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장애업보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님이 새롭게 해석한 업에 대한 가르침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14. 16:10

 

 

장애업보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님이 새롭게 해석한 업에 대한 가르침

 

 

 

법의 눈(dhammacakkhu)으로 보았을 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였다. 그래서 돼지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豕眼見惟豕, 佛眼見惟佛矣)” 는 말이 있다. 세상을 보는 내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그 마음 그대로 세상이 보인다는 말이다.

 

세상을 보는 눈은 여러 가지가 있다. 대부분 육안으로 본다. 그러나 가르침을 접하면 법의 눈(dhammacakkhu)’으로 보게 된다. ‘법안을 다른 말로 진리의 눈이라 한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는 콘단냐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자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라고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가르침을 접하면 진리의 눈으로 보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진연기법이다. 그럼에도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를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를 불교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

 

정녕 이게 붓다의 가르침 맞나요?”

 

장애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장애업보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올린 것이다. 어느 빅쿠의 장애관에 대하여 비판 한 것이다. 그 빅쿠는  절에 가면, 인과(因果)를 말합니다. 전생에 지은 바 업보(業報), 업장(業障)이니 누구를 탓할 것입니까? 자기가 과거에 잘못한 탓에 현재의 아픔을 과보로써 겪는 것이니 참회하며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생에 죄 지은 표식으로 나타난 장애를 껴안고 눈치 보며 타의적으로 차별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교리적 차이가 있는데, 장애를 가진 사람 중에 누가 절에 다니려고 하겠습니까?”라 하였다. 장애를 가진 자에 대하여 전생의 업보 때문이라고 말하면 절에 올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 한다. 그래서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에 대하여 유전적 요인이나 태내외의 관리 소홀로 보고 있다. 전반적으로 생물학적 요인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장애를 업보라고 하지 않았다”라고 결론 낸 것이다.

 

이와 같은 빅쿠의 장애관에 대하여 비판하자 어느 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주었다.

 

 

업보론이 숙명론의 일부이지요. 지어진 업의 결과를 받아들이기 싫어도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장애가 전생업 때문이다... = 네가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난건 네 전생업 때문이다 (인도인)
똑같죠. 단지 경에 그렇게 나오니 믿으라는 말인지요?
그럼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은 일생 후회와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살아가라는 뜻이네요.
보지도 알지도 알지도 못한 것으로 족쇄를 채우는 이딴 놀음은 종교의 폐해예요.
어느 정신 멀쩡한 사람이 이런 걸 믿겠습니까?
종교가 그래서 사기라는 겁니다.
한 번 이성을 갖고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이게 무슨 유익이 되는 가르침인지?
꼭 이렇게 협박하고 겁을 줘야 선한 일을 할 수 있나요? 인도놈들 참 야비합니다. 사람을 아주 비참하게 묶어버려요.
정녕 이게 붓다의 가르침 맞나요?

 

(U법우님, http://blog.daum.net/bolee591/16155854)

 

 

U법우님은 장애를 업에 대한 과보로 보는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래서 장애업보를 말하는 것에 대하여 인도의 숙명론적 업보가 아니냐고 한다. 더구나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에 대하여 일생 후회와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살아가라는 뜻이네요.”라고 하였다.

 

누구나 장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장애를 가진 것은 불편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장애를 가지지 않는 자는 매우 드물다. 누구나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탐욕이나 성냄 처럼 해로운 마음 역시 장애로 보기 때문이다. 설령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예비장애인이다. 미래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모두 미래의 장애인이라 볼 수 있다.

 

누구나 장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장애가 있다고 하여 늘 죄스런 마음을 갖거나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 다만 다른 사람 보다 불편하게 살 뿐이다. 비록 지금 불편한 삶일지라도 늘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린다면 이어지는 생에서는 지금 보다 더 나은 생을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장애를 극복해 갈 것인가? 

