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 인상과 속성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2. 19:49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 인상과 속성

 

 

 

시간이 남아 돌았을 때

 

시간이 남으면 무엇을 해야 할까? 갑자기 시간이 남아 돌았을 때 대부분 무료함과 권태를 느낀다. 그래서 무언가 즐길거리를 찾게 된다. 그래서일까 전철이나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열심히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다. 심지어 밥을 먹으면서 보는 사람도 있다.

 

시간이 남을 때 또는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을 때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경전외우기이다. 특히 게송을 외우면 시간이 잘 지나간다. 누군가를 기다린다거나 병원 등과 같이 대합실에서 대기 할 때 짧은 시간이지만 기다리기가 매우 지리하다. 이럴 때 게송을 외운다면 시간도 잘 가고 지루하지도 않다.

 

또 하나 시간을 잘 보내는 방법이 있다. 아침시간이다. 일어날 때 경전외우기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새벽에는 정신이 맑기 때문에 이 때 게송을 외우면 매우 효율이 높다. 여러 개의 게송도 맑은 정신 때문에 모두 기억이 나서 외우는데 있어서 속도가 붙는다.

 

지붕이 잘못 이어진 집에

 

법구경 쌍의 품 13번과 14번 게송은 감각기관의 다스림에 대한 것이다. 감각기관을 다스리지 못하였을 때 탐욕 등 번뇌가 생겨남을 말한다.

 

 

13.

Yathāgāra ducchanna           야타가랑 둣찬낭

vuṭṭhi samativijjhati,            윳티 사마띠윗자띠

Eva abhāvita citta          에왕 아바위땅 찟땅

rāgo samativijjhati.             라고 사마띠윗자띠

 

지붕이 잘못 이어진 집에

비가 스며들듯이

닦여지지 않은 마음에

탐욕이 스며든다. (dhp13)

 

 

14.

Yathāgāra succhanna           야타가랑 숯차낭

vuṭṭhi na samativijjhati,         윳티 나 사마띠윗자띠
Eva
subhāvita citta         에왕 수바위땅 찟땅

rāgo na samativijjhati.          라고 나 사마띠윗자띠

 

지붕이 잘 이어진 집에

비가 스며들지 않듯이

잘 닦여진 마음에

탐욕이 스며들지 않는다. (dhp14)

 

 

개송에서 키워드는 닦여지지 않은 마음(abhāvita citta)이다. 마음을 닦지 않았을 때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등의 번뇌가 생겨 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지붕의 비유를 들었다.

 

잘 닦여지지 않은 마음이란?

 

게송에서 지붕이 잘 이어진 집은 비가 스며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초가집을 연상하면 된다. 산업화 이전에 농촌에서는 대부분 볏집으로 이어 만든 초가지붕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초가지붕보기가 힘들다. 민속촌 등에나 가야 볼 수 있다. 그런데 초가삼간의 지붕을 보면 볏집이 두텁게 이어져 있다. 그러나 듬성듬성 엮어져 있으면 비가 셀 것이다. 마찬가지로 눈, , 코 등 감각기관을 단속하지 못하면 탐욕 등의 번뇌가 스며들 것이다. 그래서 지붕을 감각기관으로, 비를 번뇌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번뇌를 다스릴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잘 닦여지지 않은 마음 때문에 번뇌가 일어난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잘 닦여지지 않은 마음이란 무엇일까?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abhāvita citta : DhpA.122에 따르면, 멈춤[: samatha]과 통찰[: vipassana]을 잘 닦지 않은 마음을 말한다. 잘못 이어진 집 안에 비가 스며드는 것처럼, 탐욕(raga), 성냄(dosa), 어리석은(moha), 자만(mana) 등의 번뇌가 닦여지지 않은 마음에 스며든다.

 

(각주, 전재성님)

 

 

각주에서는 사마타에서 대하여 멈춤이라 하였고, 위빠사나에 대하여 통찰이라 하였다. 그래서 번뇌가 발생하는 것은 잘 닦여지지 않은 마음(abhāvita citta)’때문이라 하였는데 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러 한다.

 

초기경전에서 선정수행을 하면 오장애가 제거 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1)감각적 쾌락의 욕망(kāmarāga), 2)  분노(byāpāda), 3)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4) 흥분과 회한(uddhaccakukkucca), 5) 의심 (vicikicchā) 이렇게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를 말한다. 위빠사나는 오온(五蘊) 등을 무상·고·무아로 통찰하는 수행을 말한다. 이처럼 멈춤과 통찰 수행을 닦았을 때 지붕이 잘 이어진 집에 비가 스며들지 않는 것처럼 더 이상 탐욕(raga), 성냄(dosa), 어리석은(moha), 자만(mana) 등의 번뇌가 스며 들지 않을 것이다.

