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중도와 십이연기의 관계는? 초기불교의 일곱가지 중도사상

담마다사 이병욱 2014. 8. 21. 18:29

 

 

중도와 십이연기의 관계는? 초기불교의 일곱가지 중도사상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 없다

 

전하는 뉴스에 따르면 누군가 교황에게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랑리본을 떼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라 한다. 이에 교황은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 없다는 취지로 말을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중립은 어떤 의미일까?

 

중립(中立)이라는 말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간적 입장을 지킴을 뜻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교황에게 중립을 지키라고 말한 사람은 좌와 우의 이념논리에서 중간을 지키라는 말과 같다. 아마 세월호리본을 단 사람들을 좌로 보고 달지 않은 사람을 우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교황은 이런 충고를 거절 하였다. 이번 만큼은 유족들의 고통을 들어 주겠다는 의지로 보여 준다. 이런 교황의 조치에 사람들은 감동한다.

 

정치권에서 중도는?

 

중립과 유사한 말이 있다. ‘중도(中道)’이다. 흔히 중도라고 하면 정치권용어로 알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중도를 표방하면 대게 사쿠라논쟁에 휘말린다. 이때 중도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중간의 입장을 뜻한다. 마치 박쥐가 새인지 아닌지 구별이 가지 않은 것처럼, 정치권에서 중도를 표방하면 기회주의자라고 낙인 찍히기 쉽다.

 

구경론으로서의 중도

 

중도라는 말은 정치용어로 알고 있지만 불자들에게는 중도라는 용어는 매우 익숙하다. 부처님이 중도의 가르침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의 최초 설법이라 알려져 있는 초전법륜경에서도 잘 표현 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Yocayā 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hito, yo cāya attakilamathānuyogo dukkho anariyo anatthasahito, ete te bhikkhave, 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 pa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ī ñāakara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vattati.

      

요짜양 까메수 까마수칼리까누요고 히노 감모 뽀툿자니꼬 아나리요 아낫타상히또, 요 짜양 앗따낄라마타누요고 둑코 아나리요 아낫타상히또, 에떼 떼 빅카웨, 우보 안떼 아누빠감마 맛지마 빠띠빠다 따타가떼나 아비삼붓다 짝쿠까라니 냐나까라니 우빠사마야 아빈냐야 삼보다야 닙바나야 상왓땃띠.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전재성님역)

 

 

아누라다푸라

 

 

초전법륜경에서 중도라는 말은 두 번나온다. 위 문장은 앞서 나온 중도에 대한 것이다. 그런 중도는 빠알리로 맛지마빠띠빠다(majjhimā paipadā)라 한다. Majjhimā‘middle; medium; moderate; central’의 뜻이고, paipadā'Road', 'path'를 의미하므로, 이를 합치면 한자어로 중도(中道)가 되는 것이다.

 

위 문장은 고락중도(苦樂中道)’에 대한 것이다. 극단적 쾌락과 극단적 고행의 양극단은 성현의 가르침도 아니고 동시에 무익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서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중도를 깨달았다 (majjhimā paipadā abhisambuddhā라고 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

 

빠알리어 ‘abhisambuddhā’의 의미는 abhisambujjhati의 과거분사(p.p)형태이다. 그래서 ‘gained the highest wisdom’라고 번역된다. ‘최상의 지혜를 얻었다라는 뜻이다. 이 최상의 지혜에 대하여 경에서는 1)궁극적인 고요(upasamāya), 2)곧바른 앎(abhiññāya), 3)올바른 깨달음(sambodhāya), 4)열반(nibbānāya)이라 하였다. 고락중도의 길을 가면 궁극적으로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첫 번째로 언급된 중도는 목적론또는 구경론이라 볼 수 있다.

 

방법론으로서의 중도

 

이어지는 가르침을 보면 두 번째로 언급된 중도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Katamā ca sā bhikkhave, majjhimā pa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ī ñāakara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vattati: ayameva ariyo aṭṭhagiko maggo seyyathīda: sammādiṭṭhi sammāsa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Aya kho sā bhikkhave, majjhimā pa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ī ñāakara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vattati.

