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어라이징(Arising)과 비잉(Being), 불교는 왜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24. 16:32

 

 

어라이징(Arising)과 비잉(Being), 불교는 왜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일까?

 

 

 

모처럼 기억에 남는 프로

 

오늘날 TV를 보면 온갖 자극적인 화면으로 넘쳐난다. 어느 채널을 돌려도 먹거리프로가 대표적이다. 단지 눈으로 보는 것임에도 말로써 정말 맛있다라거나, 엄지손가락을 올리면서 최고로 맛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먹거리 볼거리로 넘쳐 나는 TV에서 모처럼 기억에 남는 프로를 보았다. EBS에서 심야시간대에 방영된 명사로세상을보는서양인,동사로세상을보는동양인(2014-04-15)’이라는 프로이다.

 

명사로세상을보는서양인,동사로세상을보는동양인를 다시 보았다. 인터넷 검색결과 EBS에서 2009 10 7일에도 방영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이 프로에 대한 동영상은 널리 퍼져 있다.

 

확연히 차이 나는 사고방식

 

프로에서 본 것은 동양인과 서양인의 사고방식이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집합과 일체이다. 이에 대하여 나레이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양인은 사물의 개체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전체라는 개념도 서양인에게는 개체들이 모여서 집합(collection)의 의미이다. 그러나 동양인에게 있어서 전체란 개체성이 없는 하나의 덩어리와도 같은 상태 즉, 일체(one-ness)의 상태를 의미한다.

 

(명사로세상을보는서양인,동사로세상을보는동양인)

 

 

서양인들은 개체성을 중시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개체가 모여서 된 전체도 개체들이 모여서 된 집합의 의미라 한다. 개인과 개성을 존중하는 서양인의 사고방식이다. 반면 동양인은 일체를 중시한다고 하였다. 개체가 여럿 모여 집합이 되었을 때 이를 하나의 개념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라 하였을 때 서양인에게는 집합(collection)’으로 보고, 동양인은 일체(one-ness)’로 본다고 하였다.

 

명사중심과 동사중심

 

그렇다면 서양인들은 왜 집합으로 보고, 동양인들은 일체로 보는 것일까?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서양과 동양인의 사고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라 한다. 그 가장 큰 이유로서 언어사용을 들 수 있다. 흔히 잘 알려진 대로 서양인은 명사중심이고, 동양인은 동사중심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나레이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시다라는 언어차이에서도 동서양의 차이가 나타난다. 서양인 더 마실 것을 물을 때 차라는 명사를 사용하여 “More Tea?”라고 묻는다. 그러나 동양인은 마시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더 마실래?”라고 묻는다. 마시다라는 동사는 사람과 차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표현 한다. 그러나 사람과 차가 서로 독립된 개체라고 믿는 서양에서는 라는 명사를 통하여 질문의 의미를 표현한다.

 

(명사로세상을보는서양인,동사로세상을보는동양인)

 

 

언어 사용에 있어서 서양인과 동양인이 결정적으로 차이가 난다. 이는 비행기를 타보면 알 수 있다. 비행기를 타면 기내식이 나온다. 커피를 마실 경우 외국인 승무원은 반드시 ““More Tea?”라고 묻는다. “커피 더 드실래요?”라는 말이다. Tea라는 명사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점이 서양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내에서 한국승무원이 커피를 권할 때 더 드실래요?”라고 말할 것이다. 프로에 따르면 동사위주의 언어사용은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서양인과 동양인의 행복관

 

프로에서는 서양과 동양의 사고 방식의 차이에 대하여 인터뷰형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행복한 표정이 있다. 유튜브 동영상에 올려진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양인은 분리해서 보려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i-TAeREgeZ8

 

 

 

 

 

그림을 보면 중앙에 있는 사람이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활짝 웃고 있어서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화난 표정, 슬픈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에 있는 사람은 행복할까? 이에 대하여 질문자는 서양인에게 “Is this person look happy?(가운데 있는 사람은 행복해 보이나요?)”라고 묻는다. 그러자 대부분 서양인들은 행복해 보인다고 한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불행해 보임에도 서양인은 왜 행복해 보인다고 할까? 이에 대하여 북미사람들은 그림속의 중심인물에만 초점을 맞춰 관찰하는 경향이 있다. 뒤 배경의 화만 표정이나 슬픈표정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반면 동양사람들은 자신이 아무리 행복하다고 하더라도 주변사람이 불행하면 자신도 행복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관계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관계성을 중시하는 동양에서는 주변이 불행하면 자신도 불행하다고 보고, 주변이 행복하면 자신은 더욱 더 행복하다고 보는 것이다.

