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우와 가사, 수하는 것인가 드는 것인가
가사에 대한 이야기
법구경 9번과 10번 게송은 가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먼저 9번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9.
Anikkasāvo kāsāvaṃ 아닉까사워 까사왕
yo vatthaṃ paridahissati 요 왓탕 빠리다힛사띠
apeto damasaccena 아뻬또 다마삿쩨나
na so kāsāvamarahati. 나 소 까사와마라하띠.
혼탁을 여의지 못하고
가사를 걸치고자 한다면,
자제와 진실이 없는 것이니
가사를 입을 자격조차 없다. (Dhp 9)
번역에서 ‘혼탁’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Anikkasāva에서 nikkasāva가 ‘free from impurity’로서 ‘불결로부터 자유로운’ 뜻 이므로, Anikkasāva는 ‘not free from impurity of mind’이 되어 ‘불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즉, ‘혼탁을 여의치 못하고’ 라고 번역된다. 그래서 Anikkasāvo kāsāvaṃ은 ‘혼탁을 여의치 못하고 가사를’의 뜻이 된다.
두번째 구절 yo vatthaṃ paridahissati에서 yo는 any person, vatthaṃ은 Cloth, paridahissati는 puts on의 뜻으로 ‘어떤 사람이 옷을 입으면’ 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그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구절 Anikkasāvo kāsāvaṃ yo vatthaṃ paridahissati는 kāsāvamarahati.“혼탁을 여의지 못하고 가사를 걸치고자 한다면”이라 번역 된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자는 가사를 입을 자격이 없음을 말한다. 이는 9번과 10번과 관련된 인연담에서 알 수 있다. 데와닷따와 관련된 인연담에서 데와닷따가 과거전생에 코끼리 사냥꾼으로서 가사를 이용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오랜지색 옷, 까사와(kāsāva)
인연담에 따르면 “나도 황색가사를 입어야지”하는 말이 나온다. 이로 보았을 때 가사색깔은 ‘노랑색’임을 알 수 있다. 가사의 색깔이 황색이라는 사실은 빠알리 사전에서도 보인다. 게송에서 가사를 뜻하는 말이 kāsāva이다. 그런데 kasāva에 대한 설명을 보면 ‘[m.; nt.] 1. the acrid taste; 2. a cloth of orange colour. (adj.), of the orange colour.’라 되어 있다. 첫번째의 뜻이 ‘매운맛’이지만, 두번째 뜻은 ‘오랜지색의 옷’이라 설명 되어 있다. 또 kāsāva에 대해서는 ‘(nt.), yellow robe. (adj), dyed with orange colour’라 설명 되어 있다. 가사의 색깔이 오랜지색임을 알 수 있다.
Kāsāva에 대한 한자어는 袈裟이다. 이는 빠알리어를 음역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빠알리어 Kāsā에 대한 것은 아니다. Kāsā는 가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말로서 ‘whip(때리다), a kind of reed(갈대의 일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한자어 가사로 음역된 것은 노랑색 옷을 뜻하는 ‘까사와(kāsāva)’에서 음역한 것이다.
까티나 축제(kathina)에서
가사에 대한 글을 여러 차례 올린 적이 있다. ‘까티나(kathina)행사를 아시나요’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에서 노랑색 가사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까티나 축제의 가장 큰 목적은 가사를 증정하는 것인데, 그 가사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출처 : http://www.payer.de/mahavamsa/chronik32.htm
첫째, 안따라와사까(antaravāsaka)라 한다. 이를 아랫가사라 하는데, 배꼽으로부터 15센치 정도 위까지 가리는 높이와 본인의 양손을 펼쳐 닿을 정도의 가로 폭이 있는 직사각형의 하반신을 감싸는 하의라 한다.
둘째, 웃따라상가(uttarāsaṅga)라 한다. 이를 윗가사라 하는데, 서서 손을 높이 올려 잡을 정도의 높이와 양손을 벌린 길이의 1.5배의 가로 폭이 있는 직사각형의 몸에 감는 상의라 한다.
셋째, 상가띠(saṅghāṭi)라 한다. 이를 중복가사라 하는데, 윗가사와 같은 길이와 폭으로 옷감이 2매 겹침이 되어 있는 큰 옷(大衣)를 말한다.
세 번째의 중복가사를 ‘대가사’라고도 하는데 이는 무겁기 때문에 평상시 입기 보다 주로 어깨에 걸쳐 두는데, 추울 때 또는 침구가 없을 때 활용된다고 한다.
이처럼 한 명의 비구가 세 가지 가사를 갖추려면 20미터 이상의 천이 소요 된다고 한다. 따라서 부처님 당시 가사 한 벌 장만하려면 천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비구에게 보시하는 것은 커다란 공덕을 짓는 것으로 본 것이다.