 

까따마 짜 사 빅카웨, 맛지마 빠띠빠다 따타가떼나 아비삼붓다 짝꾸까라니 냐나까라니 우빠사마야 아빈냐야 삼보다야 닙바나야 상왓따띠: 아야메와 아리요 앗탕기꼬 막고 세이야티당: 삼마딧티 삼마산깝뽀 삼마와짜 삼마깜만또 삼마아지오 삼마와야모 삼마사띠 삼마사마디. 아양 코 사 빅카웨, 맛지마 빠띠빠다 따타가떼나 아비삼붓다 짝쿠까라니 냐나까라니 우빠사마야 아빈냐야 삼보다야 닙바나야 상왓땃띠.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전재성님역)

 

 

이 문장에서도 역시 중도가 등장한다. 이전 문장에 이어 두 번째 이다. 그런데 고락중도에 대하여 부처님은 팔정도라 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고락중도에 대하여 왜 팔정도라 하였을까? 이는 앞 문장과의 관계로 유추 할 수 있다.

 

이전 문장에서는 목적론 또는 구경론으로 중도가 설명되어 있다. 그와 관련된 말이 1)궁극적인 고요(upasamāya), 2)곧바른 앎(abhiññāya), 3)올바른 깨달음(sambodhāya), 4)열반(nibbānāya)이다. 그런데 이번 문장에서는 팔정도의 여덟 가지 실천항목이 소개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중도의 방법론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중도가 목적론 또는 구경론을 거론 하였다면 그 다음 수순은 어떻게 목적한 바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 방법을 제시한 것이 팔정도라 보여진다.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이 언급한 중도는?

 

이렇게 본다면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이 언급한 중도는 다음과 같이 표로 요약할 수 있다.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이 언급한 중도

 

     

 

구경론

(목적론)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열반의 성취

방법론

(실천론)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팔정도 실천

 

 

표를 보면 초전법륜경에서 중도가 두 가지로 설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구경론으로 중도가 설명되었고, 이어서 방법론으로서 중도가 설명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는 구경론과 방법론 모두를 설한 것이다.

 

성철스님의 중도론

 

그럼에도 대승불교에서는 오로지 구경론으로서 중도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에서 중도의 목적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 팔정도가 방법론(方法論)이냐 또는 목적론(目的論). 구경론(究竟論)이냐라는 논란이 있습니다. 팔정도는 구경 목표를 향하는 방법론이지 목적론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중도의 근본 뜻을 망각하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확실히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다고 하셨지 중도를 닦아서 바르게 깨달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중도를 바로 깨친 그 사람이 부처이므로 중도의 내용인 팔정도는 목적론인 것입니다.

 

(백일법문, 4 원교(圓敎)의 중도설, 성철스님)

 

 

성철스님은 법문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는 목적론(구경론)임을 분명히 말하였다. 그러나 초전법륜경을 보면 분명히 목적론(열반)과 실천론(팔정도)이 언급되어 있다.

 

성철스님의 중도관에 대하여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마성스님은 성철스님의 중도론에 대하여 성철스님은 부처님이 깨치신 진리가 ‘중도’이며, 그 중도의 내용이 팔정도이고, 팔정도는 방법론이 아닌 목적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대승불교적 시각인데, 자칫 잘못하면 초기불교의 실천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견해라고 오해받을 소지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성스님, <百日法門> 나타난 中道思想)”라고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중도는 바른길을 의미하는 것일까?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중간길이 아니다. 정치권에서 말하는 좌와 우의 중립 또는 가운데 길을 뜻하는 중도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에 대하여 바른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왜 그런가? 바른길이 있으면 바르지 않은 길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치권에서 누군가 자신의 중도주의자라 말하였을 때 좌와 우의 중도의미도 있을 수 있지만 이를 좀더 확대 해석하여 중도에 대하여 바른길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바른길을 가는 자와 바른 길을 가지 않는 자, 이렇게 이분법적인 편가르기가 발생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중도사상에 대하여 바른길이라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다양한 부처님의 중도사상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는 중간길이 아니다. 그렇다고 바르지 않은 것을 가정하여 바른길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는 명백하다. 그것은 초전법륜경에서 표현 된 것처럼 목적론이고 실천도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중도라는 말은 초전법륜경에만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빠알리니까에는 부처님의 다양한 중도사상이 있다. 이를 전재성박사가 지은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을 참고하여 표를 만들었다.