 

서양인과 동양인의 행복관은 다르다. 이렇게 본다면 행복은 상대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막연하게 행복만을 이야기한다면 그 행복이 어떤 행복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불교의 목적에 대하여 단지행복이라거나 이고득락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한송이 꽃을 보고 있을 때

 

관계성을 중시하는 동양에서는 모든 것이 주변과 연계 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일까 프로에서는 서정주의 국화옆에서 시를 소개하고 있다. 시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서정주)

 

 

지금 한송이 꽃을 보고 있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단지 아름답다라는 느낌만 든다면 서양인 사고방식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송이 국화꽃이 피기 위해서는 봄 여름 가을 등 계절이 등장한다. 그리고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치고, 무서리가 내린다. 이렇게 온갖 자연의 조화에 의하여 마침내 한송이 꽃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화는 스스로 혼자 핀 것이 아니다. 주변환경과의 관계성에 의하여 꽃을 피워낸 것이다.

 

수 많은 원인에 대한 결과물로서

 

서양에서는 명사를 중시한다고 하였다. 반면 동양에서는 동사를 중시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개체성을 중시하는 서양에서는 명사를 사용하고, 관계성을 중시하는 동양에서는 동사를 사용한다. 서양에서는 명사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동양에서는 동사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사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관계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프로에서는 관계성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놀랍게도 연기법을 소개 하였다. 그래서 나레이터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인과관계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진다라고 하였다. 사물이 수 많은 원인에 대한 결과물로서 생겨나는 존재라는 뜻으로 연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연기법을 자막으로 내 보내고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잡아함경)

 

 

잡아함경을 근거로 하여 연기정형구를 소개 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연기정형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드믈 것이다. 불교인들도 잘 모르는 연기에 대하여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에서 연기정형구를 내 보내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프로에서 동양의 관계성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연기정형구를 소개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본다면 동양인 들의 동사사용은 연기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어라이징(Arising)과 비잉(Being)

 

프로에서는 시종 서양인과 동양인의 사고방식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명사와 동사, 관계성에 이어 이번에는 존재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존재에 대한 서양인과 동양인의 생각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나레이터의 설명을 녹취하였다.

 

 

연기는 영어로 어라이징(Arising)’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모든 존재를 비잉(Being)’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고정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동양의 어라이징은 생겨난다는 뜻으로 동사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서양의 비잉은 존재한다는 뜻으로 고정적인 의미이다. 여기에서도 사물을 바라보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명사로세상을보는서양인,동사로세상을보는동양인)

 

 

설명에 따르면 존재에 대하여 동양에서는 어라이징(Arising)’개념이라 하였고, 반면 서양에서는 비잉(Being)’개념이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존재론에 대한 것이다. 이 프로의 하이라이트라 보여진다. 그렇다면 연기법과 존재론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미 원리로서 확정 되어 있는 연기법

 

부처님은 연기법을 발견하였다. 부처님이 연기법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에서는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S12:20)”라고 되어 있다. 연기법은 부처가 출현하든 하지 않든 이미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는 법(dhamma)라는 것이다.

 

연기법을 발견한 자를 부처라 한다. 상윳따니까야에서는 과거칠불이라 하여 모두 일곱분의 부처님이 소개 되어 있다. 모두 연기법을 발견하여 부처가 된 것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가 된다는 것은 바로 연기법을 발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

 

그런데 연기법은 철저하게 관계성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상호의존발생과 조건발생으로 설명된다. 이런 연기법을 제대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정형구가 될 것이다.

