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꾼 보다 더 나쁜 패
차마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폭력
글을 쓰다 보면 칭찬도 받지만 비난도 많이 받는다. 그러다 보니 들어 보지도 못한 갖가지 말을 듣는다. 차마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가르침에 근거하여 글을 쓰는 것일 뿐인데 자신과 견해가 다르다고 하여 거친표현이나 근거없는 중상모략을 하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언어폭력이다.
폭력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체폭력이고 또 하나는 언어폭력이다. 신체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 신체폭력이라면 언어폭력은 말로서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글로 인한 타격도 언어폭력에 속할까? 일반적으로 글쓰는 행위는 ‘구업’에 속한다. 따라서 인터넷에서 글로서 타격을 가하는 행위 역시 언어폭력에 해당된다.
왜 입에 도끼가 생겨난다 하였을까?
인터넷상에서 언어폭력을 보면 몽둥이와 칼만 들지 않았을 뿐 현실세계에서 신체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것과 하등의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언어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행위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Purisassa hi jātassa
kuṭhāri jāyate mukhe,
Yāya chindati attānaṃ
bālo dubbhāsitaṃ bhaṇaṃ.
사람이 태어날 때
참으로 입에 도끼가 생겨난다.
어리석은 이는 나쁜 말을 하여
그것으로 자신을 찍는다. (stn657)
(Kokālika sutta-꼬깔리야의 경, 숫따니빠따 Sn3.10, 전재성님역)
사람이 태어날 때 입에 도끼가 생겨난다고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하여 나까무라 하지메역을 보면 “人が生まれたときには、実に口の中には斧が生じている”로 되어 있다. 이 문장으로 검색하니 “ 「斧」というのは「舌」のことなんですね(도끼라는 것은 혀를 말한다)”라는 구절을 발견하였다. 이는 도끼가 바로 ‘혀’임을 알 수 있다.
태어나면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혀이다. 이 혀의 역할은 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욕설, 중상모략, 거짓말 등 나쁜 말을 하였을 때 혀는 흉기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끼에 해당하는 빠알리어가 kuṭhāri이다. 이는 ‘an axe; hatchet, 斧, 斧頭’의 뜻으로 전재성님은 ‘도끼’로 번역하였다.
도끼는 나무를 찍거나 장작을 팰 때 사용되는 연장이다. 특히 장작을 팰 때 사용된다. 그런데 장작을 잘 못 패게 되면 어떻게 될까? 발등이 찍힐 염려가 있다. 잘못하면 제발등을 찍을 수 있다는 말이다.
거짓말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친말을 하게 되면 혀를 흉기로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는 자신의 발등을 찍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리석은 이는 나쁜 말을 하여 그것으로 자신을 찍는다. (stn657)”라고 하였다.
고약한 심보를 가진자들
구체적으로 악구는 어떤 것일까? 꼬깔리야의 경에 표현 된 악구는 다음과 같다.
Yo nindiyaṃ pasaṃsati taṃ
vā nindati yo pasaṃsiyo,
Vicināti mukhena so kaliṃ
kalinā tena sukhaṃ na vindati.
비난받아야 할 것을 찬양하고,
찬양해야 할 것을 비난하니,
입으로써 불운을 쌓고
그 불운으로 안락을 얻지 못한다. (stn658)
(Kokālika sutta-꼬깔리야의 경, 숫따니빠따 Sn3.10, 전재성님역)
“비난받아야 할 것을 찬양하고, 찬양해야 할 것을 비난하니”라는 구절은 세상의 상식으로 본다면 잘못된 표현이다. 바른 표현이라면 “비난받아야 할 것을 비난하고, 찬양해야 할 것을 찬양한다.”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청개구리와 같은 표현을 한 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자들인가? 상대방을 끌어 내리기 위하여 권모술수와 중상모략을 하고, 또 상대방에게 타격을 주기 위하여 언어폭력을 가하는 자들이다. 한마디로 남 잘될 꼴을 못보는 고약한 심보를 가진자들이라 볼 수 있다.
악한 마음을 갖고 불건전 한 생각을 가진 자는 남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해치려 한다. 그러다 보니 비난할 것을 찬양하고, 칭찬해야 될 것을 오히려 비난한다. 그런 자에 대하여 부처님은 “입으로써 불운을 쌓고 (Vicināti mukhena so kaliṃ)”라 하였다. 여기서 불운에 해당하는 말이 ‘kali’이다. ‘kali’의 뜻은 ‘1. defeat; 2. bad luck; 3. sin; 4. Distress’이다. 이 중에 두 번째인 ‘bad luck’이 게송에 표현된 불운에 해당된다. 이렇게 입으로 불운을 가져 오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어 지는 게송을 보면 알 수 있다.