 

 

빠알리 니까야에 표현된 다양한 중도사상

No

 

   

경전적 근거

1

유무중도

(有無中道)

()는 무조건적인 유일 수가 없고, ()는 무조건적인 무일 수가 없다. 존재인 유()는 현상계의 소멸원리를 살펴보면 부정되고 비존재인 무()는 현상계의 생성원리를 살펴보면 부정된다.

"깟차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S12:15)

2

자타중도

(自他中道)

자기원인설은 자기에 의해서 자기가 만들어낸 세계가 결과함을 말한다. 타자원인설은 비자기에 의해서 자기가 성립한다는 것을 말한다. 자기원인설과 타자원인설은 인과관계의 선형성의 두 극단이라고 볼 수 있다.

"존자 고따마시여, 괴로움은 자기가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 고따마시여,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 고따마시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합니까?"

"깟싸빠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존자 고따마시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난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지 않습니다.”

(S12:17)

3

단상중도

(斷常中道)

자기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동일성은 곧 '모든 것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영원주의(常見)에 바탕을 둔 것이다.

타자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차별성은 곧 '모든 것은발생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斷見)에 바탕을 둔 것이다.

연기법에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모두 부정된다.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이 있는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 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영원주의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괴로움을 당하는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다.’ 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해당되는 것입니다.”(S12.17)

4

일이중도

(一異中道)

인과의 동일론과 차별론은 부정된다. 현상계가 완전히 동일하다던가 차별적이라고 한다면, 인과성의 원리는 성립할 수 없다.

1)“존자 고따마여, 모든 것은 하나입니까?

“바라문이여, 모든 것이 하나라고 하는 것도 세 번째로 세속철학입니다.

“존자 고따마여, 모든 것은 다양합니까?

“바라문이여, 모든 것이 다양하다는 것도 네 번째로 세속철학입니다. 바라문이여, 이 양극단을 떠나서 여래는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합니다.(S12:48)

 

2)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라는 견해가 있다면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여래는 이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S12.35)

5

거래중도

(去來中道)

어디서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

조건에 따라 생성되고 조건에 따라 소멸되는 연기법칙에 따른다.

인과성에 공간적 접근성이 수반되지 않는다.

1) "수행승들이여, 시각()이 생길 때 어떤 다른 것에서 오지 않으며, 그것이 사라져버릴 때 어떤 곳에 축적되어 가지도 않는다.”(제일의공경, 산스크리트어본)

 

2) “밧차여, 그대 앞에 불이 꺼진다면, ‘그 불은 이 곳에서 동쪽이나 서쪽이나 남쪽이나 북쪽의 어느 방향으로 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밧차여, 그 물음에 대하여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M72)

6

생멸중도

(生滅中道)

우다나에서 생멸의 부정이 다른 중도설에서 부정되는 양 극단과 함께 등장하고 있어 후대에 용수가 생멸의 부정을 왜 팔부중도에 포함시켰는지 추측하게 할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바람도 없고, 무한공간의 세계도 없고, 무한의식의 세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도 없고,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태양도 없고 달도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의처(依處)를 여의고,

전생(轉生)을 여의고, 대상(對象)을 여읜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Ud81)

7

고락중도

(苦樂中道)

초기불교에서 연기설과 관련된 고락중도는 다른 중도사상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녔다. 일반적으로 고락중도는 일반적인 인과관계의 속성이라기 보다는 수행적 인과관계에 관련된 특수한 속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S56.11)

(출처: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전재성박사) 

빠알리 니까야에 표현된 다양한 중도사상_140822.docx

 

빠알리니까야에서는 일곱 가지 중도가 나온다. 이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1번항 깟짜야나곳따경(S12.15)’의 유무중도(有無中道) 7번항 초전법륜경(S56.11)’의 고락중도(苦樂中道)일 것이다.

