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자와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11. 15:37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자와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

 

 

 

아동학대 행위

 

칠곡모녀 사건이 이슈의 중심에 있다. 숨진 아동을 누가 얼마나 때렸는가에 대한 것이다. 8살 짜리가 11살 언니에게 맞아 죽어 숨졌다고 발표 되었으나 진술을 번복하는 바람에 계모에게 의혹이 집중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계모의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이 어린 아이를 학대한 결과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아동학대는 어제 오늘이 아니다. 예전부터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아동학대 사건이 일어나는 것일까? 아동학대에 대하여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

 

 

아동복지법에서는 '아동학대란, 보호자를 포함한 성인에 의하여 아동의 건강 및 복지를 해치거나 정상적인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신체적, 정신적, 성적 폭력 또는 가혹행위 및 아동의 보호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유기와 방임을 말한다'라고 규정하여, 적극적인 가해행위뿐만 아니라 소극적인 의미의 방임행위까지 아동학대의 정의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학대행위를 '아동의 복지나 아동의 잠정적 발달을 위협하는 보다 넓은 범위의 행동'으로 확대하여 직접적인 학대나 방임 행위에서 그러한 환경, 더 나아가 아동의 권리보호에 이르는 매우 포괄적인 경우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동학대)

 

 

아동학대의 개념이 물리적인 폭행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방치하는 것도 일종의 학대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부모 될 자격이 없는 사람

 

아동학대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비정상적인 부모에게 있다고 한다. 부모가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아동 양육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였을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부모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이를 낳아 키울 때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또 하나는 친자가 아닐 경우도 이에 해당 될 것이다. 흔히 말하는 계모나 계부에 의한 학대를 말한다. 이 경우 역시 비정상적인 부모에 해당되고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결과라 본다.

 

그런데 아동학대의 경우 아이가 학대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이한 행동을 하거나 똥 오줌을 못 가릴 때, 그리고 문제행동을보이는 아동에게 학대가 일어날 수 있다. 특히 장애아나 기형아 등 양육자의 신체적 또는 심리적 스트레스가 누적 될 때 학대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아동학대는 신체학대, 정서학대, 성학대, 방임과 유기로 분류 할 수 있다. 특히 정서학대의 경우 언어적 모욕, 정서적 위협이라 한다. 예를 들어 똥 오줌을 못 가리는 아이에게 야단쳐서 주눅 들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경우 아이는 특정행동이나 말을 반복하는 행동장애를 가져 올 수 있다고 한다. 반드시 신체적으로 폭력을 가해야만 학대가 아니라 언어적으로 모욕 주는 행위나 방치 하는 행위 역시 학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아동을 학대 하는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부모될 자격이 없는 자들에 의하여 저질러 짐을 알 수 있다.

 

학대로 쾌감을 느끼는 자들

 

학대는 사람이나 동물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괴롭히는 가혹행위를 말한다. 이런 학대는 일종의 분노가 마음의 바탕에 깔려 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분노로 표출 된 것이 타자를 괴롭히는 가혹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분노하면 할수록 분노는 더욱 더 상승된다는 것이다. 마치 싸울 때 피를 보면 흥분하듯이 분노가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다. 특히 약자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은 일종의 쾌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Kodhassa visamūlassa madhuraggassa, S1.71)”라 하였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madhuraggassa’에 대하여 분노에 수반되는 쾌감이라 하였다. 이는 madhuraggassamadhura+agga  분해 되는데, madhura‘sweet, , 의 뜻으로 달콤하다는 뜻이고, agga ‘the highest; the top-most, 最高的의 뜻으로 꼭대기를 뜻한다. 따라서 madhuraggassa꼭대기에 있는 꿀과 같이 달콤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분노(Kodha)’라는 것이 분노의 뿌리(mūla)에는 독(visa)이 있지만 꼭대기에는 쾌감(madhura)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약자에 대하여 분노함으로서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마음속에 분노에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분노하면 할수록 더욱 더 분노가 일어나 쾌감을 느끼는데 이를 그 쾌감이 마치 꿀처럼 달콤하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성도착증환자인 사디스트(sadist)’에게서도 볼 수 있다.

