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과거에 부처님들이 여럿 출현한 이유는? 정법(正法)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4. 5. 16. 09:53

 

과거에 부처님들이 여럿 출현한 이유는? 정법(正法)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불상 앞에서 비는 장면을 보면

 

몇 주전 기황후가 끝났다. 한 때 시청률 상위에 랭크 될 정도로 인기 있는 드라마 이었으나 갈수록 막장으로 치닫는 분위기가 되었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 전개, 매번 똑 같은 인물들의 등장에 식상하였다. 더구나 궁중암투와 죽고 죽이는 일 등이 다반사로 벌어져서 회가 거듭할수록 막장드라마가 되어 갔다. 그러다 세월호 참사 기간에 슬픈 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드라마 기황후에서 관심 있게 본 것이 있다. 그것은 불상에 절하는 장면이다. 궁중 법당에 불상이 모셔져 있는 불상 앞에 서 있는 장면을 보면 대부분 소원을 비는 장면이다. 이런 장면을 볼 때 부처님이 마치 유일신교의 신처럼 느껴졌다. 불상이 기도의 대상이 된 듯 하다. 그래서 이런 장면을 비불자들이 보았다면 틀림 없이 기독교의 아류 정도로 생각할 것임에 틀림 없다.

 

불자들이 절에 가면 법당 불상 앞에서 삼배를 한다. 그리고 바라는 소원을 간절히 염원한다. 대게 건강, 사업, 합격 등 개인적인 소원에 대한 것이다. 이쯤 되면 불교에서 부처님은 모든 소원을 다 들어 주는 절대자와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과연 부처님은 중생들의 소원이나 들어 주기에 위하여 출현한 것일까?

 

부처님이 오신 것인가 출현한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사월초파일에 대하여 부처님오신날이라 한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석가탄신일이라 하나 불자들은 대부분 부처님오신날이라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오신 것일까?

 

우리나라와 달리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는 부처님오신날에 대하여 웨삭데이라 한다. 그런데 웨삭데이는 탄생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탄생과 성도와 열반이렇게 세 가지 사건을 동시에 기념하는 날이다. 그래서 웨삭데이가 반드시 탄생만 기념하는 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 한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오셨다라기 보다 출현하였다는 말이 더 적합할 듯 하다. ‘오셨다출현하였다라는 말은 뉘앙스가 다르다. ‘오셨다라는 말은 어디에서인가 왔다라는 말이다. 어디선가 왔다면 또 어디론가 갈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오셨다라는 말은 가셨다라는 말을 전제로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출현하였다라는 말은 갑자기 나타났다라는 말과 같다. 또 없는 곳에서 나타났다라는 뜻이 강하다. 마치 현생인류인 크로마뇽인이 출현하듯이.

 

잃어 버린 고리, 미싱링크(Missing Link)

 

인류사에 미싱링크(Missing Link)라는 것이 있다. 미싱링크는 잃어 버린 고리라는 뜻이다. 생물의 진화 계통을 사슬의 고리로 볼 때, 그 빠져 있는 부분으로 상정되는 미발견의 화석 생물을 이르는 말이다.

 

인류의 조상이 250만년 전까지 올라가지만 현생인류라 불리우는 크로마뇽인이 출현한 것은 불과 몇 만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현생인류와 10만년전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을 연결하는 고리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생인류인 크로마뇽인이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교과서에서는 크로마뇽인에 대하여 출현이라는 표현을 사용 한다. 이처럼 연결 고리 없이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출현이다.

 

초기불교적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은 오셨다라기 보다 출현하였다라는 말에 가깝다. 왜 그럴까? 그것은 기존 사상과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이라는 것이 기존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마치 없던 것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아날로그와 디지털로도 비교할 수 있다.

 

아날로그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

 

2000년을 전후하여 전세계적으로 큰 혁명이 있었다. 그것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환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날로그방식을 고집하던 사람들은 디지털시대에 적응 하기 힘들었다. 예를 들어 도스(DOS)’버전 캐드프로그램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 윈도우환경으로 버전이 바뀌었음에도 사용하던 도스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에서 디지털이라는 것은 아날로그 방식을 계승한 것이 아니다. 아날로그 방식을 깡그리 무시하고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한 것이 디지털 방식이다. 마치 도스환경에서 캐드를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윈도우 환경에서 는 무용지물이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도스전문가라 하더라도 윈도우 프로그램을 다루기 위해서는 다시 배워야 한다.