 

숙명론적인 업설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가 발생한 요인에 대하여 단순하게 유전학적 또는 생물학적 요인으로 보는 것은 물질주의 기반한 과학만능주의 산물이라 본다. 초기경에 따르면 그것 플러스 알파가 있는데 바로 그것이 업에 대한 과보로도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법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업에 대한 가르침은 단지 운명론적 또는 숙명론적인 업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로나팔라경(Loaphalasutta, 소금덩어리의 경, A3.99)에 잘 설명 되어 있다. 먼저 숙명론적인 업설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 Yo bhikkhave eva vadeyya: yathā yathā'ya puriso kamma karoti, tathā tathā na paisavediyatī'ti. Eva santa bhikkhave brahmacariyavāso na hoti. Okāso na paññāyati sammā dukkhassa antakiriyāya. (A3.99)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사람은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라고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경우에 청정한 삶의 가능성이나 괴로움을 종식을 이룰 가능성이 시설 되지 않는다.

 

(Loaphalasutta- 소금덩어리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99, 전재성님역)

 

 

비구들이여, 누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떤 업을 지었건 그 업의 결과를 그대로 경험하게 된다.’라고 한다면 청정범행을 닦음도 없고 바르게 괴로움을 종식시킬 기회도 없다.

(Loaphalasutta- 소금 덩이 경, 앙굿따라니까야 A3.99, 대림스님역)

 

 

"Monks, for anyone who says, 'In whatever way a person makes kamma, that is how it is experienced,' there is no living of the holy life, there is no opportunity for the right ending of stress.

 

(Lonaphala Sutta: The Salt Crystal, A3.99, Thanissaro Bhikkhu)

 

 

 

Karma

 

 

빠알리원문과 전재성님역, 대림스님역, 타닛사로빅쿠역 이렇게 세 종류의 번역을 실었다.

 

숙명론적 업설에 대한 빠알리어 구절은 “yathā yathā'ya puriso kamma karoti, tathā tathā na paisavediyatī이다. 이에 대하여 각 번역자의 것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람은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전재성님역)

 

2) 이 사람이 어떤 업을 지었건

그 업의 결과를 그대로 경험하게 된다.(대림스님역)

 

3) In whatever way a person makes kamma,

that is how it is experienced (타닛사로빅쿠역)

 

 

빠알리어 yathā yathā는 '이러 이러한 의 뜻으로 번역되었다. 여기서 yathā‘as; like, くに의 뜻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라고 번역 될 수 있다. 그런데 두 번 걸쳐 반복 되어 yathā yathā로 되어 있으므로 이와 같이 이와 같이라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kamma karoti에서는  Kamma‘action’의 뜻으로 행위를 말하고, karoti‘does; acts; makes’의 뜻으로 실행한다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kamma karoti행위를 한다의 뜻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kamma는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선한 것이든 불선한 것이든 모두 포함된다. 그래서 앞구절 ‘yathā yathā'ya puriso kamma karoti’를 번역하면 이러이러하게 행동하는 것은 어떤 것이나의 뜻이 된다.

 

yathā yathā의 용법은 뒷 구절에 나오는 tathā tathā와 관련 되어 있다. 이때 tathā‘thus; so; in that way, 如此의 뜻도 있지만, tatha‘true; real, 實的, 如實的의 뜻도 있다. 부처님이 부처님을 지칭할 때 따타가따라 하는데 그 따타(tatha)’를 말한다. 그래서 뒷문장 ‘tathā tathā na paisavediyatī진실로 경험한다”또는진실로 그러하다의 뜻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yathā yathā'ya puriso kamma karoti, tathā tathā na paisavediyatī의 문장을 직역하면 이러이러하게 행동하는 것은 어떤 것이나, 진실로 그러한 과보를 받게 된다.”의 뜻이 된다.

 

이는 숙명론이다. 왜 그럴까? 각주에 따르면 행위한 그대로의 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은 결코 불교적 교리가 아니다.”라고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와 같은 숙명론으로는 청정한 삶(brahmacariya)’이나 괴로움의 종식(dukkhassa antakiriyāya)’을 실현 할 수 없을 것이라 하였다. 이는 연기법에 맞지 않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떤 업설을 말씀 하셨을까?

 

숙명론을 부정한 부처님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Yo ca kho bhikkhave eva vadeyya: yathā yathā vedanīya aya puriso kamma karoti, tathā tathāssa vipāka paisavediyatī'ti. Eva santa bhikkhave brahmacariyavāso hoti, okāso paññāyati sammādukkhassa antakiriyāya.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사람은 겪어야 하는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지으면, 그러한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그 과보를 받는다.’라고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경우에 청정한 삶의 가능성이나 괴로움을 종식을 이룰 가능성이 시설 된다.