 

사디스트는 성적대상을 학대함으로써 성적쾌감을 얻는 이상성욕자를 말한다. 성적으로 상대방을 괴롭히면서 동시에 고통스러워 하는 상대방을 보면 볼수록 쾌감을 느끼는 자가 사디스트이다. 이처럼 비정상적이고 변태인 사디스트적 속성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욕먹은 자를 다시 욕한다거나 매맞은 자를 다시 때리면 즐거움이 생겨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욕먹은 자를 다시 욕하고, 매맞은 자를 다시 때리고

 

학대의 대상은 다양하다. 대부분 자신 보다 힘이 약한 자가 대상이 된다. 그래서 약자에게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폭력을 가하는데 가하면 가할수록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격노하였다든가, 사장이 진노할 경우 밑에 있는 사람들이 전전긍긍한다. 권력자들은 이런 모습을 즐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의 석상에서 호통치고 무안을 주고 망신을 줌으로써 일종의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가학적인 행위가 성적 대상에게 나타나면 사디스트가 되고, 아동에게 나타나면 아동학대가 된다. 이처럼 학대는 강자가 약자에게 신체적으로 위해를 가하거나 분노함으로써 나타나는데 문제는 중독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욕먹은 자를 다시 욕하면 그와 수반하여 즐거움이 일어나고, 매맞은 자를 다시 때리면 때리는 즐거움이 일어난다.

 

자학(자기학대)하는 자

 

그런데 스스로 자신을 학대함으로써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자학이라 한다. 상대에게 가학당함으로써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성적대상에게 학대 당하였다면 이를 마조히스트라 한다.

 

장례식장에서 아이고 아이고하며 슬피우는 것 역시 자학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이 경우 울음이 울음을 유발하여 울게 되는데 일종의 자신의 신세한탄이라 볼 수 있고 한풀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울음이 울음을 유발하는 것은 자신이 울고 싶어서 울기 때문이다. 이 경우 울음을 즐긴다고 볼 수 있고 울음으로서 일종의 쾌감을 맛본다고 볼 수 있다.

 

마음에 분노가 있는 한

 

왜 사람들은 상대방을 학대함으로써 얻는 쾌감이 얻고, 또 자신을 스스로 학대함으로써 얻는 쾌감을 얻는 것일까? 근본적으로 마음에 분노의 뿌리가 있고 이를 즐기는 쾌감이 있기 때문이다. 분노의 뿌리가 있는 한 분노에 분노함으로써 달콤한 쾌감을 맛보기 위함이다. 그래서 욕먹은 자를 다시 욕보이며 쾌감을 얻고, 매맞은 자를 다시 때리면서 때리는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싱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매맞은 자를 다시 때리며 쾌감을 느끼는 것은 갈애에 기인한다. 계속 때리고 싶어 하는 욕망을 말한다. 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우는 것 역시 즐거운 느낌이 있기 때문에 울고 싶어 하는 갈애가 일어난다. 이렇게 가학하는 자나 가학을 받는 자 모두 갈애로 인하여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약한

 

가학하는 자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미움이다. 미움의 뿌리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학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피를 보면 볼수록 흥분한다는 말이 있듯이 학대를 하면 할수록 갈애가 생겨 더욱 더 확대 되고 일종의 쾌감을 느낀다.

 

학대는 자신보다 힘이 없고 약하고 무능한 대상에게 발생된다. 자신 보다 힘이 강하고 능력이 있는 상대에게는 발생할 수 없다. 그래서 가학하는 자는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준다.

 

자신 보다 저열하면 무시하고 경멸하고  자신 보다 뛰어나면 우러러 보고 받드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학대하는 자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와 같다고 본다. 그 바탕에는 항상 미움, 분노, 혐오 등 부정적인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 모두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이다.

 

악마와 같이 추한 모습

 

학대당하는 자는 힘이 없고 능력이 없고 열등한 자가 대상이 된다. 이런 열등한 자가 문제를 일으키거나 이상행동을 하였을 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마구 화를 낸다면 어떻게 될까?

 

가학자와 가학을 당하는 자는 둘로 뚜렷이 구분된다. 가학자는 가학함으로써 분풀이를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불가항력 적이어서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가학행위는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결과로 된다.

