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해체해서 보기? 부처님은 분별론자인가 해체론자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15. 19:29

 

 

해체해서 보기? 부처님은 분별론자인가 해체론자인가?

 

 

 

해체해서 보기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이 있다. 각묵스님이다. 인터넷시대를 맞이 하여 누구나 검색만 하면 쉽게 스님의 강좌를 접할 수 있다. 그런 스님의 초기불교 강좌를 듣다 보면 막힌 곳을 시원 하게 뚫어 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강좌를 듣다 보면 새로운 용어가 많이 등장한다. 그 중에 하나가 해체해서 보기이다.

 

초기불교전도사로 잘 알려져 있는 스님의 유명한 말이 있다. 그것은 뭉쳐두면 속고 해체하면 깨닫는다라는 말이다. 나와 세상 등을 온연 등의 법들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통해서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법으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그는 불교적 수행을 하는 자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이와 같은 스님의 해체론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아직까지 불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경전적 근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해체해서 보기는 어떤 경전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스님의 기고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경전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역자가 주목하고 싶은 경은「천 명이 넘음 경」(S8:8)이다. 여기서 존자는 부처님을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 분”{742}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주석서는 “‘부분들로 해체해서(bhāgaso pavibhajja)’란 마음챙김의 확립 등의 부분으로 법을 해체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혹은 철저하게 해체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는데, 여러 가지 구성요소들과 부분들로 해체하고(vibhajitvā) 해체해서라는 뜻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상윳따 니까야』제1권「왕기사 장로 상윳따」(S8) 해제, 각묵스님, 2014-04-15)

 

 

 

taking to pieces

 

 

인터넷카페에 올려져 있는 글이다. 글에서 스님은 천명이 넘음 경(S8.8)’을 근거로 하고 있다. 경에 따르면 왕기사존자가 부처님에 대하여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 분”이라고 게송으로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해체를 설하는 분이 된다. 마치 쪼개고 또 쪼개서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 같은 뉘앙스이다. 그런데 해체한다고 하였을 때 마치 몸을 갈기갈기 찢는 것 같아 무시무시한 느낌이 든다.

 

스님은 주석을 인용하야 해체를 설하는 상좌부라고 설명하였다. 과연 부처님은 해체론자이고 테라와다는 해체를 설하는 불교일까?

 

네 종류의 번역을 보면

 

스님이 근거를 든 왕기사상윳따의 천명이 넘음 경을 찾아 보았다. 빠알리 원문과 성전협, 초불연, CDB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Ummaggapatha mārassa abhibhuyya

carasi pabhijja khilāni,
Ta
passatha bandhapamuñcakara

asita bhāgaso pavibhajja.

 

 

[방기싸]

죽음의 신의 사악한 길을 극복하여

마음의 황무지를 부수고 지내네.

속박에서의 해탈을 이루고

집착 없이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는 그를 보라.

 

(Parosahassasutta- 천명 이상의 경, 상윳따니까야 S8.8, 전재성님역)

 

 

마라의 비정상적인 길을 정복하고

[마음의] 삭막함을 부수고 유행하시니

속박에서 벗어났으며 집착이 없고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 그 분을 보라

 

(Parosahassasutta- 천명 이상 경, 상윳따니까야 S8.8, 각묵스님역)

 

 

Having overcome the deviant course of Māra's path,

You fare having demolished barrenness of mind.

Behold him, the releaser from bondage,

Unattached, dissecting into parts.

 

(Over a Thousand, CDB S8.8, 빅쿠보디역)

 

 

천명이상의 경(Parosahassasutta)은 부처님에 대한 찬탄이다. 부처님이 사왓티에서 천이백오십명의 수행승에게 열반에 관한 법문을 하자 수행승들은 고무 되었다. 그 중에 왕기사가 부처님에게 즉흥적으로 게송을 읊어 찬탄한 것이다. 그런데 이 경을 보면 마치 금강경의 첫 부분을 떠 올리게 한다.