 

(Loaphalasutta- 소금덩어리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99, 전재성님역)

 

 

비구들이여, 누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떤 형태로 겪어야 할 업을 지었건 그것의 과보를 경험하게 된다.’라고 한다면 청정범행을 닦음도 있고 바르게 괴로움을 종식시킬 기회도 있다.

 

(Loaphalasutta- 소금 덩이 경, 앙굿따라니까야 A3.99, 대림스님역)

 

 

But for anyone who says, 'When a person makes kamma to be felt in such & such a way, that is how its result is experienced,' there is the living of the holy life, there is the opportunity for the right ending of stress.

 

(Lonaphala Sutta: The Salt Crystal, A3.99, Thanissaro Bhikkhu)

 

 

어느 때 지하철에서 공익광고를 본 적이 있다잘보면 보입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꼬리가 사람의 모습에 대한 그림이었다. 간첩신고에 대한 광고이다. 위에 언급되 두 개의 문장도 잘 보면 보인다. 어디가 다른 것일까? 두 개의 빠알리 문장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yathā yathā'ya puriso kamma karoti,

tathā tathā na paisavediyatī.  (숙명론)

 

2) yathā yathā vedanīya aya puriso kamma karoti,

tathā tathāssa vipāka paisavediyatī. (부처님의 업에 대한 가르침)

 

 

첫번째 문장은 고대인도의 숙명론에 대한 것이다. 두번째 문장은 부처님에 새롭게 해석한 업에 대한 가르침이다. 두 번째 문장을 보면 첫번째 문장에 없는 단어가 추가 되어 있다. 그것은 vedanīya ayavipāka이다. 두 단어의 삽입으로 인하여 숙명론적 업설과 부처님의 업에 대한 가르침의 차별화가 이루어졌다.

 

의도적행위만이 업에 해당된다

 

부처님이 재해석한 가르침에 대하여 각번역자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이 하였다.

 

 

1) 사람은 겪어야 하는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지으면,

그러한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그 과보를 받는다. (전재성님역)

 

2) 이 사람이 어떤 형태로 겪어야 할 업을 지었건

그것의 과보를 경험하게 된다. (대림스님역)

 

3) When a person makes kamma to be felt in such & such a way,

 that is how its result is experienced, (타닛사로빅쿠역)

 

 

번역을 보면 추가된 vedanīya aya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격어야할또는 to be felt(경험되는 것)’의 뜻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빠알리어 vedanīya感受さるべき, 経験すべき라 설명 되어 있다. aya‘this person(이사람)’의 뜻이다. 따라서 vedanīya aya이사람이 경험하는 것의 뜻이 된다. 그래서 앞구절 yathā yathā vedanīya aya puriso kamma karoti’그러 그러하게 어떤 사람의 행위로 인하여 그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의도적행위만이 업에 해당됨을 말한다. 지금 누군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의도(cetana)가 실린 행위를 하였을 때 그 행위에 대한 과보가 반드시 뒤따르게 됨을 말한다 반대로 의도가 실리지 않은 행위는 업에 대한 과보로서 효력이 없음을 말한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법구경 1번 게송 인연담인 짝꾸빨라장로이야기일 것이다.

 

장님이 벌레를 밟아 죽였는데

 

부처님 당시 짝꾸빨라 장로가 경행을 하다가 벌레 몇 마리를 밟아 죽이고 말았다. 번뇌 다한 아라한이 벌레를 죽인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 어느 빅쿠가 악의를 품고 부처님에게 이 사실을 일러 바쳤다.

 

짝꾸팔라 장로는 아라한이긴 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장로가 벌레들을 죽이는 것을 보았는가?”라고 물어 보았다. 일러 바친 빅쿠는 당연히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단지 죽은 벌레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그대들이 죽이는 것을 보지 못한 것처럼, 그 또한 살아 있는 곤충들을 보지 못했다. 그 밖에 그 수행승은 이미 아라한의 지위를 얻었으므로 의도적으로 살생한 것이 아니니까 그에게 허물이 없다.”

