삶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뭇삶의 안락을 위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하늘사람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서 가르친 것이 바로 삼십칠조도품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설한 부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청정한 삶의 실현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출가수행자 뿐만 아니라 재가수행자 모두에게도 포함 된다. 그 청정한 삶의 실현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열반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열반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서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대하여 몸소 보여 준것이다.

 

회의론자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삼십칠조도품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곧바른 앎(abhiñña)’으로 가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곧바른 앎의 길에 네 가지 신통의 기초가 있다. 회의론자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부처님의 37가지 깨달음으로 이끄는 수단 중에 신통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51번째 주제인 신통의 기초 모음(Iddhipāda Sayutta, S51)’에 대한 해제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신통의 기초 모음’에서 신통의 기초, 즉 잇디빠다(iddhipāda)란 말은 ‘초월적인 힘의 기초’를 말하는데, 원래 잇디(iddhi)’와 빠다(pāda)의 복합어이다. 원래 ‘성공, 성장, 번영’을 뜻하는데, 인도의 요가 전통에서 이 단어는 명상을 통해 도달한 특별한 성공, 즉 사건의 일반적 질서에 도전하는 놀라운 재주를 행하는 능력의 성취란 의미를 지닌다.

 

(상윳따니까야 ‘신통의 기초’ 해제, 전재성님)

 

 

신통을 뜻하는 잇디빠다(iddhipāda)초월적인 힘의 기초라 한다. 초월적 현상이 신통임을 말한다.

 

신통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면 주변에 사람이 몰려들 것이다. 그래서 종교의 창시자들은 초월적인 힘, 즉 신통을 보여 줌으로서 교세가 확장 되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모 유명목사는 치유능력이 있어서 세계적인 교회로 발돋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기적과 같은 초월적인 힘은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 해제글에 따르면 을 이는 기적이 아니라 한다. 집중(삼매)의 성취를 통해서 명상수행자가 이룰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면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면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는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한자성어에서도 알 수 있다. 마치 돋보기로 햇볕을 집중시키면 불꽃이 일어나듯이, 누구든지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마천루로 빼곡한 거대한 도시가 건설되고, 컴퓨터가 개발되고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가 하면 우주에 사람을 실어 보내는 것 역시 마음집중에 따른 기적이라 보여 진다.

 

누구든지 마음을 집중하면 못할 것이 없다. 마음 집중에 따른 성과에 대하여 어떤 이는 기적이라 한다. 그렇다면 마음집중에 따른 초월적인 현상은 황당무계한 것일까? 신통현상에 대하여 해제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집중에 든 마음은 일반적인 감각적 의식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의 내밀한 관계를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명상이 성취된 요가수행자에게 자연적 인식과정의 기저에 놓은 깊은 존재의 흐름 속으로 뛰어들게 하여 신비적으로 보이는 능력을 구사할 수 있게 만든다.

 

(상윳따니까야 ‘신통의 기초’ 해제, 전재성님)

 

 

해제글에 따르면 신통현상에 대하여 인식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음이 집중된 상태, 사선정상태에서 인식과정의 기저에 놓은 깊은 존재의 흐름 속으로 뛰어들게 함으로서 신비적으로 보이는 능력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 신통이라 한다.

 

진위(眞僞)를 가리자고

 

그런데 이런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현상이 초기경전에는 무수히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합리적이고 윤리적 체계로 묘사 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받아 들일 수 없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원음을 담고 있는 빠알리니까야에서는 부처님이 신통을 행사하는 장면이나 제자들 역시 그러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장면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청원경에서 하느님 싸함빠띠는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그 사이에, 하느님의 세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세존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S6.1)”라고 묘사된 장면을 볼 수 있다. 이때 하느님이라는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고 더구나 팔을 굽히는 사이에 출현하는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이런 장면에 대하여 황당무계하여 있을 수 없는 현상이라 부정하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부처님이 방편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한 이야기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왜 황당한 이야기인지, 왜 꾸민이야기라고 말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회의론자들은 신통이나 초월적 현상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단멸론자들은 업과 윤회에 대해서도 부정한다. 오로지 현세에서 행복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다. 그래서 신통이나 초월적 현상, 업과 윤회가 들어가 있는 문구나 경을 가려내자고 한다. 한마디로 경전에서 거품을 걷어 내자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을 읽을 때도 가려서 읽자고 말한다. 심지어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이라고 하더라도 진짜 그렇게 말씀 하셨는지 깔라마경(A3.65)’을 예를 들어 진위(眞僞)를 가리자 말한다.

 

이렇게 초기경전에서 차떼고 포떼다 보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사념처 등과 같은 근본가르침일 것이다. 그런데 삼십칠조품에서 사신통이 들어 있는데 이것도 걷어 내야 할까?

 

신통을 부정하지 않은 부처님

 

부처님은 신통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해제글을 보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부처님은 그러한 초월적 힘을 획득 하는 것에 대하여 부정한 것은 아니다.”라 하였다. 부처님이 부정한 것은 신통의 힘을 책임 질 수 없는 부정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라 한다. 심지어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신도들에게 감동을 주거나 이교도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 조차 금한 것이다.

 

초기경에 따르면 “하나에서 여럿이 되며, 여럿에서 하나가 된다. (M12)”는 등의 열 가지 신통변화에 대하여 소개 되어 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그러한 힘 자체를 지닌 것에 대하여 순수한 지혜를 지녔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부처님이 강조한 신통은 지혜로 계발 되었을 때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신통에 대하여 삼십칠조도품 속에 포함 시킨 것이다. 이런 신통을 빠알리어로 이디(iddhi)’라 한다.