 

인연담 위주로 게송을 해석하면

 

13번과 14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이 있다. 부처님의 이복동생인 난다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인연담으로 게송의 심오한 내용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게송마다 실려 있는 인연담은 후대, 특히 5세기 붓다고사가 편집해 놓은 것이다. 게송의 의미를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곁들인 것이다. 그런데 지나치게 인연담 위주로 게송을 설명하다 보면 본말이 전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법구경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그러나 빠알리 경전의 주석가들의 경향은 이와 정반대이었다. 언어적인 설명은 크기에서나 중요성에서나 줄어 들었지만, 이야기의 도입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법구의석에 와서는 법구경의 경전 자체의 해석은 이차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주석의 말미로 밀려났다.

 

(법구경 해제, 전재성님)

 

 

인연담 위주로 게송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라 볼 수 있다.  게송에 실려 있는 문구에 대한 해석 보다 이야기에 더 비중을 두었을 때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가 될 수 있고, 또 인연담 말미에 게송이 소개 됨으로서 본말이 전도 되는 현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연담은 참고사항 정도로 보면 좋을 듯 하다.

 

중요한 것은 게송에 실려 있는 문구에 대한 해석이다. 몇 개 안되는 단어와 함께 짤막한 구절로 이루어져 있지만 니까야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심오한 사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념의 구조물, 빠빤짜(희론, 망상)

 

13번과 14번 게송에서 지붕의 비유를 든 것은 여섯 감각기관에 대한 단속이야기와 같다. 감각기관에 대한 이야기가 상윳따니까야 4권에 실려 있다. 35상윳따인 여섯가지 감역모음(Saāyatanavaggo)’이 그것이다.

 

35상윳따 해제에 따르면 인식론적 기능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갈애와 번뇌는 희론 또는 망상 때문에 생겨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감각대상에 대하여 감각적 인상(nimitta)’과 그 연상(anubyanjana)’ 때문이라 한다. 이와 같은 원재료를 바탕으로 하여 사념은 고 확장 된다. 경에서는 사랑스런 형상’ ‘향기롭고 매혹적인 냄새등으로 표현 되어 있다. 이에 대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Rūpa disvā sati muṭṭ

piyanimitta manasi karoto

Sārattacitto vedeti

tañca ajjhesāya tiṭṭhati.

 

혼란된 새김으로 형상을 보면

매혹적인 인상에 마음이 쏠려

오염된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마침내 그것에 탐착하고 마네. (S35.95)

 

 

 사랑스런 형상을 보고 이를 기억하여 다시 떠 올리게 되었을 때 이는 니밋따(표상)’라 볼 수 있다. 이 니밋따를 대상으로 하여 연상작용을 할 때 사념이 확장되고 마침내 거대한 사념의 구조물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런 사념의 구조물을 빠빤짜라 한다. 빠빤짜는 희론 또는 망상으로 번역된다.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

 

경에서 감관의 제어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부처님이 말룽끼야뿟따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 말룽끼야뿟따여, 그대에게 보이고, 들리고, 감각되고 인식된 것에 관하여 말한다면,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감 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 된 것만이 있을 뿐이다.

 

(말룽끼야뿟따경-Mālukyaputtasutta, 상윳따니까야 S35:95(5-2), 전재성님역)

 

 

보인다는 것은 인식된 것을 말한다. 거기서 보는 것으로 멈추어야 한다. 그라서 경에서는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이 말은 각주에 따르면 형상을 형상속에서 인식하는 시각의식이라 하였다. 여기서 이라 한 것은  한계를 뜻한다. 나의 마음은 단지 시각의식일 것이라는 뜻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단지 보는 것으로 그쳤을 때

 

아비담마에서 인식과정 17단계가 있는데 자와나단계가 있다. 이를 순간포착이라 한다. 이런 순간포착 역시 인식하는 것인데 이런 인식은 순수한 것이라 한다. 아직 탐욕이나 증오 등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말룽끼야뿟따여,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감 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 된 것만이 있을 뿐이라면, 말룽끼야뿟따여, 그대는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는 그것 안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그것 안에 있지 않으면, 여기나 저기나 그 양자 사이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자체가 괴로움의 종식이다.

 

(말룽끼야뿟따경-Mālukyaputtasutta, 상윳따니까야 S35:95(5-2), 전재성님역)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인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대는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각주에 따르면 탐진치와 관련하여 탐욕이나 증오, 어리석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 한다. 순간포착(자와나)된 대상에 대하여 단지 보는 것으로 그쳤을 때 망상으로 발전 되지 않아 욕망 등의 번뇌가 일어 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악마의 낚싯바늘에 걸려서

 

35상윳따에서는 감각대상에 대하여 악마로 비유하는 경도 있다. 시각으로 사랑스런 형상을 보았을 때 제어되지 않으면 악마의 낚싯바늘에 걸려서 불행에 빠지고 재난에 빠져 악마 빠삐만이 하자는 대로 할 것이다.(S35.230)”라 하였다.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는 다면 마라에게 코를 꿴 것 같아서 마라가 하자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 다닐 것이라 한다.