 

(법구경 1번 게송 인연담 짝꾸빨라장로이야기, 전재성님역)

 

 

눈이 보이지 않는 짝꾸빨라 장로가 경행중에 밟아 죽인 벌레는 살생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의도가 실리지 않은 행위는 업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여담이지만 짝꾸빨라장로가 벌레를 죽인 것에 대하여 사마타수행을 하지 않고 위빠사나 수행만 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오로지 위빠사나 수행만 하여 아라한이 되었다면 신통을 쓸 수 없다. 그러나 사마타수행을 하여 사선정에서 신통을 얻게 되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 지기 때문에 경행을 해도 벌레를 밟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 한다. 부처님이 경행을 하지만 벌레를 밟아 죽이지 않는 것은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한 신통으로 보고 있다.

 

나는 의도가 행위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업으로서 효력이 발생하는 것은 의도가 발생하였을 때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 경전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Cetanāha bhikkhave kamma vadāmi,

cetayitvā kamma karoti kāyena vācāya manasā,

 

수행승들이여, 나는 의도가 행위라고 말한다.

의도하고 나서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행한다.

 

(Nibbedhika sutta-꿰뚫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6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의도(Cetanā)가 행위(kamma)라 하였다. 의도가 실려야 행위로서 인정될 수 있는데 그것은 신구의 삼업을 말한다. 따라서 의도가 되지 않은 것은 신구의 삼업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눈먼 아라한 짝꾸빨라 장로가 벌레를 밟아 죽인 것은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생업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언젠가 신구의 삼업에 대한 글을 썼다. 그때 신구의 삼업 중에 신체적으로 지은 죄가 가장 중하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살인을 하였을 경우 이는 신체적인 업에 해당된다. 그래서 죽은 다음 악처에 떨어지게 되는 매우 무거운 업으로 본 것이다. 이런 살인업은 거짓말하는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러자 어떤 이가 이의를 제기 하였다. 가장 중한 죄는 정신적으로 업을 짓는 것이라 하였다. 아마도 의도를 이야기 한 것이라 보여 진다. 의도가 있어야 살인도 저지르고 거짓말도 하고 탐욕도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도의 결과물인 신구의 삼업 중에 내생을 결정짓는 가장 중한 죄는 신체적으로 지은 죄가 될 것이다.

 

연기법으로 재해석된 업설

 

소금덩어리의 경에서 부처님은 업에 대하여 새롭게 해석하였다. 숙명론의 경우 모든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부처님이 해석한 가르침은 경험된 것만 해당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yathā yathā'ya puriso kamma karoti에서 yathā yathā vedanīya aya puriso kamma karoti그사람이 경험하는이라는 뜻의 ‘vedanīya aya이 추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경험 즉, ‘느낌(vedana)’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 그럴까? 느낌이 없으면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님인 짝꾸빨라 장로가 벌레를 밟아 죽였을 때 경험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벌레를 무심코 밟았지만 앞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전혀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행위의 원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Katamo ca bhikkhave kammāna nidānasambhavo:

phasso bhikkhave kammāna nidānambhavo.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행위의 원인인가?

수행승들이여, 접촉이 행위의 원인이다.

 

(Nibbedhika sutta-꿰뚫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63, 전재성님역)

 

 

자신에 대하여 가장 많이 아는 자는 바로 자기자신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위를 하였을 때 이는 바로 경험을 뜻한다. 그런 경험은 좋다, 싫다또는 즐겁다, 괴롭다와 같은 느낌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십이연기에 따르면 느낌은 접촉으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Phassapaccayā vedanā)라 되어 있다. 이렇게 느낌 (vedanā)은 접촉(phassa)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다.

 

그런데 부처님은 접촉이 행위의 원인(phasso kammāna nidānambhavo)”이라 하였다. 따라서 행위는 접촉을 조건으로 발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바로 연기법이다. 부처님은 숙명론적 업설에 대하여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연기법칙에 따라 재해석한 것이다.

 

부처님이 재해석한 업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연기법칙에 따른다. 그것은 느낌(또는 경험)인데 이는 접촉에서 비롯 된 것이다. 만일 숙명론적인 업설을 짝꾸빨라에게 적용한다면 짝꾸빨라는 살생업을 저지른 것이 된다. 하지만 짝꾸빨라가 밟아 죽인 벌레는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서 보지 못하였을 뿐이다.