 

이런 악행이 쌓이고 쌓이면 어떻게 될까? 얼굴모습은 악마와 같이 추한 모습으로 변해 갈 것이다. 미움, 증오, 경멸 등 성냄에 뿌리 박은 마음이 그대로 얼굴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학대하는 것은 비불교적 행위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업을 짓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움에 뿌리를 둔 마음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전환하는가? 그것은 미움과 반대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다름 아닌 자애이다.

 

성냄(미움, 분노)의 허물을 먼저 알아야

 

자애와 미움(분노)은 서로 상대적이다. 분노를 죽이면 자애가 되고, 자애를 죽이면 미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애에 대하여 알려면 먼저 성냄(미움, 분노)의 허물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앙굿따라니까야를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도반이여,

성내거나, 성냄에 휩싸이거나,

마음이 [성냄에] 시달릴 때 생명조차 앗아간다(A.i.216)”

 

(청정도론 제9장 거룩한 마음가짐 138p, 대림스님역)

 

 

누군가를 미워한다거나 상대에게 분노한다는 것은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격분하여 살인이 나는 경우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자존심을 건드렸을 때 격분하여 한대 때린 것이 죽음으로 연결 되는 경우를 말한다. 이는 전혀 죽일 의도가 없었음에도 살인을 한 결과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격분하게 되면 사람을 죽이게 된다.

 

왜 번역차이가 날까?

 

청정도론에서 성냄의 허물에 대한 근거로서 ‘A.i.216’라 하였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1 216페이지를 말한다. PTS 본 기준이다. 이를 찾아 보니 앙굿따라니까야 찬나의 경(A3.71)’이다. 해당부분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Duṭṭho kho āvuso dosena

abhibhūto pariyādinnacitto

kāyena duccarita carati, vācāya duccarita carati, manasā duccarita carati.

 

벗이여, 성냄으로 인해 분노하고,

성냄에 정복되고, 마음이 사로잡히면,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를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합니다.

 

(Channasutta-찬나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71, 전재성님역)

 

 

청정도론에서 5세기 붓다고사가 인용한 문구와 우리말로 번역된 빠알리니까야와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생명조차 앗아간다라는 말이다. 하지만 A.i.216에는 이 말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신구의 삼업으로 악행을 합니다. (duccarita carati)”라는 문구가 보인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하여 빅쿠냐나몰리의 영역을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다음과 같다.

 

 

 

“Friends, when a man hates,

is a prey to hate

and his mind is obsessed by hate,

he kills living things, and …” (A I 216).

 

(빅쿠 냐나몰리역, CHAPTER IX, LOVING-KINDNESS)

 

 

번역해 보면 친구여, 어떤 사람이 증오할 때, 증오함으로 먹이가 되는 것이고, 그의 마음은 증오에 사로잡히고, 그는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고, 그리고…”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5세기의 붓다고사는 앙굿따라니까야에 실려 있는 찬나의 경의 문구를 올바로 표현 하지 못한 것이라고 결론 낼 수 있다. 찬나의 경 그 어디에도 붓다고사가 표현한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인다는 표현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빠알리사전 PCED194에서 제공되는 청정도론 빠알리 원문을 찾아 보았다. 해당부분을 찾아 보니 다음과 같다.

 

 

“duṭṭho kho, āvuso,

dosena abhibhūto

pariyādiṇṇacitto

pāampi hanatī

 

(PCED194, 9. Visuddhimaggo, Brahmavihāraniddeso)

 

 

빠알리 문구를 보니 “duṭṭho kho, āvuso, dosena abhibhūto pariyādiṇṇacitto” 부분은 PTS본과 같다. 그러나 ‘pāampi hanatī가 차이난다.

 

문구에서 pāa‘life; breath’로서 생명을 뜻하고,  hanatī‘kills; strikes; injures’의 뜻이다. 따라서 ‘pāampi hanatī생명을 죽이는 것이 된다.

 

하지만 PTS 본에는 이런 문구가 없고 그대신 신체적으로( kāyena) 언어적으로(vācāya) 정신적으로(manasā)악행을 한다 (duccarita carati)”라고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붓다고사가 경을 자의적으로 바꾸었거나, 잘못 인용하였거나, 그 때 당시 경의 내용과 현재의  PTS 본의 내용이 다를 수 있음을 말한다.

