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삽베삿따바완뚜수키땃따” 원한 맺힌 자에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9. 1. 18:27

 

삽베삿따바완뚜수키땃따원한 맺힌 자에게

 

 

 

운전을 하다 보면

 

운전을 하다 보면 차가 꽉 막힐 때가 있다. 고속도로에서 고속으로 달려야 하나 기어가다시피 할 때 운전자들은 어떤 일이 일어 났는지 매우 궁금해 한다. 대부분 사고가 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오랜 정체 끝에 속도가 나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고속으로 달린다. 그렇다면 왜 정체가 일어났을까?

 

이유 없이 막히는 경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러시아워가 아닌 때 막히는 경우 사고가 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고도 없는데 이유 없이 막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흐름에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도로는 흐름이 원활해야 한다. 특히 고속도로가 그렀다. 그래서 과속을 제한 하기도 하지만 저속도 제한한다. 누군가 매우 저속으로 운행을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흐름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런 흐름 방해는 뒤따라 오는 차에 영향을 준다. 차츰차츰 브레이크를 밟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브레이크를 밟기 시작하면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 처음 브레이크를 밟은 자로부터 멀어질수록 속도가 줄어든다. 그래서 아주 먼거리 있는 사람들은 차가 밀릴 때 어떤 이유인지 알지 모른 채 교통체증이 풀리기만을 한없이 기다려야 한다.

 

흐름을 방해하는 또 하나 케이스가 있다. 그것은 고속도로에서 경주하는 차들이다. 어떤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서로 경쟁이 붙어 차선을 바꾸어 달릴 경우 뒤이어 오는 차들은 위험을 감지하고 브레이크를 밟는다. 이렇게 한번 브레이크를 밟으면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마치 고요한 호수에 돌맹이를 던지면 파문이 파문을 일으켜 멀리 퍼져 가듯이 누군가 성냄으로 운전하였을 때 심한 교통체증을 유발하게 된다. 이런 경우는 삶에서도 볼 수 있다.

 

호수에 파문이 일 듯

 

회사에서 사장이 화를 내면 그 파급효과가 매우 크다. 회사분위기는 얼어 붙고 분위기는 냉냉해진다. 매스컴에서는 종종 대통령이 격노하였다는 말을 전한다. 이럴 경우 공직사회는 경직 된다. 심지어 공포심까지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경우 영향을 받지 않는다. 대통령이 격노 하였다고 하여 내가 하는 일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인터넷과 정보통신이 발달한 요즘 대부분 연결 되어 있다. 가정이나 직장, 일터등 어느 곳이든지 네트워크가 깔려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때 자극 받을 수 있다. 누군가 인터넷에서 나에게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였을 때 즉각적인 감정 반응을 일으킨다. 심하면 손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비록 직접적인 대면이 없을지라도 글로서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정보통신시대에 누군가의 글을 보고 자극 받을 수 있다. 자극 받는 다는 것은 나의 감정상태가 변화 하였음을 말한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의 글에 자극 받아 감정변화를 일으켜 생활의 리듬이 깨졌다면 마치 고속도로에서 차가 밀리는 것과 같고, 호수에 돌을 던져 파문이 이는 것과 같다.

 

공기를 통해서도 가능한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도 자신의 감정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같은 하늘아래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사는 이웃의 감정변화에 자신의 감정도 영향을 받을 수 있을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종교적으로 보았을 때 충분히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본다. 한사람이 화를 냈을 때 그 화가 공기를 타고 전파 되는 경우를 상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특정인을 지목하여 저주를 하였을 때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저주가 있다면 이와 반대 되는 개념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애이다. 성냄을 뿌리로 하는 저주가 상대방에게 원망의 마음과 해꼬지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라면 반대로 자애의 마음은 상대방에게 우호적인 마음을 내 보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 된다.

 

삽베삿따바완뚜수키땃따(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초기경전에서는 자애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많이 나온다. 사부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가장 유명한 경전이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자애경(Sn1.8)’이다.

