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내세와 윤회는 있을까? 부처님의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26. 12:31

 

 

내세와 윤회는 있을까? 부처님의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

 

 

 

뇌과학자의 글을 비판하였는데

 

언젠가 뇌과학자의 글을 비판한 바 있다. 블로그내 검색창을 이용하여 검색해 보니 [위빠사나 수행기 13] 불법승 삼보와 연기법을 회의 하는 어느 뇌과학자의 전도된 인식을 보고(2009-05-10)’라는 제목의 글이다. 초기불교에 대하여 막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무렵이다. 더 검색해 보니 불교평론에 유식론과 신경과학(2009-04-24)’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발제자는 강병조교수이다.

 

강병조교수는 경북대 정신과교수라고 소개 되어 있다. 글을 보면 강교수는 불교신도로서 지금까지 살아왔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음을 전공하는 정신의학도로서 40년을 살아왔다고 하였다. 이처럼 불자라서 의사로서 삶을 살아온 교수가 “영혼이나 마음이라는 것은 뇌의 작용에 불과하다” 라는 주장을 하였다. 이런 주장에 반발하여 글을 올린 것이다.

 

올린 글에서 뇌과학을 전공하는 교수에 대하여 전도된 인식을 가졌다고 비판하였다. 스님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자도 아닌 보통불자가 감히 비판한 것이다. 인터넷시대에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에 블로그를 통하여 경전을 근거로 하여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지적수준을 넘어 추론 하면 처음에는 의심이 생기지만 나중에는 전도된 인식에 집착 하여 회의주의자가 된다는 것이다라고 뇌과학자에 대하여 회의주의자로 규정하였다.

 

뇌과학자는 불교평론 열린논단에서 영혼이나 마음은 뇌의 작용에 불과 하고, 깨달음 역시 뇌의 상태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윤회는 실체로서 파악 해서는 안되고 기능으로 파악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런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는 명백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경전전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뇌과학자의 견해에 대하여 단멸론으로 규정하였다.

 

강병균교수 주장하기를

 

5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 또 다른 과학자를 비판한다. 그는 포항공대 강병균교수이다. 불교닷컴에 시리즈로 기고 되어 있는 기사 중에서 내세에 대한 믿음이 행복을 증진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이다. 강병균교수는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종교인들은내세가 없다면 지금 제멋대로 살다가 가면 될 것이라며내세가 없다는 주장을 공격하는데, 이는 어불성설적인 주장이다. 그리 주장하는 사람이나 그리 할 일이다.

 

(강병균교수, 내세에 대한 믿음이 행복을 증진하는가?, 불교닷컴 2014-06-16)

 

 

강병균교수는 기고문 가장 첫 번째 문단에서 내세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내세를 믿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내세를 믿는다고 하여 사람들이 도덕적인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회의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어지는 글을 보면 내세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지금 그리하고 사는가? 함부로 살고 있는가? 내세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서로 수천 년 동안 끔찍한 전쟁을 벌여온 이유는 무엇인가? 각자 서로 다른 내세를 믿어서 상대방의 내세를 믿지 않기 때문인가?”라고 의문하고 있다.

 

강병균교수가 내세에 대하여 부정하는 듯한 표현을 한 것은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주로 유일신교의 내세관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는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왜 그런가? 내세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 하고 있다.

 

불교에서 내세라 하였을 때 이는 결국 윤회를 말한다. 그런데 강병균 교수는 내세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였다. 그것도 과학자 답게 과학적 근거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내세에 대한 부정은 결국 윤회에 대한 부정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도덕적 압력(moral pressure)

 

윤회없는 불교를 상상할 수 있을까? 누군가 윤회를 부정한다면 그는 불자라 볼 수 없다. 인생이라는 것이 오로지 한번 뿐이라면 되는대로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종교나 도덕적인 규범을 마련해 놓았다. 이에 대하여 도올 김용옥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서양인들은 초월적 세계로부터 도덕적 압력을 받는다.

하나님이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 본다.

 

2) 인도인들은 업으로부터 도덕적 압력을 받는다.

다음 윤회할 때 더 바람직한 세계로 태어난다고 본다.

 

3) 동양인들은 도덕적 압력을 역사로 받는다.

역사에 오명을 남기면 안된다.

 

(01 인도문명의 기둥)

 

 

김용옥교수가 EBS에서 특강한 동영상이다.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것을 참고한 것이다.

