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사실상 육식을 허용하지 않았다, 청정한 고기와 부정한 고기
카페테리아에서
주로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를 한다. 점심시간에 수백명에 한꺼번에 밥을 먹는 부페식 식당을 말한다. 가격도 싸고 메뉴도 메일 바뀌어서 부담 없다. 더욱 더 부담 없는 것은 혼자 먹기 때문이다. 일인사업자이다 보니 혼자 식사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작은 식당에 갈 경우 테이블만 차지 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수백명이 한꺼번에 식사 하는 카페테리아가가 부담이 없다.
카페테리아에서는 메뉴가 메일 바뀐다. 국을 포함하여 일식 5찬 또는 6찬이 보통이다. 가장 좋은 점은 야채가 풍부하다는 것이다. 김치는 기본이고 다양한 녹색의 채소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작은 식당과 다른 점이다. 그런데 항상 빠지지 않는 먹거리가 있다. 그것은 고기이다.
카페테리아에서 매일매일 어떤 고기이든지 하나 정도는 올라 온다. 만일 고기가 하루라도 빠진 다면 어떻게 될까? 당장 반응이 온다. “풀만 먹으라는 말이냐?”의 등의 불만이 쏟아진다. 특히 젊은 층에서 그렇다. 그래서 식당을 운영하는 주인에 따르면 매일매일 고기를 올려 놓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마치 남의 살 먹는 것처럼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를 하지만 고기를 그다지 즐겨 먹지 않는다. 특히 불교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알게 되면서 의식적으로 피한다. 고기를 먹는 것이 마치 ‘남의 살’ 먹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몸집이 큰 동물의 고기가 그렇다. 크기가 작은 생선류는 덜 하지만 닭이나 돼지, 소와 같은 축생들이다. 이는 불교의 육도윤회에 따른 것이다.
누구나 행위에 대한 과보가 남아 있는 한 유전하고 윤회 할 수밖에 없는데 그 중에 축생도 포함 되어 있다. 그래서 아래로는 지옥에서부터, 축생, 아귀, 아수라 그리고 인간과 천상에 이르기 까지 한량없이 유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S15:11)”라 하였다.
윤회의 시작을 알 수 없다면 윤회의 끝도 당연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무명에 덥히고 갈애에 속박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한량 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개로, 돼지로, 소로 태어난 적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실제로 경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Dīgharattaṃ vo bhikkhave, gunnaṃ sataṃ gobhūtānaṃ sisacchinnānaṃ lohitaṃ passannaṃ paggharitaṃ, na tveva catusu mahāsamuddesu udakaṃ.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소로 태어나 소가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Tiṃsamattasutta-삼십 명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13,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소로 태어난 적이 있음을 말한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사대양의 물보다 더 많은 피를 흘렸을 정도로 태어났음을 말한다. 그런데 경에서는 소뿐만이 아니다. 물소, 양, 염소, 사슴, 닭, 돼지가 되어 목을 잘려 이제까지 흘린 피가 수미산에 있다는 사방의 사대양 보다 더 많을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경에서는 우리들의 식탁에 매일매일 오르는 소, 닭, 돼지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마치 ‘동족’을 먹는 것 같아 마음이 찜찜하다. 그래서 고기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기를 먹지 않고 풀만 먹고 살 수 있을까?
왜 삼겹살을 먹는가?
종종 EBS에서 ‘극한직업’을 본다. 이 세상에 수 많은 직업이 있지만 더럽고 위험하고 어렵다고 알려져 있는 ‘삼디직종(三D業種)’에 대한 이야기다. 최근 본 것 중에 ‘대리석’채취 작업장 편을 보았다.
강원도 채석장에서 잘려진 대리석을 가공하는 공장이 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매일 분진과 함께 산다. 건물 외벽에 붙여질 대리석을 가공할 때 소음과 함께 먼지가 일어나는데 작업자들은 늘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인체에 매우 해로운 돌가루이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되자 대리석불판이 등장한다. ‘삼겹살’을 구워 먹기 위해서이다. 작업자에 따르면 매일 먹는다고 한다. 이렇게 삼겹살을 먹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삼겹살을 먹음으로 인하여 돌가루 먼지를 씻겨 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 한다.