 

자애경에서 키워드는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 stn145)”라는 말일 것이다. 이는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라고 바라는 것이다. 모든 중생이라 하였을 때 이는 삽베 삿따(sabbe sattā)’를 말하고, 바란다는 뜻은 바완뚜 (bhavantu)’이다. 행복은 수키(sukhi)의 번역어이다. 수키땃따 할 때 땃따(tattā)‘[nt.] the real nature; reality. (pp. of tapati), heat; hot; glowing’의 뜻으로 진실로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삽베삿따바완뚜수키땃따(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 stn145)’를 다시 번역해 보면 모든 존재들이 진실로 행복하기를!”이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삿따를 존재들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때 존재는 인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아래로는 지옥중생에서부터 위로는 비상비비상처정의 천신들, 그리고 사쌍팔배의 성자에 이르기 까지 모든 유정중생을 뜻한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름다운 마음이다. 그것도 진실로(tattā)’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매우 아름다운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기독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마음 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이다. 왜 그럴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부모나 형제, 자식을 죽인 원수가 있을 때 원한 맺힌 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때 사랑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식 사랑을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끼리의 사랑을 말한다. 신의 피조물로서 신의 사랑을 뜻한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사랑이라고 말하였을 때 보통사람들이 말하는 사랑과 다른 것이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을 때 그 사랑이라는 말은 기독교라는 특수한 관계속에서 설정된 사랑을 뜻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 하신 자애는 보편적 사랑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특수한 관계가 아니라 모든 존재들에 대한 보편타당한 사랑을 말한다. 이를 자애(metta)’라 한다.

 

불교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불교에서도 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삐야(piya)이다. 그런데 삐야는 자애를 뜻하는 멧따와 다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자신보다 사랑스런 것은 없다” 삐야(piya,사랑) 아니라 멧따(metta, 자애)(2012-12-07)’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삐야는 무슷 뜻일까?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말리까의 경(S3.8)을 보면 다음과 같다.

 

 

[빠쎄나디]

 “말리까여,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이 있소?

 

[말리까]

“대왕이시여,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런데 전하께서는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Mallikāsutta- 말리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3:8(1-8),전재성님역)

 

 

 

茉莉花

 

 

꼬살라의 빠세나디국왕이 왕비인 말리까 부인에게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이 있소? (devi etadavoca: atthi nu kho te mallike ko cañño attanā piyataroti?)”라고 묻는다. 왜 이런 말을 하였을까? 그것은 요샛말로 하면 자기 나 사랑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왕은 예상 이외의 답변을 듣는다. 왕비는 대왕이시여,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Natthi kho me mahārāja ko cañño attanā piyataro).”라 하여 왕이 원하는 답변을 일축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왕비는 왜 왕의 의도와 달리 말하였을까? 이는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남들도 사랑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자기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남도 사랑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왕비는 대왕이시여,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Tuyha pana mahārāja atthañño koci attanā piyataroti?)”라고 되물음으로서 사실상 왕이 듣고 싶은 답을 우회적으로 말한 것이다. 이에 빠세나디 국왕은 곧바로 알아 듣고 “말리까여, 나에게도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은 없소.( Mayhampi kho mallike natthañño koci attanā piyataroti. S3:8)”라고 말함으로써 왕비의 말을 추인한다.

 

지혜로운 여자 말리까부인

 

말리까부인은 지혜로운 여자로 알려져 있다. 주석에 따르면 말리까부인은 꽃다발을 만들어 파는 가난한 집의 딸이었다. 16세 때에 부처님을 만나 부처님께 유미죽 공양을 드렸다고 한다. 부처님은 그녀가 왕비가 될 것을 예견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부처님과의 인연이 있는 말리까가 현세에 빠세나디를 만나는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빠세나디가 전쟁에서 패하여 도망다니다가 그녀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져 그녀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제일의 왕비가 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말리까가 왕비가 되었기 때문에 빠세나디 왕은 자신이 가난한 소녀를 왕비로 만들어 준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나보다 사랑스럽소”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물어 본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왕비는 “자신보다 사랑스런 것은 없다”라고 말함으로서 왕으로 하여금 말리까여, 나에게도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은 없소.(S3:8)”라는 말을 유도해 낸 것이다. 그래서일까 빠알리어 법명을 지을 때 여성불자들은 말리까라는 법명을 선호한다고 한다.