상가띠(중복가사)를 어깨에 걸치고
윗글은 이전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실은 것이다. 이렇게 가사는 아랫가사, 윗가사, 중복가사(대가사)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대가사의 경우 주로 어깨에 걸친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그림이 대표적이다.
그림을 보면 빅쿠가 상가띠(중복가사)를 어깨에 걸치고 걸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세 벌의 옷중에 두 벌은 입은 상태이고 나머지 하나는 어깨에 매거나 팔에 걸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발우와 가사를 들고(pattacīvaramādāya)”
그런데 이런 장면이 초기경전에도 보인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Atha kho sambahulā bhikkhå pubbaṇhasamayaṃ nivāsetvā pattacīvaramādāya sāvatthiyaṃ piṇḍāya pavisiṃsu.
그때 많은 수행승들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위해 싸밧티시로 들어 갔다.
(Yaññasutta-제사의 경, 상윳따니까야 S3.9, 전재성님역)
빅쿠들이 탁발을 나갈 때 챙기는 것이 ‘발우’이다. 그런데 경을 보면 ‘발우와 가사를 들고’라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발우와 함께 챙기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가사’라는 것이다. 이처럼 초기경에서는 ‘발우와 가사를 들고’라는 정형구가 수없이 등장한다.
‘발우와 가사를 들고’라는 말이 빠알리어 pattacīvaramādāya이다. 이는pattacīvaram과 Ādāya의 합성이다. Pattacīvaram는 ‘Bowl and robe’라 설명 되어 있다. ‘발우와 가사’를 말한다. 영어에서 robe라 함은 ‘가운, 옷, 예복, 무릎 덮개’의 뜻이다. 따라서 아랫가사와 윗가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랫가사와 윗가사는 항상 입고 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nivāsetvā’라 하였다. 이는 ‘having dressed oneself; having got clothed or dressed’의 뜻으로 옷을 입었다는 뜻이다.
‘발우와 가사를 들고(pattacīvaramādāya) 라 하였을 때 가사는 상가띠(대가사 또는 중복가사)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어깨에 매거나 들고 다녔음을 뜻한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이 부분에 대하여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수 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가사를 수한다는 것
‘가사를 수하다’는 뜻은 ‘가사를 입다’는 뜻이다. 이는 법보신문기사에서 “법계를 품서한 스님들은 가사를 수하고 장궤합장으로(2013-11-14 법보신문)”라는 설명에서 알 수 있다. 괴색가사를 입은 스님들이 합장하며 서 있는 사진이 이를 말해 준다.
가사를 수한 모습(2013-11-14 법보신문)
초불연 번역에서는 pattacīvaramādāya에 대하여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라 하였다. 그러나 성전협 번역을 보면 “발우와 가사를 들고”라 하였다. 가사는 수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발우도 수할 수 있는 것일까?
pattacīvaramādāya에서 ‘든다’는 뜻이 Ādāya이다. 이에 대한 빠일리어 사전을 보면 ‘having taken.。 執取, 取って’라 되어 있다. 이는 ‘가지다, 취하다’의 뜻이다. 추위를 막고 침구 개념인 상가띠(대가사, 중복가사)는 ‘입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그런데 한국스님들의 주황색 또는 괴색 가사를 보면 편단 우견이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형태이다. 이는 세벌의 가사 중에 위에 입는 옷인 ‘웃따라상가(uttarāsaṅga)’라 본다.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발우와 가사(상가띠)는 드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이는 맛지마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수행승들이여, 내가 더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서 그들 다섯 명의 수행승들은 스스로 약조를 지킬 수 없었다. 어떤 자는 나를 맞으러 나와 가사와 발우를 받아 들었다. (M26)
부처님이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 이런 깨달음이 맞는 것인지 알아 보기 위하여 처음 찾은 곳이 오비구가 머물던 곳이다. 그러나 오비구들은 부처님이 타락하였다고 생각하여 “벗이여, 수행자 고따마가 온다. 윤택하게 살며 정진을 포기하고 사치에 빠졌다. 우리는 그에게 인사도 하지 말고 일어나 영접하지도 말고 옷과 발우를 받지도 말자. 그러나 그가 앉기를 원한다면, 자리를 깔아주자.(M26)”라고 서로 약조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점차 다가감에 따라 약조를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자는 가사와 발우를 받고, 또 어떤 자는 자리를 펴주고, 또 어떤 자는 발씻을 물도 준비한 것이다.