사진: EBS 극한직업 대리석광산
프로에서는 삼겹살 파티를 종종 보여 준다. 먼지를 뒤집어 쓰고 일하는 목재작업장, 탄광, 채석장 등이다. 작업자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불판에 삼겹살을 먹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너무나 자연스럽다. 보기에도 부담이 없다. 작업자 중의 한사람은 “매일 구워 먹어요. 먼지를 많이 먹으니까 먼지 씻겨 내려가라고요”라고 말한다. 삼겹살을 먹음으로서 체내의 분진을 제거 하고 한잔 술에 고된 노동을 보상받고자 하는 것 같다.
사진: EBS 극한직업 대리석광산
삼디업종 종사자들에게 삼겹살 파티는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것은 땀흘린 노동의 대가고 내일을 위한 충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에게 육도윤회를 거론 하며 육식의 부당성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처럼 보인다. 하는 일 없이 한가하게 놀면서 ‘맛집’을 찾아 다니는 ‘식도락가’들을 비난할 지언정 먼지를 마셔 가며 오로지 ‘팔뚝의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들에게 삼겹살과 소주파티를 비난할 수 없다.
“스님네가 고기 좀 먹는 것 가지고 시비 거는 사람들이 있어요”
수행자들은 대체적으로 육식을 하지 않는다. 삼디업종의 노동자들처럼 먼지를 뒤집어 쓰고 고된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족을 위하여 돈을 버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육식을 할만한 뚜렷한 이유가 없어서 일 것이다. 그럼에도 스님들은 종종 육식을 하는 모양이다. 언젠가 불교TV에서 본 법문에 따르면 어느 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아마 사찰에서 여러분도 이렇게 절에 오셨으니까 계를 받으시라고 많이 할 것입니다. 오계를 받아라 하고, 스님네는 십계를 받고, 비구는 이백여개를 받아야 해요. 그런데 첫 번째가 불살생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살생하지 말라. 내가 이것에 대하여 잠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살생을 하지 말라니까 스님네가 고기 좀 먹는 것 가지고 시비거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 잘못된 것 입니다. 아시겠어요. 인도에서는 그 당시 육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와 가지고 도가에서는 육식을 하게 되면 피가 탁해지니까 수행자로서는 피가 탁해지면 정신적으로 흐려지기 때문에 안먹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해서 금지를 한 것입니다.”
(불교TV 무상사 일요초청법회, 제163회 OO스님(조계종 원로위원), 불교TV 2009-11-05)
이 이야기는 ‘고기 좀 먹는 것 가지고, 아마간다의 경(Sn2.2)(2012-03-19)’라는 제목으로 올린 바 있다.
스님은 육식 하는 것에 대하여 문제삼지 않아도 좋다는 취지로 법문하였다.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는 육식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는데, 다만 중국에서 도교의 영향으로 불가에서 육식을 금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전통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출가자는 육식을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뭐? 축생과보를 면할 수 있도록 한다고?
여기까지는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다음이 문제이다.
“그것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와서도 그렇게 됐는데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살생에 대하여 내가 설명을 해 드리지요.