 

수보리존자와 왕기사존자

 

금강경에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에게 법을 청하는 장면이 있다. 경에서는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서 있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의 옷을 걷고 오른쪽 무릎을 꿇어 합장하며 공손히 부처님께 여쭈었다 (時長老須菩提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 而白佛言)”라고 표현 되어 있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의 경에서도 이와 유사한 장면이 있다. “존자 방기싸는 자리에서 일어나 왼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세존께서 계신곳을 향해 합장하고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 드렸다. (S8.8)”라는 내용이다.

 

더구나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금강경의 내용과 매우 유사한 게송이 보인다. 이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여래선호념제보살           如來善護念諸菩薩

선부촉제보살               善付囑諸菩薩

세존선남자선여인           世尊善男子善女人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發阿樓多羅三邈三菩提心

응운하주                   應云何住

운하항복기심               云何降伏其心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희유한 일입니다.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모든 보살들이 불법을 잘 전하도록 부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금강경, 선현기청분)

 

 

[방기싸]

천명 이상의 수행승들이

아무런 두려움 없는 열반,

탐욕의 진리를 가르치는

올바른 길로 잘 가신님을 받들어 모시네.

 

세존이시여, 용왕으로 불리니

선인 가운데 가장 선인이네.

마치 큰 구름처럼

제자들에게 비를 내리네.

 

대낮의 처소에서 빠져나와

스승을 뵙고 싶은 욕심에

제자 방기싸가 예배 드립니다.

위대한 영웅이여. 그대의 두 발에.

 

(Over a Thousand, CDB S8.8, 빅쿠보디역)

 

 

두 게송을 보면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격하여 자발적으로 나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금강경에서는 수보리 존자가 가르침을 듣고 체루비읍(涕漏悲泣)’하는 장면이 있다. 가르침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펑펑흘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에도 최상의 예를 표하는 장면이 있다. “위대한 영웅이여. 그대의 두 발에라 하였는데 이는 제자가 최상의 예를 갖추어 예배드리는 장면이다.

 

너무나 차이 나는 번역

 

이와 같이 천명 이상의 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감흥하여 찬탄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두 번역자의 번역을 보면 너무나 차이가 난다. 문제의 네 번째 문구를 보면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

asita bhāgaso pavibhajja (S8.8)

 

전재성님역

집착 없이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는

나누어 줌

각묵스님역

집착이 없고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

해체하여 설함

빅쿠보디역

Unattached, dissecting into parts.

(집착없이 나누어서)

부분으로 나눔

 

 

 

가장 차이가 나는 말이 나누어 주는해체해서 [설하시는]’이다. 차이난다기 보다 전혀 다른 번역이라 볼 수 있다. 왜 이렇게 다른 번역이 되어 버렸을까?

 

위방가경(Vibhagasutta), 분별경인가 분석경인가?

 

나누어 준다해체하여 설한다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이는 pavibhajja를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pavibhajja ‘pa + vibhajja + a + 로 분해 된다. 핵심어는 vibhajja이다.

 

사전에 따르면 vibhajja ‘[abs. of vibhajati] having divided or analysed.’의 뜻이다. 직역하면 분리되는’ ‘분석되는의 뜻이다. 또 일본어 사전을 보면 ちて, 分別して로 되어 있어서 나누어또는 분별하여의 뜻이다. 이로 본다면 나누고, 쪼개고, 해체 하는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초기경전에 위방가경(Vibhagasutta)이 있다. 이에 대하여 성전협에서는 분별경이라 하였고, 초불연에서는 분석경이라고 이름 하였다. 분별과 분석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Vibhagasutta를 이름으로 가지는 경 중에 대표적으로 두 개가 있다. 십이연기를 설명한 위방가경(Vibhagasutta, S12:2)’과 팔정도를 설명한 위방가경(Vibhagasutta, S45:8)’이다.

 

십이연기와 팔정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왜 나눔을 뜻하는 위방가라는 말을 사용하였을까? 아마도 나누어 설명하였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조목조목 나누어 설명하였기 때문에 분별하여 설하였다는 의미로 위방가경(Vibhagasutta)이라 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분석경이라 하여 마치 물질을 분석하는 것처럼 경의 이름을 지었다. 이는 해체해서 보기를 강조 하다 보니 그런 제목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집착없이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는

 

전혀 다른 두 개의 번역어는 어떤 근거로 한 것일까? 먼저 성전협의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asita bhāgaso pavibhajja: Srp.I.279에 따르면, ‘집착하지 않고(asita)’의존하지 않고(anissita)’로 해석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현재분사의 단수대격(sg.acc)을 취하는 문장을 구성하고 있다.