이때 받아 준 것이 ‘발우와 가사’이다. 이 구절이 Appekacce maṃ paccuggantvā pattacīvaraṃ paṭiggahesuṃ이다. 여기서 pattacīvaraṃ이 ‘Bowl and robe(발우와 가사)’의 뜻이다. paṭiggahesuṃ에서 gaha가 ‘one who catches or take possession of’의 뜻으로 paccuggantvā pattacīvaraṃ는 “가사와 발우를 받아 들었다”의 뜻이 된다. 따라서 탁발할 때 상가띠(대가사)는 어깨에 매거나 들고 다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초불연 번역을 보면 “한사람은 마중 나와 발우와 가사를 받아 들였고(M26)”라고 번역 되어 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제사의 경(S3.9)에서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라고 번역한 것과 다르다.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어느 번역에서는 ‘가사를 입었다’는 ‘뜻의 수하다’라고번역하고, 또 어떤 번역에서는 ‘가사를 들고’라고 번역 하였다. 그러나 두 경에서 언급된 빠알리어는 ‘pattacīvaraṃ(발우와 가사를 들고)’으로 동일 하다. 따라서 초불연에서 pattacīvaraṃ의 번역에 대하여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라고 번역된 것은 ‘어색’하다.
가사 입을 자격이 없는 자
게송에서는 탐진치로 가득 찬 자가 가사를 입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apeto damasaccena라 하였다. Apeta는 gone away, damasaccena는 dama (restraint) +sacca (true)의 뜻이다. 그래서 “자제와 진실이 없는 것이니”라 번역 된다.
가사를 입을 자격이 없는 자에 대한 이야기가 맛지마니까야에도 나온다. ‘앗싸뿌라 설법의 작은 경(M40)’에서 “수행승들이여, 나는 가사를 입은 자에게 단지 가사를 입는다고 해서 수행자라고 하지 않는다. (M40)”라는 말이다.
수행자라면 수행자다워야 함을 말한다. 올바른 길을 실천하지 않는 자에 대하여 단지 머리만 깍았다고 해서, 가사만 걸쳤다고 해서 수행자라 볼 수 없음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를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Nāhaṃ bhikkhave saṅghāṭikassa saṅghāṭidhāraṇamattena sāmaññaṃ vadāmi. Nāhaṃ bhikkhave acelakassa acelakamattena sāmaññaṃ vadāmi. Nāhaṃ bhikkhave rajojallikassa rajojallikamattena sāmaññaṃ vadāmi. Nāhaṃ bhikkhave udakorohakassa udakorohakamattena sāmaññaṃ vadāmi. Nāhaṃ bhikkhave rukkhamūlikassa [PTS Page 282] [\q 282/] rukkhamūlikamattena sāmaññaṃ vadāmi. Nāhaṃ bhikkhave abbhokāsikassa abbhokāsikamattena sāmaññaṃ vadāmi. Nāhaṃ bhikkhave ubbhaṭṭhakassa ubbhaṭṭhakamattena sāmaññaṃ vadāmi. Nāhaṃ bhikkhave pariyāyabhattikassa pariyāyabhattikamattena sāmaññaṃ vadāmi. Nāhaṃ bhikkhave mantajjhāyakassa mantajjhāyakamattena sāmaññaṃ vadāmi. Nāhaṃ bhikkhave jaṭilakassa jaṭādhāraṇamattena sāmaññaṃ vadāmi.
수행승들이여, 나는 가사를 입은 자에게 단지 가사를 입는다고 해서 수행자라고 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나체로 유행하는 자에게 단지 나체로 유행한다고 해서 수행자라고 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진흙을 바르는 자에게 단지 진흙을 바른다고 해서 수행자라고 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목욕재계하는 자에게 단지 목욕재계한다고 해서 수행자라고 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나무 아래서 좌선을 하는 자에게 단지 나무 아래서 좌선한다고 해서 수행자라고 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노천에서 좌선하는 자에게 단지 노천에서 좌선한다고 해서 수행자라고 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항상 위로 서있는 자에게 단지 항상 위로 서있다고 해서 수행자라고 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정기적으로 식사하는 자에게 단지 정기적으로 식사한다고 해서 수행자라고 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진언을 외우는 자에게 단지 진언을 외운다고 해서 수행자라고 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머리에 상투를 튼 자에게 단지 머리에 상투를 튼다고 해서 수행자라고 하지 않는다.