패가망신 하는 나쁜 패
도박을 하면 돈을 딸 수 있을까? 거의 대부분 잃는다. 그것도 남김 없이 털린다. 심지어 아내와 딸 까지 팔아 먹어도 도박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한번 도박에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승부가 곧바로 나기 때문일 것이다. 불과 몇 분도 안되어서 승패가 결정 나기 때문에 한 번 시작 하면 밤이 새는 줄 모르고 밑천이 다 바닥나야 자리를 뜨는 것이다. 이것이 도박자의 불운이다. 그러나 도박자의 불운 보다 더 큰 것이 있다고 하였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Appamatto ayaṃ kali
yo akkhesu dhana parājayo,
Sabbassāmipa sahāpi attanā
ayameva mahantataro kali,
Yo sugatesu manaṃ padosaye.
도박으로 돈을 잃거나, 모든 재산과 함께
자기 자신마저 잃어도, 그 불운은 오히려 작은 것이다.
바른길을 가신 이에게 적의를 품는다면,
그 불운이야말로 참으로 큰 것이다. (stn658)
(Kokālika sutta-꼬깔리야의 경, 숫따니빠따 Sn3.10, 전재성님역)
행운과 불운이 있다. 행운과 불운이 극명하게 교차하는 곳이 도박장이라 볼 수 있다. 화투나 카드놀이도 행운과 불운의 연속이고, 국민도박장이라 볼 수 있는 경마장 역시 운이 좌우 한다. 그러나 대부분 불운의 연속이다. 대박을 터뜨리는 경우는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불운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돈 뿐만 아니라 재산, 심지어 자기자신마저 잃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도박자의 불운 보다 더 불운한 것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성자를 근거없이 비방하는 과보이다. 이는 착하고 순진한 사람을 해치는 것도 해당된다고 본다.
도박꾼 보다 더 나쁜 패가 있는데
부처님이 초기경에서 도박꾼의 비유를 든 것은 패가망신 하는 나쁜 패이다. 그런데 더 나쁜 패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도박의 비유를 든 것이다.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에서 알 수 있다.
Sataṃ sahassānaṃ nirababudānaṃ
Chattiṃsati pañca ca ababudāni,
Yamariyagarahi nirayaṃ upeti
Vācaṃ manañca paṇidhāya pāpakaṃ.
입으로 마음으로 악함을 기도하여,
거룩한 이를 비난하는 사람은
십만 삼천 니랍부다와 오압부다를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다. (stn660)
(Kokālika sutta-꼬깔리야의 경, 숫따니빠따 Sn3.10, 전재성님역)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비유로서 알기 쉽게 설명하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중생의 근기가 다양하다 보니 맞춤설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법하는 것에 대하여 ‘대기설법’ 또는 ‘방편’이라 한다.
부처님의 비유설법에 대하여 백도수 교수는 불교닷컴 기사에 따르면 “도박 비유는 악행을 원관념, 도박을 보조관념으로 ‘도박꾼이 도박해서 재산 잃듯이 어리석은 이 악행을 저질러 지옥 가는 것이 더 나쁜 패’라는 내용이다.(불교닷컴, 2014-02-17)”라는 취지로 말하였다고 한다.
경에서는 부처님을 비방하고, 성자를 비난하고, 착하고 순진한 사람을 해쳤을 때 지옥에 간다고 하였다. 그것도 ‘십만 삼천 니랍부다와 오압부다’동안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는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 도박 보다 더 나쁜패이이다. 그렇다면 압부다는 얼마나 오랜 기간일까?
압부다, 니랍부다, 아바바, 아하하, 아따따, 황련, 백련, 청련, 홍련지옥
꼬깔리야경에는 ‘압부다’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다. 이는 “꼬쌀라 국에 20카리의 채소 씨앗이 있어 사람이 백년이 지날 때마다 한 알의 채소 씨앗을 줍는다고 하자. 그러나 그렇게 해서 꼬쌀라 국에 있는 20카리의 채소 씨앗이 다 없어져도 1 압부다의 지옥의 기간이 다하지 않는다.(Sn3.10)”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1압부다는 사실상 ‘천문학적 숫자’를 말한다.