 

같은 살인이라도 우발적인 것과 계획적인 것은 형량이 다르다. 똑 같은 살생업을 저질렀지만 의도가 실렸다면 중죄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조직폭력배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폭력단체를 구성하였다면 소위 동네깡패논두렁깡패보다 엄하게 처벌 받는다.

 

짝꾸빨라 장로가 장님으로 태어난 이유

 

그렇다면 짝꾸빨라 장로는 어떻게 하다 장님으로 태어났을까? 이는 법구경 1번 게송 인연담에 나와 있다. 다음과 같은 이야이기이다.

 

 

그는 전생에 의사였는데, 가난한 여인의 시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연고를 처방해주었다. 그 때 그녀는 자신의 시력이 회복되면 자신의 자식들과 함께 그의 하인이 될 것을 약속했었다. 의사의 처방으로 효과를 내었으나 그녀는 약속을 지키기 싫어서 시력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처럼 속였다.

 

잔인한 의사는 그녀의 사악한 생각을 읽고는 다른 연고를 처방하여 그녀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그 악한 행위의 결과로 그 의사는 다시 태어나 결국은 눈먼 수행승이 되었다.

 

(법구경 1번 게송 인연담 짝꾸빨라장로이야기, 전재성님역)

 

 

인연담을 보면 장로가 눈이 먼 이유가 있다. 그것은 과거 전생에 의도적인 악행을 하여 여인의 눈을 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과보로서 현생에서 눈이 먼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의도가 실렸을 때 업으로서 효력이 발생함을 말한다.

 

현세에서 받거나 다음생에 받거나 훨씬 먼 후생에

 

의도가 실린 행위만이 업으로서 효력이 있다. 그렇다면 업에 대한 과보는 언제 받을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Katamo ca bhikkhave kammāna vipāko: tividhāha bhikkhave kammāna vipāka vadāmi: diṭṭhevā dhamme, upajje vā, apare vā pariyāye. Aya vuccati bhikkhave kammāna vipāko.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행위의 결과인가?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유형의 행위의 결과에 대하여 나는 말한다. 현세에서 받거나 다음생에 받거나 훨씬 먼 후생에 받는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행위의 결과이다.

 

(Nibbedhika sutta-꿰뚫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63,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세 가지 유형의 결과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결과는 vipāka의 번역어이다. Vipāka는   'kamma-result'로서 ‘result; fruition; consequence of one's actions. 異熟, , 果報’의 뜻이다. 그래서 과보에 대하여 1) 현생 (diṭṭhevā dhamme) 에서 받는 것, 2) 다음 생 (upajjhā)에서 받는 것, 3) 먼 후생(apara)에서 받는 것 이렇게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였다.

 

지금여기에서 현전(現前)한 것

 

현생에서 받는다고 하였을 때 현생은 diṭṭhevā dhamme를 번역한 것이다. 초불연에서는 ‘금생이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diṭṭhevā dhamme’는 ‘법을 본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자어로 법이 나타난다는 뜻으로 ‘현법(現法)’이라 하였다.  한글로서는 ‘지금 여기’라고 번역된다. 영어권에서는 ‘here and now’로 정착 되어 있다.  

 

이처럼 법은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나의 모습이 바로 이전 행위에 대한 과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전생을 보려거든 멀리서 찾지 말고 현재 네 꼬라지를 보면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과거에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라 볼 수 있다. 그것이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과거에 의도하였던 신구의 삼업에 대한 행위가 무르익어 나타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장애역시 과거 행위에 대한 산물로 볼 수 있다. 물론 유전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또는 환경적요인이 복합화 된 것이긴 하지만 짝꾸빨라장로이야기에서 처럼 의도에 의한 업의 과보가 무르익어 지금여기에서 현전(現前)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업보를 멈추게 할 수 없을까?

 

지금 여기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가 있다.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고통을 받고 있는 것 그 자체는 과거의 의도적인 행위에 대한 과보가 무르 익은 것이다. 그런데 아직 과보로 익지 않은 업이 또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이번 생이 될지 아니면 다음생일지 아니면 머나먼 후생이 될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과거 어느 생에선가 지은 업보를 멈추게 할 수 없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Idha bhikkhave ekaccassa puggalassa appamattakampi pāpa kamma kata, tame'na niraya upaneti. Idha pana bhikkhave ekaccassa puggalassa tādisaññeva appamattaka pāpa kamma kata diṭṭhadhammavedanīya hoti. Nāumpi khāyati. Ki bahudeva.

