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시기와 질투가 작렬할 때, 그릇된 사유의 행경(Gocara)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23. 13:14

 

 

시기와 질투가 작렬할 때, 그릇된 사유의 행경(Gocara)

 

 

 

 

게송을 외울 때

 

법구경 게송을 외우고 있다. 하루에 한게송씩 외우기로 목표를 정하고 외우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 외웠던 것을 되새김해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게송을 외울 때는 그 만큼 시간이 더 소요 된다. 이전 게송을 완전히 다 외워야 다음게송으로 진도가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게송을 외울 때 뜻을 알고 외우면 매우 쉽다. 그러나 뜻을 모르고 생짜배기로 외우면 힘이 많이 든다. 그래서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면서 뜻을 확인 하며 외운다. 이때 한글의 뜻 보다는 가급적 영어로 익히는 것이 유리함을 알았다.

 

예를 들어 9번 게송에서 빠리다힛사띠(paridahissati )’가 있는데 이에 대하여 우리말 번역 걸치고자 한다면뜻이 된다. 그러나 paridahissati  영어 puts on 이라고 기억해 두면 편한다. ‘입다’ 보다 ‘puts on’이라는 말이 더 뜻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외우기 어려운 단어가 메다가(medhagā)’라는 말이다. 이 말은 사전을 보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 없는 단어이다. 빠알리 문구를 자주 접하다 보면 어근으로도 대략 뜻을 알 수 있으나 이렇게 생짜배기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떠 들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글 번역으로는 다툼이라 되어 있다. 그러나 빠알리 사전에는 영어로 a quarrel이라 되어 있다. 그래서 메다가(medhagā)’에 대하여quarrel이라는 말을 떠 올리면 외기 쉽다.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라 생각하고

 

법구경 1번 왁가가 쌍의 품인데 쌍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게송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쌍으로 되어 있어서 외우기 편리 하다. 그 중에  11번과 12번은 완벽하게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11.

Asāre sāramatino                 아사레 사라마띠노

sāre cāsāradassino,              사레 짜사라닷시노
Te s
āra nādhigacchanti         떼 사랑 나디갓찬티

micchāsakappagocarā.           밋차상깝빠고짜라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라 생각하고

핵심을 핵심이 아닌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릇된 사유의 행경을 거닐며

그들은 핵심적인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dhp11)

 

 

 

 

 

12.

Sārañ-ca sārato ñatvā            사란 짜 사라또 냐뜨와

asārañ-ca asārato,               아사란 짜 아사라또
Te s
āra adhigacchanti          떼 사랑 아디갓찬띠

sammāsakappagocarā.            삼마상갑빠고짜라

 

핵심인 것을 핵심인것이라 여기고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 아닌 것이라고 여긴다면,

올바른 사유의 행경을 거닐며

그들은 바로 핵심적인 것에 도달한다. (dhp12)

 

 

 

 

 

사라(sāra), 본질인가 진실인가?

 

첫번째 구절을 보면 Asāre sāramatino라 되어 있다. 여기서 키워드는 sāra이다. PCED194에 따르면 sāra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번역에서 사용된 핵심이라는 말도 그 중의 하나이다. 두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sara

: [m.] 1. an arrow; 2. a sound; 3. a vowel; 4. a lake; 5. a kind of reed.。

 

2)

Sāra

(m.), essence; the pith of a tree; the choicest part. (adj.) essential; excellent; strong.。

 

 

두 번째 항에서 사라 (Sāra)가 명사로서‘essence(본질)’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형용사로서 ‘essential(본질적인), excellent(훌륭한), strong (강한)’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sāramatino에서 matino는 ‘wisdom; idea’의 뜻이다. 그래서 sāramatino는 ‘본질인 것이라 생각하고’ 뜻이 된다. 따라서 첫번째 구절 Asāre sāramatino을 직역하면 “본질이 아닌 것을 본질이라 생각하고”의 뜻이 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라 생각하고”라 하였다. 나까무라 하지메는 “まことではないものを、まことであるとなし” 라 하여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 보고”라 번역하였다. 법정스님은 “진실을 거짓이라 생각하고 거짓을 진실로 생각하는 사람은”이라 하였다. 거해스님은 “그들은 진실 아닌 것을 진실이라 받들고”라 하였다. 타닛사로 빅쿠는 “Those who regard non-essence as essence and see essence as non-,”라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사라에 대하여 ‘진실(まこと)’과 ‘본질(essence)’ 이렇게 두 가지로 번역되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나까무라하지메류는 ‘진실’이라 하였고, 빠알리 원어를 그대로 번역한 부류는 ‘본질’로 번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Cā의 여러 가지 용법

 

