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불교를 불교답게 하는 가르침 무아(無我)사상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4. 12:45

 

 

불교를 불교답게 하는 가르침  무아(無我)사상

 

 

 

 

벚꽃축제를 한다는데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끝나가려 한다. 올해 벚꽃이 그렇다. 서울 여의도에서 벚꽃 축제가 4 3일부터 열릴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미 벚꽃은 지고 있다. 갑자기 한파와 함께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그 동안 만개 하였던 벚꽃이 마치 눈송이 떨어지듯이 땅바닥에 가득하다.

 

 

 

 

 

 

 

올해 벚꽃개화시기는 무척빠르다. 수도권의 경우 이미 3 30일 경에 활짝 피었다. 물론 기온이 높은 도시의 양지가 그렇다. 이렇게 벚꽃이 빨리 핀 것은 좀처럼 볼 수 없는 현상이라 한다. 아무래도 기온이 급상승한 탓이라 보여진다.

 

일반적으로 벚꽃이 개화하는 시기는 4 10일 전후이다. 이상한파가 있는 해에는 더 늦게 핀다. 그래서 어느 해의 경우 4 15일 넘어 핀 경우도 있었다.

 

하나마츠리(花祭)

 

일본에서 벚꽃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가 4 8일이라 한다. 이는 하나마츠리(花祭)행사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마츠리는 일본에서의 부처님오신날이라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양력으로 부처님오신날을 행사 하고 있는데 그 날이 양력으로 4 8일이다. 그런데 쿄오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에서는 4 8일에 벚꽃이 절정에 이른다고 한다.

 

하나마츠리는 일본 정토종에서 처음 사용하였다고 한다. 해마다 양력 4 8일에 꽃의 축제라는 뜻의 하나마츠리(花祭)’는 이제 종파에 관계없이 관불회(仏会)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벚꽃이 질 때

 

우리나라에서 벚꽃개화지도를 보면 서울의 경우 4 11일이다. 그러나 올해의 경우 일찍 피었기 때문에 이미 져가고 있다. 그럼에도 4 3일부터 여의도 벚꽃 축제가 시작 되는데 절정에서 비켜나 있기 때문에 벚꽃축제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 버릴 가능성이 크다. 

 

벚꽃축제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 버리면 서운할 것이다. 화사한 벚꽃이 그 자태를 계속 유지해 주면 좋으련만 날자가 지남에 따라 지탱할 힘이 없어서 맥없이 떨어져 버린다. 그래서 땅바닥에 눈처럼 쌓인 벚꽃을 볼 때 마다 아름답기 보다 처참함을 느낀다.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것이 아쉬운 것이다.

 

꽃이 처참하게 시들 때 무상함을

 

자연의 변화는 늘 그렇듯이 극적이다. 요즘 같은 경우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는 것 같다. 하루밤 자고 나면 푸르름이 더해 간다. 아마 4 15일을 전후하여 은행나무에서 일제히 싹이 올라오면 세상은 완전히 초록색 옷으로 갈아 입게 될 것이다.

 

11 20일 전후하여 일제히 낙엽이 졌다. 그후  5개월만에 생명이 넘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꽃이 피는 기간은 매우 짧다. 옛말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여 열흘 붉은 꽃이 없다라 하였는데, 절정의 벚꽃이 지는 것을 보면 길어야 일주일 가는 것 같아 보인다.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를 보면서 무상함을 느낀다. 특히 가을에 낙엽이 질 때 더욱더 자연무상을 느낀다. 그런데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면 더 빨리 무상함을 본다.

 

길어야 십일 가량 피고 말 꽃을 보면서 볼 때는 아름답지만 질 때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다. 특히 모란처럼 꽃이 큰 경우가 그렇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라고 노래 하였다. 이렇게 꽃이 절정에 이를 때 아름다움에 감탄하지만 꽃이 처참하게 시들 때 무상을 본다.