 

용수의 팔부중도(八不中道)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중도사상은 용수의 팔부중도(八不中道)’보다 더 다양한 것이다. 그렇다면 용수의 팔부중도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여덟가지가 그릇된 망념을 일으키므로 이를 깨뜨리기 위하여 일체현상이 자성이 없다는 도리를 밝히고 불생, 불멸, 불거, 불래, 불일, 불이, 부다, 불상의 팔불의 정관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전재성님의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에 따르면 용수의 팔부중도는 이미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것이다. 위 표에서 6번항 생멸중도가 그것이다.

 

우다나 열반의 경(Ud81)에서

 

표에서 6번항을 보면 우다나 열반의 경(Ud81)’이 있다. 이 경에서 부처님의 게송이 있는데 이 게송의 문구가 용수의 팔부중도에 해당되는 문구가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일불이(不一不異)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바람도 없고,
무한공간의 세계도 없고, 무한의식의 세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도 없고,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태양도 없고 달도 없다.

 

 

2) 불래불거(不來不去)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3) 불상부단(不常不斷)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4)불생불멸(不生不滅)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의처(依處)를 여의고,

전생(轉生)을 여의고, 대상(對象)을 여읜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Ud81)

 

 

 

불일불이(不一不異)

 

용수의 불일불이(不一不異)란 무엇일까? 그것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다르나 그 진리의 본체에서 보면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다르다거나 동일하다는 집착성을 부정하였다. 그런데 우다나에서 용수의 불일불이(不一不異)와 유사한 문구가 있다. 그것은 우다나 게송에서 지수화풍과 사무색처에 대한 것이다.

 

게송에서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라는 말이 열반을 뜻한다. 그런 열반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이다. Uda.391에 따르면 꿈속에서조차 경험 해 보지 못한 세계라 한다. 가장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부드럽고 미세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지극히 고요하고, 현자에게만 알려지고, 지극히 미묘한 불사의 세계가 열반이라 한다.

 

그런데 게송에서는 지수화풍 사대를 부정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설명에 따르면 현상세계의 다양성의 부정을 뜻한다. 이는 다름 아닌 차별성의 부정을 뜻한다. 이것이 불이(不異)’이다.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사무색처의 부정이 나온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설명에 따르면 내적 본질의 자기동일적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동일성의 부정이다. 이것이 불일(不一)이다.

 

이와 같은 불일불이는 열반의 속성이 분명히 드러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우다나의 게송이 용수의 불일불이(不一不異)를 말한 것이 아니다.

 

불래불거(不來不去)

 

용수의 불래불거(不來不去)가 있다. 이 말은 일체중생이 무명망상으로 윤회하여 왔다 갔다 하지만 본래 진리의 당체는 오고 가는 체성이 아닌데, 임시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실제의 현상으로 집착함을 타파 하는 것이라 설명되어 있다. 이 불래불거에 해당되는 말이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neva āgatii, na gati).”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다나의 게송이 용수의 불래불거(不來不去)를 말한 것이 아니다.

 

불상부단(不常不斷)

 

용수의 불상부단(不常不斷)은 무엇일까? 모든 밥은 인연의 집합으로 모이고 흩어지는고 하는데, 영원히 상주한다거나 단멸한다고 착각하는 극단적인 사고를 타파한 것이다. 이에 대한 구절이 우다나에서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na gati, na hiti)”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다나의 게송이 용수의 불상부단(不常不斷)을 말한 것이 아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마지막으로 용수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생멸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일체법의 생은 인연이 화합하여 나타난 것이며 멸하는 것도 인연이 다 되어 사라지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인연의 유무에 따라 생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생멸에 대한 착각과 집착을 고쳐 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이 불생불멸에 대한 것이 우다나에서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na cuti, na upapatti)”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다나의 게송이 용수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우다나의 게송에는 용수의 팔부중도에 대한 대강이 들어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용수의 팔부중도가 우다나에서 표현된 네 가지 중도에 대한 것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다.

 

초기불교 일이중도(一異中道)사상의 예를 보면

 

초기경전에서는 용수의 팔부중도 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한 부처님의 중도사상이많다. 그런 부처님의 중도중에 4번항 일이중도(一異中道)’가 있다. 그런데 용수의 불일불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른 것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No kallo pañhoti bhagavā avoca. "Katama jarāmaraa? kassa ca panida jarāmaraanti?" Iti vā bhikkhu yo vadeyya, "añña jarāmaraa aññassa ca panida jarāmaraanti" iti vā bhikkhu yo vadeyya, ubhayameta ekattha. Byañjanameva nāna.