 

중요한 사실은 성내는 것이 신구의 악업을 짓는 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살인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삶의 방식

 

격분하면 우발적살인을 불러 올 수 있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이를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고 하더라도 참기가 쉽지 않다. 곧바로 응수를 하든가 제압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사태만 더욱 악화 시킬 뿐이다. 화내는 이에게 화내면 화만 더욱 돋을 뿐이기 때문이다.

 

피는 피를 부르고 증오는 미움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어느 선에서 멈추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대꾸를 하지 않는 것이다. 상대방이 뭐라고 하건 말건 관여치 않는 것이다. 더 좋은 방법은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피함으로써 번뇌를 소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의 업대로살기 때문에 좋으면 욕심부리고 싫으면 밀쳐 내며 성을 낸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이처럼 보통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사소한 것에도 욕심을 부리고 화를 낸다. 더구나 자신 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기 일쑤이다. 그래서 대부분 학대는 자신 보다 약한자, 무능력자를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다.

 

분노의 표출은 바탕에 있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탐진치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비를 기대하기란 좀처럼 힘들다. 탐욕에 뿌리 박은 마음, 성냄이 뿌리박은 마음, 어리석은 뿌리 박은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으로 꽉 차 있는 자에게 자애나 연민 등 착하고 건전한 마음을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찾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사회에서는 이들에게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자비를 이야기 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든가 어머니가 외아들 대하듯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랑도 탐진치에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성인에게나 사랑이니 자애이니 하는 말들이 필요할 지 몰라도 탐욕으로 성냄으로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이나 자애를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가 먹혀 들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자신을 사랑하라!”

 

탐진치로 살아 가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해 줄 말이 있다.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든가 어머니가 외아들 대하듯 자애의 마음을 내라등의 사랑타령이 아니다. 가장 먼저 자기자신을 사랑하라!”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은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 되기 때문이다.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남을 사랑하라고 백번 천번 이야기 해 보았자 먹혀 들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적으로 알고 자신을 해치는 자에게 남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Sabbā disā anuparigamma cetasā
Nevajjhag
ā piyataramattanā kvaci,
Eva
piyo puthu attā paresa
Tasm
ā na hise para attakāmoti.

 

[세존]

“마음이 어느 곳으로 돌아다녀도

자기보다 더 사랑스런 님을 찾지 못하듯,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사랑스러우니

자신을 위해 남을 헤쳐서는 안되리.

 

(말리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3.8, 전재성님역)

 

 

 

 

Jasmine

 

 

빠세나디왕이 “당신은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왕비는 예상을 깨고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오늘날 당신 나 사랑해?”라며 사랑을 확인 할 때 하늘만큼 땅 만큼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해!”라는 말을 듣고자 한다. 그러나 부처님가르침을 믿고 따르고 실천하는 현명한 말리까왕비는 빠세나디왕의 사랑확인에 대하여 자기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게송에서 자신을 위해 남을 헤쳐서는 안되리. (Tasmā na hise para attakāmoti)라하였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남을 헤쳐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도 역시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똑 같다.

 

이렇게 부처님은 가장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런 가르침은 그 어떤 종교나 사상에서도 볼 수 없다. 타종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지만 부처님은 나자신을 먼저 사랑하라고 한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타종교와 차별화 된다.

 

자신을 ()’으로 여기는 자들

 

부처님은 왜 자기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고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구체적인내용은 다음과 같다.

 

 

Evameta mahārāja, evameta mahārāja, ye hi keci mahārāja, kāyena duccarita caranti, vācāya duccarita caranti, manasā duccarita caranti, tesa appiyo attā.

 

Kiñcāpi te eva vadeyyu, "piyo no attā"ti. Atha kho tesa appiyo attā. Ta kissa hetu: ya hi mahārāja, appiyo appiyassa kareyya, ta te attanāva attano karonti. Tasmā tesa appiyo attā.

