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지혜의 전당에서 바라 본 세상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14. 12:50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지혜의 전당에서 바라 본 세상

 

 

 

천안을 가진 자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하였다. 이는 시야가 좋음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지혜의 눈을 가진 자는 더 많이 볼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천안을 가진 자에 대한 게송이 있다.

 

 

Pamāda appamādena        빠마당 압빠마데나

yadā nudati paṇḍito       야다 누다띠 빤디또

paññāpāsādam-āruyha        빤냐빠사당 아루이하

asoko sokini paja      아소꼬 소끼닝 빠장

pabbataṭṭho va bhñmaṭṭhe    빱바땃토 와 분맛테

dhīro bāle avekkhati.      디로 발레 아웩카띠.

 

(Dhp28)

 

 

슬기로운 님은

방일하지 않음으로 방일을 쫓아내고

지혜의 전당에 올라

슬픔을 여윈 님이 슬퍼하는 사람들을 살핀다.

산정에 오른 슬기로운 님이

지상의 미혹한 존재들을 굽어보듯.

 

(Dhp28, 전재성님역)

 

 

 

賢者が精修行によって

怠惰を退けるときには、

智慧の高閣(たかどの)に登り、

自らは憂い無くして(他の)

憂いある愚人どもを見下ろす。

 

(Dhp28, 中村元역)

 

 

현자는 마음 집중으로써 태만을 다스려

슬픔에서 벗어나 지혜의 정상에 올라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내려다본다,

마치 산 위에 오른 사람이

산 아래 사람들을 내려다보듯이.

 

(Dhp28, 법정스님역)

 

 

 

放逸如自禁   방일여자금

能却之爲賢. 능각지위현

己昇智慧閣   기승지혜각

去危爲卽安. 거위위즉안

明智觀於愚   명지관어우

譬如山如地. 비여산여지

 

(Dhp28, 한역)

 

 

When the wise person drives out

       heedlessness

       with heedfulness,

having climbed the high tower

of discernment,

       sorrow-free,

he observes the sorrowing crowd —

as the enlightened man,

having scaled

       a summit,

the fools on the ground below.

 

(Dhp28, Thanissaro Bhikkhu)

 

 

현자는 마음 집중으로써 태만을 다스려

슬픔에서 벗어나 지혜의 정상에 올라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내려다본다,

마치 산 위에 오른 사람이

산 아래 사람들을 내려다보듯이.

 

(Dhp28, 거해스님역)

 

 

 

게송을 보면 총 6구로 이루어져 있다. 게송이 일반적으로 사구로 이루어진 사구게인 것과 달리 육구게라 볼 수 있다.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

 

게송에서 키워드는 현자이다. 이는 빠알리어 빤디따(paṇḍita)’에 대한 번역이다. 이 빤디따에 대하여 슬기로운 님, wise person 등으로 번역하였다. 슬기로운 자가 있다면 어리석은 자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현자를 뜻하는 빤디따는 어리석은 자를 뜻하는 발라(bāla)’와 함께 사용된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Balapanditasutta, M129)’에서도 알 수 있다.

 

 

게송에서도 역시 현자를 뜻하는 빤디따와 어리석은 자를 뜻하는 발라가 함께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pabbataṭṭho va bhñmaṭṭhe dhīro bāle avekkhati”라 하여 산정에 오른 슬기로운 님이 지상의 미혹한 존재들을 굽어보듯이라 표현 한 것이다.

 

산꼭대기에 올라 가면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 온다. 이처럼 산정상에서 아래 세상을 굽어 보는 듯한 표현을 한 것이 현자이다. 반면 어리석은 자들은 산아래에 있기 때문에 바깥 세상을 볼 수 없다. 산으로 둘러 쌓인 곳에서 살기 때문에 산너머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라 하였다.

 

계속 흐르는 물은 맑고 깨끗 하듯이

 

게송에서 현자는 시야가 넓은 것으로 표현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세번째구절에paññāpāsādam-āruyha”라는 말이 있다. 이는 지혜의 전당에 올라라고 번역되어 있다. 산꼭대기처럼 높은 곳을 의미한다. 여기서 지혜의 전당이라는 말이 ‘paññāpāsādam’이다. 그렇다면 왜 현자들이 가는 곳에 대하여 paññāpāsādam라 하였을까?

 

Paññāpāsādam에 대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를 찾아 보았다. Paññāpāsādampaññā+pāsāda로 분해 된다. Paññā는 일반적으로 지혜를 뜻한다. Pāsāda‘clearness; brightness’의 뜻이지만, Pāsāda‘a lofty platform, a building on high foundations, a terrace, palace’의 뜻이 있으므로 Paññāpāsādam지혜의 전당이라 번역할 수 있다.