 

김용욕교수에 따르면 도덕적 압력(moral pressure)’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도덕적 압력이라는 것이 문화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서양의 경우 기독교의 영향으로 하나님이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 본다라 하여 강력한 도덕적 모럴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경우 유교의 영향으로 역사에 오명을 남기면 안된다라 하여 역사가 키워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인도의 경우 행위(kamma)’라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에 따라 내세가 결정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학을 전공하는 강병균교수는 오로지 과학적 관점에서 관찰하였다. 그래서 내세는 죽은 다음에 올 일이요 신의 응징은 언제 올지 모르는 일이니, 둘 다 더디고 기약없는 일이다.”라고 하여 내세를 부정하였다. 과연 그럴까?

 

경전적 근거가 없는 글을 보면

 

강병균교수의 기고문을 보면 경전적 근거가 없다.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것도 과학자답게 과학적 근거를 들어 이야기를 전개 하고 있다. 보통불자가 학자의 글을 비판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은 경전을 근거로 비판하는 수밖에 없다.

 

강병균교수는 기고문에서 종교인들이 주장하는 내세에 대하여 어불성설이라 하였다. 그리고 내세는 죽은 다음에나 생각할 일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경전에는 분명히 내세가 있는 것이라 하였고 그것도 내세를 위하여 현생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한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근거로서 맛지마니까야에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이 있다.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가 있는데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을 근거로 하여 글을 쓴 적이 있다. 현세열반론(ditthadhamma) 단멸론자들의 낭패(2013-03-03)’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에서 먼저 언급한 것이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에 대한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란 무엇일까? 이는 볼레즈 파스칼이 주장한 ‘기독교 변증론’이라 한다. 기독교의 변증론이란 기독교 사상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을 말한다.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보면 1세기 바울의 변증법, 가정법등을 말하는데 고대 그리스 문학을 활용하여 기독교사상을 해명한 것이다. 이 파스칼 내기에 대하여 경우의 수를 들어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신이 있을 경우

신이 없을 경우

신을 믿을 경우

천국

이득 없음

신을 믿지 않을 경우

지옥

이득 없음

결론

신을 믿는 것이 신을 믿지 않는 것보다 이득이다

(출처: 위키백과, 파스칼의 내기)

 

 

표를 보면 결론적으로 신을 믿는 것이 신을 믿지 않는 것 보다 이득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내기는 무신론자들이나 과학을 신봉하는 자들에게는 먹혀 들어 가지 않는다. 그 첫째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신의 속성을 하나로 단정하고 있기 때문이고, 셋째는 신이 있을 확률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스칼내기라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수도 있지만, 지극히 미약한 가능성에 매달리는 행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파스칼내기의 오리지널버전

 

유일신교에서의 파스칼내기는 목사들이 교회에 더 자주 나오게 하기 위한 방편이라 한다. 그런데 파스칼의 내기와 유사한 이야기가 맛지마니까야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에 실려 있다. 이렇게 본다면 파스칼내기의 원조는 초기경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파스칼내기의 오리지널버전이라 볼 수 있는 가르침이 있다. 먼저 경의 초반부에 다음과 같은 대화를 볼 수 있다.

 

 

[세존]

“장자들이여, 그대들에게는 합당한 이유로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어떠한 스승이라도 있습니까?

 

[장자들]

“세존이시여, 저희들에게는 합당한 이유로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어떠한 스승도 없습니다.

 

[세존]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면, 그것은 그대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자들이여,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아빤나까경-Apaṇṇaka sutta-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Buddha

 

 

부처님이 꼬살라국을 유행하다가 ‘살라’라고 하는 바라문 마을에서 장자들과 나눈 대화이다. 그렇다면 경의 초반에 왜 이런 대화가 실렸을까? 그것은 부처님당시 사상의 혼란에 기인한다. 이곳 살라마을에도 육사외도들이 다녀 갔는데 모두 자신의 견해가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주민들은 어떤 가르침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러자 부처님은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이라고 전제 하면서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어느 누구도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

 

오늘날 한국에는 수 많은 사상과 종교가 난립하고 있다. 모두 자신이 신봉하는 것이 참이고 다른 것은 위선이라 주장한다. 불교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부터 선불교, 밀교 등 온갖 불교가 난립 하고 있는데 모두 자신이 믿는 불교가 최고라 한다. 더구나 과학의 시대에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오로지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만 진리이고 나머지는 허구라 말하기도 한다.