 

디지털 프로그램을 다루려면 처음부터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아날로그방식만을 고집하면 시대에 적응하는 사람이 되지도 못할 뿐더러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단절 되어 있다. 그래서 아날로그방식과 디지털방식은 근본적으로 공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계승이 아니라 완전히 단절이다

 

부처님의 출현은 마치 아날로그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 바뀐 것과 같다. 이는 다름 아닌 단절을 뜻한다. 계승이 아니라 완전히 단절 되는 것을 말한다. 완전히 새롭게 시작 하는 것이다. 이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출현이 마치 디지털시대에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기존 방식과 단절을 뜻한다. 기존사상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사상을 부수고 새롭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부처님가르침은 혁명적이었다. 마치 아날로그시대에 디지털시대로 바뀌면서 단절 되듯이 기존 사상과 단절이었다.

 

2600년전 인도에서 부처님이 출현하였다는 사실은 기존 사상과 단절을 뜻한다. 그 차이가 너무 커서 자신의 사상을 버리지 않으면 받아 들일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하느님(Brahma) 사함빠띠의 청원에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Kicchena me adhigata

halandāni pakāsitu,
R
āgadosaparetehi

nāya dhammo susambudho.

 

[세존]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차라리 설하지 말아야지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yācanasutta-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6.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사함빠띠하느님의 청원에 뭇삶들이 진리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 하였다. 세상에서는 탐진치로 살아 가지만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는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기 때문이다.

 

불사의 문으로 들어 가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를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어지는 게송에서 부처님은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Apārutā tesa1 amatassa dvārā ye sotavante pamuñcantu saddha, S6:1)”라고 하였다. 불사의 문으로 들어 가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사상을 버리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믿음이나 신조 등을 먼저 버려야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 들일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는 기존 사상과의 단절을 뜻한다. 마치 아날로그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 시대가 바뀔 때 프로그램이 단절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디지텉시대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아날로그 프로그램 대신 디지털 환경에 적합한 프로그램을 사용해야 하듯이,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 역시 기존 사상이나 신념, 신조, 신앙이 남아 있는 한 받아 들일 수 없다. 깨끗이 비워 내고 제로베이스에서 새로 시작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ye sotavante pamuñcantu saddha)”라 한 것이다.

 

과거부처님들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기존사상과 단절을 뜻하는 부처님의 진리는 어떤 것일까? 그리고 부처가 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의문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명쾌하게 설명되어 있다. 상윳따니까야 2권에 있는 인연상윳따(Nidāna Sayutta, S12)’가 그것이다.

 

인연상윳따는 연기에 대한 가르침이다. 9개품에 무려 390페이지에 달한다. 이렇게 방대하게 설명 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연기에 대한 가르침이 이해 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연기에 대하여 현자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인연상윳따 시작 부분에서는 과거불이 언급되어 있다. 이렇게 초반에 과거불이 언급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해제글을 보면 고따마붓다를 비롯한 과거불들이 모두 연기법을 깨달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일련의 경으로 시작한다(12:4-10)”라고 설명 되어 있다. 과거에 출현한 부처님들이 깨달은 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이라는 것이다.

 

일곱 분의 과거불이 깨달은 것이 모두 연기법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한 이유는 분명하다. 괴로움을 소멸하고 윤회를 종식시키기 위해서이다. 그 방법이 바로 연기법이다. 이런 연기법을 과거 부처님이 발견하였다. 이 연기법을 발견함으로서 부처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불이 깨달은 연기법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신 비빳씬 부처님께서 예전에 아직 올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새김을 확립하여 이와 같이 생각했다.

 

'이 세상은 곤란함에 빠져 있다. 태어나고 늙고 죽고 사멸하고 다시 태어나면서도 그러한 늙고 죽음이라는 괴로움에서의 벗어남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 참으로 언제 그러한 늙음과 죽음의 괴로움에서의 벗어남을 알겠는가?'