 

멧따(metta)란 무슨뜻일까?

 

경에서는 사랑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여기서 사랑이라고 번역한 말은 빠알리에 삐야(piya)에 대한 것이다. 이 삐야라는 말은 ‘dear; amiable; beloved.’의 뜻이지만 이를 한자어로 표현 한다는 를 뜻한다. 남녀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부모자식간의 사랑이 이에 해당된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의 사랑은 빠알리어 삐야에 가깝다.

 

그러나 모든 존재들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에 대한 용어는 멧따(metta)이다. 빠알리어 멧따는 영어로 'loving-kindness'로 번역된다. 이는 사무량심 중의 하나이다. 또 멧따는 ‘amity(우호); benevolence(자비심)’의 뜻도 있다. ‘Friendliness, friendly feeling, good will, kinduess, love, charity’의 뜻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멧따는 우정, 우호, 자비심 등의 뜻이 된다. 일반적으로 멧따는 자애로 번역된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과 자애는 다른 말이 된다. 자애를 뜻하는 멧따는 사랑을 뜻하는 삐야를 포괄하고 있으며 인간을 뛰어넘어 전 우주적 영역으로 확대 된 보편적 사랑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그들끼리 말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과 불교에서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이라고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사랑이다.

 

원한 맺힌 자에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들끼리의 사랑이다. 그들의 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끼리의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보편적이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어떻게 원수를 대할까? 이는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Yasmi bhikkhave, puggale āghāto jāyetha, mettā tasmi puggale bhāvetabbā. Eva tasmi puggale āghāto paivinetabbo.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된다.

 

(Pahama āghātapaivinayasutta-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61, 전재성님역)

 

 

여기 원한 맺힌 자가 있다. 부모를 죽였거나, 형제를 죽였거나, 자식을 죽인 원수를 말한다. 원한 맺힌 자는 나를 힘들게 한 사람도 해당된다. 요샛말로 그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혼한 전처나 전남편이 될 수도 있고, 돈을 떼먹고 도망간 채무자도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군상은 눈에 흙이 들어 가는 순간에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원한 맺힌 자’, ‘그인간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만 본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수행을 통하여 원한의 마음까지 제거함을 뜻한다.

 

초기경전에서 자애를 뜻하는 멧따라는 용어는 수 없이 등장한다. 이런 용어가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과 같이 단순하게 자애의 마음을 내어라라고 그치는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애의 마음을 낸다는 말은 수행을 뜻한다. 그래서 자애수행을 하여 자신에게 남아 있는 원한의 마음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자애수행으로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였을 때 원한의 마음이 일어 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슬로건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다.

 

원한은 원한으로 풀리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수행을 통하여 원한의 마음을 제거한다. 부모, 형제, 자식을 죽인 철천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라기 보다 성냄에 뿌리를 둔 원한의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단지 구호에 지나지 않지만 원한맺힌 자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이 제거된다(tasmi puggale āghāto paivinetabbo)”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원한이라고 번역된 말이 āghāto이다.  Āghāto ‘Anger, ill-will, hatred, malice’의 뜻으로 성냄, 사악한 의도, 증오, 원한을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원한을 원한으로서 제거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는 법구경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설명될 수 있다.

 

 

Na hi verena verāni              나 히 웨레나 웨라니

sammantīdha kudācana,           삼만띠다 꾸다짜낭
Averena ca sammanti,            
아웨레나 짜 삼만띠

esa dhammo sanantano.            에사 담모 사난따노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윔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원한 맺힌 자에게 복수를 한다고 하여 원한이 풀리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원한의 여윔으로 그친다 (Averena ca sammanti)”라 하였다. 원한의 마음을 내려 놓았을 때 비로소 원한이 그친다고 하였다. 이는 원수를 사랑하라든가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과 다른 것이다. 원수라는 말 자체를 무력화 시키는 것이다.