 

어떤 경전적 근거도 제시 하지 못하면서

 

 초기경전에서 묘사된 신통중에 달과 해를 만지고 쓰다듬는다.(M12)”와 같은 내용이 있다. 마치 신통변화의 진수를 보여 주는 듯하다. 이런 신통에 대하여 회의론자들은 물론 믿음을 가진 불자들 역시 받아 들여지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반응이 나올 수 있다.

 

일반적으로 회의론 자들은 황당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럴 수 있다라고 할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자라면  판단을 유보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황당하다고 하여 부정하는 자들은 이에 대하여 어떤 경전적 근거도 제시 하지 못한다. 다만 남이 말한 것을 들어서 말한다거나, 자신의 인식으로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라고 결론을 내려 버린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법에 따라 유추하지 못한다.(M12)”라 하였고, “나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가르침에 견주어 안다.(M12)”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초기불교 경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신통현상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별에서 온 그대

 

요즘 방영 되고 있는 인기드라마가 있다. 김수현 작가가 쓰고 전지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별에서 온 그대’이다. 이를 줄여서 ‘별 그대라’고도 한다. 이 드라마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SF소설 같다. 드라마에서는 400년 전 광해군 시절 강원도에서 목격된 UFO를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강원도에서 목격된 UFO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한다. 그 때 당시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지방관아의 보고서가 실록에 그대로 실린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오마이뉴스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옛날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어땠을까? <별에서 온 그대>에서처럼 UFO나 외계 생물체를 목격할 경우, 옛날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전에, 우리가 혹시라도 갖고 있다면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현대도 아닌 400년 전에 무슨 UFO가 있었겠느냐?"며 "말도 안 돼!"라고 말할 수도 있다.

 

('별그대' 도민준이 탄 UFO, 조선 역사기록 보니, 오마이뉴스 2014-02-04)

 

 

 

 

UFO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에 목격된 UFO현상에 대하여 현대사람들 대부분 아마도 황당하다” “말도 안된다라고 할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접 보지 않은 것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왜 기록이 되어 있을까? 이에 대하여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강원도에서 발견된 비행물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반응이 나타났을 것이다.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 말도 안 된다며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종합적으로 파악한 조선 정부의 태도는 '이상하고 신비한 일이기는 하지만, 진상을 확인할 수 없으므로 판단을 유보한다'는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별그대' 도민준이 탄 UFO, 조선 역사기록 보니, 오마이뉴스 2014-02-04)

 

 

조선시대 UFO현상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지만 실록에 기록된 것은 판단유보에 따른 것이라 하였다. 직접 눈으로 확인 한 것은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신통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라 본다.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한다면 이는 경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자신의 인지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현상에 대해서는 판단유보를 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 보여 진다.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네 가지 신통의 기초

 

초기경전에서 보여지는 신통현상은 초월지에 대한 것이다. 깨달음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37조도품에 편입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1) 의욕의 집중에 기반한 노력의 형성을 갖춘 신통의 기초를 닦는다.

2) 정진의 집중에 기반한 노력의 형성을 갖춘 신통의 기초를 닦는다.

3) 마음의 집중에 기반한 노력의 형성을 갖춘 신통의 기초를 닦는다.

4) 탐구의 집중에 기반한 노력의 형성을 갖춘 신통의 기초를 닦는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과거세의 어떤 수행자라도 번뇌를 부숨으로써 번뇌 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그 생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하였다면, 그것은 모두 그들이 네 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고 익혔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미래의 어떤 수행자라도 번뇌를 부숨으로써 번뇌 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그 생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하였다면, 그것은 모두 그들이 네 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고 익힐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현세의 어떤 수행자라도 번뇌를 부숨으로써 번뇌 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그 생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한다면, 그것은 모두 그들이 네 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고 익혀 왔기 때문이다.

 

(Bhikkhusutta-수행승의 경, 상윳따니까야 S51.1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의욕과 정진과 마음과 탐구에 기반한 신통의 기초를 닦을 것을 말씀 하셨다. 이 것이 37조도품에서 말하는 ‘네 가지 신통의 기초(사신통)’이다.

 

이렇게 사신통을 닦는 목적은 번뇌를 부수는 것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심혜탈혜해탈을 이루어 궁극적으로 열반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신통은 깨달음 얻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신통지는 여섯 가지로 알려져 있다. 사선정의 사마타 수행으로 성취될 수 있는 신족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천안통 이렇게 다섯 가지인데 이를 오신통이라 한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으로 번뇌를 소멸하는 궁극적인 앎, 누진통이 있다. 이렇게 사마타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으로 성취 될 수 있는 신통은 여섯 가지로 요약되어서 육신통이라 한다.

 

가르침의 기적을 보여 준 부처님

 

신통이나 초월적이고 신비적현상에 대하여 무조건 부정하는 회의론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인지와 한계를 넘어선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눈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것이다. 그래서 신통이나 초월적 현상에 경전에 언급되어 있으면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든가, 편집된 것이라든가, 방편으로 설명하기 위한 꾸며 낸 이야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상식을 가진 신심 있는 불자라면 비록 자신의 인지와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고 하더라도 부정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마치 400년전 강원도에 출현한 UFO현상에 대하여 판단을 유보 하여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처럼, 자신이 한계를 넘어선 것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바른 자세라 본다.

 

신통에 대한 더 바른 자세는 이를 수용하는 것이다.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불자라면 신통이나 초월적 현상 등을 수용한다고 하여 삼보에 대한 믿음이 결코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이는 전재성님의 해제글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속에서 진정한 기적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극복하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증진시키는 가르침을 통해 인간의 변화를 유도하는 ‘가르침의 기적(anusasanipatihariya)’이었다.

 

(상윳따니까야 ‘신통의 기초’ 해제, 전재성님)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신통의 기적을 보여 준 것이 아니라 가르침의 기적을 보여 준 것이라 하였다.

 

 

 

2014-02-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