 

(Vipassisutta-비빳씬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4, 전재성님역)

 

 

과거칠불 중에서 가장 먼저 위빳시붓다가 등장한다. 61겁전에 위빳시붓다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경에 따르면 연기법이다. 구체적으로 십이연기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인연상윳따에서는 과거칠불이 깨달았던 내용을 차례로 소개 하고 있다. 그런데 경을 보면 일곱분이 깨달았던 내용이 모두 똑 같다. 그래서 일곱개의 경이 있지만 사실상 이름만 달리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 과거에 출현하였던 모든 부처님들이 깨달았던 내용은 한결 같이 똑같은 내용임을 말한다. 이는 경에서 정형구로 표현 되어 있다. 동일한 문장을 놓고 과거불의 이름만 바뀌어져 있는 형태이다.

 

과거칠불을 보면

 

초기경전에서는 모두 일곱분의 과거불이 소개 되고 있다. 고따마붓다 이전에 출현하였던 과거6불과 고따마붓다를 말한다. 이들 과거칠불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았다. 이에 대하여 경전을 근거로 하여 표를 만들었다.  

 

 

과거칠불

출현시기

출신

성씨

수명

위빠시(Vipassī)

91겁전

왕족

꼰당냐

팔만 세

시키(Sikhī)

31겁전

왕족

꼰당냐

칠만 세

웻사부(Vessabhū)

31겁전

왕족

꼰당냐

육만 세

까꾸산다(Kakusandha)

현겁

바라문

깟사빠

사만 세

꼬나가마나(Koāgamana)

현겁

바라문

깟사빠

삼만 세

깟사빠(Kassapa)

현겁

바라문

깟사빠

이만 세

고따마(Gotama)

현겁

왕족

고따마

백 세 안팍

 

 

 

이표는 이전에 스리랑카는 마음의 고향(2014-01-02)’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에서 가져 온 것이다. 또 위 표는 디가니까야 비유의 큰 경(D14)’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표에서 모두 일곱분의 과거불이 소개 되어 있다. 고따마붓다 역시 과거불에 해당 된다. 그러나 경에서는 부처님이 과거불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표를 보면 가장 먼저 출현한 부처님이 위빠시(Vipassī)붓다이다. 무려 91겁전에 출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어서 31겁전에 시키(Sikhī)붓다, 역시 31겁전에 웻사부(Vessabhū)붓다가 드문드문 출현하였다. 이후 현겁에 이르러 까꾸산다(Kakusandha)붓다, 꼬나가마나(Koāgamana)붓다, 깟사빠(Kassapa)붓다, 고따마(Gotama)붓다 이렇게 네 분의 부처님이 연달아 출현하였다. 그래서 현겁에 대하여 행운의 겁이라 한다.

 

비유의 큰 경(D14)’에 따르면 과거부처님들의 모든 것이 다 설명 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출신은 무엇이고, 성씨와 수명 등이 소개 되어 있다. 심지어 어느 나무에서 깨달았는지, 상수제자와 시자는 누구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밝혀 놓았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과거칠불

보리수

상수제자

시자

위빠시

(Vipassī)

빠딸리

ali

칸다와 띳사

khaṇḍatissa

아소까

asoka

시키

(Sikhī)

뿐다리까

puṇḍarīka

아비부와 삼바와

abhibhūsambhava

케망까라

khemakara

웻사부

(Vessabhū)

살라

sāla

소나와 웃따라

souttara

우빠산따

upasanta

까꾸산다

(Kakusandha)

시리사

sirīsa

비두라와 산지와

vidhurasañjīva

붓디자

buddhija

꼬나가마나

(Koāgamana)

우둠바라

udumbara

바이요사와 웃따라

bhiyyosuttara

솟티자

sotthija

깟사빠

(Kassapa)

니그로다

nigrodha

띳사와 바라드와자

tissabhāradvāja

샅바밋따

sabbamitta

고따마

(Gotama)

앗삿타

assattha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sāriputtamoggallāna

아난다

ānanda

 

 

위 두 표를 보면 과거칠불에 대한 대강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더 많은 것이 표현 되어 있으나 생략하였다. 그런데 경을 보면 과거칠불에게 공통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행적이 똑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따마붓다의 행적과 정확하게 일치 한다. 그러다 보니 깨달음 역시 똑 같다. 과거부처님들은 모두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된 것이다.