 

인상과 속성

 

감관의 제어에 대하여 또 하나의 경을 보면 매우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온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뜨거운 쇠바늘로 시각기관을 차라리지질지언정,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의 인상과 속성에 사로잡히지 말라.

 

(연소의 법문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235,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인상과 속성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앞서 언급된 감각적 인상(nimitta)  연상(anubyanjana)’과 동의어이다. 여기서 인상은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하고, 속성은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악어의 비유를 들고 있다. 인상의 파악은 악어를 알아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는 것이고, 속성은 손이나 발처럼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길거리에서 예쁘고 섹시한 여인을 보았을 때 여자다!” 라거나 섹시하다라고 보았을 때 이는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상(nimitta)’이라 한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파악한 다음 눈길은 얼굴의 눈이나 코, 가슴 등 신체의 부분으로 옮아 간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세밀히 파악하는 것에 대하여 속성(anubyanjana)’이라 하였다.

 

인상에 대하여 총상(總相)’이라고도 하고, 속성에 대하여 세상(細相)’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그리고 부분적으로 파악하여 마음에 담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또 더 나아가 표상(nimitta)을 떠 올려 상상의 나래를 편다면 어떻게 될까? 망상으로 발전하여 번뇌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 망상으로 인하여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였을 때 업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매혹적인 감각대상에 사로잡히는 것 보다 차라리 자신의 눈을 찔로 보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다.

 

왜 극단적으로 말씀 하셨을까?

 

부처님은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씀 하셨을까? 왜냐하면 그러한 것에 이해하는 것은 낮은 단계의 태어남으로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인상과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 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S35.235)”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처에 태어나느니 지금 여기서 눈을 찌르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다.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이 낫다

 

 경에서는 시각 외에도 청각 등 여섯 감각기관과 도구에 대해서도 언급해 놓았다. 이를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감각대상

감각기관

형상의 유혹

뜨거운 쇠바늘로 시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소리의 유혹

뜨거운 쇠막대로 청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냄새의 유혹

날카로운 손톱칼로 후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맛의 유혹

뜨거운 면도칼로 미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감촉의 유혹

날카로운 칼로 촉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사유에 사로잡힘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이 낫다.

 

 

다섯가지 감각기관에 대하여 쇠바늘, 쇠막대, 손톱칼, 면도칼, 칼이 등장하고 있다. 미래에 악처에 태어나느니 차라리 감각기관을 파괴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일부 수행자들은 자신의 생식기가 번뇌의 온상이라 보고 생식기를 칼로 자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섯번째 항을 보면 정신에 대한 것으로 사유를 들었다. 사유가 망상으로 발전하였을 때 악하고 불건한 행위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경에서는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을 자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다. 쓸데 없이 공상이나 망상에 사로 잡혀 악처에 떨어지는 것 보다 휴식을 취하는 것이 더 나음을 말한다.

 

좋아 죽겠네” “미워 죽겠네

 

눈만 뜨면 형상이 보인다. 듣기 싫어도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다섯가지 감각기관으로 대상을 받아 들인다. 그럴 때 마다 반응을 하면 어떻게 될까? 예쁜 아가씨가 걸어 가는데 마음이 끌려서 따라가야 할까?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는 다면 본능에 의해서 살아 간다고 볼 수 있다. 보이면 가지고 싶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화를 내는 삶이다. 이렇게 기분에 따라 대상에 따라 마음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것은 탐진치로 살아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르침에 따르면 보인다고 하여 끌리지 말라고 하였다. 어떻게 해야하는가? 경에 따르면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S35:95)”라 하였다. 볼 때 다만 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들리는 것도 들릴 뿐이다. 냄새도 냄새 날 뿐이다. 이렇게 으로 그친다면 망상으로 발전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접촉에 따라 좋고 싫은 느낌이 일어 났을 때 좋으면 좋을 뿐이고 싫으면 싫을 뿐이다.

 

그럼에도 좋다고 하여 좋아 죽겠네라거나 싫다고 하여 미워 죽겠네라고 한다면 이는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갈애로 발전한 것이다. 갈애를 조건으로 하여 집착이 일어남으로 필연적으로 업으로서의 존재를 유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행처에서는 항상 알아차리라고 한다. 접촉에 따른 느낌 단계에서 알아 차리는 것이다.

 

 

2014-04-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