한번 저보다 지식이 많은 분들이 들으시면 잘 아실 겁니다. 파리 한 마리 죽였다면 살생했다고 해서 야단법석이라, 또 배암 한마리 죽였다면 또 살생했다 야단이라. 그게 아닙니다. 축생보를 받고 있으면 그 축생보를 면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되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살생이라는 것은 나쁜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TV 무상사 일요초청법회, 제163회 OO스님(조계종 원로위원), 불교TV 2009-11-05)
스님은 살생하는 것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라 한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나쁜 생각으로 살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파리한마리, 뱀한마리 죽이는 것에 대하여 민감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한다. 오히려 파리한마리, 뱀한마리 죽여 주는 것이 ‘축생과보를 면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식의 설명에 대하여 불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마간다의 경(Sn2.2)에서
원로스님은 스님들이 고기 좀 먹는 것 가지고 불자들이 시비 건다고 하였다. 아무리 수행자라 할지라도 건강을 위해서는 고기를 먹을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육식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 하셨을까? 숫따니빠따 ‘아마간다경(Sn2.2)’에서 바라문 띳사는 깟사빠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바라문 띳사]
하느님의 친척인 그대는
새의 고기를 훌륭하게 요리해서 함께 쌀밥을 즐기면서도
‘나는 비린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 깟싸빠여, 그 뜻을 그대에게 묻건대
‘그대가 말한 비린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stn241)
(Āmagandhasutta-아마간다의 경, 숫따니빠따 Sn2.2, 전재성님역)
여기서 깟사빠는 과거불 깟사빠붓다를 말한다. 깟사빠부처님 당시에 아마간다라는 수행자가 있었는데, 육식을 금하고 오로지 채식으로만 수행을 하였다.
인연담에 따르면 아마간다는 부처가 출현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새로 출현한 부처님이 비린내 나는 것, 즉 물고기와 고기를 먹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오 깟싸빠여, 그 뜻을 그대에게 묻건대 그대가 말한 비린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Pucchāmi taṃ kassapa etamatthaṃ Kathaṃpakāro tava āmagandho.)”라고 묻고 있다. 여기서 비린 것이라는 뜻의 빠알리어가 ‘āmagandha’이다. 이는 ‘verminous odour; flesh’의 뜻으로 육류 또는 생선을 의미한다. 그래서 경의 제목이 ‘아마간다경(Āmagandhasutta)’이 되었다.
오계를 어기는 것이 비린 내 나는 것
아마간다의 질문에 깟사빠부처님은 무어라 답하였을까? 가장 먼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Pāṇātipāto vadhachedabandhanaṃ
Theyyaṃ musāvādo nikatī vañcanāni,
Ajjhenakujjhaṃ paradārasevanā
Esāmagandho na hi maṃsabhojanaṃ.
[붓다 깟싸빠]
“살생하고, 학대하고, 자르고, 묶는 일,
도둑질, 거짓말, 사기와 속이는 일,
가치 없는 공부, 남의 아내와 가까이 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닙니다.(stn242)
(Āmagandhasutta-아마간다의 경, 숫따니빠따 Sn2.2, 전재성님역)
한마디로 오계를 어기는 것이 비린 내 나는 것이라 하였다. 살생, 도둑질, 거짓말, 사음 등 을 서슴없이 하는 자가 육식을 하는 자 보다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마다 말미에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닙니다.(Esāmagandho na hi maṃsabhojanaṃ)”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육식을 금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금한 것은 살생 등 오계를 지키지 않는 것, 그리고 악하고 불건전 행위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스님들이 고기를 먹어도 되고, 더구나 뱀 등 축생에게 축생과보를 면하게 하기 위하여 살생해도 좋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원로의원 스님 말대로 닭이나 돼지, 소 등을 잡아서 먹어도 전혀 거리낄 것이 없을 것이다. 닭이나 돼지 등 축생으로 태어난 과보를 면하게 해 주어서 좋고 인간에게 또는 수행자에게 고기를 제공해 주어서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불교는 있을 수 없다.
횟집에 갔을 때
대승불교에서는 육식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남방 테라와다불교에서는 그런 규정이 없다고 한다. 이는 마성스님이 불교평론에 발표한 논문 ‘불교는 육식을 금하는 종교인가’에서도 확인 된다.
스님의 논문에 따르면 “초기불교에는 출가·재가를 막론하고 절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해 놓은 엄격한 계율은 없다.”라고 하였다. 다만 몸소 죽여서는 안되고, 남을 시켜 죽어서도 안되고 죽이는 것을 묵인해서도 안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횟집에 가는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나라사람들은 회를 즐겨 먹는다. 누군가에 따르면 회를 먹을 때 살아 있는 물고기를 지적하면서 “저것으로 달라”고 말하면 살생업을 짓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남을 시켜 죽이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마트에서 고기를 사먹는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할까?