 

원한을 여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자애의 마음을 내라는 말과 같다. 성냄에 뿌리박은 원한(verā)’이라는 말은 자애와 반대 되는 말로서, 원한 맺힌 자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자애의 마음을 낸다고 하여 상대방을 조정하는 것은 아니다. 강력한 자애의 마음을 방사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감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였을 때 비로서 원한을 내려 놓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유일신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 보다 훨씬 더 수승한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애수행은 40가지 사마타수행 중의 하나에 속해 있다.

 

어떻게 원한의 마음을 제거할 것인가?

 

자애에 대하여 언급 될 때 항상 따라 붙는 말이 있다. 그것은 자애와 함께 연민과 기뻐함과 평정이다. 이를 사무량심이라 한다. 그래서 초기경전 도처에서 정형구로 정형화 되어 있다.

 

그렇다면 원한 맺힌 자에게 원한의 마음을 여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대펴적인 경이 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A5.161)’이다. 그런데 이 경을 보면  사무량심 중에 기뻐함(무디따)이 빠져 있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만일 기뻐함이 들어 간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기뻐함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라고 되어 버릴 것이다. 원한 맺힌 자, 그인간에게 기뻐하는 것이 원한을 여의는 것이다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무량심 중에서 기뻐함(무디따)가 빠지고 그 대신 새김없음(asati)’업의 주인임을 반조함이 추가 되어 모두 다섯 가지 항목이 되었다. 경을 근거로 하여 이 다섯 가지에 대하여 다섯 가지 방식에 대하여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No

구분

내용(A5.161)

 

1

자애

mettā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2

연민

karuā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3

평정

upekkhā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평정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4

새김의 놓음

asati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

새김을 놓아 버리고

5

업의 주인

kammassakatā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행위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이와 같이 이 사람에게 행위가 주인이고, 행위가 상속자이고, 행위가 모태이고, 행위가 친족이고, 행위가 의지처이다.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하면,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인식해야 한다.”

행위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원한을 놓아 버리는데 다섯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방식을 뜻한다. 그래서일까 이 경의 중요성에 대하여 니까야의 주석서이자 동시에 수행지침서라 볼 수 있는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 되어 있다.

 

 

앞서 설한 이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도반들이여, 이것이 적개심을 제거하는 다섯 가지 방법이니 비구에게 적개심이 일어나면 이것으로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A.iii.186-90)”라는 증지부 다섯의 모음에 있는 절복진노경(折伏瞋怒經, āghātapaivinayasutta)을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

 

(청정도론 9 21, 대림스님역)

 

 

여기서 절복진노경이라 한 것은 ‘Pahama āghātapaivinayasutta(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61)을 말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A5.161)’ 5세기 붓다고사가 인용하였을 정도로 매우 비중 있는 경이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자애수행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근거가 되는 경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원한 맺힌 자에게 연민하는 이유는?

 

경에 따르면 모두 다섯 가지 방법이 소개 되어 있다. 첫 번째, 자애에 대한 것은 모든 중생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이라고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두 번째 연민에 대한 것을 보면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원한 맺힌 자에게 연민을 내어야 할까?

 

연민이라는 말은 까루나(karuā)의 번역어이다. 까루나의 뜻은 ‘[f.] compassion; pity’의 뜻이다. 동정, 불쌍함, 애석함 등으로 해석된다. 원수에 대하여 원한의 감정 대신 연민의 마음을 내라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할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그러면 지금 이자가 비록 인간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며칠도 못가서 여덟 가지 큰 지옥이나 열여섯 가지 작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그 사람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연민을 통해 적개심은 가라 앉는다.