Katharūpassa bhikkhave puggalassa appamattakampi pāpa kamma kata tame'na niraya upane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사람은 적은 죄악을 지어도 그것이 그를 지옥으로 이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동일한 적은 죄악을 지어도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지었으므로 미래에는 그것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많이 나타나겠는가?

 

(Loaphalasutta-소금덩어리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99, 전재성님역)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약간의 악업을 짓지만 [그 업은] 그를 지옥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약간의 악업을 짓지만 지금 여기에서 [] 겪는다. 그러면 [다음 생에는] 털끝만큼도 [그 과보가] 없을 것인데 어찌 많을 것인가?

 

(Loaphalasutta- 소금 덩이 경, 앙굿따라니까야 A3.99, 대림스님역)

 

 

두 번역을 올려 놓았다. 요지는 이렇다. 누군가 악행(pāpa)을 조금이라도 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게 된다. 과거 전생에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지만 조금이라도 악행을 지었을 경우 현생이나 내생, 아니면 먼 후생에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언제 받을 지 모르는 것이 업에 대한 과보이다.

 

kata diṭṭhadhammavedanīyaṃ(지금 여기에서 경험했다)

 

언제 과보로 받을 지 모르는 업에 대하여 손 놓고 있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그 문장이 ‘kata diṭṭhadhammavedanīya이라 본다. 여기서kata는 과거분사형으로 ‘done; made; finished’의 의미이다. diṭṭhadhammavedanīyadiṭṭhadhamma+vedanīya으로서 지금 여기에서 느낀다의 뜻이다. 따라서 ‘kata diṭṭhadhammavedanīya지금 여기에서 느꼈다의 뜻이 된다. 접촉이 일어남에 따라 지금 여기에서 경험했다는 뜻이다.

 

 ‘kata diṭṭhadhammavedanīy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지었으므로라 번역하였고, 초불연 대림스님은 지금 여기에서 [] 겪는다.”라 하였다. 대체 무엇을 경험했고 무엇을 겪었다는 말인가?

 

diṭṭhadhamm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현세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초불연의 대림스님은 지금 여기라 번역하였다. 타닛사로 빅쿠는 “experienced in the here & now”라 하여 지금 여기에서 경험된이라 하여 diṭṭhadhamma에 대하여 지금 여기로 번역하였다.

 

경에서 diṭṭhadhamma라고 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실현 되어야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업을 만들어 내는 것도 지금 여기에서이고, 과거에 지은 업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이다. 그래서 “diṭṭhevā dhamme, upajje vā, apare vā pariyāye(A6.63)”이라 표현 했을 것이다.

 

그런데 “diṭṭhevā dhamme, upajje vā, apare vā pariyāye(A6.63) 대하여 굳이 ‘현세(또는 금생), 내생, 먼 후생’ 이렇게 삼생으로 번역하는 것 보다, 원어 그대로의 뜻을 살려 ‘지금 여기 (diṭṭhevā dhamme), upajja(다음), apara(후에)’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업장소멸은?

 

경에서 ‘kata diṭṭhadhammavedanīya라 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한 것을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한 것으로 인하여 미래에는 조금도 과보를 받지 않음을 말한다. 이른바 업장소멸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업장소멸하려면 어떻게 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똑같이 적은 죄악을 지으면,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지었으므로 미래에는 그것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늘며 많이 나타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몸을 닦고 계행을 닦고 마음을 닦고 지혜를 닦아, 협소하지 않고 큰 도량을 지니고 있어 무량한 삶을 산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은 똑 같은 죄악을 지으면,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지었으므로 미래에는 그것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많이 나타나겠는가?

 

(Loaphalasutta-소금덩어리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99, 전재성님역)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지었다는 것‘kata diṭṭhadhammavedanīya를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였다는 것이다. 무엇을 경험한 것인가? 경에서는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지금 여기(현세)에서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을 경험하였을 때 다음(미래)에 과보를 받지 않음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업장소멸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부처님이 새롭게 해석한 업에 대한 가르침이다.