 

"Ta jīva, ta sarīranti" vā bhikkhu diṭṭhiyā sati brahmacariyavāso na hoti. "Añña jīva, añña sarīranti" vā bhikkhu diṭṭhiyā sati brahmacariyavāso na hoti. Ete te bhikkhu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 deseti jātipaccayā jarāmaraanti.

 

[세존]

 

그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수행승이여, ‘늙음과 죽음이란 무엇이고,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하거나 수행승이여, ‘늙음과 죽음이라는 것과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자가 서로 다르다.’고 한다면, 그 양자는 같은 것이며 표현만 다른 것이다.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라는 견해가 있다면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여래는 이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

 

(Avijjādipaccaya desanā sutta-무명을 조건으로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35, 전재성님역)

 

 

경에서 그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No kallo pañho)라 하였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 한마디로 질문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질문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말한 것은 한수행승이 세존이시여, 늙음과 죽음이 무엇이고,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자는 누구입니까?”라고 물어 본 것에 대한 지적이다. 이는 수행승의 질문이 적절해 보일지 모르지만 누구에게 늙음과 죽음이 있는가?”라고 물어 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악취나는 질문

 

왜 이와 같은 질문이 잘못 된 것일까? 그것은 영혼이 있다고 가정하고 질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 따르면 접시 위에 똥덩어리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황금쟁반 위에 맛있는 음식을 담은 접시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약간의 똥덩어리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대부분 먹지 않고 버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구에게 늙음과 죽음이 있는가?”라고 물어 보는 것은 영혼이 있다고 가정하고 물어 보는 것과 같기 때문에 악취나는 질문이라 볼 수 있다. 마치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 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질문자가 유아임을 가정하며 무아윤회론의 모순을 지적하고자 함은 음식에 똥덩어리가 떨어진 것처럼 악취 나는 질문이고, 동시에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인 것이다.

 

극단적 견해를 가졌을 때

 

부처님은 늙음과 죽음그리고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자에 대하여 육체와 영혼의 비유를 들었다. 이렇게 본다면 늙음과 죽음은 육체’,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자는 영혼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한 문제이다.

 

육체(물질)를 강조하면 허무주의자가 되고, 영혼(정신)을 강조하다 보면 영원론자가 된다. 이는 없다있다와 같은 것이다.

 

영혼과 육체를 서로 같은 것(Ta jīva, ta sarīranti)’으로 본다면 허무주의자가 된다. 육체가 파괴되면 정신도 죽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반대로 영혼과 육체가 서로 다른 것(Añña jīva, añña sarīranti)’으로 본다면 영원주의자가 된다. 육체가 파괴되더라도 정신만은 죽지 않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극단적인 허무주의적 견해와 극단적인 영원주의적 견해에 대하여 부처님은 모두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라 하였다 

 

팔정도가 없는 삶

 

그렇다면 왜 허무주의와 영원주의 견해를 가지면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할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Srp.II.68-69에 따르면, 여기서 청정한 삶은 여덟 가지 고귀한 길(八正道)을 가는 삶을 말한다. ‘영혼과 신체가 같다.’는 것은 죽음과 함께 영혼도 단멸한다는 허무주의자의 견해를 말한다. 허무주의자들은 고귀한 길을 통하지 않고도 윤회를 끝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고귀한 길을 닦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영혼과 신체가 다르다.’는 것은 신체만이 파괴되고 영혼은 새장에서 날아가는 것 같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는 것으로 영원주의자의 견해이다. 하나의 형상이라도 지속적이고 견고하고 영원한 것이 있다면, 고귀한 길을 닦아 윤회를 끝낼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고귀한 길을 닦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2 189번 각주, 전재성님)

 

 

청정한 삶을 살아 가기 위한 조건으로 팔정도를 들고 있다. 그러나 허무주의자나 영원주의자들에게는 팔정도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팔정도를 통하지 않고도 윤회를 끝낼 수 있다고 보는 자들이 허무주의 자들이라 한다. 허무주의자들은 단지 육체적 죽음으로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본다. 이런 견해를 가졌을 때 보시의 공덕 등 인과가 무력화 된다.

