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번뇌의 족쇄를 부수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14. 2. 19. 16:52

 

번뇌의 족쇄를 부수려면

 

 

 

초기경전을 접하면 항상 마음이 차분해 진다. 특히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애송되고 있는 법구경과 숫따니빠따가 그렇다. 왜 이처럼 초기경전을 접하면 마음이 차분해질까?

 

가족을 위해서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부대끼며 삶을 살아 간다.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라면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일도 마다 하지 않는다. 종종  TV에서 극한직업이라는 프로를 보면 가장의 책임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극한직업 프로를 보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냉동창고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사람, 뜨거운 쇳물을 다루는 사람, 막장에서 석탄을 캐는 사람 등 힘들고 더럽고 어려운 일을 말한다. 소위 3D업종이라 불리우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어느 경우 숭고해 보이기 까지 한다.

 

오로지 팔의 힘으로 땀을 흘려 가며 중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노동의 가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고된 노동이 끝난 다음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는 장면을 보면 아름다워 보인다. 이는 일없이 무위도식하는 자들이 무료와 권태를 못이겨 고급룸살롱에서 양주를 마시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극한 환경을 마다 하지 않고 목숨걸고 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방송에서는 항상 들려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구동성으로 가족을 위해서 일합니다라는 말이다.

 

법륜스님의 고문이야기

 

가족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한다. 설령 그것이 잘못된 것일지라도 가족이라는 대의명분을 위하여 무슨 짓이든지 다 한다는 것이다. 고문하는 기술자 역시 가족을 위해서라고 한다. 이는 법륜스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스님이 젊은 시절 모처에 끌려 가서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고문 도중에 딸의 대학입시를 걱정하는 고문기술자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공중파방송에 출연하여 고문관들끼리 하는 일상적인 대화를 들었는데, 그 순간 엄청난 충격이 왔다. 저 사람도 집에 가면 아이의 착한 아빠고, 아내의 사랑스러운 남편이고, 어쩌면 자기 어쩌면 자기 나름대로 애국하는 사람이었더라.(문화일보 2012-05-29)”라고 말하였다. 스님은 그 이후로 고문기술자에 대한 증오를 접었다고 한다.

 

고문하는 자는 고문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다. 그래서 열심히 고문하여 자백을 받아 내는 것이 고문기술자의 직무이다. 만일 고문기술자가 마음이 약해져 고문하지 않는다면 직무유기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 고문기술자도 퇴근 하여 집에 돌아 가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고문관은 가정의 가장일 뿐만 아니라 한 여자의 남편이고 자녀의 대학입시를 걱정하는 아버지이다. 고문기술자가 열심히 일하는 것도 결국 가족을 위해서 일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탈출을 꿈꾸는 도시인

 

도시탈출이라는 말이 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 일상에서 탈출하는 것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주말에 산행 등으로 자연과 함께 하는 것을 말하지만, 넓게는 아예 산속에 들어 가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탈출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이다.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늘 탈출을 꿈꾼다. 지금 탈출이 가능하지 않다면 마음속으로라도 벗어 나고 싶어 한다.

 

마음으로 도시탈출 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이 초기경전을 접하는 것이라 본다. 특히 법구경과 숫따니따따이다. 주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 경을 읽으면 마음은 이미 탈출한 것이나 다름 없다.

 

자식과 아내에 대한 기대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Vaso vīsālo va yathā visatto
Puttesu dāresu ca yā apekhā,
Va
sakaīrova asajjamāno
Eko care khaggavis
āakappo.

 

자식과 아내에 대한 기대는

뻗은 대나무가 엉킨 것과 같으니,

대나무 순이 서로 달라붙지 않듯이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stn38)

 

(haggavisāa sutta-무소의 뿔의 경, 숫따니빠따 Sn1.3, 전재성님역)

 

 

자식과 아내에 대한 기대는 대나무가 엉킨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대나무 뿌리를 말한다. 지상에서 보는 대나무는 독립적으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이나 땅 속에 있는 뿌리는 얽키고 설켜 있어서 엉켜 있다고 표현 한 것이다.

 

가족이라는 구성원은 서로 개별적으로 보이지만 정으로 얽혀 있다. 그래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이를 대나무 뿌리가 서로 엉켜 있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다.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이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시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연각불이 지은 것이다. 과거불인 깟싸빠 부처님 시대에 세 명의 연각보살이 이 만년에 걸쳐서 수행을 닦았는데, 천계에 태어났다.

 

천계의 수명이 다하고 죽어서 세 명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자가 베나레스의 왕실에 태어났고 다른 두 명은 변경의 왕가에 태어났다. 그 두 명은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연각불이 되었다.