 

과거부처님들이 깨달은 연기법은 이미 원리로서 확정 되어 있는 법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S12.20)”이라 하였다. 이처럼 자연의 이법으로서 이미 확정 되어 있는 진리에 대하여 과거부처님들이 출현하여 발견한 것이다.

 

과거에 28분이 부처님이 출현하였는데

 

기록에 따르면 지금까지 출현한 부처님은 모두 28불이라 한다. 니까야에서는 칠불까지만 표시 되어 있지만 주석서에 따르면 25불까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인터넷검색을 하면 과거에 출현한 부처님은 모두 28불이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No

과거부처님

출현

비고

1

Tahakara

딴한까라

 

 

2

Medhakara

메단까라

3

Saraakara

사라난까라

4

Dīpankara

디빵까라

燃燈佛

5

Koṇḍañña

꼰단냐

6

Magala

망갈라

7

Sumana

수마나

8

Revata

레와따

9

Sobhita

소비따

10

Anomadassi

아노마닷시

11

Paduma

빠두마

12

Nārada

나라다

13

Padumuttara

빠두뭇따라

14

Sumedha

수메다

15

Sujāta

수자따

16

Piyadassi

삐야닷시

17

Atthadassi

앗타닷시

18

Dhammadassī

담마닷시

19

Siddhattha

시닷타

20

Tissa

띳사

21

Phussa

풋사

22

Vipassī

위빠시

91겁전

과거칠불

23

Sikhī

시키

31겁전

과거칠불

24

Vessabhū

웻사부

31겁전

과거칠불

25

Kakusandha

까꾸산다

현겁

과거칠불

26

Koāgamana

꼬나가마나

현겁

과거칠불

27

Kassapa

깟사빠

현겁

과거칠불

28

Gautama

고따마

현겁

과거칠불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the_twenty-eight_Buddhas

 

  

 

디빵까라붓다(燃燈佛)와 수메다존자

 

과거 28불의 명단에서 네 번째 디빵까라(Dīpankara)’붓다가 있다. 금강경에 등장하는 연등불(燃燈佛)의이다. 금강경 장엄정토분에서 如來在燃燈佛所於法實無所得(여래재연등불소어법실무득)’라는 구절이 있다. “여래가 옛적에 연등(燃燈)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었더냐?”라는 내용이다. 이때 연등불이 표에서 네 번째에 해당되는 디빵까라붓다이다.

 

그러나 연등불이 언제 출현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아득한 과거에 출현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마도 우주가 성주괴공을 수 없이 되풀이 하였을 먼 과거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수메다(Sumeda)라는 수행자가 디빵까라부처로부터 먼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예언)를 받았다는 이야기기 전해져 온다.

 

이런 수기이야기와 함께 전해져 오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수메다존자가 물웅덩이에 몸을 던져 디빵까라붓다가 자신의 몸을 밝고 지나가게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땅바닥에 던진 것에 대하여 오늘날 티벳불교에서의 전체투지(全體投地)’의 시초로 보고 있다.

 

 

 

디빵까라붓다(연등불)을 맞이 하여 물웅덩이에 전체투지(全體投地)하는 수메다존자

Ascetic Sumedha and Dipankara Buddha

 

 

왜 여러 부처들이 출현하였을까?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부처님이 여러 분 출현하였을까?”에 대한 것이다. 만일 과거칠불 중에 가장 먼저 거론 된 61겁 전의 위빠시붓다의 정법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될까? 굳이 다음 부처가 출현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붓다가 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위빠시붓다는 61겁전에 출현하였다. 그런데 30겁이나 지난 후인 31겁전에 시키붓다가 출현하였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는 정법이 도중에 사라졌음을 뜻한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정법이 사라져 정법시대가 끝났기 때문에 한량 없는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부처가 출현한 것이다.