 

(청정도론 9 20, 대림스님역)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은 그 사람이 불쌍해서이다. 원한 맺힌 자가 신체적으로 또는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죄를 지었다면 그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받을 것이다. 행위에 대한 과보는 어떤 식으로든지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증오한다고 하여 과보로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증오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내가 과보를 받을 수 있다. 이럴 경우 연민해야 한다. 왜그럴까? 악행을 하여 죄업을 지은 자는 내가 관여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살해 하였다면  현생에서도 과보를 내생에서도 과보를 받는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슬퍼하니 이 세상에서도 슬퍼하고 저 세상에서도 슬퍼한다.(dhp15)”라 하였다. 이는 자신의 더러운 업을 보고 통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에게 몹쓸 짓을 저지른 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굳이 복수를 한다거나 증오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 단지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을 것에 대한 연민의 마음만을 내면 된다.

 

평정의 마음을 닦았을 때

 

세 번째 항목에서 원한이 생겼을 때 평정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수행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평온수행을 닦고자하는 자는 먼저 자애 등에 대해 세 번째선() 네 번째 선() 얻어야 한다. 이미 익숙한 제3선으로부터 출정하여 처음 세 가지 [자애 연민 더불어 기뻐함에] 대해 위험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행복하기를!’하는 방법으로 중생의 즐거움에 대해 마음에 잡도리함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이고, 적의와 찬사가 가까이 있기 때문이고, 기쁨과 관련되어 거칠기 때문이다. 아울러 [평온의] 고요한(sata) 고유성질을 통해서 평온의 이익을 보아야 한다.

 

(청정도론 984, 대림스님역)

 

 

평온수행은 네 번째 선정에 속한다. 그러나 자애, 연민, 기뻐함 수행은 네 번째 선정에 속하지 않는다. 네 번째 선정에 대한 정형구는 행복도 고통도 버려지고, 기쁨도 근심도 사라진 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에 든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집중이라고 한다. (S45:8)”이다. 여기서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upekhāsatipārisuddhi)’이라는 말이 있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이라 번역하였다. 이는 네 번째 선정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평정하지만 그것은 알아차림이 있는 청정한 상태임을 뜻한다. 이런 평온의 상태에서는 행복, 기쁨, 근심, 괴로움, 즐거움이 있을 수 없다. 지극히 평온하고 알아차림이 있는 청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한자어로 사념청정(捨念淸淨)’이라 한다.

 

이런 평온의 상태에서는 행복, 기쁨, 근심, 괴로움, 즐거움이 있을 수 없다. 네 번째 선정의 경우 오로지 평온만이 있기 때문에 자애의 마음, 연민의 마음, 기뻐함의 마음 또한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경에서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평정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선정수행의 관점에서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왜 새김을 놓으라 하였을까?

 

네 번째 항목 새김의 놓음(asati)’과 다섯 번째 항목 업의 주인(kammassakatā)’이 있다. 이 두 항목은 원한을 제거 하는데 있어서 매우 특별한 항목이다. 자애, 연민, 평정만으로 원한을 제거 하기 힘들 경우 추가로 더해 지는 수행방법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 두가지가 추가 되었을까? 먼저 새김의 놓음(asati)’에 대한 것이다.

 

초기경전 도처에서는 사띠(sati)를 강조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을 한 단어로 압축한다면 사띠가 될 것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수행처에서 늘 하는 말이 알아차림(sati)이다. 그런데 원한의 마음을 제거 하는데 있어서 알아차리자 말자고 한다. 그래서 새김을 놓아 버리고(asati)”라고 하였다.

 

새김을 놓는다는 말이 ‘asati’이다. 그런데 이 말은 ‘amanisikāro’와 함께 쓰여 “asati amanisikāro”라 되어 있다. 이는 새김을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라고 해석된다. 이 구절에 대한 청정도론의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맛지마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이 관련된 구절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관찰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배우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은 거룩한 이를 인정하지 않고, 거룩한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에 이끌리지 않고, 참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참사람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에 이끌리지 않는다. 그들은 정신을 써야 할 것에 대해 잘 모르고,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잘 모른다.

 

그들은 정신을 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므로,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고, 정신을 써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지 않는다.

 

(모든 번뇌의 경, 맛지마니까야 M2, 전재성님역)

 

 

모든 번뇌의 경(M2)’에 따르면 번뇌가 발생하는 요인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원한 맺힌 자에 대하여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이 된다. 그럴 경우 번뇌만 증가 될 것이다.