 

(각주, 전재성님)

 

 

주석을 근거한 각주에 따르면 asita집착하지 않고의 뜻이라 한다. Bhāgaso‘in parts; by portions’뜻으로 부분으로뜻이다. pavibhajja는 분리의 뜻이다. 따라서 집착없이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는(asita bhāgaso pavibhajja)’ (Ta)를 보라 한 것이다. 이렇게 집착없다의 뜻과 나누어 주다의 뜻이 매칭됨을 알 수 있다.

 

집착이 없고 부분들로 해체해서?

 

그러나 초불연 번역을 보면 집착없다와 해체하다의 결합이 어울리지 않는다. asita bhāgaso pavibhajja에 대하여 집착이 없고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라고 번역함으로서 이상한번역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번역을 보면 집착이 없고문구를 세 번째 구절에 갖다 놓았다. 그래서 속박에서 벗어났으며 집착이 없고/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 그 분을 보라라고 분리해 놓았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번역이다. 빠알리어 문구 ‘asita bhāgaso pavibhajja는 한 구절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수인지 의도인지 알 수 없으나 바르게 놓는다면 속박에서 벗어났으며 /집착이 없고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 그 분을 보라가 된다. 그래서 asita bhāgaso pavibhajja집착이 없고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이라고 되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번역이 되어 버린다.

 

집착이 없고 부분들로 해체해서? 이 말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요즘 말로 뭥미?”가 될 것이다. ‘집착이 없다는 것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이라는 문구는 도저히 결합 될 수 없는 말이다. ‘집착이 없다는 것과 해체해서 설한다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도무지 뜻이 통하지 않는 말임에도 해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사전과 주석에 의존한 번역이라 보여진다.

 

왜 그토록 해체에 집착할까?

 

그렇다면 초불연에서는 왜 그토록 해체라는 말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부분들로 해체해서(bhāgaso pavibhajja)’란 마음챙김 등의 부분으로 법을 해체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혹은 철저하게 해체하는 것(pavibhajjati)으로도 읽을 수 있는데, 여러 가지 구성요소들과 부분들로 해체하고 해체해서라는 뜻이다. (S.A.i.279)

 

여기서 pavibhajja은 목적격으로 볼 수 있고 절대분사 pavibhajja에 어미 -을 붙인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주석서는 이 두 가지 다를 인정하고 있으며, 노만은 후자로 간주하고 있다.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bhāgaso pavibhajja에 대하여 부분들로 해체해서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사전에 실려 있는 그대로의 번역이라 볼 수 있다. Bhāgasoin parts뜻이고, vibhajjaanalysed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번역에 대하여 주석 ‘S.A.i.279’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런데 성전협 전재성님도  Srp.I.279’라 하여 같은 279페이지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두 개의 번역을 보면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대체 어느 번역이 맞는 것일까?

 

빅쿠보디의 비판적 견해

 

이번에는 빅쿠보디의 CDB각주를 보았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Spk:

The deviant course of Māra's path (ummaggapathamMarassa) refers to the emergence of the hundreds of defilements, called a path because they are the path into the round of existence.

 

On barrenness of mind (khila) see n. 500. In pada d, I read asitam bhagaso pavibhajjam, with Se and Eel & 2. Be reads pavibhajam. Spk glosses as vibhajantam, an accusative present participle, but Norman suggests pavibhajjam may be an absolutive with - added, and Spk mentions a v.1.

pavibhajja, a clear absolutive. Spk paraphrases: "who analyses the Dhamma by way of such groups as the establishments of mindfulness," etc.

 

The explanation sounds contrived, but it is difficult to determine the original meaning.

 

(각주 521, 빅쿠보디)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초불연 각주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초불연 각주에서 보이지 않는 항목이 있다. 빅쿠보디 개인적 견해라 보여지는데 The explanation sounds contrived, but it is difficult to determine the original meaning.”문구이다. 이는 이런 설명은 꾸며낸 말처럼 들린다. 원래의 의미라고 보기 어렵다라는 뜻이다.

