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남이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의지할 것은 오직 가르침과 자기자신뿐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17. 11:09

 

 

남이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의지할 것은 오직 가르침과 자기자신뿐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세상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이다. 지금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이 세상의 일이다. 이럴 때 어디에 의지해야 할까?

 

최근 블랙박스 동영상을 보았다. 블랙박스 장착이 일반화 되어 가는 추세에서 블랙박스로 본 세상이라는 프로가 있다. 제보로 제작되는 이 프로를 보면 갖가지 사고현장이 생생하게 기록 되어 있다.

 

그런데 프로를 보면 공통적인 현상이 있다. 사고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갑자기 차가 돌진한다든가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는 듯한 모습이다. 이런 장면에 대하여 슬로우비디오로 보면 모두 원인이 밝혀 진다. 주로 신호위반이나 과속 등 교통법규를 준수하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이다. 그래서 동영상 제보자는 내가 신호를 지키더라도 상대방이 위반할 수 있기 때문에 일이초간 살펴 본 다음 지나간다라고 말한다. 교차로에서 신호를 지키지 않는 차량에 대하여 방어운전 차원에서 한말이다.

 

아무리 신호를 잘 지켜도 뒤에서 받아 버리면 사고가 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변수가 많기 때문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주변을 살펴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큰 교통수단은 안전할까?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진도에서 여객선침몰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아직까지 실종자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역사상 가장 참혹한 대형참사로 기록 될 듯하다. 더구나 수학여행을 떠난 고등학생이 대부분이라 하니 더욱 더 가슴이 아프다.

 

일반적으로 큰 비행기나 큰 배 등 교통수단이 크면 안전하다고 한다. 그러나 크다고 하여 결코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다. 큰 것이건 작은 것이건 사고가 일어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첨단장비가 갖추어진 비행기나 선박, 열차라 하더라도 결국 사람이 운전한다. 큰 것도 사람이 운전하고 작은 것도 사람이 운전한다. 어떤 사람이 운전하느냐에 따라 사고가 발생한다. 이렇게 본다면 운전하는 사람에 따라 승객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까?

 

자신이 운전하면 살펴 가며 운전할 수 있다. 내가 신호를 지키더라도 상대방이 신호를 무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까지 감안하여 방어운전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에게 맡겼을 때는 불가능하다. 오로지 운전하는 자의 손에 달렸기 때문이다.

 

운전자가 술에 취해 운전한다면 나의 목숨은 불안하다. 또 운전경력이 짧아 경험부족이라면 역시 나의 목숨은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 보다 운전경험이 맞고 더구나 안전거리를 확보하면서 방어운전을 한다면 믿어도 좋다. 그렇다면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삶에서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까?

 

마하야나 보살사상의 원형

 

숫따니빠따에 나룻배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마하야나의 보살사상의 원형이라 보여지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Yathāpi nāva dahamāruhitvā
Piyena'rittena sama
gibhūto,
So t
āraye tattha bahūpi aññe
Tatr
ūpāyaññū kusalo mutīmā.

 

현명한 자가 튼튼한 나룻배에 올라서

노와 키를 장착하고,

그 도구에 대하여 잘 알고 잘 다룬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을 태워서 건네줄 수 있는 것과 같이, (stn321)

 

(Dhamma (nāvā) sutta-나룻배의 경, 숫따니빠따 Sn2.8, 전재성님역)

 

 

거센 강물을 건너려면 배를 타야 한다. 배에 타면 나의 운명은 전적으로 배를 운전하는 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운전자가 운전미숙으로 인하여 돌발상황에 대처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거센 풍랑이 일어 배가 전복될 위기에 처했을 때 승객들은 오로지 운전자만 바라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운전자가 경험도 없고 더구나 법규도 지키지 않아 내키는 대로 운전한다면 승객들은 불안해 할 것이다.

 

경에서 현명한 자를 언급하였다. 그런 현명한 자는 나룻배를 운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를 말한다. 그래서 그가 노와 키를 잡으면 승객을 저언덕으로 안전하게 건너게 해 줄 수 있음을 말한다.

 

운전기사가 졸았는데

 

2007년 남해 연화사로 순례법회 (관세음보살찾아 삼만리..  남해바다 연화사와 보덕암) 갔었다. 거리가 멀어 무박2일 일정으로 갔었다. 토요일 저녁에 버스로 출발하여 새벽에 통영에 도착하고, 토영에서 배를 타고 연화도 연화사에 들어 가는 일정이었다. 그래서 전세버스로 서울에서 늦은 밤에 출발하여 새벽까지 이동하였다.

 

나중에 안사실이지만 야간이동 중에 어느 법우님은 공포의 시간을 보냈다고 하였다. 운전자가 운행중에 자꾸 졸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숨도 자지 못하고 운전기사가 운전을 잘 하는지에 대하여 지켜 보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모르는 법우님들은 운전기사를 믿고 잠을 잔 것이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 다시는 무박2일 일정을 가지 않았다.

 

버스운전자가 졸음운전을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대형사고로 이어질 것이다.것이다. 만일 비행기나 큰 배를 운전하는 자가 졸음운행한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승객은 웃고 떠들고 잠을 청한다. 인생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나룻배의 노와 키를 잡은 자

 

흔히 인생을 길 또는 바다로 표현 한다. 그래서 인생길 또는 인생항로라 한다. 마치 길을 나그네와 같은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런 인생항로에서 배를 탓다면 전적으로 배를 운행하는 자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Evampi yo vedagū bhāvitatto
Bahussuto hoti avedhadhammo,
So kho pare nijjhapaye paj
āna
Sot
āvadhānūpanīsūpanne.