그런데 각주에 따르면 “압부다지옥이나 니랍부다지옥은 독립된 지옥이 아니라 아비지옥 가운데 고통을 받는 기간을 압부다나 니랍부다 단위로 헤아리는 장소를 말한다.(Prj.II.476)”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1압부다에 대하여 숫자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각주에 따르면 10의42승이라 되어 있다.
혀를 도끼로 사용하여 폭력을 일삼는 자가 있다. 이렇게 도끼를 휘두르는 자는 지옥행이라 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를 근거 없이 비방하고 중상모략한 꼬깔리야는 홍련지옥에 떨어졌다고 하였다.그 홍련지옥은 어떤 곳일까?
홍련지옥은 장소가 아니다. 시간 개념으로 지칭한 것이다. 그런 홍련지옥의 얼마나 긴 세월일까? 이는 경에서 압부다, 니랍부다, 아바바, 아하하, 아따따, 황련, 백련, 청련, 홍련지옥 순으로 표시 된 것에서 알 수 있다. 한량없이 긴세월을 뜻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o appaduṭṭhassa narassa dussati
Suddhassa posassa anaṅgaṇassa,
Tameva bālaṃ pacceti pāpaṃ
Sukhumo rājo paṭivātaṃva khitto.
청정하고, 더러움이 없고,
죄악 없는 사람을 미워하는 자, 그 어리석은 자에게,
바람을 거슬러서 미세한 먼지가 불어오듯,
반드시 그 악함은 되돌아온다. (stn662)
(Kokālika sutta-꼬깔리야의 경, 숫따니빠따 Sn3.10, 전재성님역)
성자를 근거없이 비방하고 중상모략하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였다. 특히 부처님의 상수제자를 중상모략한 꼬깔리야는 그 기간을 알 수 없는 홍련지옥에 떨어졌다고 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은 청정하고 더러움 없고 죄악이 없는 자에 대하여 이유 없이 미워하는 자도 역시 불운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람을 거슬러서 미세한 먼지가 불어오듯”이라 하여 악행에 대한 과보를 반드시 받을 것임을 말씀 하시고 있다. 이 게송은 법구경 125번 게송과 똑 같다.
“재수없는 놈을 만났다. 오늘은 공쳤구나!”
착하고 순진한 사람, 청정한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 하고 중상모략을 일삼는 자는 어떤 과보를 받을까? 법구경 125번 인연담에는 ‘장로와 사냥꾼 이야기’라 하여 무서운 과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전에 올렸던 것을 다시 한 번 올리면 다음과 같다.
DhpA.III.31-33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숲에 계실 때, 사냥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냥꾼 꼬까(Koka)는 손에 활을 들고 자신을 따르는 사냥개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한 수행승을 만났다. 수행승을 만나자 ‘재수없는 놈을 만났다. 오늘은 공쳤구나!’라고 생각하며 길을 갔다.
장로는 마을로 탁발을 하고 아침을 먹고 승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었다. 사냥꾼은 장로를 보고 ‘오늘 아침에 만난 재수없는 놈이구나. 숲에 갔다가 공쳤다. 내 앞에 불쑥 나타났으니 내 개들의 밥이나 되라.’라고 생각하고 사냥개들을 장로에게 들이댔다. 그러자 장로는 ‘재가신도여, 제발 이러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사냥꾼은 ‘아침 일찍 당신을 만났는데, 그 때문에 숲에 갔다가 공쳤다. 내 앞에 불쑥 나타났으니 네 개들의 밥이나 되라.’고 말하며 사냥개들을 풀어 놓았다. 그러자 장로는 허겁지겁 나무위로 기어 올랐다.
사냥개들이 그 나무를 둘러쌌다. 그리고 사냥꾼은 활을 쏘아 장로의 발바닥을 맞추었다. 장로는 ‘제발 이러지 마시오.’라고 빌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사냥꾼은 계속 활을 쏘아대서 장로의 양쪽 발바닥에 불이 날 지경이었고, 몸에서 가사가 떨어지는 것 조차 몰랐다.
가사가 바닥으로 떨어져 사냥꾼 꼬까의 몸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덥쳤다. 개들은 장로가 나무에서 떨어진 줄 알고 자신의 주인을 물어서 뼈만 남기고 삼켜버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장로는 나무 위에서 마른 가지를 꺽어 개에게 던졌다. 그제야 사냥개들은 자신들이 주인을 죽였다는 것을 알고 숲으로 도망갔다.