 

빅쿠보디는 사띠를 확립하여 여러 가지 그룹으로 분해하는 방식으로 법을 분석하는 자(who analyses the Dhamma by way of such groups as the establishments of mindfulness)”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을 말한다. 해체를 설하시는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주석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비판적이다. 글에서 ‘Spk paraphrases’라 하였는데 이는 주석에서 바꾸어 말했다라는 뜻이다. 원래의 뜻과 다르게 주석가들이 부처님에 대하여 해체를 설하는 자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게송을 보면 부처님은 해체를 설하는 자가 아니다. 방기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감격하여 찬탄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하여 죽음의 신을 극복하고, 마음의 황무지를 부수고, 속박에서 해탈을 이룬 자로 묘사 되어 있다. 그런데 갑자기 해체를 설하는 자로 묘사한 것은 문맥상 맞지 않다. 이후 전개 되는 게송에서도 해체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Oghassa hi nittharaattha anekavihita magga akkhāsi,
Tasmi
te amate akkhāte dhammaddasā hitā asahīrā.

Pajjotakaro ativijjha dhamma sabbaṭṭhitīna atikkamamaddasa,
Ñatv
ā ca sacchikatvā ca agga so desayi dasaddhāna

Eva sudesite dhamme ko pamādo vijānata,
Tasm
ā hi tassa bhagavato sāsane appamatto sadā namassamanusikkheti.

 

 

거센 흐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그는 여러 가지 길을 가르쳤고

이러한 그가 가르친 불사의 세계에서

진리를 보는 자는 흔들림 없이 살아가네.

 

꿰뚫어 빛을 비추는 사람은

모든 주처를 초월하는 것을 보았네.

그것을 알고 실행한 뒤에

다섯 가지 힘 가운데 최상을 말씀하셨네.

 

이처럼 진리를 잘 말씀하셨을 때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나태할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세존의 가르침에 관해

부지런히 항상 예배하며 따라 배우네. (S8.8)

 

(Parosahassasutta- 천명 이상의 경, 상윳따니까야 S8.8, 전재성님역)

 

 

부처님을 찬탄하는 왕기사의 게송을 보면 해체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해체에 대한 이야기 있다면 온, , , , , 연과 같은 교학이나 교리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게송에서 ‘bhāgaso pavibhajja(부분적으로 분석하여)’에 대하여 문자 그대로 뜻으로 하여 부처님에 대하여 해체론자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다만 pavibhajja에 대하여 나누는 것으로 본다면,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하나 하나 나누어 주는 자또는 베푸는 자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교는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이다

 

부처님은 분별하여 법을 설하였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분별론자가 맞다. 이는 초기경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위방가경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연기를 분별하여 설하겠다. 그것을 잘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Paiccasamuppāda vo bhikkhave, desissāmi. Vibhajissāmi. Ta suātha. Sādhuka manasikarotha. Bhāsissāmī'ti. S12.2)”라 하였다. 이렇게 부처님은 분별하여(Vibhajissāmi)’ 설하신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의 교단에 대하여 고따마의 교단은 일찍이 분별설의 교단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이 해체하여 설하신 것은 아니다. 해체라는 말이 물질을 나누는 의미이고, 분석이라는 말 역시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갠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해체나 분석이라는 용어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법으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그는 불교적 수행을 하는 자가 아니다. 개념적 존재로 뭉쳐두면 속는다. 법들로 해체해야 깨닫는다. 뭉쳐두면 속고 해체하면 깨닫는다. (http://cafe.daum.net/chobul/1A5i/952)”라 하였다.

 

분별을 뜻하는 위밧자(Vibhajia)에 대하여 해체로 번역하는 것은 존재론적 방식이다. 위방가경(Vibhagasutta)에 대하여 분석경이라 번역한 것 역시 존재론에 기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불교는 존재론을 부정한다. 이는 연기의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다. 조건에 따라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였을 때 존재에 기반을 둔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논파 되게 되어 있다.

 

존재론적 이미지를 풍기는 해체분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본다. 왜 그럴까? 불교는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이기 때문이다.