맛지마니까야 ‘지바까의 경(M55)’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육식을 금하지는 않았다. 다만 생명을 죽이는 것을 금하였을 뿐이다. 그래서 고기를 먹는 것이 비린내 나는 것이 아니라 살생하는 것이 비린내 나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맛지마니까야 ‘지바까의 경(M55)’이 그것이다. 지바까는 재가의 남자신도로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님 가운데 제일(puggalappasannānaṃ)’로 알려져 있다.
경에 따르면 지바까는 부처님에게 불만이 섞인 투로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이 ‘수행자 고따마를 위해서 생명을 죽이는 자들이 있는데, 수행자 고따마는 그 고기가 자신을 위해 죽인 동물의 고기인 것을 알고도 먹는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생명을 중시하는 부처님 교단에서 수행자들이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하여 알고 싶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교단에서 비난과 비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존에 관하여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까, 세존을 진실이 아닌 말로 비방하는 것이 아닙니까? 진리에 따라서 말하는 것입니까, 진리에 관하여 모든 이론에 밝은 자가 비방할 구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까?”라고 거듭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Ye te jīvaka evamāhaṃsu: samaṇaṃ gotamaṃ uddissa pāṇaṃ ārabhanti. Taṃ samaṇo gotamo jānaṃ uddissakaṭaṃ maṃsaṃ paribhuñjati paṭiccakammanti, na me te vuttavādino, abbhācikkhanti ca pana mante asatā abhūtena.
Tīhi kho ahaṃ jīvaka ṭhānehi maṃsaṃ aparibhoganti vadāmi: diṭṭhaṃ sutaṃ parisaṅkitaṃ, imehi kho ahaṃ jīvaka tīhi ṭhānehi maṃsaṃ aparibhoganti vadāmi.
Tīhi kho ahaṃ jīvaka ṭhānehi maṃsaṃ paribhoganti vadāmi: adiṭṭhaṃ asutaṃ aparisaṅkitaṃ, imehi kho ahaṃ jīvaka tīhi ṭhānehi maṃsaṃ paribhoganti vadāmi.
[세존]
“지바까여, ‘수행자 고따마를 위해서 생명을 죽이는 자들이 있는데, 수행자 고따마는 그 고기가 자신을 위해 죽인 동물의 고기인 것을 알고도 먹는다.’고 말하는 자들은 나에 관하여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실이 아니고 진실이 아닌 말로 비방하는 것입니다.
지바까여, 나는 세 가지 경우, 고기를 수용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즉 보여진 것이고, 들려진 것이고, 추측된 것인 경우입니다. 지바까여, 나는 이러한 세 가지 경우, 고기를 수용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지바까여, 나는 세 가지 경우, 고기를 수용한다고 말합니다. 즉 보여지지 않은 것이고, 들려지지 않은 것이고, 추측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지바까여, 나는 이러한 세 가지 경우, 고기를 수용한다고 말합니다.
(Jīvaka sutta-지바까의 경, 맛지마니까야 M55,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교단에서 수행승들이 고기를 먹는다는 비난에 부처님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1)보여지지 않은 것(adiṭṭhaṃ)이고, 2)들려지지 않은 것(asutaṃ)이고, 3)추측되지 않는 경우(aparisaṅkitaṃ)라 하였다.
“이미 죽은 것을 음식으로 요리할 수 있다”
이 세 가지의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 이 구절은 부처님이 육식의 문제에 대하여 승단에 어떻게 처방을 했는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엄격한 채식을 요구하지 않았다. 육식이라고 하더라도 특별히 자신들을 위해 도살된 것이 아닌 것이라면, 먹어도 좋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고기에 대하여 수행승들을 위해 특별히 도살된 것으로 보여진 것이 아니고, 들려진 것이 아니고, 추측된 것이 아니므로, ‘세 가지 점에서 청정한 고기’라고 불렀다.