(Cūḷaassapurasutta- 앗싸뿌라 설법의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40, 전재성님역)
부처님 당시 여러 부류의 수행자가 있었다. 그 중에는 가사를 입은 수행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수행자도 있었다. 상윳따니까야 일곱명의 결발수행자의 경(S3.11)에 따르면 “일곱 명의 결발 수행자와 일곱 명의 니간타, 일곱 명의 벌거벗은 수행자, 일곱 명의 한 벌 옷만 입는 수행자, 일곱 명의 편력 수행자에게 합장하며(S3.11)”라고 되어 있어서 갖가지 모습의 수행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에서 가사를 입은 자에 대하여 수행자라 하였는데 가사를 입었다고 해서 모두 다 같은 수행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는 것이다. 이는 ‘반짝인다고 해서 금이 아니다’라는 말고 같고, 또 “머리가 희다고 해서 장로가 아니다.(dhp260)”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상가띠(saṅghāṭi: 중복가사 또는 대가사)에 대하여
경에서 “가사를 입은 자에게 단지 가사를 입는다고 해서 수행자라고 하지 않는다. (Nāhaṃ bhikkhave saṅghāṭikassa saṅghāṭidhāraṇamattena sāmaññaṃ vadāmi)”라 하였다. 여기서 saṅghāṭi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세 벌의 가사 가운데 ‘중복가사’ 또는 ‘대가사’를 뜻한다. 그러나 세 벌의 가사 전체를 대표하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영역에서는 “I do not say that the recluse’s status comes about in a patchwork-cloak wearer through the mere wearing of the patchwork cloak,(빅쿠보디와 냐나몰리역, MDB)”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recluse 는 ‘은둔자’를 뜻한다. 이는 전재성님이 ‘수행자’라고 번역한 것과 다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출가한 자는 모두 ‘수행자’라 불렀다. 그래서 빠알리경에서는 ‘사만냐(sāmañña)’라고 표기 되어 있다. 따라서 사만냐는 불교도를 포함하여 출가수행자 전체를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빅쿠 보디와 빅쿠 냐나몰리는 recluse라 하여 은둔자라 번역하였다. 초불연에서는 한역 그대로 ‘사문’이라 번역하였다.
영역에서 가사에 대한 단어가 ‘patchwork-cloak’이다. 사전에 따르면 ‘쪽매붙임 망토’라 되어 있다. 이에 대한 각주는 없지만 빠알리어에서 상가띠(saṅghāṭi)라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위아래 옷을 입은 상태에서 걸치는 것을 뜻한다.
상가띠에 대한 빠알리 사전 PCED194을 보면‘the upper robe of a Buddhist monk.’라 설명 되어 있다. 한자어로는 ‘僧伽梨衣, 重衣, 大衣’로 되어 있다. 겹처서 입는 옷, 큰 옷의 뜻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상가띠는 출가수행자 또는 은둔자자들이 추울 때 입는 겉옷 내지 잠잘 때 덮고 자는 침구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전통이 있어서일까? 아깍까소 빅쿠의 2006년 스리랑카 웨삭 순례에 대한 사진을 보면 겉옷 가사 즉, 상가띠를 어깨나 팔에 걸치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 Akakkaso빅쿠의 포토스트림(2006년 스리랑카 웨삭)
가사를 입을 자격이 있는 자
가사를 입을 자격이 있는 자는 어떤 자일까? 법구경 10번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10,
Yo ca vantakasāvassa 요 짜 완따까사왓사
sīlesu susamāhito, 실레수 수사마히또
Upeto damasaccena 우뻬또 다마삿쩨나
sa ve kāsāvam-arahati. 사 웨 까사왐 아라하띠
혼탁을 끊어 버리고
계행을 잘 확립한다면,
자제와 진실이 있는 것이니
가사를 입을 자격이 있다. (dhp10)
아랫가사, 윗가사, 중복가사(대가사)를 입을 자격이 있는 자는 가장 먼저 ‘계행(sīla)’이 확립된 자라 하였다. 여기서 계행은 각주에 따르면 1) 계율의 덕목에 따라 제어하는 것, 2) 여섯 감역의 제어, 3) 삶의 위의가 청정한 것, 4) 다른 사람이 제공하는 의복, 음식, 처소, 의약품을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으로 사용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런 계행의 바탕위에서 ‘자제와 진실(damasacca)’이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 자만이 ‘가사를 입을 자격이 있다 (kāsāvam-arahati)’ 라고 하였다.
청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하여
가사는 ‘분소의’로 만든다고 한다. 시체를 감싸고 있는 천을 모아 기워서 만든 것이 분소의이다. 이렇게 분소의를 입고 탁발을 하는 것은 ‘청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이처럼 분소의를 입은 수행자에 대한 게송이 있다. 청정도론 두타행에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마라의 군대를 항복받기 위해 분소의를 입은 수행자는
전쟁터에서 갑옷으로 무장한 왕족처럼 빛난다.
세상의 스승께서도 까시의 비단 옷 등을 버리고
분소의를 입으셨거늘 누가 그것을 입지 못할까?
그러므로 비구는 스스로 서원한 말을 기억하여
수행자에게 적합한 분소의 입는 것에 즐거워할지어다.
(청정도론, 제2장 두타행, 22절, 대림스님역)
201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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