 

 

imasmi sati ida hoti.                이마스밍 사띠 이당 호띠

Imassuppādā ida uppajjati.            이맛숩빠다 이당 웁빳자띠

Imasmi asati ida na hoti.            이마스밍 아사띠 이당 나 호띠

Imassa nirodhā ida nirujjhati.        이맛사 니로다 이당 니룻자띠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若有此卽有彼)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若生此卽生彼)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若無此卽無彼)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若無此卽滅彼)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구절은 상호의존적 연기를 말하고,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구절은 조건발생적 연기를 말한다. 그래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若有此卽有彼)”라는 구절은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S21.65)”처럼, 식과 명색이 상호의존하여 발생함을 말한다.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若生此卽生彼)”라는 말은 조건발생연기로서,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S21.65)”와 같이 십이연기 정형구로 설명된다. 그래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연기의 정형구는 상호의존연기와 조건발생연기 모두를 만족한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이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논파

 

상호의존과 조건발생으로 설명되는 연기법에서 존재론은 설자리가 없다. 어느 것도 연기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으로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논파하였다.

 

그런데 명사 중심의 서양의 사고 방식은 철저하게 존재론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비잉(Being)’으로 설명된다. 비잉(Being)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를 뜻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존재론을 부정한다. 연기의 법칙으로 보았을 때 스스로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양인들은 만물에 대하여 왜 존재론으로 볼까? 그것은 서양의 종교에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서양의 종교는 유일신교로서 창조주를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창조주가 만물을 만들어 냈다고 보기 때문에 존재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연기법에 따르면 창조론은 설자리가 없다. 어느 것 하나 관계속에서 상호의존과 조건발생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깟짜야나곳따경에서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라 하였다.

 

존재론에 입각한 번역을 보면

 

연기적 관계성으로 보았을 때 절대로 있다존재론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초기불교 번역을 보면 존재론에 입각한 번역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Ya bhikkhave, natthisammata loke paṇḍitāna ahampi ta natthīti vadāmi.  Ya bhikkhave, atthisammata loke paṇḍitāna ahampi ta atthīti vadāmi.

 

비구들이여세상에서 현자들이 없다고 동의하는 것을 나도 역시 없다고 말한다세상에서 현자들이 있다고 동의하는 것을 나도 역시 있다고 말한다.

 

(Puppha sutta-꽃 경, 상윳따니까야 S22:94, 각묵스님역)

 

 

초불연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없다있다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빠알리어 ‘natthi’‘atthi’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번역이 문제가 될까? 그것은 다름아닌 존재론적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세상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긍정하고 계십니다

 

초불연의 경을 보면 비구들이여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그러한 물질()있다고 세상에서 현자들은 동의하며 나도 역시 있다고 말한다.”라 하였다. 이렇게 오온에 대하여 있다또는 없다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견해를 제시한다.

 

 

위의 꽃 경(S22:94)에서 보듯이 부처님께서는 세상{오온으로 구성된 고성제}이 분명히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세상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긍정하고 계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조건적으로(세상의 일어남을 볼 때에는) 있다()도 긍정하시고,

조건적으로(세상의 소멸을 볼 때에는) 없다()도 긍정하시며, 이것을

{''의 견해 = 바른 견해(정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 견해 = 바른 견해(정견)}, 용수가 중론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주장하듯이 무조건, 있다()도 부정하고, 무조건, 없다()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묵스님, 출처 : http://cafe.daum.net/chobul/1AoB/1109)

 

 

각묵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부처님이 세상에 있는 것은 있다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다고 하였다. 그래서 엄연히 보이는 세상에 대하여 세상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긍정하고 계십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존재론적인 번역이다.

 

빅쿠보디의 존재론적 번역 비판

 

존재론적인 번역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역자는 번역에서 여기서 인식론적으로 이다아니다를 사용하여 번역했으나 있다있지 않다로 바꾸어 존재론적으로 번역할 수 있음을 밝힌다.

 

Cdb.949에서 존재론적인 번역을 택하고 Cdb.1085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책 12:15의 경에서 이 가르침에 대한 중요한 보완적인 가르침을 제공한다. 세존은 모든 존재론적인  사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만 부정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깟짜야나곳따경’이 중도적인 가르침이 존재와 비존재의 정태적이고 실체론적인 개념을 몰아내는데 비해 여기서는 동일한 중도적인 가르침이 존재론적인 주제에 관한 결정론적인 견해를 화해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상한 과정으로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에 대한 긍정은 세계에는 실재론적 존재가 없다고 주장하는 환상가에 대한 답변이 될 것이다.