 

원한의 마음을 내지 않으려면 원한 맺힌 자또는 그인간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 asati amanisikāro tasmi puggale āpajjitabbā)”라고 하였을 것이다.

 

원한 맺힌 자 또는 그인간을 생각하면 화가 솟구쳐 오른다. 그사람 이름만 들어도 피가 거꾸로 솟구친다.  그래서 증오의 마음이 일어나고 증오의 마음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마치 폭주 하는 기관차처럼 마구 불선한 마음으로 가득해진다. 그렇다고 하여 상황이 변화 되는 것은 아니다. 증오의 마음을 가짐으로 인하여 자신만 고통스러울 뿐이다. 이는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을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뇌가 일어난 것이다.

 

자신이 업의 주인임을 반조해야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항목에 업의 주인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kammassakatā’의 번역어이다. 빠알리어 깜맛사까따는 행위가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행위에 대한 책임성을 의미한다.

 

누구나 행위를 하면 그에 대한 과보를 받는다. 그런 행위는 좋은 행위도 있고 나쁜 행위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선행을 하면 선과보를 받고, 악행을 하면 악과보를 받는 것은 인과법에 따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지은 행위는 반드시 과보로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행위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원한 맺힌 자에 대하여 증오심을 낸다는 것은 증오심을 낸 것에 대한 과보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 원한 맺힌 자가 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우연히 마주쳤을 때 어떤 생각이 날까? 부모나 형제, 자식을 해친 자라면 그 자리에서 해칠 지 모른지다. ‘그인간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구친다. 그래서  죽일놈!”이라 고 소리치거나 생각으로 살해하는 것을 연상한다면 이는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불선업을 짓는 것이 된다.

 

불선업은 불선업에 대한 과보를 받게 된다. 이는 자신이 행위에 대한 주인이기 때문이다. 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원수를 저주하고 증오의 감정을 내비친다고 하여도 결국 자신이 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과보는 마땅히 받아야 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행위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사람에 대하여 나쁜 마음을 먹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kammassako ayamāyasmā kammadāyādo kammayonī kammabandhū kammapaisarao. Ya kamma karissati kalyāa vā pāpaka vā, tassa dāyādo bhavissatī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행위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이와 같이 ‘이 사람에게 행위가 주인이고, 행위가 상속자이고, 행위가 모태이고, 행위가 친족이고, 행위가 의지처이다.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하면,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인식해야 한다.

 (A5.161)

 

 

이 문구는 정형화 되어 있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M135)’등 초기경전에서 정형구로 나타난다. 그리고 청정도론에서도 설명 되어 있다.

 

어떻게 반조할 것인가?

 

청정도론에 따르면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에게 해당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반조할 것인가? 먼저 자기의 것을 반조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이와 같이 자기를 훈계해도 적개심이 가라앉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나 남에게 업이 각자 자기의 주인임을 반조해야 한다. 우선 이와 같이 자기 것을 반조해야 한다.

 

‘여보게, 그에게 화를 내어 무엇을 할 것인가? 화냄으로 인한 그대의 업이 장차 그대를 해로움으로 인도하지 않겠는가? 그대의 업이 바로 그대의 주인이고, 그대는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그대의 권속이고, 업이 그대의 의지처이다. 그대는 그대가 행한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이 행위는 정등각을 얻게 하는 것도 아니고, 벽지불의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도 아니고, 성문의 지위에 이르게 하는 것도 아니고, 범천과 제석과 전륜왕과 지방의 왕 등 가운데 어느 지위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이 행위는 교단으로부터 물러나게 하여 먹다 남은 음식을 먹는 지경에 처하게 하고, 지옥 등 갖가지 고통을 겪게 한다. [화내는 업]을 행할 때 양손에 시뻘건 숯과 똥을 쥐고서 다른 자에게 던지려는 사람처럼 첫 번째로 자신을 태우고 악취나게 한다.’라고.