두번째 구절에 cāsāradassino가 있다. 이에 대하여 “핵심이 아닌 것이라고 여긴다면”이라 하였다. 이 단어는 cā+sāra+dassi로 본다. 여기서 cā 가 sāra 를 부정하는 뜻으로 쓰였고, dassi는 ‘본다면(Seeing)’의 의미이다. 따라서 “본질을 아닌 것으로 본다면”의 뜻이 된다. 그런데 부정으로 쓰인 cā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ca

: [copulative or disjunctive particle] and; then; now.。, , 然後

 

2) ca

:And; but; even。 と, そして, また

 

3) Ca

, (连词虚词)此外

cettha(ca+ettha)此外

 

 

Cā에 대한 세 가지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나열할 때 and용법으로 쓰이지만 3번항과 같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예로서 cettha를 들었는데 이는 ca+ettha이다. 그래서 ‘이외(此外)’ 라고 일역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용법으로 본다면 cāsāra는 cā+sāra로서 ‘본질의 바깥 것’ 즉, ‘본질이 아닌 것’이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cāsāradassino는 “본질을 아닌 것으로 본다면”의 뜻이 된다.

 

본질이 아닌 것이란?

 

첫번째 구절에서 Asāre sāramatino라 하여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라 생각하고”라 하였다. 여기서 sāra 즉 본질(essence)은 무엇을 뜻할까? 단지 게송 문구만 보고서는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이럴 때는 주석을 보아야 한다. 각주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Asāre sāramatino: 핵심이 아닌 것은 단지 신체적으로 필요한 의복과 음식과 처소와 의약품의 네 가지 필수품과 정신적으로는 열 가지 기초에 바탕을 둔 사견과 그 가르침을 뜻한다.(DhpA.I.114)

 

(489번 각주)

 

 

주석에 따르면 본질이 아닌 것에 대하여 사대필수품열가지사견이라 하였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먹는 것과 입는 것 등 사대필수품은 본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까무라 하지메류의 번역을 보면 진실이라 하였다. 그렇게 된다면 사대필수품은 진실이 될 수 없다는 뜻이 되어 이상한 번역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sāra는 진실(Truth)이라고 번역하기 보다 본질또는 핵심의 뜻인 ‘essence’의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열가지 사견과 열가지 정견

 

그런데 본질이 아닌 것에 대하여 열가지사견이 언급되어 있다. 열가지 사견이 본질이 아니라면, 정견도 있을 것이다. 각주에서는 본질인 것에 대하여 열 가지 정견이라 하였다. 그래서 각주를 참고 하여 본질이 아닌 열가지 사견과 본질인 열가지 정견에 대한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주석

본질이 아닌 것

(열가지사견)

본질인 것

(열가지 정견)

Dag.45.16

Sdk.8.Dv.21

1) 보시도 없고

2) 제사도 없고

3) 헌공도 없고

4)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고

5) 이 세상도 없고

6) 저 세상도 없고

7) 어머니도 없고

8) 아버지도 없고

9) 화생하는 뭇삶도 없고

10)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세상에서 올바로 살고 올바로 실천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

좌측항과 반대로 생각하는 견해

Dps.7-8.

Dad.13.

Dp.15.

Sds.I.151

1) 잘못된 견해

2) 잘못된 사유

3) 잘못된 언어

4) 잘못된 행위

5) 잘못된 생활

6) 잘못된 정진

7) 잘못된 새김

8) 잘못된 집중

9) 잘못된 지혜

10) 잘못된 해탈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

올바른 지혜

올바른 해탈

 

 

 

유물론에 바탕을 둔 단멸론적 견해

 

표를 보면 ‘보시도 없고’로 시작 되는 견해는 초기경전에 따르면 유물론자들의 단멸론적 견해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 나타난다.

 

 

장자들이여, 어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이와 같은 가르침과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공양도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마음에서 홀연히 생겨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고 올바로 실천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고 깨달아 설명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

 

(Apaṇṇaka sutta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유물론에 바탕을 둔 단멸론적 견해를 설명한 것이다. 살라 마을에 영원주의, 허무주의, 회의주의 등 다양한 이론을 가진 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상대방의 견해를 논파하려고 시도 하였다. 그래서 마을주민은 혼란에 빠졌는데 이때 부처님이 마을을 방문하여 삿된 견해를 주장하는 무리들을 논파하였다고 하여 제목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이 되었다. 이처럼 보시도 없고 시작 되는 열 가지 삿된 견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이와 같은 가르침과 이와 같은 견해를 갖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이와 같은 것이 기대됩니다. 그들은 세 가지 착하고 건전한 것 즉, 신체적인 착한 행동, 언어적인 착한 행동, 정신적인 착한 행동을 피하고, 세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행동 즉, 신체적인 악한 행동, 언어적인 악한 행동, 정신적인 악한 행동을 받아들여 실천합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에서 재난이나 타락이나 오염을 보지 못하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서 출리의 공덕과 정화의 면모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Apaṇṇaka sutta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원인과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열 가지 삿된 견해를 가진 자들은 어떤 행동을 할까? 경에서는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예사로 저지를 것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과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보를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 있어서 보시하는 행위 는 아무 의미가 없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업을 짓는 것은 없다.’라는 견해를 가졌을 때 도덕적으로 불건전한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를 것이다.