 

부처님 당시도 마찬가지 이었을 것이다. 이 마을 저 마을로 유행하며 다니는 외도들이 자신이 믿는 스승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몹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이때 부처님은 믿을만한 스승이 없다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따르라고 하였다. 여기서 부처님은 나를 믿어라라고 하지 않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초대할 만한 하기 때문에 와서 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분명히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따르라 하였다. 어느 누구도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란 어떤 것일까?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유물론적 허무주의에 대하여

 

먼저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유물론적 허무주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세존]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견해를 갖는다면, 그는 잘못된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사유를 한다면, 그는 잘못된 사유를 하는 것입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언어를 말한다면, 그는 잘못된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그 세계를 아는 거룩한 이들에게 적대하는 것이 됩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그는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는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려주면서 스스로를 칭찬하고 남을 비난합니다. 이와 같이 그는 악한 계행을 실천하며 앞서 있었던 선한 계행을 버립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유, 잘못된 언어, 거룩한 이에 대한 적대,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려줌, 스스로를 칭찬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 이러한 여러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잘못된 견해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빤나까경-Apaṇṇaka sutta-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부처님 당시 허무주의자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은 내생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업에 대한 과보를 부정하였다. 그래서 항상 그들은 “보시도 없고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식으로 말하였다. 마치 오늘날 단멸론자들을 보는 것 같다.

 

단멸론자들의 특징은?

 

오늘날 단멸론자들의 특징은 철저하게 자신의 감각과학적 검증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 또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내세와 윤회에 대하여 부정적이다.

 

아직까지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기에 내세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단멸론자 또는 회의론자는 죽어서 윤회한다는 윤회사상 역시 믿을 것이 못된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단멸론자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감각적 인지에 의존하고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 내밀며 부처님은 현세적 가르침을 말씀 하셨지 내세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강병균 교수의 기고문을 보면 이런 단멸론자의 주장과 매우 흡사한 면이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한 강병균교수

 

경에서 부처님은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그는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다.

 

그럼에도 강병균교수는 종교인들은내세가 없다면 지금 제멋대로 살다가 가면 될 것이라며내세가 없다는 주장을 공격하는데, 이는 어불성설적인 주장이다.”이라 하였다. 부처님이 저 세상이 있다고 하였음에도 강병균교수는 내세가 없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강병균교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한 것이고 잘못된 견해임에 틀림 없다.

 

강병균교수의 기고문에서 내세는 죽은 다음에 올 일이요 신의 응징은 언제 올지 모르는 일이니, 둘 다 더디고 기약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말은 내세는 죽은 다음에 올 일이요라는 말과 더디고 기약없는 일이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말이다.

 

부처님의 내세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그렇다면 부처님은 내세에 대하여 어떤 말을 하였을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경우로 말씀 하셨다.

 

 

[세존]

장자들이여, 이것에 대하여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된 뒤의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그러한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비난받는다.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비난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하여 한 쪽만을 충족시키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버리고 있다.

 

(아빤나까경-Apaṇṇaka sutta-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저 세상이 있다면이렇게 두 가지로 말씀 하셨다. 저 세상이 있다는 것은 내세가 있고 윤회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저 세상이 없다면 내세도 윤회도 없다고 주장하는 단멸론적 견해를 말한다.

 

경우의 수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그런데 부처님은 단멸론적 견해가 매우 손해 보는 것임을 말한다. 단멸론자의 말을 믿고 내세를 부정하였을 경우 불운에 떨어질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우의 수에 대하여 표로 만들어 보았다.

 

 

 

내세를 믿지 않는 자

내세를 믿는 자

저 세상이 없다면

1)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

2)부도덕적 생활로 현자들에 의해 지금 여기에서 현자들에 의해 비난받음

1)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

2) 도덕적 생활로 현자들에 의해 지금 여기에서 현자들에 의해 칭찬받음

저 세상이 있다면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

결론

1)한쪽면만 충족

2)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짐

1) 양쪽으로 충족

2) 양쪽에서 행운을 받음

 

 

 

 

내세를 믿지 않는 자의 경우

 

여기 내세를 믿지 않는 자가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내세를 믿지 않는 자는 잘못된 견해를 갖는 자라 하였다. 잘못된 견해를 가졌기 때문에 잘못된 행위를 할 것이다. 이는 보시에는 공덕도 없다등의 인과를 부정하는 단멸론적 견해를 말한다.

 

이처럼 인과를 부정하는 자들이 도덕적인 삶을 살기 힘들것이다. 행위에 대한 과보를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감각적 쾌락주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금하는 행위를 서슴없이 할 지 모른다.