 

 

[세존]

“대왕이여,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이든 신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며 정신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겠습니까? 그들은 미워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Piyasutta-사랑스런 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4(1-4), 전재성님역)

 

 

타인 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부처님은 분명하고 명백하게 말씀 하신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 대하여 자신을 ()’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자신을 적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악행으로 인하여 과보를 받게 되었을 때 고통을 당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럼에도 악행을 서슴없이 하는 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 자신을 원수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자에게 타인의 사랑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원수를 사랑하라든가 자애의 마음을 가져라라고 말해 보았자 허공의 메아리에 불과 하다. 성냄이 바탕이 깔려 있는 자에게 자애의 마음이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자에게 타인을 사랑하라고 말하기 보다 가장 먼저 해 주어야 할 말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이다.

 

자신을 사랑함으로서 마음속에 깔려 있는 분노의 마음을 자애의 마음으로 전환 시켜야 한다. 이렇게 자신에게 먼저 자애의 마음을 내고 그 다음에 할 일은 타인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것이 순서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자애의 마음을 내는 데 있어서 먼저 자기를 자애로 가득 채워야 한다. (Vsm9.11)”라 하였다.  그 다음에 자애를 쉽게 일으키기 위해 좋아 하고 마음에 들고 공경하는 스승이나 이에 필적할 만한 분을 자애로 가득채워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함을 말한다.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사람들

 

그렇다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Ye ca kho keci mahārāja, kāyena sucarita caranti, vācāya sucarita caranti, manasā sucarita caranti, tesa piyo attā. Kiñcāpi te eva cadeyyu "appiyo no attāti", atha kho tesa piyo attā. Ta kissa hetu: ya hi mahārāja, piyo piyassa kareyya, ta te attanāva attano karonti. Tasmā tesa piyo attāti.

 

[세존]

“어떤 사람들이든 신체적으로 착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착한 행위를 하며 정신적으로 착한 행위를 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겠습니까?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Piyasutta-사랑스런 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4(1-4), 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자신을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나와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결코 신구의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자신을 친구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기 때문에 선업을 짓는다. 선업을 짓는 다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구절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행하기 때문입니다.”이다.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타인도 사랑할 수 있어서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라 한 것이다.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자와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았을 때 모든 것이 명백하다. 신구의 삼업으로 악업을 짓는 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따라서 자신을 적으로 삼기 때문에 자기자신은 자기자신의 이 된다. 반면 신구의 삼업으로 선업을 짓는 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이다. 따라서 자신을 친구로 삼기 때문에 자기자신은 자신의 친구가 된다. 이를 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구 분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자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

삼업

신구의 삼업으로 선업을 짓는 자

신구의 삼업으로 악업을 짓는 자

내용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행하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함.

미워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행하기 있기 때문에,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대함.

관계

자기자신은 자기자신의 친구

자기자신은  자기자신의 적

 

 

 

표를 보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친구이지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을 자신의 적으로 생각할 때 어떤 행동을 할까? 어떤 행동이든지 서슴없이 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고 할지라도 신체적으로 살인, 도둑질, 음행을 서슴지 않고 할 것이다. 또 자신을 적으로 여긴다면 거짓말, 해코지 하는 말 등을 서슴없이 할 것이다.

 

현재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모든 범죄행위는 결국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무리 방송과 매스컴을 통하여 원수를 사랑하라든가 자애의 마음을 내어라라고 말해 보았자 일부 사람들에게 호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뭇삶들 대부분은 탐진치에 절어서 살기 때문에 탐진치로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은 지금 여기에서 너 자신을 사랑해라라는 말이 될 것이다. 따라서 교도소 등에서 교화 할 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해 주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말은 자신을 먼저 사랑하세요!”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일부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원수를 사랑하라든가 자애의 마음을 내어라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 사람들에게 호소한다면 “자신을 먼저 사랑하십시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여긴다면

 

자신을 먼저 사랑하였을 때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칠곡모녀 사건 등과 같은 아동학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 볼 수 있다.

 

욕먹은 자를 다시 욕하거나  매맞은 자를 다시 때림으로서 쾌감을 느끼는 것은 분노에 바탕을 둔 악행이다. 이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적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세존]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여긴다면

자신을 악행에 묶지 말라.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행복을 얻기가 어렵네.”(S3.4)

 

 

 

2014-04-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