 

(청정도론 9 23)

 

 

원한 맺힌 자에게 적개심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렇다고 하여 분노한다면 불선업을 짓게 된다. 불선업은 반드시 과보를 가져 오기 때문에 분노를 잘 다스려야 한다. 그 분노다스리는 방법중의 하나가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이다.

 

화내는 업을 행할 때

 

청정도론에 따르면 원한 맺힌 자에게 분노하는 것의 불이익을 열거 하고 있다. 가장 먼저 부처님도 분노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대스승인 부처님도 원수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았음에도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가 원한 맺힌 자에게 분노하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의 비유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화내는 업을 하면 자신을 태우고 악취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은 원한 맺힌 자에도 해당된다. 반조하는 방법은 동일하다. 다만 비유가 다를 뿐이다. 이에 대한 비유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업의 반조에 대한 비유

비 고

자기의 것에서

반조하기

화내는 업을 행할 때 양손에 시뻘건 숯과 똥을 쥐고서 다른 자에게 던지려는 사람처럼 첫 번째로 자신을 태우고 악취나게 한다

자신을 태우고 악취나게 함

화내는 사람에

대하여 반조하기

화내는 업을 행할 때 바람을 안고 서서 다른 자에게 먼지를 뒤집어씌우려는 사람처럼 바로 자신이 뒤집어쓸 뿐이다.

자신이 뒤집어쓸 뿐임

 

 

 

표를 보면 분노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불이익을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화내는 이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하였다. 만일 상대방이 화를 낸다고 하여 같이 화를 내면 똑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릴 뿐만 아니라 불선업까지 짓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한손에 똥을 들고 또 한손에는 시뻘건 숯을 들고 던지려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상대방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적개심이 일어났을 뿐이다. 그래서 화내는 업을 짓는 것에 대하여 자신을 태우고 악취나게 할 뿐이라 하였다.

 

메타기도라는 것이 있는데

 

초기불교 도입과 함께 자애수행이 유행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자애수행에 대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 것중에  메타기도가 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혼합이라 보여진다.  마치 소원성취  기도하는 것처럼 자애의 마음을 내 보내어 원하는 바를 이루려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자애수행도 기도의 대상인가, ‘100 소원성취 메타기도’ 보고(2011-06-2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자애와 관련하여 초기경전에서는 그는 자애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남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북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 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마음으로 일체의 세계를 가득 채운다.(M7)”라는 정형구가 있다. 이 문구대로 본다면 자애의 마음을 낸다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착각을 가지게 한다. 심지어 원수에게도 자애를 방사하면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그러나 마음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기 힘들다. 아무리 강력한 자애의 마음을 방사해도 받아 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동서남북상하좌우 등 십방으로 자애의 마음을 내어 남의 마음을 조종하거나 나의 마음을 실어 보내어 내뜻대로하겠다는 발상은 있을 수 없다.

 

자애수행을 하는 근본 목적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자애수행을 하는 근본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자애수행을 함으로 인하여 나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원한 맺힌 자에게 증오의 마음을 멈추는 것이다. 대신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낸다. 그렇게 하면 내 마음이 편해진다. 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은 마음이 분노가 사라지고 평온한 마음상태가 됨을 말한다. 그래서 자애수행은 40가지 사마타 명상주제의 하나이다. 이런 자애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āvuso vyāpādassa yadida mettācetovimutti

 

존자여, 분노를 여의는 것이 곧,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입니다.” (A6.13)

 

 

이 구절을 보면 자애수행을 하는 목적은 분명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해탈이다. 그것은 자애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해탈을 얻고자 함이다. 이를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mettācetovimutti)’이라 한다. 이를 한자어로 표현하면 자심해탈(慈心解脫)’이라 한다. 자애수행을 하는 것이 남의 마음을 움직인다거나 내뜻대로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애의 마음을 냄으로 인하여 마음을 청정하게 만들어 해탈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애의 마음을 내면 어떤 공덕이 있을까?