물론 재가의 신도도 ‘살아 있는 생명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계행 때문에 자신을 위해 살아있는 것을 죽여 음식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미 죽은 것을 음식으로 요리할 수 있다.
(M55, 967번 각주, 전재성님)
각주에 주석의 근거를 제시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전재성님의 견해로 볼 수 있다.
청정한 고기와 부정한 고기
각주에서 키워드는 ‘청정한 고기(tikotiparisuddha)’이다. 그렇다면 고기에도 ‘청정한 고기’가 있고 ‘부정한 고기’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각주에 따르면 분명히 있다. 이미 죽은 동물의 고기로 음식을 만드는 것은 청정한 고기이고, 반면 죽여서 만든 고기는 부정한 고기라는 뜻이다. 특히 수행승을 위하여 동물을 살생하는 경우는 매우 부정한 고기이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도살된 것으로 보여지는 고기, 도살된 것으로 들려지는 고기, 도살된 것으로 의심이 되는 고기는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경에서 ‘보여지지 않은 것(adiṭṭhaṃ)이고, 2)들려지지 않은 것(asutaṃ)이고, 3)추측되지 않는 경우(aparisaṅkitaṃ)’라 하였는데, 이는 앞 구절에 ‘도살된 것’이라는 말이 빠진 형태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써 본 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지바까여, 나는 세 가지 경우, 고기를 수용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즉 [도살된 것으로]보여진 것이고, [도살된 것으로]들려진 것이고, [도살된 것으로]추측된 것인 경우입니다. 지바까여, 나는 이러한 세 가지 경우, 고기를 수용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빅쿠보디의 영역판인 MDB를 보면 다음과 같다.
“Jivaka, I say that there are three instances in which meat should not be eaten: when it is seen, heard, or suspected [that the living being has been slaughtered for the bhikkhu]. I say that meat should not be eaten in these three instances. I say that there are three instances in which meat may be eaten: when it is not seen, not heard, and not suspected [that the living being has been slaughtered for the bhikkhu]. I say that meat may be eaten in these three instances.[i]
(Jivaka Sutta - To Jivaka, MDB M55, 빅쿠보디역)
빅쿠보디역을 보면 친절하게도 대괄호를 이용하여 ‘[that the living being has been slaughtered for the bhikkhu]’라고 구체적으로 설명 해 놓았다. 이는 “빅쿠를 위하여 살아 있는 생명을 도살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구문은 원문에는 없다. 주석에서 설명되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실려 있는 것이다. 이를 ‘주석적 번역’이라 한다.
닭을 사먹는 소비자의 경우
빅쿠보디의 각주에 따르면 빅쿠를 위하여 살아 있는 것을 도살하여 요리를 하면 안된다고 하였다. 그 대신 “but does not proscribe purchasing meat prepared from animals already dead.(574번 각주)” 라 하였다. 이미 죽은 동물로부터 얻어진 고기를 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시장이나 마트에서 파는 고기는 부정한 고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청정한 고기라고 보기도 어렵다. 청정한 고기는 죽은 고기를 말한다. 그러나 세상에 죽은 고기가 과연 얼마나 될까? 만일 닭이나 돼지나 소가 자연사하여 죽었다고 하였을 때 이를 고기로 먹는 사람들은 극소수일 것이다.
닭의 경우 ‘일령’으로 따진다. 평균 33일만에 출하 된다. 알에서 부화 하여 도살장으로 가기 까지 33일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거의 대부분의 닭들은 인간에게 살코기를 제공하기 위하여 도살된다. 이렇게 도살된 닭이 마트에서 팔린다. 이런 닭을 사 먹는 소비자는 마치 상품 고르듯이 닭을 산다.