 

이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그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다

 

누구나 무상을 느낀다. 자연에서 변화에서 무상함을 느끼고, 사람이 늙고 병들어 가는 모습을 보고서 무상함을 느낀다. 그래서 제행무상이라 한다. 그런데 이  법칙은 보편적인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이미 원리로서 확정된 법칙으로서 어느 것 하나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그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다라는 말이 나왔다.

 

부처님은 제행무상을 설하였다. 그리고 일체개고와 제법무아를 설하였다. 이 세가지를 삼법인이라 한다. 불교와 다른 종교와 가장 차별 되기 때문에 이 삼법인의 잣대로 불교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것이다.

 

그런데 삼법인 중에 제행무상은 불자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다. 누구나 자연과 인생의 변화를 보면서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불교에만 있는 제법무아

 

그러나 타종교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일체개고와 제법무아이다. 특히 제법무아의 경우 오로지 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생무상!”하며 애통해 하지만 제법무아!’라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상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무아는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무상을 느껴 자연의 법칙을 아는 것처럼 느끼지만 무아를 모르기 때문에 깨달을 수 없다. 따라서 진짜 깨닫기 위해서는 무아를 알아야 한다. 또 무아를 알아야 괴로움과 윤회가 종식시킬 수 있다. 그래서 불자와 비불자의 차이는 무아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라 볼 수 있다.

 

불교를 불교답게 하는 가르침

 

무상만 알고 무아를 모르면 절대 깨달을 수 없다. 그리고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상도 알고 무아를 알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괴로움과 윤회도 끝낼 수 있다. 그런 가르침을 부처님이 펼치셨다. 그래서 불교를 불교답게 하는 것이 삼법인이고 불자와 비불자의 차이는 무아를 아는 것과 알지 못화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불교가 무아의 종교일까?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rūpa bhikkhave, anicca, yadanicca ta dukkha, ya dukkha tadanantā, yadanattā ta neta mama neso'hamasmi, na me so attā"ti evameta yathābhūta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

 

(Yadanicca sutta-무상한 것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15, 전재성님역)

 

 

무상에 대한 설법이다. 오온중에 물질을 예로 든 것이다. 물질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번역한 빠알리어가  anattā 이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PCED194에 따르면 anattā Not a self, not a soul’라 하며 한자어로는 無我(무아)라 한다. 이 아낫따에 대하여 성전협에서는 실체가 없음이라 번역하였고, 초불연에서는 한자어 그대로 무아라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실체가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같은 상윳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이 갠지즈강이 커다란 포말을 일으키는데, 눈 있는 자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하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실로 포말의 실체일 수 있는가?

 

(Pheapiṇḍūpama sutta-포말 비유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5,전재성님역)

 

 

경에서 포말의 비유를 들며 실체일 수 있는가?”라 하였다. 여기서 실체라고 번역한 것은 빠알리어 사라(sāra)’에 대한 것이다. 사라는 본질, 핵심의 뜻이다. 그래서 사라가 들어간 게송을 보면 Asāre sāramatino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라 생각하고, dhp11)”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경에서 말미에 해당 하는 문구를 무엇이 실로 포말의 본질일 수 있는가?”라고 바꿀 수 있다.

 

다섯 가지 실체가 없는 것

 

포말의 경에서는 모두 다섯 가지 비유를 들고 있다. 이는 오온이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 이렇게 다섯 가지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말의 경 게송에 실려 있는 오온과 다섯 가지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한 것을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오온

비유어

설 명

물질(rūpa)

포말(Pheapiṇḍūpama)

갠지즈강의 커다란 포말

느낌(vedanā)

물거품(Maricikupamā)

빗방울이 떨어질 때의 물거품

지각(saññā)

아지랑이(kadalūpamā)

늦여름 대낮의 아지랑이

형성(sakhārā)

파초(Kadalūpamā)

속대도 없는 높고 커다란 파초

의식(viññāa)

환술(āyūpamañca)

환술사가 길에서의 보여주는 환술

 

 

 

표를 보면 물질(rūpa)에 대하여 포말같은 것이라 하였다. 이는 바다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물질은 실체가 없음을  뜻한다.