 

해체(解體)는 무시무시한 용어

 

해체라는 용어는 무시무시한 느낌을 준다. 마치 몸을 갈기갈기 찢는 듯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각묵스님은 해체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고기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해체해서 보기의 가장 좋은 비유로는 「대념처 경」(D22)에 나타나는 백정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마치 솜씨 좋은 백정이나 그 조수가 소를 잡아서 각을 뜬 다음 큰길 네 거리에 이를 벌려놓고 앉아있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요소()별로 고찰한다. ‘이 몸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있다’고.(D22 §6; M10 §12 )

 

(『아비담마 길라잡이』강의 참고자료7 - 법(dhamma) 해체했을 드러난다, 각묵스님 2014-03-20)

 

 

스님은 해체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대념처경에 등장하는 길거리의 고기장사의 비유를 들었다. 저자거리에서 파는 고기는 부위별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소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이 몸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비구가 이전의 재가자이었거나 출가를 하였어도[명상주제를 들지 않는] 어리석은 범부일 때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덩어리를 분해(해체)하여 요소별로 따로따로 반조하지 않는 이상 그것에 대해 중생이라거나 사람이라거나 인간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다.(DA.iii.770; MA.i.272)”라고 주석서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몸을 해체한다는 것은 섬뜻하다. 마치 소를 잡으면 부위별로 해체 하듯이 사람도 몸, 느낌, 지각 등 오온으로 해체한다는 것이 매우 무섭게 들리는 것이다. 이는 나누다’ ‘분별하다는 뜻의 위밧자에 대하여 해체라는 무시무시한 용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전협에서는 덩어리를 분해(해체)하여라는 부분에 대하여 어떻게 각주 하였을까? 이 부분에 대한 성전협 각주와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비구가 이전의 재가자이었거나 출가를 하였어도[명상주제를 들지 않는] 어리석은 범부일 때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덩어리를 분해(해체)하여 요소별로 따로따로 반조하지 않는 이상 그것에 대해 중생이라거나 사람이라거나 인간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다.(DA.iii.770; MA.i.272, 초불연각주)

 

 

이 수행승은 이전에 어리석은 범부였을 때는 재가자였건 출가자였건 이 몸에관하여, 성립한 대로, 바라는 대로 덩어리로 식별(ghanavinibbogam)해서 요소의 세계로 관찰하지 않는 한, ‘뭇삶이다.’라든가 사람이다라든가 하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Smv770, 성전협각주)

 

 

두 개의 각주는 주석서의 설명을 번역하여 소개 한 것이다. 그런데 용어사용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가장 차이 나는 부분이 덩어리를 분해(해체)하여덩어리로 식별(ghanavinibbogam)해서라는 말이다. 이 말은 결국 분해(해체)’식별로 포커스가 모아진다.

 

몸을 요소별로 또는 덩어리로 관찰하는 것에 대하여 한편에서는 분해또는 해체라는 무시무시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또 한편에서는 분별을 뜻하는 식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같은 빠알리어에 대하여 해체분별이라는 용어가 두 종류의 번역서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분별하여 말하는 사람(Vibhajjavādo)

 

초불연에서 해체론을 설명하기 위하여 근거로 든 천 명이 넘음 경(S8:8)’경은 잘못 선정되었다고 본다. 빅쿠보디도 The explanation sounds contrived, but it is difficult to determine the original meaning. (이런 설명은 꾸며낸 말처럼 들린다. 원래의 의미라고 보기 어렵다)”라고 지적하였듯이 해체론의 근거로 삼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차라리 맛지마니까야의 다음과 같은 문구를 근거로 드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Vibhajjavādo kho ahamettha māava, nāhamettha ekasavādo,

 

바라문 청년이여, 그것에 대해 나는 분별하여 말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 것에 대해 일방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Subhasutta-수바의 경, 맛지마니까야 M99, 전재성님역)

 

 

경에서 부처님은 분별하여 말하는 사람(Vibhajjavādo)’이라 하였다. 주석에 따르면 이처럼 분별하여 말하는 자를 분별론자(Vibhajjavādin)’라 한다. 이와 같이 본다면 바로 이 내용이 부처님에 대하여 분별론자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2014-04-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