장로는 자신의 가사가 떨어져 사냥꾼이 죽게 된 것에 죄책감을 느껴 부처님을 찾아 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부처님께서는 장로에게 ‘수행승이여, 그대는 죄가 없다. 수행자의 삶을 잘 영위하고 있다. 그는 죄없는 자를 공격하여 파멸을 자초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냥꾼의 전생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의사였는데, 일거리를 찾다가 발견하지 못하자 문 앞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고 ‘뱀을 놓아 상처를 입으면 내가 치료해주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무의 구멍에 머리를 내민 뱀을 보고 아이들에게 ‘쌀리까(Salika)새를 보라, 잡아라!’라고 거짓말을 했다. 한 아이가 손을 집어넣어 뱀의 목을 붙잡아 구멍에서 꺼냈다. 손에 뱀이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뱀을 던졌는데 의사의 머리에 떨어졌다. 뱀은 의사의 어깨를 물었고, 의사는 그 때문에 죽었다(Jat.367).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장로에게 시로써 ‘죄악이 없고 청정하여 허물이 없는 님에게 해를 끼치면, 티끌이 바람 앞에 던져진 것처럼, 악의 과보가 어리석은 그에게 돌아간다.’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그 수행승은 거룩한 경지를 성취했다.
(법구경 125번 게송 인연담, 전재성님역)
인연담을 보면 크게 두 가지에 대한 것이다. 하나는 허물 없는 성자를 해치려 한 것이고, 또 하나는 순진한 아이에게 상해를 입히려 한 것이다. 두 가지 시도 모두 자신의 죽음으로 끝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아무 근거도 없이 성자를 비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순진한 사람을 꼬드겨서 이익을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허물 없는 자를 비방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그에 대한 과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 한다.
중상모략하는 자들의 과보
이어지는 게송에서 부처님은 성자를 근거없이 비방하고 중상모략하는 자들의 악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갖가지 탐욕의 대상들에 빠져,
믿음도 없고 이기적이고, 불친절하고,
인색하고 중상을 일삼는다면,
그 사람은 말로써 남들을 매도하는 것이다. (stn663)
입이 험하고, 진실하지 못하고, 천한 자여,
산 것을 죽이고, 사특하며, 악행을 일삼는 자여,
비루하고 불행하고 비천한 자여,
이 세상에서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
그대는 지옥에 떨어진 자이다. (stn664)
죄악을 짓는 자여,
그대는 불이익을 위해 먼지를 뿌리고,
참사람들을 비난한다.
온갖 나쁜 일을 하고 나서,
오랜 세월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다. (stn665)
결코 어떤 행위도 없어지지 않는다.
때가 되면 그 임자가 그것을 받는다.
죄악을 짓는 어리석은 자는
내세에 자신 안에서 그 괴로움을 발견한다. (stn665)
(Kokālika sutta-꼬깔리야의 경, 숫따니빠따 Sn3.10, 전재성님역)
stn665에서 “결코 어떤 행위도 없어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반드시 받을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때가 되면 그 임자가 그것을 받는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죄악에 대한 과보를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고통일까?
지옥에서 자신의 모습을
이어지는 게송에서는 성자를 비방하고 착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자의 지옥고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는 지옥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쇠꼬챙이로 꿰이는 곳에서
날카로운 날이 달린 쇠창에 찔린다.
그곳에서 거기에 알맞은 불에 달군
쇳덩이 같은 음식이 주어진다. (stn667)
말 건네는 자들은 상냥하지 않고,
서둘러 그를 구해주지 않고,
안전한 곳으로 이끌지 않는다.
그는 숯불이 뿌려진 곳에 누워
불붙는 화염 속에 들어간다. (stn668)
그들은 그곳에서 그를 그물로 덮어서
쇠로 만든 망치로 내려친다.
그리고 어둠이 안개처럼 펼쳐져 있는
칠흑 같은 암흑 속으로 그를 이끈다. (stn669)
그리고 화염처럼 불타오르는
구리로 만들어진 가마솥에 들어간다.
오랜 세월 그 화염처럼 불타오르는
가마솥 안에서 오르락내리락 괴롭힘을 당한다. (stn670)
또한 고름과 피로 섞인 것이 있어,
죄악을 지은 자는 그 속에서 괴롭힘을 당한다.