 

이처럼 자애수행의 근본목적은 자애수행을 함으로 인하여 해탈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자애수행을 하면 여러 가지 이점이 많다는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모두 열 한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Sukha supati, sukha paibujjhati, na pāpaka supina passati. Manussāna piyo hoti, amanussāna piyo hoti, devatā rakkhanti, nāssa aggī vā visa vā sattha vā kamati, tuvaa citta samādhiyati, mukhavaṇṇo vippasīdati, asammūho kāla karoti, uttari appaivijjhanto brahmalokūpago hoti.

 

수행승들이여, 편안히 잠자고, 행복하게 깨어나고, 악몽을 꾸지 않고, 사람들에게 아낌을 받고, 귀신들에게조차 사랑을 받고, 신들이 보호해주고, 불이든 독약이든 거의 해를 입지 않고, 빠르게 삼매에 들고, 안색이 맑고, 당황함이 없이 임종에 들고, 더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Mettānisasa sutta-자애 공덕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11.15, 전재성님역)

 

 

자애수행을 닦아 자심해탈하여 윤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해탈과 열반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자애수행을 한 공덕은 매우 크다. 이에 대하여 열 한가지 이익이 소개 되어 있다. 이 중에 신들이 보호해 주고(devatā rakkhanti)” 라는 말이 있다. 이는 자애의 마음을 닦으면 신들이 수호해 줌을 말한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일지라도 모든 중생들이 진실로 행복하기를!(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 stn145)”이라고 자애의 마음을 낸다면 감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애의 마음을 내서는 안되는 경우

 

하지만 아무리 자애의 마음을 방사하여도 무용지물인 경우가 있다. 그것은 죽은자와 연인에게 방사하였을 때이다. 죽은 자는 자애의 마음을 내어도 감응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자애의 마음을 낼 때는 반드시 살아 있는 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또 부부나 연인 사이에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자애의 마음이 애정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진실로 행복하기 바라는 자애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이라기 보다 우정의 마음, 우호의 마음에 더 가깝다.

 

수호경으로서의 자애경

 

자애의 마음을 낸다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수행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자애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였을 때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디.  또 하나는 감응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애의 마음을 모든 존재에게 사방, 팔방, 십방으로 방사하여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된다면 신들도 감동하여 보호해줄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자애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수호경이 있다. 그것은 뱀왕의 경(A4.67)’이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수호를 위하여 이러한 네 가지 종류의 뱀왕의 혈통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펼치는 것을 허락한다.(A4.67)”라고 말씀 하심으로서 수호경으로 허락된 것이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자들이 늘 독송하는 자애의 마음을 냄에 따라 보호받는 수호경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1.

Virūpakkhehi me metta metta erāpathehi me,
Chaby
āputtehi me metta metta kahāgotamakehi ca.

 

위루빡카들에게 나의 자애를!

에라빠타들에게 나의 자애를!

차비야뿟따들에게 나의 자애를!

깐하고따마까들에게 나의 자애를!

 

2.

Apādakehi me metta metta dipādakehi me,
catuppadehi me metta
metta bahuppadehi me.

 

발 없는 자들에게 나의 자애를!

두 발 가진 자들에게 나의 자애를!

네 발 가진 자들에게 나의 자애를!

많은 발을 가진 자들에게 나의 자애를!  

 

3.

Mā ma apādako hisi mā ma hisi dipādako,
M
ā ma catuppado hisi mā ma hisi bahuppado.

 

발 없는 자들이 나를 해치지 않기를!

두 발 가진 자들이 나를 해치지 않기를!

네 발 가진 자들이 나를 해치지 않기를!

많은 발을 가진 자들이 나를 해치지 않기를!

 

4.

Sabbe sattā sabbe pāā sabbe bhūtā ca kevalā,
Sabbe bhadr
āni passantu mā kañci pāpamāgamā.

 

모든 뭇삶들, 모든 생명들, 모든 존재들은 모두

선하고 슬기로운 것만 보고

일체 악한 것을 만나지 않기를

 

( Ahi(metta)sutta-뱀왕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67, 전재성님역)

 

 

 

2014-09-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