 

느낌(vedanā)에 대해서는 물거품같다고 하였다. 이는 비가 올 때 보면 알 수 있다. 땅바닥 고인 물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동그랗게 원을 그리다 곧바로 사라진다. 느낌 역시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지각(saññā)아지랑이같다고 하였다. 아지랑이 솟아 오르면 잡힐 듯하지만 실체가 없다. 그래서 지각 또는 인식이라고 번역 되는 산냐 역시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까달리는 야자나무가 아니라 파초

 

형성(sakhārā)에 대하여 파초로 비유하였다. 파초는 우리나라에서 좀처럼 볼 수 없지만 따뜻한 남쪽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다년생식물과 같다. 나무라 볼 수 없기 때문에 심이 없다. 여러겹의 껍질로 되어 있어서 속대가 없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래서 모든 형성된 것은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심리현상들은 야자나무와 같으며(S22.95)”라 번역하였다. 하지만 이는 오역이라 본다. 야자나무라 번역된 까달리(Kadali)’ ‘The plantain or banana tree, 芭蕉로서 다년생초로 보기 때문이다.

 

 

 

 

芭蕉(파초)

 

 

야자나무는 이 있어서 나무와 같은 것이고 또 열매는 딱딱한 코코넛이다. 남방에서는 가로수나 정원수로 활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초불연 각묵스님은 각주 347번에서 “마치 야자나무 줄기(kadali-kkhandha)가 많은 잎과 껍질 등으로 조합(bahu-patta-vaṭṭi-samodhāna)되어 있듯이 심리현상들의 무더기도 많은 법들로 조합(bahu-dhamma-samodhāna)되어 있다.”라 하였는데, 야자나무라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 본다.

 

 

 

 

Palm tree(야자나무)

사진 : 디아

 

 

 

PCED194에서도 까달리에 대하여 Plantain tree라 하였고, Plantain tree에 대한 영어사전을 보면 ‘열대의 파초속의 일종’이라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빠알리어 까달리가 야자나무가 아니라 파초인 것이 분명하다. 이에 대하여 파초인가 야자수인가, 포말경(S22:95) 까달리(kadali)나무(2013-03-04)’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실체없음에 대하여 게송으로

 

의식(viññāa)에 대하여 환술이라 하였다. 이는 마술을 말한다. 마술사들이 눈을 감쪼같이 속이듯이 의식 역시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이렇게 포말의 경에서는 오온에 대하여 모두 실체가 없다고 포말, 물거품, 아지랑이, 파초, 환술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Pheapiṇḍūpama rūpa

vedanā bubbuupamā
Maricikupam
ā saññā

sakhārā kadalūpamā,
M
āyūpamañca viññāa

dīpitādiccabandhunā.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S22.95)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실체없음 즉, 무아에 대한 비유이다.

 

일점회귀하듯이 무아(無我)로 포커스가 맞추어져

 

22상윳따 존재의 다발 모음에서는 무상, , 무아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하다.이 중에 실체가 없다는 무아에 대하여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마치 일점회귀하듯이 무아로 하이라이트 되어 있는 것 같다. 삼법인이 어떻게 무아로 수렴 되는지 비교표를 만들어 보았다.

 

 

   

    

 

무상한 것의 경

(S22.15)

1)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2)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3)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무상, , 무아

괴로운 것의 경

(S22.16)

1)물질은 괴로운 것이다.

2)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 무아

실체가 없는 것의 경

(S22.17)

물질은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

무아

 

 

 

표를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하다. 마치 일점으로 회귀하듯이 무아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무상경에서는 무상, , 무아 이렇게 세 가지가 모두 언급 되어 있다. 괴루움경에서는 고와 무아 두 가지만 되어 있다. 무아경에서는 오로지 무아에 대해서만 언급 되어 있다.

 

타종교와 차별 되는 무아사상

 

그런데 세 경을 보면 공통적으로 무아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말씀 하시고자 하는 핵심사상이 바로 무아사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무상만 이야기 한다면 불교라고 볼 수 없다. 자연무상, 인생무상 등 불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무상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괴로움만 이야기 한다고 하여 불교를 안다고 볼 수 없다. 누구나 괴로움은 겪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로움만 이야기 한다면 반쪽짜리불교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진짜불교, 진짜불자는 누구일까? 그것은 무아를 말해야 한다. 무아를 말하면 무상과 무아는 자동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가 타종교와 차별 되는 것이 바로 이 무아사상이다.