어느 쪽으로 피신하든 거기에 닿아서 더렵혀진다. (stn671)
해충들이 사는 물이 있어,
죄악을 지은 자는 그 안에서 괴롭힘을 당한다.
나오려 해도 언덕이 없다.
그 가마솥은 둘레가 모두 한결 같기 때문이다. (stn672)
날카로운 칼 잎으로 이루어진 숲이 있어
팔다리가 잘린 채 그곳에 들어간다.
낚시 바늘로 혀를 꿰어 찌르고 또 찌르면서 괴롭힘을 당한다. (stn673)
또한 예리한 면도칼이 있는
건너기 어려운 베따라니 강에 이른다.
악을 행하는 어리석은 무리들은
죄악을 범하고도 그곳에 떨어진다. (stn674)
그곳에는 갈가마귀, 검은 개,
점박이 개, 승냥이 떼들이 있어,
울부짖는 사람들을 뜯어먹는다.
또 독수리와 까마귀들도 살을 쪼아 먹는다. (stn675)
(Kokālika sutta-꼬깔리야의 경, 숫따니빠따 Sn3.10,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지옥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이다. 이런 설명에 대하여 누군가는 ‘허구’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문학작품’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은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다만 자신의 판단에 따랐을 때 허구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가르침을 비방하는 ‘삿된 견해(邪見)’이다.
경에서 “그는 숯불이 뿌려진 곳에 누워 불붙는 화염 속에 들어간다.(stn668)”라 하였다. 또 “화염처럼 불타오르는 가마솥 안에서 오르락내리락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런 지옥을 roruva’라 하여 규환지옥이라 한다.
규환지옥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연기의 규환지옥이고, 또 하나는 화염의 규환지옥이다. 특히 후자의 화염지옥을 ‘아비지옥(avici-niraya)’이라 한다. 이 아비지옥에 대하여 지옥중생들이 불에 탈 때 비명소리가 끊임 없이 들려 오기 때문에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고 한다. 이는 “화염처럼 불타오르는 가마솥 안에서 오르락내리락 괴롭힘을 당한다.(stn670”이라고 묘사 된 것에서 알 수 있다.
언어적으로 청정하게 해야
이처럼 지옥에 대하여 말씀 하신 부처님은 이어지는 게송에서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죄악을 지은 자가 만나는 이 세상의 삶은
실로 비참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사람은 해야 할 일을 하고 방일하지 말라. (stn676)
홍련지옥에 끌려와 사는 기간은
깨알더미 만큼이라 현자들은 헤아렸으니
실로 오 나유따 꼬띠하고도
또한 천이백 꼬띠나된다. (stn677)
여기서 말한 지옥의 고통이
아무리 오래 지속하더라도 그곳에서 살아야한다.
그러므로 청정하고 어질고 착한 성품의 사람들 사이에서
항상 언어와 마음을 수호해야한다. (stn678)
(Kokālika sutta-꼬깔리야의 경, 숫따니빠따 Sn3.10,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한 것은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언어적으로 청정하게 해야함을 말한다. 그래서 “항상 언어와 마음을 수호해야한다.”라고 하였다.
순진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
지옥은 가서 보고 온 사람이 없기에 누군가 지어낸 ‘허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지옥에 대한 묘사는 무수히 많다. 그것도 마치 현장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 되어 있다. 이것 역시 허구라고 볼 수 있을까?
만일 누군가 경전에 쓰여 있는 부처님 말씀 조차 허구라고 본다면 그를 불자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설령 지옥에 대한 묘사가 자신의 오감으로 인지 할 수 없고 한계를 넘어 선 것이라 할지라도 근거없이 허구라고 떠들어 댄다면 불자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불자는 삼보에 귀의 하고 의지처로 삼는다. 또 삼보를 피난처로 여기며 가르침을 실천한다. 이때 경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부처님 가르침 역시 의심이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불자는 어떻게 경을 대할 것인가.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가르침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심지어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심지어 가르침을 따르는 착하고 순진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마치 청개구리처럼 ‘비난받아야 할 것을 찬양하고, 찬양해야 할 것을 비난하는’ 고약한 심보를 가진 자들이 있다. 이런 자들은 어떤 운명에 떨어질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근거없이 중상모략을 일삼는 자들은 도박꾼의 패 보다 더 나쁜 패를 가지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항상 불운이 함께 할 것이라 하였다.
2014-02-1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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