 

슬기로운 자는 방일하지 않기 때문에 지혜의 전당에 오를 수 있다고 하였다. 지혜의 전당에 오를 수 있는 조건이 방일 하지 않음이다. 그런데 첫 번째 구절을 보면 Pamāda appamādena”라 하였다. 이는 방일하지 않음으로 방일을 쫓아내고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연못으로 흘러 드는 신선한 물이 오래된 물을 움직이게 하여 자리를 내주지 않고 쫓아내고 한쪽 끝에서 다른 쪽으로 가도록, 몰아 내듯, 총명한 사람은 방일하지 않음을 키워서 방일하지 않음으로서 방일을 쫓아낸다.(DhpA.I.258)”라고 설명 되어 있다. 고인물은 썩어서 악취가 풍기기마련이지만 계속 흐르는 물은 맑고 깨끗 하듯이, 부지런함은 게으름을 몰아낸다는 말과 같다.

 

하늘 높이 치솟은 궁전

 

이처럼 방일하지 않는 것은 방일한 것을 몰아 낼 수밖에 없다. 모든 수행의 기초가 불방일에 있기 때문에 방일하지 않는 자는 지혜의 전당에 오를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지혜의 전당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Paññāpāsādam : DhpA.I.258에 따르면, 지혜의 전당은 하늘 높이 치솟은 궁전으로 하늘눈(dibbacakkhu : 天眼)이라는 보다 높은 의식으로 구성된 지혜를 상징한다. 거기에는 슬픔의 화살이 뽑혀졌기 때문에 슬픔이 없다.

 

(562번 각주, 전재성님)

 

 

 

 

Palace

 

 

주석에서는 Paññāpāsādam(지혜의 전당)에 대하여 천안을 가진 자가 도달할 수 있는 궁전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혜의 궁전에는 슬픔은 찾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괴로움을 소멸한 자에게 있어서 더 이상 슬픔이나 고통 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명한 자는 산위에서 산아래의 어리석은 자를 내려다 보듯이, 슬픔을 여읜 자는 슬퍼하는 자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중역의 한계

 

빠알리게송에서는 Paññāpāsādam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에 대하여 각번역자의 번역내용이 다르다. 전재성님은 지혜의 전당이라 하였고, 나까무라 하지메는 智慧の高閣(たかどの)’이라 하여 비교적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였다. 그러나 중역한 번역을 보면 지혜의 정상이라 하여 마치 산정상을 뜻하듯이 번역하였다. 이는 중역의 한계라 보여진다. 나까무라 하지메가 괄호안에 높은 곳이라는 뜻의 たかどの를 사용하였는데, 이를 그대로 우리말로 옮겼을 때 높은 곳또는 정상이 되어 지혜의 정상이라고 번역한 듯 하다.

 

청원경(S6.1)에도 유사한 게송이

 

지혜의 전당에 대한 이야기는 상윳따니까야 청원경(S6.1)에도 등장한다. 사함빠띠 브라흐마가 부처님에게 진리를 선포하실 것을 청원하는 경을 말한다. 그런데 진리의 전당과 관련된 게송을 보면 놀라우리만큼 법구경  28번 게송과 유사하다.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Sele yathā pabbatamuddhaniṭṭhito

yathāpi passe janata samantato,
Tath
ūpama dhammamaya sumedha

pāsādamāruyha samantacakkhu,
Sok
āvatiṇṇa janatamapetasoko

avekkhassu jātijarābhibhūtanti.

 

산꼭대기의 바위 위에 서서

사방으로 사람들을 굽어보는 것처럼

현자여, 널리 보는 눈을 지닌 님이여,

진리로 이루어진 전당에 오르소서.

슬픔을 여윈 님께서는

슬픔에 빠지고 생사에 고통받는 뭇삶을 보소서. (S6.1,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법구경 28번 게송과 사실상 같은 내용이라 볼 수 있다. 법구경에서는 불방일(appamāda)’을 모티브로 하여 게송이 전개 되고 있지만, 그 이후 구절을 보면 청원경과 같은 내용이다.

 

일체지자의 사만따짝꾸(普眼)

 

청원경에서도 전당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진리로 이루어진 전당에 오르소서라 하였다. 이 때 전당에 오르소서라는 말이 pāsādamāruyha이다. Pāsāda 가 궁전이나 전당을 뜻하고, āruyha‘having climbed’를 뜻하기 때문에, pāsādamāruyha전당에 오르소서가 된다. 그런 전당은 어떤 곳인가? 번역에서는 진리로 이루어진 전당이라 하였다. 진리의 궁전을 말한다.

 

게송에서는 진리로 충만한 전당이라는 뜻으로 진리의 전당이라 하였다. 그런 진리의 전당은 아무나 가는 곳일까? 게송에 따르면 특별한 눈이 있어야 가는 곳이라 하였다. 그래서 널리 보는 눈(samantacakkhu)’을 가진 자가 오를 수 있는 곳이라 하였다. 이 사만따짝꾸를 한자식으로 표현하면 보안(普眼)’이라 한다. 그런데 이 보안은 일체지자만이 가질 수 있는 눈을 말한다. 그래서 일체지자로 불리우는 부처님은 널리 보는 눈을 가졌다고 표현 되어 있다.