 

(atthīti natthīti에 대한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은 atthīti natthīti에 대하여 이다아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인식론적로 번역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있다있지 않다로 존재론적으로 번역한  빅쿠 보디의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CDB에서 빅쿠 보디의 설명에 따르면 세존은 모든 존재론적인  사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만 부정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무슨뜻일까? 경험가능한 것은 존재로 인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설령 그것이 연기적으로 무상하다고 할지라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 하는 것으로 본다.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빅쿠보디의 견해에 대하여 결정론적인 견해를 화해시키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결정론과 존재론에 바탕을 둔 서양의 데카르트적 사유와 화해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빅쿠보디의 견해에 따르면 오온은 실재하는 것이 된다. 비록 오온이 연기적 현상이라 하더라도 빅쿠보디의 존재론적 번역방식에 따르면 오온은 실체가 있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런 방식은 실재론적 존재가 없다고 주장하는 환상가에 대한 답변이 될 것이다라 하였다. 이는 무슨말일까? 예를 들어 유식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마음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유식에서는 이 세상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다만 환영처럼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오온에 대하여 실재성을 부여하면 환상가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가 됨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실재성 부여는 자칫하면 유아론으로 흐르기 쉽다.

 

존재론을 인정하게 되면

 

유아론은 무아론과 반대 되는 말이다. 자아, 개아, 영혼 등 실체가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나를 찾는 수행, 또는 존재의 근원을 찾는 수행으로 발전될 수 있다. 이렇게 존재의 근원을 찾다 보면 결국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궁극적 실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늘 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산정상론이다. 산으로 올라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만 결국 정상에서 모두 만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모든 종교가 궁극적 추구하는 진리는 모두 모두 같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다원주의자들은 존재의 근원을 궁극적 실재(Reality)’라 보고 있다. 그런데 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궁극적실재는그리스도, 브라흐만, 비로자나, 불성, 참나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궁극적실재에 열반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연기법에 따르면 그 어떤 실체도 인정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의 근원이나 궁극적 실재라고 할지라도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왜그럴까? 연기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온에 대하여 실체를 인정하는 듯한 빅쿠보디의 존재론적 번역방식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초불연에서는 이런 빅쿠 보디의 견해를 존중하여 atthīti natthīti에 대하여 있다없다로 존재론적으로 번역하였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조건적으로(세상의 일어남을 볼 때에는) 있다()도 긍정하시고라고 설명하였다.

 

각묵스님이있다없다라고 번역한 것은 존재론적 번역방식임에 틀림 없다. 또 존재론적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은 서양인인 빅쿠보디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 들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atthīti natthīti에 대하여 인식론적 번역과 존재론적 번역은 어떻게 차이가 있을까? 이를 비교해 보았다.

 

 

구 분

       (S22.94)

 

빠알리원문

Ya bhikkhave, natthisammata loke paṇḍitāna ahampi ta natthīti vadāmi.  Ya bhikkhave, atthisammata loke paṇḍitāna ahampi ta atthīti vadāmi.

‘Natthi’

‘atthi’

초불연

각묵스님역

비구들이여세상에서 현자들이 없다고 동의하는 것을 나도 역시 없다고 말한다세상에서 현자들이 있다고 동의하는 것을 나도 역시 있다고 말한다.

없다

있다

성전협

전재성님역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이 아니다리고 여기는 것은 나도 그것을 아니다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이 이다리고 여기는 것은 나도 그것을 이다라고 한다.

아니다

이다

CDB

빅쿠보디역

Of that which the wise in the world agree upon as not existing, I too say that it does not exist. And of that which the wise in the world agree upon as existing, I too say that it exists-

‘not existing’

‘existing’

 

 

 

표를 보면 ‘Natthi’‘atthi’에 대하여 번역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없다있다라고 번역한 것은 ()’()’로 설명되는 존재론적 번역의 대표적인 예이다. 빅쿠보디는 ‘Natthi’에 대하여 ‘not existing’이라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의 뜻으로 번역하였고, ‘atthi’에 대하여 ‘existing’이라 하여 존재하는 것이라 번역하였다.

 

있다이다의 차이는?

 

이런 존재론적 번역을 취하면 오온은 어떻게 설명될까? 경에서 물질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Form that is impermanent, suffering, and subject to change: this the wise in the world agree upon as existing, and I too say that it exists.