 

정법이 머무는 기간이 짧다고 한다. 고따마붓다가 출현한 이래 이제 2600년이 흘렀지만 정법은 살아 있다. 그러나 앞으로 만년, 십만년 후에도 정법이 살아 있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백만년후에 또는 천만년 후에도 정법이 계속 유지되고 있으라고 볼 수 있을까? 한량 없는 과거에 무수한 부처님이 출현한 이유는 도중에 정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법이 변질되어 사라진 것이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 현상에 대하여 무상--무아라 하였으나, 후대에 이를 정반대로 해석하여 ---이라 한다면 정법이 사라진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제대로 전승되지 않고 도중에 변질이 되어 사라진 것이다.

 

정법이 사라진 시대는 암흑시대이다. 그런데 부처가 드문드문 출현하였다는 사실은 암흑속에서 잠깐 일시적으로 반짝 불빛이 보이는 것 같다. 마치 깜박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정법이다. 그런 정법은 항상 원리로서 이미 확정 되어 있는 진리이다. 또 정법은 부처가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항상하고 안정적이고 불변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부처가 출현하였다는 것은 정법을 발견하였다는 말과 같다. .

 

부처님이 발견한 아름다운 고대도시

 

아득한 영겁의 시간속에서 불빛이 점멸하듯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정법이다. 정법시대가 오래 지속 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가 출현하였다는 것은 정법시대가 다시 시작 되었음을 뜻한다. 이런 정법을 발견하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아름다운 고대도시의 비유를 들고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광야의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가다가 정원을 갖추고 원림을 갖추고 연못을 갖추고 제방을 갖추고 분위기가 좋은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옛 성과 옛 도시를 발견했다면, 그때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왕이나 왕의 대신들에게 ‘왕이시여, 마땅히 아셔야 합니다. 저는 광야의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가다가 정원을 갖추고 원림을 갖추고 연못을 갖추고 제방을 갖추고 분위기가 좋은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옛 성과 옛 도시를 발견했습니다. 왕이시여, 그 도시를 다시 세우십시오.’라고 권유 했을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왕이나 왕의 대신들이 그 도시를 다시 세웠다면, 그 도시가 나중에 번영하고 부유해지고 사람들이 몰리고 인구가 많아져서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전생의 올바로 깨달은 분들이 거닐던 옛 성과 옛 거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승들이여, 전생에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들이 거닐던 그 옛 길과 옛 거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이것이 수행승들이여, 과거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들이 거닐던 그 옛 길과 옛 거리이다.

 

(나가라경-Nagarasutta-도시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65(7-5),전재성님역)

 

 

 

 

 

 

 

 

 

 

 

 

 

 

 

 

나란다(Naranda)

주석에 따르면 도시의 경(s12.65)’에 묘사 되어 있는 도시는

나란다(Naranda)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사진 ; 현장법사 방문 당시 나란다 전경을 묘사한 것임

사진출처: 玄奘大師 3/3 —在線觀看佛學視頻網

 

 

나그네가 길을 걷다가 우연하게 아름다운 고대도시를 발견한다. 여기서 나그네는 부처님을 말하고 아름다운 고대도시는 열반을 말한다. 이렇게 고대도시를 발견한 부처님은 안내자로서 부처님이다. 그래서 자신의 말대로 그 길을 죽 따라 가면 아름다운 고대도시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 도시에 이르는 방법, 즉 열반에 이르는 방법은 다름 아닌 팔정도라 한다.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짧다

 

붓다가 출현하여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극히 짧다고 한다. 공백기간은 한량없이 길고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짧기 때문에 영겁의 시간속에서 본다면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순간적인 깜박임에 지나지 않는다.