닭을 사먹는 소비자에게 있어서 살생업에 대한 죄의식은 거의 없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도 마찬가지이다. 레스토랑에서 연인들이 비프스테이크를 시켜 놓고 소고기맛을 즐겨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왜 그럴까? 직접 살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고기를 먹는 것 자체는 비린내 나는 행위가 아니다. 비린내 나는 것은 실제로 살생업을 저질렀을 때이다.
스님을 위하여 닭을 잡은 경우
그렇다면 촌로가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닭을 잡았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엄밀히 말하면 살생업에 해당된다. 단지 시골에서 닭을 키우고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잡게 되는 것이다. 이런 닭을 잡아 스님에게 공양하였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느 스님의 이야기이다. 하루는 스님이 신도집을 방문하였는데 재가신도는 너무 황송하고 고마운 나머지 닭을 잡았다고 하였다. 집에 귀한 손님이 오면 닭을 잡는 풍습이 있기 때문에 무지한 촌로는 그렇게 한 것이다. 과연 스님은 이 닭을 먹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부처님은 살생을 금하였다. 그러나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빅쿠들도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이는 남방 테라와다에서 탁발이나 청식에 의존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마성스님의 논문에 따르면 “남방불교의 경우 재가자들은 자신이 마련한 음식을 스님들에게 공양한다. 스님들의 발우에는 채식은 물론 육식으로 가득 찬다. 재가자들이 올린 공양물은 선택의 여지없이 모두 먹는다.(불교평론, 불교는 육식을 금하는 종교인가)”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다.
탁발이나 청식의 경우 재가자가 주는 대로 먹는 다고 한다. 그 중에 고기가 있을 수 있는데, 그 고기에 대하여 ‘[도살된 것으로]보여진 것이 아니고, [도살된 것으로]들려진 것이 아니고, [도살된 것으로]추측된 것이 아닌 경우에 먹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스님들이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하여 비난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스님을 위하여 닭을 잡은 것은 먹어서는 안된다. 이미 보여진 것이고, 들려진 것이고 추측된 것이기 때문이다.
먹는 사람 따로 잡는 사람 따로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먹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설령 고기라고 할지라도 도살된 것으로 보여진 것이 아니고, 들려진 것이 아니고, 추측된 것이 아닌 경우에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재가거사님은 스님들에게 종종 ‘영양보충’을 시켜 드린다고 한다. 산중에서 채식만 하는 스님을 위하여 오리백숙 등 기름진 음식을 일부로 사 드린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신체를 지탱하는 약으로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재가자들도 얼마든지 기름진 것, 비린내 나는 것을 먹을 수 있다. 다만 닭을 잡듯이 살생하는 것이 아니고, 회를 쳐 달라고 손가락으로 지적하는 것이 아닌 한 먹을 수 있다. 그럼에도 고기를 먹을 때 늘 찜찜하다. 마치 공범이 된 듯한 느낌이다. 비록 살생업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고기를 먹는 것 자체가 공범자가 된 듯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먹는 사람 따로 있고 잡는 사람 따로 있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횟집에 가면 살아 있는 활어를 볼 수 있다. 종업원은 뜰채로 고기를 낚아 그 자리에서 회를 쳐준다. 비록 손으로 가리키며 보지는 않았을지라도 고기를 먹는 행위 그 자체는 살생하는 것과 다름 없다. 그렇다고 죽은 물고기를 먹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농촌에서 오랜 만에 보는 자식을 위하여 장닭을 잡았다. 닭을 잡아 모가지를 비틀고 끓는 물속에서 푹 고아 닭백숙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식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 경우 자식은 살생업을 짓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을 위하여 부모가 닭을 잡았다는 것은 사실상 간접살생이나 다름 없다. 그렇다고 죽은 닭을 먹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까?
허물 있는 음식에 대하여
부처님은 허물있는 음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였다.