 

그들은 명상에 들었다가 과거를 기억해내고 그들의 옛 도반이 베나레스의 왕이 된 것을 알았다. 그들은 왕이 유원을 노닐 때에 공중으로 비행해서 왕의 곁에서 알현을 청했다.

 

왕이 이름을 묻자 그들은 ‘무집착’이라고 대답했다. 왕은 그 의미를 재차 묻자 ‘뻗은 대나무가 엉킨 것’이 집착이고 ‘대나무 순이 서로 달라붙지 않은 것’이 무집착이라고 말한다.

 

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홀로 떨어져 연기를 순관하고 역관하다가 깨달음을 얻어 연각불이 되어 그 감흥을 시로 읊은 것이다.

 

(stn38 인연담, 전재성님)

 

 

인연담에 따르면 대나무 순이 서로 달라붙지 않은 것에 대하여 무집착이라 하였다. 무집착의 반대말은 집착이 된다. 대나무 뿌리가 서로 엉킨 상태를 말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집착은 갈애가 강화된 것이다. 그런데 게송에서는 대나무뿌리가 서로 엉킨 것에 대하여 자식과 아내에 대한 기대 (Puttesu dāresu ca yā apekhā)’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기대는 apekhā의 번역어이다. Apekhā‘Desire, longing, 期待, 待望의 뜻이다.

 

자식과 아내에 대한 기대는 무엇을 뜻할까? 주석에 따르면 기대는 갈애(tanha)에 의한 애정(sineha)을 말한다.(Prj.II.76)”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갈애와 애정으로 뭉쳐진 것이 가족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가족은 얼키고 설킨 대나무 뿌리와 같은 것이어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내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족은 끈끈한 정으로 맺어져 있다. 그래서 늘 염려하며 잘 되기를 바란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서 힘들고 더럽고 어려운 일도 마다 하지 않는 가장에게는 가족이라는 든든한 백이 있다. 그래서 그것이 설령 불법이고 탈법이고 잘못된 것이라도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정당화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가족은 대나무 뿌리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법구경에도 유사한 게송이 있는데

 

그런데 더 강한 표현이 있다. 법구경에도 숫따니빠따 stn38과 유사한 게송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Na ta daha bandhanam-āhu dhīrā,     나 땅 달항 반다나마아후 디라
Yad-
āyasa dāruja babbajañ-ca,       야다야상 다루장 밥바잔짜
S
ārattarattā maikuṇḍalesu             사랏따랏따 마니꾼달레수
Puttesu d
āresu ca yā apekhā             뿥떼수 다레수 짜 야 아뻭카

 

쇠나 나무나 밥바자 풀로 만든 것을

현명한 님은 강한 족쇄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석이나 귀고리에 대한 탐착,

자식과 아내에의 애정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

 

(법구경 Dhp 345, 전재성님역)

 

 

345번 게송에서는 쇠, 나무, 밥바자 풀이 등장하였다. 이런 재료를 이용하여 족쇄를 만드는 것이다. 이중 가장 강한 족쇄는 쇠붙이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쇠로 만든 족쇄 보다 더 단단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족이라는 족쇄이다.

 

보석은 누구나 좋아 한다. 보석으로 만든 귀고리나 목거리 등은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사랑스런 것이다. 그러나 보석 보다 더 사랑스런 것이 있다고 하였다. 아내와 자식이다. 그래서 가족 보다 더 사랑스런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렇게 무쇠로 만든 족쇄보다 강하고, 보석으로 치장된 장신구 보다 사랑스런 것이 가족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자식과 아내에의 애정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 라 하였다.

 

번뇌로 이루어진 족쇄

 

자식과 아내에의 애정에 대한 빠알리구문이 ‘Puttesu dāresu ca yā apekhā’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숫따니빠따 stn38에서 ‘Puttesu dāresu ca yā apekhā구문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apekhā 에 대하여 법구경에서는 애정이라 번역하였고, 숫따니빠따에서는 기대라고 번역한 것이 다르다.

 

법구경에서는 자식과 아내에 대한 애정에 대하여 족쇄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족쇄를 뜻하는 빠알리어가 bandhana이다. 이는 ‘bound; fetter; attachment; imprisonment; binding; bondage, , 捕縛, 結縛의 뜻이다. 그것도 강한(daha) 족쇄라 하였다. 얼마나 강하길레 쇠붙이 보다 더 강하다고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쇠붙이 등과 같은 족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깨달은 님 등과 같은 성자는 그와 같은 족쇄를 강력한 족쇄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족쇄는 언제든 칼로 자를 수 있기 때문이다.(DhpA.IV.56)

 

(Dhp 345각주, 전재성님)

 

 