 

진실된 말은 아무리 반복해 들어도

 

부처님의 무아사상을 이해하려면 빠알리니까야를 읽어야 한다. 경전에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이 자세하게 기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 읽어도 늘 감동을 받는다. 왜 그럴까?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실된 말은 아무리 반복해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그래서 신심있는 불자들이 경전을 독송하고 게송을 외울 것이다. ‘원인의 경(S22.18)’에서 보는 무상, , 무아의 가르침 역시 진한 감동을 준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무상

수행승들이여, 느낌은 무상한 것이다. 느낌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도 조건도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것에 의해 생겨나는 느낌이 어찌 무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상하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다

수행승들이여, 느낌은 괴로운 것이다. 느낌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도 조건도 괴로운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운 것에 의해 생겨나는 느낌이 어찌 즐거울 수 있겠는가?

괴롭기 때문에 즐겁지 않다

무아

수행승들이여, 느낌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느낌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도 조건도 실체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실체가 없는 것에 의해 생겨나는 느낌이 어찌 실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무아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표를 보면 공통적으로 조건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오온중에서 느낌을 예로 들었는데, 느낌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도 조건도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무상한 것에 의해 생겨나는 느낌이 어찌 무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이런 반문은 고에 대하여 괴로운 것에 의해 생겨나는 느낌이 어찌 즐거울 수 있겠는가?”라 하였고, 무아에 대하여 실체가 없는 것에 의해 생겨나는 느낌이 어찌 실체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실체가 없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

 

사람들은 실체가 없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 마치 무지개를 찾아서 떠나는 것 같고, 허깨비를 잡으로려고 몽둥이를 드는 것 같다. 이렇게 실체가 없는 것에 집착을 하면 할수록 더욱 더 미궁에 빠져들고 괴로울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행복은 행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단지 느낌에 지나지 않는 행복감일 뿐이다.

 

원인과 조건에 따라 만들어진 행복은 물거품 같고 아지랑이 같고 마술같아서 무상하고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행복감이 사라졌을 때 행복감을 계속 느낄 수 없어서 괴로워 질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에 따르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고 더러운 것에 대하여 상락아정이라는 전도된 지각을 일으키지 말하야 함을 말한다.

 

현상에 대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보면 삿된견해(邪見)’이고, 현상에 대하여 무상--무아(無常--無我)’로 보면 정견(正見)’이다.  특히 괴로움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a pare sukhato āhu

tadariyā āhu dukkhato

Ya pare dukkhato āhu

tadariyā sukhato vidū.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 (S35:136)

 

 

즐거움 또는 행복이라 번역되는 수카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사실을 알고 보면 괴로운 것이라 하였다. 행복이라는 것이 단지 일시적으로 느끼는 즐거운 느낌인 행복감일 뿐 영속되지 않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와 같이 무상하고 실체도 없는 행복한 느낌(수카)’에 대하여 목숨을 건다.

 

무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세월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자꾸 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제 보았던 우아한 벚꽃이 오늘 보니 처참하게 떨어져 있는 것도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지난달에 보았던 삭막한 도시의 풍광이 연한 초록으로 물들어 가는 것도 지구의 공전주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보았던 사람의 얼굴이 형편없이 쭈굴쭈굴 해진 것도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간은 인정사정없이 흘러가고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간다.

 

자연무상과 인생무상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무상하게 변하는 것이 괴로운 것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고, 더구나 무상하게 변하는 것이 결국 실체가 없는 무아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가르침에 따르면 현상의 본질은 무상, , 무아라 하였다. 그런데 초기경에 따르면 결국 무아 하나로 수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불교의 핵심사상은 무아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무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부처님 가르침이라 볼 수 없고 더 이상 불교라 볼 수 없다.

 

 

 

 

2014-04-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