 

영원주의자들이 팔정도를 닦지 않는 것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연기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조건발생하여 형성된 것은 조건이 다하면 소멸되기 마련임에도 변치 않고 죽지도 않는 영혼이 있다고 본다면 결코 윤회를 끝낼 수 없을 것이다.

 

중도와 십이연기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는 일곱 가지 중도를 보면 하나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양극단에 대한 중도이다. 그 양극단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고락, 유무, 단상, 일이, 자타, 생멸, 거래 등이다. 그런데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양극단에 대하여 부처님은 중도의 가르침을 설한다고 하였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는 팔정도와 십이연기이다. 특히 십이연기가 대부분이다.  이에 대하여 일곱가지 중도사상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았다.  

 

 

중도와 십이연기

No

중  도

 

초기경전

1

유무중도

(有無中道)

십이연기

순관과 역관

깟짜야나여,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소 가르침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깟짜야나곳따,S12.15)

2

자타중도

(自他中道)

십이연기

순관과 역관

깟싸빠여,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소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아쩰라 깟싸빠의 경, S12.17)

3

단상중도

(斷常中道)

십이연기

순관과 역관

깟싸빠여,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소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아쩰라 깟싸빠의 경, S12.17)

4

일이중도

(一異中道)

십이연기

순관과 역관

 

바라문이여,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소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세속철학의경 , S12.48)

5

거래중도

(去來中道)

 

 

6

생멸중도

(生滅中道)

 

 

7

고락중도

(苦樂中道)

팔정도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초전법륜경, S56.11)

 

 

표를 보면 중도사상은 십이연기로 설명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유무, 자타, 단상, 일이 중도의 경우 양극단을 설명하고 난 다음 반드시 조건발생에 따른 십이연기정형구가 삽입 되어 있다. 고락중도로 설명되는 초전법륜경(S56.11)에서는 십이연기정형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팔정도 정형구가 소개 되어 있다.

 

중도에서 십이연기를 설한 세 가지 이유

 

그렇다면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난 중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십이연기를 말씀 하셨을까?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은 다름 아닌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육체의 죽음과 함께 정신도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허무주의적 견해는 연기의 순관에 따르면 조건에 따라 뒤이어 일어나는 법을 관찰하면 거짓이 된다. 그리고 육체의 죽음과 무관하게 변치 않는 자아가 있다고 보는 영원주의적 견해는 연기의 역관에 따르면 조건에 따라 소멸하는 법을 관찰하면 무너진다. 이처럼 양극단이 모순이고 거짓임은 연기법으로 밝혀진다.

 

부처님이 양극단에 대한 중도로서 십이연기를 설한 두 번째 이유는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도를 설명할 때 십이연기의 순관 뿐만 아니라 역관도 함께 설하고 있다. 연기의 역관으로 관찰해야 열반을 실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양극단에 대한 중도로서 십이연기를 설한 세 번째 이유는 단멸론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 보여진다. 부처님 당시 외도들은 열반을 설하는 부처님을 단멸론자로 오해 하였다.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십이연기 순관과 역관을 함께 설한 것이라고 주석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요약하면

 

부처님이 설한 중도는 목적론(열반)과 실천론(팔정도)으로서의 중도라 볼 수 있다. 이는 초전법륜경(S56.11)에서 확인 된다. 그런데 초전법륜경 외에도 니까야에는 다양한 중도사상이 있다는 것이다. 모두 일곱 가지로 정리 된다. 이런 중도사상은 용수의 팔부중도와 다른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중도사상을 설하면서 대부분 십이연기를 함께 설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십이연기를 설한 이유로서 세 가지로 보았다. 첫 번째는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이고, 두 번째는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이고, 세 번째는 단멸론자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 볼 수 있다. 세 번째 견해는 주석을 근거로 한 개인적인 견해이다.

 

 

 

2014-08-21

진흙속의연꽃

빠알리 니까야에 표현된 다양한 중도사상_140822.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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