여기 쇠사슬로 만든 족쇄가 있다. 또 나무로 만든 형틀이 있다. 그리고 밥바자 풀이나 얇은 나무껍질 등으로 만든 족쇄가 있다. 이런 것들은 강해 보이지만 견고 하지 않다고 한다. 모두 칼로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족은 칼로 끊기 어렵다. 아무리 모진 마음을 가진 자라도 처자식을 생각하면 마음이 약해지기 때문에 도저히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쇠붙이로 만든 족쇄 보다 더 강력한 것이 가족이라 한다. 또 가족은 보석이나 귀거리와 같은 장신구 보다 더 애착이 가는 것이어서 처자식에 대한 갈애는 보석 보다 더 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애정, 갈애 , 집착 등 번뇌로 이루어진 족쇄가 강한 족쇄이다. 그러나 현명한 자는 이런 족쇄를 끊어 버린다고 하였다. 어떻게 끊어 버릴까?

 

엉킴을 풀려면

 

Stn38에서 뻗은 대나무가 엉킨 것과 같으니 (Vaso vīsālo va yathā visatto)”라 하였다. 여기서 엉킴이라고 번역한 것이 ‘visatto’이다. Visata에 대한 빠알리 사전  PCED194를 보면 ‘strongly attached; entangled’라 되어 있다. 이는 과거분사형으로서 강력하게 엉켜서 도저히 풀리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또 달라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상태가 십이연기에 따르면 집착이다.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된 것이 집착이다. 이는 떨어지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대나무 뿌리가 서로 엉킨 것은 강한 집착과도 같은 것이다. 집착은 갈애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래서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Upādānapaccayā bhavo, S12.2)”라 하여 업으로서 존재(業有)’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가족의 관계가 그렇다. 그렇다면 이런 엉킴을 어떻게 해야 풀을 수 있을까?

 

엉킴과 관련하여 상윳따니까야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Sīle patiṭṭhāya naro sapañño citta paññañca bhāvaya,
Ātāpi nipako bhikkhu so ima vijaaye jaanti.
Yesa
rāgo ca doso ca avijjā ca virājitā,
Khīāsavā arahanto tesa vijaitā jaā.

 

 

[세존]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매듭을 풀 수 있으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번뇌가 다한 성자에게

그 얽매인 매듭은 풀리리.

 

(Jaāsutta-매듭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3, 성전협 전재성님역)

 

 

이 게송에 대한 주석을 보면 사람이 땅위에 서서 잘 드는 날카로운 칼로 대나무가 엉킨 것을 잘라내듯, 수행승은 계행 위에 서서 집중의 돌로 질 갈아진 통찰적 지혜라는 칼을 잡고, 정진의 힘에 의해 발휘된 실천적 지혜의 손으로, 갈애의 얽힘을 자르고 부수어 버린다. (Srp.I.150)”라고 되어 있다. 아는 무엇을 말할까?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엉킴을 풀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두손으로 지혜의 검을 꼬나잡고

 

Stn38에서 아내와 자식에 대한 기대는 엉킴과 같다고 하였다. 그런 엉킴은 법구경 345번 게송에 따르면 쇠붙이로 만든 족쇄 보다 더 강한 것이라 하였다. 쇠붙이로 만든 족쇄는 칼로 끊어 버리면 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의 족쇄는 끊기 힘들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엉킴을 풀고 족쇄를 끊어 버리는 자가 있다. 계정혜 삼학을 갖춘 자이다.

 

엉킴을 풀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계행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행이라는 굳건한 토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계행을 확립하고 (Sīle patiṭṭhāya, S1.23)라 하였다.

 

계행의 굳건한 토대 위에서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지혜를 계발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이 등장한다. 그 칼은 부엌칼이 아니라 무사들이 사용하는 ()’이다. 그런데 검은 날카롭게 갈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무엇이든지 벨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석에서는 검을 갈 때 집중의 돌로 간다고 하였다. 집중이라 불리우는 돌에 검을 갈았을 때 날카롭게 빛날 것이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돌은 집중 즉, 삼매를 비유한 것이다. 이렇게 삼매의 돌에 갈아야 날카로운 검을 가질 수 있는데 그런 검에 대하여 통찰적 지혜라는 칼이라 하였다.

 

이제 엉킴을 풀 준비는 다 되었다. 계행이라는 토대위에 굳건히 두 발을 디딘 수행자는 잘 갈아진 지혜의 검을 두 손으로 꼬나잡는다. 그리고 검을 휘두른다. 어떻게 휘두르는가? 주석에서는  정진의 힘에 의해 발휘된 실천적 지혜의 손으로, 갈애의 얽힘을 자르고 부수어 버린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계정혜 삼학으로 얼키고 설킨 매듭을 베어 버리는 것이다.

 

 

 

 

 

 

 

 

2014-02-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