“지바까여, 누군가가 여래나 여래의 제자를 위해서 생명을 죽인다면, 그는 다섯 가지 경우에 많은 악행을 낳는 것입니다. 그가 ‘가서 그 생명을 가져와라.’라고 한다면, 그가 많은 악행을 낳는 첫 번째 경우입니다. 그 생명이 목덜미가 낚아 채여 끌려와서 괴로움과 근심을 체험한다면, 그가 많은 악행을 낳은 두 번째 경우입니다. 그가 ‘가서 이 생명을 죽이라.’라고 한다면, 그가 많은 악행을 낳는 세 번째 경우입니다. 그 생명이 살해될 때에 괴로움과 근심을 체험한다면, 그가 많은 악행을 낳는 네 번째 경우입니다. 그가 여래나 여래의 제자에게 허용되지 않은 음식을 제공하면, 그가 많은 악행을 낳는 다섯 번째 경우입니다. 지바까여, 누군가가 여래나 여래의 제자를 위해서 생명을 죽인다면, 그는 이러한 다섯 가지 경우에 많은 악행을 낳는 것입니다.”
(Jīvaka sutta-지바까의 경, 맛지마니까야 M5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모두 다섯 가지 악행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이는 직접살생과 간접살생 모두 해당된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가서 그 생명을 가져와라.”라고 말하는 것
2) 그 생명이 목덜미가 낚아 채여 끌려와서 괴로움과 근심을 체험하는 것
3 “가서 이 생명을 죽이라.”라고 말하는 것
4) 그 생명이 살해될 때에 괴로움과 근심을 체험하는 것
5) 여래나 여래의 제자에게 허용되지 않은 음식을 제공하는 것
다섯 가지의 악행은 재가자가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고기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닭을 예로 든다면 1)“가서 그 닭을 가져와라.”라고 누군가 지시하였다면, 2) 그 닭의 날개죽지를 잡자 꼬꼬댁 하며 비명을 지를 것이다. 이때 보기가 민망할 것이다. 3) 다음에 누군가 “가서 이 닭을 죽이라.”라고 말할 것이다. 4) 그러면 그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 죽일 것이다. 5) 그리고 펄펄 끓는 물에 넣고 닭백숙을 만들 것이다. 그 닭백숙을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공양하였을 때 이는 큰 허물이라는 것이다.
죽은 고기를 먹지 않는 한 그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허물은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공양할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일반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내려온 자식을 우위하여 부모가 닭을 잡았을 때 역시 허물을 짓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좀 더 확장하여 마트에서 닭을 산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 경우 소비자는 생산자의 닭을 마치 상품 고르듯이 살 것이다. 물론 이 닭은 죽은 닭이 아니라 일령 33일 밖에 되지 않는 산닭을 도살장에서 잡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생산자나 소비자 모두 살생업을 짓는 셈이 된다. 죽은 고기를 먹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살생업을 짓는 허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렇게 보았을 때 부처님은 육식을 허용하였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허용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다.
부처님은 사실상 육식을 허용하지 않았다
고기를 먹을 때는 늘 찜찜하다. 먹고 나서도 개운치 않다. 그것은 한때 나도 그런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닭으로 태어나 닭이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S15:13)”라고 경전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카페테리아에 매일매일 올라 오는 육류를 입에 대기가 찜찜하다.
그러나 극한직업 프로에서 보는 노동자들의 삼겹살 먹는 모습은 전혀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다. 또 농촌에서 자식을 위하여 닭을 잡는 부모가 살생업을 짓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왜 그럴까? 비록 그들이 비린내 나는 고기를 먹는다든가 살생업의 허물을 짓고 살긴 하지만 그런 허물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착하고 건전한 행위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닙니다”
고기를 먹는 것 보다 생계를 위해서 동물을 살생하는 것 보다 더 비린 것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닙니다.”라 하였다. “이것이야말로”라 하였을 때 이것이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Pāṇātipāto vadhachedabandhanaṃ
Theyyaṃ musāvādo nikatī vañcanāni,
Ajjhenakujjhaṃ paradārasevanā
Esāmagandho na hi maṃsabhojanaṃ.