 

행위에 대한 과보를 부정하는 자가 신구의 악업을 짓고 죽음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될까? 평소 생각대로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여 막행막식하며 살아 왔는데 정말 내세가 없다면 다행일 것이다. 그래서 내세를 믿지 않는 자가 내세가 없을 경우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내세가 있을 경우 어떻게 될까? 이런 경우 낭패라 볼 수 있다. 내세가 없다고 믿었는데 내세가 있을 경우 당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낭패는 악처행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은 내세를 믿지 않는 자에 대하여 한쪽면만 충족하고,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한쪽면만 충족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만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보시에는 공덕이 없다등으로 인과를 부정하는 사견을 가진 자의 생활태도는 바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 살아서도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죽어서는 악처에 떨어지고 살어서도 비난 받을 것이기 때문에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내세를 믿지 않는 자는 내세가 있건 없건 한쪽면만 충족시킬 것이다. 그리고 양쪽으로 불운은 받을 것이라 하였다. 이런 경우에 대하여 법구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고 있다.

 

 

Idha socati pecca socati,        이다 소짜띠 뻿짜 소짜띠
P
āpakārī ubhayattha socati,      빠빠까리 우바얏타 소짜띠
So socati so vihaññati          
소 소짜띠 소 위한냐띠
Disv
ā kamma kiliṭṭham-attano.     디스와 깜마 낄릿탐 앗따노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슬퍼하니

이 세상에서도 슬퍼하고 저 세상에서도 슬퍼한다.

자신의 업의 더러움을 보고

비탄에 빠지고 통탄에 빠진다. (dhp15)

 

 

 

내세를 믿지 않는 자의 경우

 

반면 내세를 믿는 자가 있다. 그 경우 모두 안전할 것이라 하였다. ‘보시에는 공덕이 있다는 등 인과를 믿는 자는 정견이다. 따라서 행위를 함부로 못할 것이다. 김용옥교수가 말한대로 인도인들은 이 업을 쌓음으로서 다음 윤회할 때 더 바람직한 세계로 태어난다.”라 하였는데 이때 행위(kamma)’도덕적 압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구의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삶을 살아 갈 것이다. 이럴 경우 내세가 있건 없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내세가 있다면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다. 설령 내세가 없다고 하더라도 현세에서 삼업을 청정하게 하였으므로 현자들로부터 칭찬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내세를 믿는 자는 내세가 있건 없건 양쪽으로 충족할 것이다. 그래서 양쪽에서 행운을 받을 것이라 하였다. 이런 경우에 대하여 법구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고 있다.

 

 

Idha modati pecca modati,        이다 모다띠 뻿짜 모다띠
Katapuñño ubhayattha modati,    
까따뿐뇨 우바얏타 모다띠
So modati so pamodati           
소 모다띠 소 빠모다띠
Disv
ā kammavisuddham-attano.     디스와 깜마위숫담 앗따노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기뻐하니

이 세상에서도 기뻐하고 저 세상에서도 기뻐한다.

자신의 업의 청정함을 보고

기뻐하고 그리고 환희한다. (dhp16)

 

 

 

강병균교수의 주장을 보면

 

불교닷컴에 기고한 과학자이자 불자인 강병균교수는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는 듯하다. 경전적 근거 없이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였는데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종교인들은내세가 없다면 지금 제멋대로 살다가 가면 될 것이라며내세가 없다는 주장을 공격하는데, 이는 어불성설적인 주장이다.

 

2) 내세는 죽은 다음에 올 일이요 신의 응징은 언제 올지 모르는 일이니, 둘 다 더디고 기약없는 일이다.

 

3) 내세라는 개념조차 없는 코끼리와 침팬지와 물소도 나름대로 정의란 무엇인지 안다.

 

4) 진화의 과정을 거쳐 생성되고 발달한 습성과 정보가 물질적(생체) 유전자와 정신적(문화) 유전자에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

 

5) ‘내세가 없으면 지금 당장 자살하면 될 일이라는 주장 역시 일고의 가치도 없다.

 

6) 내세에 대한 믿음은 오히려 자살을 부추기고 있다.

 

7) 오히려단 한 번뿐인 삶이라는 생각이 자살을 억제할 수 있다.

 

8) 내세에 대한 믿음은 현세의 삶을 몹시 더 괴롭게 만들고 품위있는 임종을 막기도 한다.

 

9) 자살은 현세의 삶이 괴로워서 생기는 일이지,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10) 종교는 참이 아니라 단지 방편일 뿐이다. 인간이 더 평화롭게 그리고 더 행복하게 살게 하기위한 방편일 뿐이다.