 

정법이 사라졌다는 것은 암흑이나 다름 없다. 그런 암흑시대가 한량 없이 계속 된다. 그러다가 누군가 연기법을 발견한다. 마치 나그네가 우연히 길을 걷다가 아름다운 고대도시를 발견하듯이 과거 부처님들이 깨달았던 연기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연기법을 발견하였을 때 부처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부처가 출현할 때 나타나는 징조

 

부처가 출현하였다는 것은 커다란 사건이다. 이에 대하여 초기경에서는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일이라 하였다. 그래서 보살이 입태 하였을 때와 보살이 태어났을 때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M123, D14)”라 하였다. 이처럼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난 것은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렸을 때도 나타났다. 이처럼 부처의 출현은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이다. 이런 감격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아난다]

 

세존이시여, 저는 ‘아난다여, 보살이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 무리에서 죽어서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었을 때에, 신들의 세계에, 악마들의 세계에, 하느님들의 세계에, 성직자들과 수행자들의 후예 가운데에,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의 세계에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달도 태양도 그와 같은 커다란 신통력 그와 같은 커다란 위신력으로도 빛을 비출 수 없는, 어둡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캄캄한 심연의 감추어진 세계에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Acchariyabbhutta Sutta , 맛지마니까야 M123, 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M23)”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S56.11)”이라는 표현과 일치한다.

 

이렇게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할 때는 광대한 빛이 나타난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신들을 능가하는 광대하고 무량한 빛은 1)부처님이 모태에 들 때, 2) 부처님이 태어날 때, 3)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릴 때 이렇게 세 가지 경우에 나타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가 출현할 때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광대한 빛이 나타난다는 것에 대하여 회의론자들은 허구라 할지 모른다. 누군가 후대에 소설을 썼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경에서 부처가 출현할 때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이 나는 것은 구원에 대한 표현이라 보여진다.

 

신들은 왜 환희 하였을까?  

 

정법이 사라졌을 때는 오로지 선정수행만 있었다. 그래서 선정수행으로 올라 갈수 있는 최고의 경지는 비상비비상처정이다. 그래서 84천겁이라는 한량없는 수명이 보장 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명과 복이 다하면 아래 세상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아무리 높은 경지에 해당되는 선정수행을 하였어도 윤회 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가 출현하였다는 것은 윤회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아는 신들이 가장 반겼을지 모른다.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꼰단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 하고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 S56.11)”라고 진리의 눈이 생겨났을 때 이런 사실을 가장 먼저 안 것은 땅의 신이었다.

 

부처님이 오비구에게 설법을 하고 있던 장소는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이다. 이곳에서 땅의 신 붐마데와(bhummā deva)’가 환희에 차 외쳤다. 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S56.11)”라고 소리쳤다. 이런 외침이 즉시 바로 위 천상인 네 위대한 왕들의 하늘나라에 사는 신들(cātummahārājikā deva, 사대왕천)에 전해졌다위로 전해지다 보니 마침내 하느님의 세계(brahmalokā)’ 에 까지 소리가 미쳤다.

 

하느님의 세계(brahmalokā, 범천) 까지 전달 되었을 때

 

초전의 순간에 대하여 가장 먼저 안 것은 신들이다. 땅의 신들로부터 시작하여 욕계천상의 신들이 차례로 알게 되었고, 색계천상과 무색계천상을 아우르는 개념인 하느님의 세계(brahmalokā, 범천)’에 까지 전달 되었을 때, 이 감격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Itiha tena khaena tena muhuttena yāva brahmalokā saddo abbhuggañchi. Ayañca dasasahassī lokadhātu sakampi sampakampi sampavedhi. Appamāo ca uāro obhāso loke pāturahosi: atikkamma devāna devānubhāvanti.

 

이띠하 떼나 카네나 떼나 무훗떼나 야와 브라흐마로까 삿도 압붓간치. 아얀짜 다사사핫시 로까다뚜 산깜삐 삼빠깜삐 삼빠웨디. 압빠마노 짜 울랄로 오바소 로께 빠뚜라호시: 아띳깜마 데와낭 데와누바완띠.

 

이와 같이 그 찰나, 그 순간, 그 잠깐 사이에 하느님의 세계에 까지 소리가 미쳤다. 또한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

 

(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초전의 순간에 대하여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들(Brahma,범천)까지 감격 하였을까? 그것은 윤회를 끝낼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수명과 복이 보장 되는 하느님일지라도 공덕이 다하면 윤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초전의 순간을 반긴 것이다. 그래서일까 하느님 사함빠띠는 이제 막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알아 듣는 자가 반드시 있으리니, 세존께서는 진리를 설하여 주소서(S6.1)”라고 간청하였다.