 

부처님의 다섯 가지 눈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눈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육체의 눈이 있고, 진리의 눈을 뜻하는 법안이 있다. 이에 대하여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No

다섯 가지 눈

  

 

1

자연의 눈

(性眼, pakaticakkhu)

육체의 눈

 

2

하늘의 눈

(天眼, dibbacakkhu)

신성한 눈

Dhp28

3

지혜의 눈

(慧眼, paññācakkhu)

세 가지 길에 대한 지혜를 말함

법안

S56.11

4

보편의 눈

(普眼, samantacakkhu)

전지한 지혜를 말함

S6.1

5

부처의 눈

(佛眼, buddhacakkhu)

감각능력의 성숙정도에 대한 지혜와 의도와 경향에 대한 지혜를 말함. 깨달은 자의 눈

 

 

 

 

다섯 가지 눈 중에서 네 번째의 지혜의 눈(paññācakkhu)’이 있다. 이를 법안(dhammacakkhu)’이라고 한다. 이 법안에 대하여 세 가지 길에 대한 지혜를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알 수 있다.

 

지혜의 눈(慧眼)에 대하여

 

오비구 중에 꼰단냐가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을 때 또한 그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꼰당냐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S56.11)”라는 구절이 있다. 꼰단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에 대하여 수다원오도송이라고도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순간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의 눈은 ‘dhammacakkhu’를 말한다. 표에서 세 번째 항에 해당되는 지혜의 눈(慧眼, paññācakkhu)’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누구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면 진리의 눈이 생겨남을 알 수 있다.

 

하늘의 눈(天眼)에 대하여

 

부처님의 눈에 대하여 불안 등 다섯 가지 눈으로 설명 되어 있다. 그런데 경에 따라 쓰임새가 다르다. 청원경(S6.1)에서는 널리 보는 눈을 지닌 님이여라 하여 널리 보는 눈‘samantacakkhu’에 대한 것이다. 보안(普眼)으로서 일체지자를 지칭한다. 그러나 법구경 28번 게송에서는 하늘눈(天眼, dibbacakkhu)’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주석에 따르면 지혜의 전당은 하늘 높이 치솟은 궁전으로 하늘눈(天眼, dibbacakkhu)이라는 보다 높은 의식으로 구성된 지혜를 뜻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법구경 28번 게송에서는 천안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산꼭대기로 올라가야 안보이는 것도 보일 것이다. 그래서 총명한 자는 산위에 올라가 대지를 굽어 보듯, 하늘눈으로 본다는 것이다. 산에 올라가면, 별다른 노력 없이 지상을 굽어 볼 수 있듯이 궁전의 꼭대기에 올라서면, 궁전을 둘러싼 건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마치 산 위에 오른 사람이 산 아래 사람들을 내려다보듯.(Dhp28)”라 하였는데, 이는 주석에 따르면 총명한 사람, 번뇌를 부순 거룩한 님은 윤회의 씨앗이 제거 되지 않아 죽고 다시 태어나는 미혹한 존재들을 볼 수 있다. (DhpA.I.258)”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육체의 눈을 넘어 보다 더 높은 눈을 가져야 함을 말한다.

 

어떤 이는 오로지 눈에 보는 것만 믿는다고 한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은 것, 확인 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경전에 쓰여 있는 내용마저 의심한다. 그래서 진짜 하늘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부터 심지어 아라한은 존재할까?” 또는 열반은 가능한가?” 등 모두 의심한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 되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자신의 감각적 인지에 의존하는 자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과학을 신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검증 되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실증에 의존 하는 자들은 육체적 눈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다섯 가지 눈 중에 육안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르침에 따르면 육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육안 위에 천안도 있고, 그 위에 혜안, 보안, 불안도 있는 것이다.

 

슬픔의 화살을 뽑아 버려서

 

육안에만 의존하는 자들은 산아래에서 사는 것과 같다. 산으로 둘러 쌓인 분지에서 살다 보면 전체적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산꼭대기에 올라가 보면 한눈에 볼 수 있다. 더구나 힘들이지 않고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산정에서 보는 것처럼 한눈에 볼 수 있는 눈에 대한 것이 법구경 28번 게송에서는 천안이라 하였다. 그런 천안을 가진 자가 보다 높은 지혜를 가진 자이기 때문에 마치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듯한 지혜의 전당에 오를 수 있다고 하였다.

 

지혜의 궁전에 오른 자는 슬퍼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슬퍼하는 자들은 산아래 세상에 사는 자들로서 고통의 화살을 맞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의 화살을 제거 하지 못하기 때문에 슬퍼하며 죽어서 다시 태어남을 말한다. 그러나 지혜의 눈을 가져서 지혜의 전당에 오른 자는 마치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듯이 슬픔의 화살을 뽑아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슬퍼 하지 않는 다고 하였다.

 

 

 

 

 

슬기로운 님은

방일하지 않음으로 방일을 쫓아내고

지혜의 전당에 올라

슬픔을 여윈 님이 슬퍼하는 사람들을 살핀다.

산정에 오른 슬기로운 님이

지상의 미혹한 존재들을 굽어보듯.(Dhp28)

 

 

 

2014-06-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