 

(빅쿠보디역, 존재론적 번역)

 

 

2) 비구들이여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그러한 물질() 있다고 세상에서 현자들은 동의하며 나도 역시 있다고 말한다

 

(각묵스님역, 존재론적 번역)

 

 

3)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현자들은 물질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 이다라고 여기는데 나도 그것을 이다라고 말한다.

 

(전재성님역, 인식론적 번역)

 

 

오온은 무상한 것이다. 제행무상이라 하여 어느 것 하나 예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존재론적으로 번역하면 물질은 있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존재하는 것의 뜻으로 existing이라 하였다. 초불연에서도 역시 무상하게 변하는 물질()있다라고 하여 존재론적으로 번역하였다. 반면 성전협에서는 무상하게 물질이 변화한다라 하여 인식론적으로 번역하였다.

 

불교는 인식론이에요

 

그렇다면 존재론과 인신론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설명해 놓은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조금 짚고 넘어 가야 될 것이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불교는 존재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인식론이에요. 존재는 그 것 자체가 하나의 실체를 가진 것을 말합니다.

 

사실 존재는 인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이 때의 인식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며 매 순간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으로 귀결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알면 무아를 알아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집착 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에 이르게 됩니다.

 

(묘원법사,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201210 29일자, 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 지금은 수행시대 - 위빠사나5:사대)

 

 

묘원법사에 따르면 불교는 존재론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일 불교가 존재론을 이야기 한다면 더 이상 불교라고 볼 수 없음을 말한다. 왜 그럴까? 불교는 존재의 근원을 밝히는 종교가 아니고 존재의 근원과 합일하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서 현상을 인식하고, 그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통찰하는 종교이다. 이렇게 실체없음을 강조하는무아의 가르침인 불교에서 존재론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넌센스라 볼 수 있다.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사유

 

그렇다면 존재론은 왜 나오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묘원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양철학은 존재론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 이야기 우리 많이 들어 보았을 거에요. 그러나 이러한 존재는 지극히 사변적인 것이에요. 존재의 실재는 인식을 통해서만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관념(개념)과 실재의 문제이에요. 몸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바로 지수화풍이라는 사대입니다.

 

몸을 존재로 보면 관념으로 보는 것이라서 몸이 가진 성품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인식으로 보면 몸이 가진 성품을 보아서 사물을 바르게 통찰 할 수가 있습니다.

 

(묘원법사,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2012 10 29일자, 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 지금은 수행시대 - 위빠사나5:사대)

 

 

묘원법사는 존재론은 서양철학의 산물이라 한다. 대표적으로 데카르트(1596-1650)를 들 수 있다고 하였다. 데카르트는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은 위키백과에 따르면 존재하지 않는 다면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의심하고, 의심하고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결국 존재하는 것이라 한다.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사유는 서양철학의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나 존재론적 사유로는 바른 성품을 볼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왜 그럴까? 사유는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생각에 그치는 개념일 뿐인 것이다.

 

개념(관념)으로 말하지 말고 느낌을 말하세요

 

개념으로는 실재를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아픈 느낌이 왔을 때 , 아프구나라고 느끼는 것은 아픔이라는 법이 실재 하는 것이다. 그러나 토끼의 뿔과 같은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개념 내지 관념인 것이다.

 

개념이나 관념으로는 성품을 올바로 볼 수 없다. 따라서 개념에 따른 존재론적 방식으로는 결코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을 실현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수행처에서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개념(관념)으로 말하지 말고 느낌을 말하세요라는 말이다.

 

좌선이나 경행 중에 일어 났던 현상을 인터뷰시간에 말한다. 그 때 사람들은  느낌에 대하여 말한다. 딱딱하다든가 부드럽다든가 뜨겁다든가 차갑다든가 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누군가 참나불성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참나나 불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 마하야나에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인식론에 바탕을 둔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한낱 우스개 소리 밖에 되지 않음을 말한다.