 

그릇된 사유의 행경

 

주석에서는 열가지 사견과 열가지 정견에 대하여 두 종류로 설명하였다. 두 번째 종류를 보면 팔정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팔정도에다 지혜와 해탈이 추가 되어 열 가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 게송을 보면 그릇된 사유의 행경을 거닐며 (micchāsakappagocarā, dhp11)”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잘못된 사유에 대한 것으로서 팔정도에 있어서 정사유로 설명된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micchāsakappagocarā : 

 

1)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매인 사유,

2) 분노에 매인 사유,

3) 폭력에 매인 사유

 

와 같은 사유의 활동을 걷는다는 뜻이다. (Dhp.A.114)

 

(490번 각주, )

 

 

각주의 설명은 팔정도의 정사유를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세 가지 사유의 활동을 ‘걷는다’라 하였다. 여기서 ‘걷는다’라 는 말이 ‘고짜라(gocarā)’이다.

 

고짜라(gocarā)에 대하여

 

이 고짜라와 관련하여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Migo araññamhi yathā abaddho3
Yenicchaka
gacchati gocarāya,
Viññ
ū naro serina pekkhamāno
Eko care khaggavis
āakappo.

 

숲 속에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초원을 찾아 거닐듯,

현명한 자라면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며,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stn39)

 

 

두번째 구절에 고짜라야(gocarāya)가 나온다. 이를 초원이라 번역하였으나 고짜라의 원래 뜻은 소가 풀을 뜯는 목초지를 말한다. 그외 행동반경, 명상대상의 뜻도 있다.

 

명상대상으로서의 고짜라

 

특히 명상대상으로서의 고짜라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선정을 닦는 자에게는 이와 같은 네가지 부류가 있다.

네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선정을 닦는 어떤 자는

삼매에서 집중에 능숙하지만 삼매에서 행경에 능숙하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선정을 닦는 어떤 자는

삼매에서 행경에 능숙하지만 삼매에서 집중에 능숙하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선정을 닦는 어떤 자는

삼매에서 집중에 능숙하지도 삼매에서 행경에 능숙하지도 못하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선정을 닦는 어떤 자는

삼매에서 집중에 능숙할뿐만아니라, 삼매에서 행경에 능숙하다.

 

(Gocarakusalasutta-행경에 능숙함의 경, 상윳따니까야 S34.6, 전재성님역)

 

 

삼매에서 집중과 행경에 대하여 네 가지 경우의 수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행경이라고 번역된 고짜라는 명상대상을 거니는 것이라 설명되고 있다. 이는 다름 아닌 행동반경이다. 소가 풀을 뜯을 때 목초지를 벗어 나지 않듯 명상대상의 범위를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네 번째 항 삼매에서 집중에 능숙할뿐만아니라, 삼매에서 행경에 능숙함에 대하여 선정을 닦는 자 가운데 최고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우유가 우유에서 응유가 응유에서 버터가 버터에서 버터기름이 버터기름 나온다라는 우유의 비유를 들어 집중과 행경이 능숙한 자에 대하여 버터기름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시기와 질투가 작렬할 때

 

법구경 게송에서 1)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매인 사유, 2) 분노에 매인 사유, 3) 폭력에 매인 사유를 가진 자에 대하여 ‘올바르지 않은 사유를 걷는 것 (micchāsakappagocarā)’라 하였다. 이런 세 가지 생각에 사로 잡혀 있을 때 열 가지 삿된 견해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사유의 활동영역이 욕망, 분노, 폭력에서 벗어 나지 못함을 말한다. 그래서 남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하고 시기와 질투가 ‘작렬’하는 것이다.

 

앗사지장로와 만남

 

법구경 11번과 12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은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인연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법구경-담마빠다에서는 무려 약 5페이지에 걸쳐 실어 놓았다. 두 상수제자의 태어남부터 소년 시절의 산정축제  이야기, 산자야의 제자가 된 이야기 등이다. 이중 앗사지장로와 만남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핵심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래서 장로는 시의 첫 구절 즉, ‘모든 것은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여래께서는 그 원인을 설하셨다. 또한 그것의 소멸도 위대한 수행자께서는 설하셨다.’유행자는 그 첫번째 시행을 듣자마자 흐름에 드는 길이 확립 되었고 두 번째 시행을 듣자 흐름에 든 님이 되었다.