 

지혜에 통달하고 자신을 수양하고 많은 것을 배워

동요하지 않는 성품을 가진 사람은,

가르침을 귀를 기울이고 따르려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깨우칠 수 있다. (stn322)

 

(Dhamma (nāvā) sutta-나룻배의 경, 숫따니빠따 Sn2.8, 전재성님역)

 

 

나룻배의 노와 키를 잡은 자는 현명해야 함을 말한다. 수양이 잘 되어 있고 지혜를 갖추고 있어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를 말한다. 그런 자를 믿고 따르면 이 거센 물결을 건널 수 있음을 말한다.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건질 수 없다

 

여기 물에 빠진 자가 있다.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자를 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영도 못하는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건져 낼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 대하여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athā naro āpaga otaritvā
Mahodaka
1 salila sīghasota,
So vuyham
āno anusotagāmi
Ki
so pare pakkati tārayetu.

 

마치 사람이 물이 넘치고, 홍수가 져서,

물결이 거센 강에 빠지면,

그 물결에 휩쓸려 떠 내려가는 것과 같다.

그런 이가 어찌 남을 건네 줄 수 있겠는가. (stn319)

 

(Dhamma (nāvā) sutta-나룻배의 경, 숫따니빠따 Sn2.8, 전재성님역)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할 수 없다. 수영도 못하는 자가 물에 들어가 보았자 함께 물귀신이 될 것이다. 또 장비도 갖추지 못하고 물에 들어가 보았자 함께 휩쓸려 떠 내려 갈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그런 이가 어찌 남을 건네 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그렇다면 물에 빠진 자를 어떻게 구해 낼 수 있을까?

 

구원을 바라는 자에게

 

물에 빠져 허우적 대는 자는 인생에 있어서 생과 사의 기로에 있는 자와 같다. 학인 우빠시바가 사끼야시여,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저는 커다란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없습니다.(stn1099)”라고 말하였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인생의 험한 바다를 건너 저 언덕에 도달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빠시바는 제가 의지해서 이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있도록 의지처를 가르쳐 주십시요.(stn1069)”라고 말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질문을 하고 있는 우빠시바가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부처님으로부터 만족할 만한 답을 바라는 것이다.

 

이때 부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생사의 기로에서 한마디를 듣고 싶어 하는 듯한 우빠시바에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Ākiñcañña pekkhamāno satimā,

Natthīti nissāya tarassu ogha;

Kāme pahāya virato kathāhi,

tahakkhaya nattamahābhipassa

 

우빠씨바여, 새김을 확립하여 아무 것도 없는 경지를 지각하면서,

나아가 ‘없다’에 의존하여 거센 물결을 건너십시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의혹에서 벗어나

갈애의 소멸을 밤낮으로 살펴보십시오. (stn1070)

 

(Upasivasutta-우빠시바의 질문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n5.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생사의 기로에 처해 있는 듯한 우빠시바에게 가장 먼저 알아차림(sati)’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어서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대하여 말씀 하신다. 이는 무소유처를 말한다. 바라문이 무소유처의 경지에 도달했지만 그 이상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라 한다. 그 이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알 수 있다. ‘갈애의 소멸(tahakkhaya)’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nibbana)을 뜻한다. 이렇게 부처님은 구원을 바라는 자에게 상세하게 일러 주신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자를 구원할 수 없다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생이라는 거센 물살에 빠진 자가 있다. 그를 누가 구해 낼 수 있을까? 나룻배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Tathecha dhamma avibhāvayitvā
Bahussut
āna anisāmayattha,
Saya
ajāna avītiṇṇakakho
Ki
so pare sakkati nijjhāpetu.

 

마찬가지로 가르침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많이 배운 사람에게서 그 의미를 경청하지 않으면,

스스로도 모르고 의심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가 어찌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 (stn320)

 

(Dhamma (nāvā) sutta-나룻배의 경, 숫따니빠따 Sn2.8, 전재성님역)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해 내지 못하듯이 가르침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는 자는 남을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 자는 어떤 자인가? 경에 따르면 가르침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자라 하였다. 아마도 가르침을 거꾸로 이해하는 자도 해당될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라 하였다. 그러나 거꾸로 이해하는자는 상, , , 정이라 할 것이다. 또 의심이 많은 자는 사쌍팔배의 성자들은 진짜 존재할까?”라든가  열반은 성취가능한 것일까?”라고 의심한다. 이렇게 의심을 하는 한 결코 가르침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자를 구원할 수 없다. 마치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할 수 없는 이치와 똑 같은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 스스로도 모르고 의심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가 어찌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 (stn320)”라 하였다.

 

남이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모든 사고는 순간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이 순간이 지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교통법규를 잘 지켜도 상대방이 어기면 사고가 발생한다.

 

운전할 때는 방어운전뿐만 아니라 예측운전도 해야 한다. 이런 저런 상황을 가정하고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히지만 아무리 방어하고 예측을 한다고 하여도 상대방이 법규를 지키지 않으면 소용없다. 더구나 상대방이 취중에 운전한다거나 졸음운전을 할 경우 피해를 당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다.

 

흔히 하는 말 중에 내가 남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만, 남이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남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이다. 물에 빠진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해낼 수 없고,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자를 구원할 수 없듯이 남이 나의 안전을 남이 책임 져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디에 의지해야 할까?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다. 가르침과 자신에 의지하라고 하였다. 결국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은 가르침과 자기자신 밖에 없다.

 

 

Attadīpā bhikkhave,

viharatha attasaraā

anaññasaraā.

Dhammadīpā dhammasaraā

anaññasaraā.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S22:43)”

 

 

 

2014-04-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