 

다원주의자들이 열반을 포함하지 않는 이유

 

불교에서는 존재론을 말하지 않는다. 존재론은 유일신교처럼 궁극적 실재를 가정하여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식론으로 말한다. 인식론은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모든 현상이 상호의존하고 조건발생함을 말한다. 그래서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통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통찰하였을 때 지혜가 생겨나고 괴로움에서 벗어남을 말한다. 그래서 결코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빅쿠 보디는 꽃의 경(S22.94)’에서 ‘Natthi’‘atthi’에 대하여 ‘not existing’‘existing’로서 존재론적으로 해석하였다. 빅쿠 보디의 견해를 존중하는 초불연에서도 없다있다라 하여 역시 존재론적으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이런 번역은 사실상 부분적으로 존재론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존재론적 사유는 결국 궁극적 실재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그 어떤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브라흐만, 비로자나, 불성, 참나 등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는 한 더 이상 불교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산의 정상론을 설명하면서 열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브라흐만, 비로자나, 불성, 참나 등이 궁극적 실재의 다른 이름이라 하지만 열반을  포함하지 않는 것은 불교가 무아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존재론은 궁극적 실재를 바탕으로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유아를 기반으로 한다. 브라만교의 브라만이 궁극적 실재이고, 아뜨만이 개아를 뜻하는 유아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부정하였다. 불교는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성립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궁극적 실재와 아뜨만을 부정한다. 그래서 불교는 연기법에 따른 열반을 추구한다. 이처럼 궁극적 실재와 유아를 비판하고 성립된 종교가 불교이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산정상론을 말하면서 열반에 대해서는 예외로 하는 것이다.

 

존재론에 근거한 유신견(有身見)

 

부처님은 존재에 실체가 없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것이 불교의 무아사상이다. 그래서 초기경전 도처에서 무아 즉, 실체가 없음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맛지마니까야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큰 경(M64)’에서 부처님은 존재에 실체가 없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그의 마음은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에 정복당하여 이미 생겨난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에서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이러한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가 굳어지고 제거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그에게 낮은 단계의 장애이다.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큰 경, M64)

 

 

불교에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첫번째 조건이 있다. 그것은 유신견을 타파하는 것이다. 그런 유신견은 존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유신견은 존재론을 바탕으로 한다. 이런 유신견이 있는 한 결코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존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 장애를 가진 것과 같다고 하였다.

 

존재론은 번뇌의 온상

 

부처님은 결코 존재론을 설하지 않았다. 존재론은 결국 나를 찾는 수행을 말하기 때문에 존재의 근원을 찾는 수행으로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존재의 근원을 찾다 보면 결국 이 세상은 영원한가?”라든가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등으로 의심하게 된다. 이런 의심은 한국의 간화선에서 이뭐꼬?”라 하여 장려 되지만 부처님은 번뇌의 온상으로 보았다. 모든 번뇌의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존재의 근원을 찾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고, 정신을 써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지 않음으로써,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번뇌가 성장한다.

 

그는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을 쓴다. -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 나는 미래세에 있을까? 나는 미래세에 없을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세에 어떻게 지낼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 또는 현세에 이것에 대해 의심한다 - 나는 있는가? 나는 없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을 쓰면, 여섯 가지 견해 가운데 하나의 견해가 생겨난다. ‘나의 자아는 있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나의 자아는 없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자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자아에 의해서 무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무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

 

또는 이와 같이 ‘나의 이 자아는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체험하는데, 그 나의 자아는 항상하고 항주하고 항존하는 것으로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는 견해가 생겨난다.

 

(모든 번뇌의 경, M2)

 

 

모든 번뇌의 경에 따르면 나를 찾는 수행 또는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에 대하여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는 것이라 하였다. 한마디로 쓸데 없는 짓을 한다와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궁극적실재나 존재의 근원, 참다운 나를 찾는 수행은 결국 자신을 얽어 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견해의 심취, 견해의 정글, 견해의 험로, 견해의 왜곡, 견해의 몸부림, 견해의 결박(M2)”이라 하였다. 이렇게 스스로 결박에 얾매이는 것에 대하여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M2)”라고 하였다.

 

왜 존재의 근원을 찾아서는 안되는가?

 

부처님은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말씀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말룽끼야뿟따경에서는 내가 왜 그것을 설명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유익하지 않고, 청정한 삶과는 관계가 없으며, 멀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멈추고 삼매에 들고 올바로 원만히 깨닫고 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M63)”라 하였다. 이렇게 부처님은 철저하게 존재의 근원을 찾는 것에 대하여 부정하였다. 따라서 존재론적으로 불교를 바라보는 것은 넌센스라 아니할 수 없다.

 

 

 

2014-04-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