 

11) 우리를 구원(救援)하는 것은 신이나 내세나 종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우리의 깨인 마음(지성)과 의지와 행()이다

 

 

강병균교수의 견해를 보면 일부 수용가능한 것도 있다. 그러나 불교인이라면 대부분 받아 들이기 힘든 견해이다. 아무런 경전적근거도 없이 자신의 생각하는 바를 이야하기 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과학적 근거를 들어 자신의 견해를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보았을 때 강병균교수의 견해는 철저하게 자신의 감각적인지과학적검증이라는 잣대로 종교를 말하고 불교를 해석한 것이라 보여진다.

 

자꾸 원시불교라 하는데

 

강병균교수의 컬럼을 읽어 보면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고 있다. 오로지 현세적인 삶에만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행복론을 주장하면 단멸론이나 현법열반론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과학의 시대에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과학을 맹신하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는 교계신문 댓글에서 본 것이다. 댓글이라고는 하지만 스님이 쓴 것으로 보여진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이렇게...
미얀마를 비롯한 동남아 남방불교국가들이 미개한 상태에 처한 원인은 무었인가.
그 주원인은 2000년이 넘도록 지켜온 마하박가등의 팔리어율장에 기초한 조잡한 수준의 불교에 있다.

세상과 사회는 나날이 진보하고 발전하는데,
2500
년전 만들어진 원시적 농경사회의 그것을 맹목적으로 보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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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과학기술의 문명시대에 가사를 걸치고 맨발에 탁발하러 나서는 그 한심한 모습에 있는 것이다.
그 우매한 짓들것을 가능케하는 것이 바로 빨리어 율장이고 각종의 경전들이다.
그것을 맹목적으로 고수하는 답답한 군상들이다.

 

(서광,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25074)

 

 

불교닷컴에 실린 어느 기사의 댓글이다. 필명은 서광으로서 스님으로 보인다. 글을 보면 2500년 전 가르침에 대하여 시대에 뒤쳐진 것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불교는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고?

 

이런 류의 글은 종종 볼 수 있다. 블로그에 산중승이라는 필명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꾸만 [초기불교]를 들먹이시는데, 과연 [초기불교]라는게 있었습니까? 혹시 [원시불교]를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이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지요. 그냥, 샤카무니'의 설법시대'였을 뿐이죠.
샤카모니 열반하신 후에 10대불제자를 중심으로, [불교적 교리]가 체계화되고,
[
불경]이 집대성 된후에 비로소 컬리큘럼이 만들어지면서 [
佛敎]라는 宗敎 성립되어진 것이지요.
그때로 부터 수천년을 지나오면서 [불교]는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산중승)

 

 

댓글을 보면 공통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폄하하고 있다. 이는 원시불교라고 칭하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원시불교는 덜 완성된 불교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현재까지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진화할 것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초기불교를 원시불교라 칭하는 자들은 공통적으로 샤카무니또는 석가라 부른다. 마치 김가’ ‘이가하듯이 옆집 아저씨 이름 부르듯이 하는 것이다. 강병균교수도 기고문에서 석가는 오히려 공중의 새가 매에게 잡아먹히는 참극을 목격하고라 하여 부처님을 부처님이라 부르지 않고 석가라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미 완성되었다

 

마하야나에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하여 미완성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테라와다에서는 부처님가르침 자체는 이미 완성된 것이라 한다. 부처님이 깨닫고 난 다음 더 높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삼전십이행상으로도 나타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삼전십이행상은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 三轉十二行相)’라는 뜻이다. 이말은 무슨 뜻일까?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법을 펴신 것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불완전하지 않았다면 법을 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세 번 굴렸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세 번씩이나 굴려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고 판단 되었기 때문에 선언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마하야나에서 부처님에 대하여 석가라 부르며 미완성된 원시불교라고 폄하하는 것은 부처님에 대한 모독이다.

 

왜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되는가

 

강병균 교수는 내세를 부정하였다. 그리고 과학에 근거한 실증주의적 견해를 제시하였다. 과학의 시대 타당한 면도 있으나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경전을 근거로 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강병균교수가 기고한 글은 개인의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실증에 바탕을 둔 개인적 견해라 보여진다. 그래서 강병균교수가 주장하는 내세부정론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부처님은 내세와 윤회는 분명히 있는 것이라 하였다. 특히 맛지마니까야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의 경(M60)’에서는 마치 파스칼내기의 오리지널버전이라 볼 수 있는 내세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이 가르침에서 보시에는 공덕이 있다는 등의 정견을 믿어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한다면 반드시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설령 내세가 없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이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 간다면 현세에서 현자들에게 칭찬 받을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과 저 세상 양쪽에서 행운이라 하였다. 이런 가르침을 불자들은 믿는다. 부처님이 왜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과 자신에게 의존하라고 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2014-06-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