 

(Dhp11과 12번 인연담,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 이야기, 전재성님)

 

 

앗사지 장로가 우빠띳사(사리뿟따)에게 인인과 결과에 대한 법문을 하자 그 자리에서 수다원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우빠띳사(사리뿟따)와 꼴리따(목갈라나)는 스승인 산자야에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스승에게 선생님은 헛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부처님께 갑시다.”라고 권유하였다. 그러자 산자야는 지금 내가 학생이 되는 것이 우스꽝스럽다고 하면서 현명한 자는 현명한 자인 고따마에게 갈 것이지만,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나에게 올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똑똑한 제자의 요청을 거부 하였다.

 

 

산자야와 같은 스승을 모신 자들은 산자야를 넘어 설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S14:25)”라 하였다.

 

우빠띳사(사리뿟따)로부터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은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산자야는 삿된 견해를 지녀서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으로 여기고 핵심을 핵심이 아닌 것으로 여긴다.”라고 게송을 읊은 것으로 되어 있다.

 

다섯 가지 본질에 대하여

 

게송의 핵심은 그릇된 사유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그릇된 사유의 행경을 거닐면 본질에 도달하지 못함을 말한다. 반대로 올바른 사유의 행경을 거닐면 올바른 행경에 도달 할 수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올바른 사유의 행경이란 다름 아닌 팔정도에서 정사유에 대한 것이다. ,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읜 사유, 분노를 여윈 사유, 폭력을 여읜 사유를 말한다. 그러면 본질에 도달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주석에 따르면 1) 계행이라는 핵심, 2) 삼매라는 핵심, 3) 지혜라는 핵심, 4) 해탈이라는 핵심, 5) 해탈에 대한 앎과 봄이라는 핵심 이렇게 다섯 가지 핵심을 말한다. 이 다섯 가지는 청정도론에서 칠청정으로 정리 되어 있는 근거가 되는 경은 맛지마니까야 파발수레의 경(M24)이다.

 

다섯 가지 핵심에 대하여 파발수레의 경(M24)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누가 자기 고장에서 토박이 수행승으로 동료 수행자들 사이에 ‘스스로 욕망이 적고 수행승들에게도 욕망이 적음에 관해 설하고, 스스로 만족하고 수행승들에게도 만족에 관해 설하고, 스스로 한가하고 수행승들에게도 한가함에 관해 설하고, 스스로 사교하지 않고 수행승들에게도 사교하지 않음에 관해 설하고, 스스로 정진수행하고 수행승들에게도 정진수행에 관해 설하고, 스스로 계행을 갖추고 수행승들에게도 계행의 갖춤에 관해 설하고, 스스로 삼매를 성취하고 수행승들에게도 삼매의 성취에 관해 설하고, 스스로 지혜를 성취하고 수행승들에게도 지혜의 성취에 관해 설하고, 스스로 해탈을 성취하고 수행승들에게도 해탈의 성취에 관해 설하고, 스스로 해탈에 대한 앎과 봄을 성취하고 수행승들에게도 해탈에 대한 앎과 봄에 관해 설하고, 동료 수행자들을 훈계하고, 인식하게 하고, 교시하고, 독려하고, 고무하고, 기쁘게 하는 자’로서 이와 같이 존경할 만한가?

 

(파발수레의 경, 맛지마니까야 M24, 전재성님역)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1) 계행, 2) 삼매, 3) 지혜, 4) 해탈, 5) 해탈에 대한 앎과 봄  이렇게 다섯 가지가 핵심이고 또한 본질이다. 이 다섯 가지에 대하여 마하야나에서는 오분향례라 하여 1) 계향(戒香), 2) 정향(定香), 3) 혜향(慧香), 4) 해탈향(解脫香), 5)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라 한다. 그래서 조석으로 예불 올릴 때 독송하고 있다.

 

분노와 폭력에 뿌리 박은 마음으로 인하여

 

핵심 아닌 것을 핵심이라 여기는 자들이 있다. 본질이 아님에도 본질 아닌 것에 집착하는 자들을 말한다. 대게 삿된 견해를 가진 자들을 말한다. 그런 자들은 욕망과 분노와 폭력이라는 사유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이런 사유의 행경을 벗어 나지 못하는 자들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도 감정이 폭발해 버린다.

 

분노와 폭력에 뿌리 박은 마음으로 인하여 시기와 질투가 작렬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은 사유의 행경을 벗어 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기와 질투, 분노, 폭력에 얽매여 있는 자들은 끼리끼리 어울린다. 그래서 부처님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S14:25)”라 고 말씀 하셨다.

 

 

 

 

2014-03-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