 

적은 죄악을 지어도 지옥에 떨어지는 이유

 

지금 여기에서 나의 의도적인 행위에 따라 미래에 일어날 과보는 선업과보가 되고 과거에 지었던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지은 과보가 효력이 나타 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소금덩어리 비유를 들고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소금덩어리를 적은 그릇의 물속에 던져 넣는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적은 그릇의 물은 그 소금덩어리 때문에 짜져서 마실 수 없는가?

 

(Loaphalasutta-소금덩어리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99, 전재성님역)

 

 

여기 탁구공만한 소금덩어리가 있다. 이것을 밥먹는 공기그릇에 넣고 물을 부었다면 어떻게 될까? 도저히 마실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소금 덩어리는 과거에 지은 악행을 말한다. 그리고 공기그릇은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그릇 즉, 역량을 말한다. 공기그릇속의 물은 신구의 삼업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작은 소금덩이가 공기그릇속에 들어가면 짜셔 못먹듯이공덕이 짧은 자는 작은 악행에도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세상에 어떤 사람은 적은 죄악을 지어도 그것이 그를 지옥에 이끈다.(A3.99)”라 하였다.

 

소금덩어리를 갠지스강에 던져 넣는다고 하자

 

이어서 부처님은 갠지스강 비유를 한다. 으로 한다. 부처님이 이렇게 묻는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소금덩어리를 갠지스강에 던져 넣는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갠지스 강의 물은 그 소금덩어리 때문에 짜져서 마실 수 없는가?

 

(Loaphalasutta-소금덩어리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99, 전재성님역)

 

 

탁구공만한 소금덩어리를 넓고 넓은 갠지스강에 던졌을 때 소금맛은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물을 마셔도 전혀 짠 맛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이때 소금은 과거에 지은 악행이고, 갠지스강의 물은 큰공덕행이라 볼 수 있다. 강물과 같은 공덕을 지었을 때 이전에 지었던 악업이 효력을 발휘할 수 없음을 말한다. 

 

비록 과거에 지은 악행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계정혜삼학을 닦아 늘 알아차림을 유지 하고 있다면 지금 여기에서 과보가 무르익어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kata diṭṭhadhammavedanīya라 하였는데, 이는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지었으므로 미래에는 그것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다.(전재성님역)” 라거나, “지금 여기서 [] 겪는다.(대림스님역)”라거나, “experienced in the here & now(지금 여기에서 경험된다. -타닛사로 빅쿠)”라고 번역된다.

 

부처님이 새롭게 해석한 업에 대한 가르침

 

댓글을 주신 법우님은 장애업보에 대하여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에 대하여 죄의식과 함께 평생원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하였다. 그래서 장애업보가 부처님의 가르침일리가 없다고 강하게 부정하였다. 또 테라와다빅쿠 역시 장애업보를 부정하면서 만약 장애업보를 인정하면 절에 나올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염려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장애업보에 대하여 부정하지 않았다. 경전에는 눈멀거나 팔병신이거나 절름발이이거나 반신불수이고,( M129.33)”라고 표현되어 있듯이 장애업보에 대한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부정한 것은 숙명론이다. 이는 소금덩어리의 경(A3.99)’에서  사람은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 (yathā yathā'ya puriso kamma karoti, tathā tathā na paisavediyatī, A3.99)”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모든 행위에 대하여 그대로 과보를 받는 것을 숙명론으로 보고 있다. 

 

부처님이 재해석한 업의 가르침은 사람은 겪어야 하는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지으면, 그러한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그 과보를 받는다. (yathā yathā vedanīya aya puriso kamma karoti, tathā tathāssa vipāka paisavediyatī, A3.99)”라 하였다. 이는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으면 과거에 지은 악행은 한 효력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에 어떤 사람은 동일한 적은 죄악을 지어도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지었으므로 미래에는 그것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많이 나타나겠는가? (A3.99)”라 하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소금덩어리 비유로 설명하였다. 

 

 

소금덩어리를 갠지스강에 던져 넣는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갠지스 강의 물은 그 소금덩어리 때문에 짜져서 마실 수 없는가?” (A3.99)

 

 

 

 이것이 부처님이 새롭게 해석한 업에 대한 가르침이라 본다.

 

 

 

2014-03-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