 

한번도 빛이 도달하지 않았던 아비지옥에 이르기 까지

 

그런데 부처의 출현과 초전이 신들의 세계에서만 빅뉴스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깜깜하고 어두운 곳에 있는 지옥중생에게도 역시 빅뉴스이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표현 되어 있다.

 

 

그곳에 태어난 존재들은 그 빛으로 ‘벗이여, 다른 존재들도 참으로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 일만 세계가 흔들리고 동요하고 격동하면서,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라고 세존의 앞에서 직접 듣고 세존의 앞에서 직접 배웠습니다.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Acchariyabbhutta Sutta , 맛지마니까야 M123, 전재성님역)

 

 

 

 

Niraya

 

 

경에 따르면 아비지옥에 사는 존재들은 처음으로 빛을 접하였다. 그래서 그제서야 상대방의 얼굴을 알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벗이여, 다른 존재들도 참으로 여기에 태어났다.(M123)”라고 서로가 서로를 비로소 알아 본 것이다.

 

 

 

 

Niraya

 

 

 

 

경에서 설명된 아비지옥은 ‘빛의 사각지대’이다. 그래서 그 어떤 빛도 비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출현 할 때는 빛이 비친다. 그래서 비록 칠흑같이 어두운 지옥일지라도 부처님이 출현하면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보는 것이다.

 

 

 

Niraya

 

 

 

이렇게 부처님의 지혜광명은 이제까지 한번도 빛이 도달하지 않았던 아비지옥에 이르기 까지 환하게 밝혔다. 이는 무엇일 말할까? 부모를 살해하는 등 중죄를 지어 비록 아비지옥에 고통받고 있는 존재라도 빛이 도달함에 따라 구원의 가능성이 제시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Niraya

 

 

 

하느님도 감격하고 지옥중생도 반긴 이유는?

 

 

부처가 출현하였다는 것은 커다란 사건이다. 그것은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경이롭고 놀라운 일이라 묘사 되어 있다. 그래서 보살이 입태에 들었을 때, 보살이 태어났을 때, 그리고 초전이었을 때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빛은 이제 까지 한번도 비춘 적이 없는 아비지옥까지 미쳤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구원의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부처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나고 죽는 일을 반복하는 윤회에서 벗어 나지 못하였으나, 부처가 출현함으로 인하여 괴로움과 윤회를 종식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도 감격하였고 지옥중생도 반겼다.

 

부처가 출현하였다는 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을 발견하였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과거에 수 많은 부처가 출현하였다는 말은 정법시대가 오래 가지 않았음을 말한다. 만일 부처가 출현한 이래 정법시대가 지금까지 계속 유지 되었다면 도중에 부처가 출현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부처가 마치 영겁의 암흑속에서 점멸하듯이 드믄드문 출현하였다는 것은 정법이 도중에 사라졌다는 말과 같다.

 

한 부처가출현할 때는 또 다른 부처가 출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 모든 부처님이 발견하고 깨달은 진리는 연기법으로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왜 붓다데이를 되새겨야 하나?

 

지금을 정법시대라 한다. 2600년 전 고따마붓다가 출현하여 마치 아름다운 고대도시를 발견하듯 연기법을 발견 하여 정법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 정법시대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1)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빠알리 삼장)이 있고, 2)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수행을 할 수 있는 팔정도가 있고, 3) 깨달음을 통하여 열반을 성취한 성자가 있으면 정법시대라 한다.

 

현재 우리는 정법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정법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정법이 앞으로 천년, 만년 가리라는 보장이 없다. 따라서 불자들은 정법시대가 오래 유지 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부처의 탄생과 성도와 초전과 열반을 기념하고자 한다.

 

탄생과 성도와 열반을 기념하는 날이 웨삭데이이다. 웨삭데이는 부처님의 탄생한 날이라기 보다 부처님의 날(Buddh Day)’이다. 탄생과 성도, 그리고 열반을 생각함으로서 왜 부처가 이 땅에 출현하였는지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는 날이라 본다.

 

 

2014-05-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