[깟사빠 부처님]
“살생하고, 학대하고, 자르고, 묶는 일,
도둑질, 거짓말, 사기와 속이는 일,
가치 없는 공부, 남의 아내와 가까이 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닙니다. (stn242)
Ye idha kāmesu asaññatā janā
Rasesu giddhā asucīkamissitā, 2
Natthikadiṭṭhi visamā durannayā
Edāmagandho na hi maṃsabhojanaṃ.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감각적 쾌락을 자제하지 않고,
맛있는 것을 탐하고, 부정한 것과 어울리며,
허무하다는 견해를 갖고, 바르지 못하고, 교화하기 어려우면,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닙니다. (stn243)
Ye lūkhasā dāruṇā piṭṭhimaṃsikā,
Mittadduno nikkaruṇā timānino,
Adānasīlā na ca denti kassaci
Esāmagandho na hi maṃsabhojanaṃ.
거칠고 잔혹하며,험담을 하고
친구를 배신하고 무자비하며,
몹시 오만하고 인색해서 누구에게도 베풀지 않는 사람들,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닙니다. (stn244)
Kodho mado thambho paccuṭṭhāpanā ca
Māyā usūyā bhassasamussayo va,
Mānātimāno ca asabbhi santhavo
Esāmagandho na hi masayojanaṃ.
성내고, 교만하고, 완고하고, 적대적이고,
속이고, 질투하고, 호언장담하고,
극히 오만하고, 사악한 자들을 가까이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닙니다. (stn245)
Ye pāpasīlā iṇaghātasucakā
Vohārakūṭā idha pāṭirūpikā
Narādhamā ye'dha karonti kibbisaṃ
Esāmagandho na hi maṃsabhojanaṃ.
악행을 일삼고, 빚을 갚지 않고, 중상하며,
재판에서 위증을 하고, 정의를 가장하며,
이 세상에서 죄과를 범하며 비천하게 행하면,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 (stn246)
Yo idha pāṇesu asaññatā janā
Paresamā'dāya vihesamuyyutā,
Dussīlaluddā pharusā anādarā
Esāmagandho na hi maṃsabhojanaṃ.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하다면,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닙니다. (stn247)
Etesu giddhā viruddhātipātino
Niccuyyutā pecca tamaṃ vajanti ye,
Patanti sattā nirayaṃ avaṃsirā
Esāmagandho na hi maṃsabhojanaṃ.
뭇삶으로서 욕심내고, 적대적이고 공격적이고,
항상 그런 일에 바쁘고, 죽어서는 암흑에 이르며,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지옥에 떨어진다면,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닙니다. (stn248)
Na macchamaṃsaṃ nānasakattaṃ
Na naggiyaṃ na muṇḍiyaṃ jaṭājallaṃ
Kharājināni nāggihuttassupasevanā vā
Ye cāpi loke amarā bahū tapā
Mantā'hutī yaññamutūpavesanā
Sodhenti maccaṃ avitiṇṇakaṅkhaṃ.
생선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나, 단식하는 것이나,
벌거벗거나, 삭발하거나, 상투를 틀거나,
먼지를 뒤집어쓰거나, 거친 사슴 가죽을 걸치는 것도,
불의 신을 섬기는 것도, 또는 불사를 얻기 위해 많은 고행종류의 고행,
진언을 외우거나, 헌공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나,
계절에 따라 행하는 수련도
모두 의혹을 여의지 못한 자를 청정하게 할 수 없습니다. (stn249)
Sotesu gutto viditindriyo care
Dhamme ṭhito ajjavamaddace rato,
Aṅgātigo sabbadukkhappahīno
Na lippatī1 diṭṭhasutesu dhīro.
욕망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수호하고, 감관을 제어하며 유행하십시오,
진리에 입각해서 바르고 온화한 것을 즐기고,
집착을 뛰어넘어서 모든 고통을 버려버린 현명한 님은
보여지고 들려진 것 속에서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stn250)
2014-08-1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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