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오, 나의 어머니” “오, 나의 딸” “오, 나의 누이”여자보기를 가족처럼

담마다사 이병욱 2014. 9. 23. 14:19

, 나의 어머니” “, 나의 딸” “, 나의 누이여자보기를 가족처럼

 

 

 

질문 같지 않은 질문

 

우리는 왜 여기에 있게 되었을까?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런 질문은 옛날에도 있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형이상학적 질문이라 하여 부처님이 답을 하지 않았다. 왜 답을 하지 않았을까? 질문으로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이기 때문에 답을 말씀 하시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런가? 설령 답을 한다고 해도 질문자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논쟁거리만 유발하고 말 것이다. 이런 이유로 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당면한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독화살의 비유를 설하면서 동시에 사성제를 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라 의문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의문하는 것은 쓸데 없는 것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나를 찾으려 할수록 번뇌만 늘어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서 온 것일까?

 

수행녀는 왜 머리를 싸매고 누워있었을까?

 

아난다존자가 꼬삼비의 고시따승원에 있을 때이다. 이 때 어떤 수행녀(빅쿠니)가 한 사람에게 부탁했다. 어떤 부탁일까? 경에 따르면 아난다 존자가 자신의 처소를 방문해 달라는 부탁이다. 이유는 자신이 병이 들어 괴로워 하기 때문에 가엽게 여겨 찾아 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그러자 어느 수행승은 아난다 존자에게 사실을 이야기 하였다. 이에 아난다존자는 침묵으로 승낙하였다.

 

아난다 존자가 수행녀가 있는 처소로 방문하였다. 그러자 수행녀는 기다렷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행동하였다.

 

 

Adhivāsesi kho āyasmā ānando tuhībhāvena. Atha kho āyasmā ānando nivāsetvā pattacīvara ādāya yena bhikkhunūpassayo tenupasakami addasā kho sā bhikkhunī āyasmanta ānanda dūratova āgacchanta. Disvā sasīsa pārupitvā mañcake nipajji.

 

그래서 존자 아난다는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그 수행녀가 있는 곳으로 찾아 갔다. 그 수행녀는 존자 아난다가 멀리서 오는 것을 보았다. 보고 나서 머리를 감싸고 침상에 누웠다.

 

(Bhikkhunīsutta -수행녀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159,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수행녀는 아난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난다가 가까이 다가오자 재빨리 침상에 누웠는데 경에 따르면 보고 나서 머리를 감싸고 침상에 누웠다 (Disvā sasīsa pārupitvā mañcake nipajji.)”라 표현 되어 있다. 여기서 머리를 감싼다는 말이 ‘pārupitvā이다. 이는 ‘having wrapped in’뜻이다. 그것도 머리까지 감싼(sasīsa)’것 이다.

 

수행녀는 왜 이런 행동을 하였을까? 이부분에 대한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보고서는 머리를 덮고 [거짓으로 아픈척하며] 침상에 누웠다.”라고 표현 하였다. 대괄호치기를 이용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원문에 없지만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주석적 번역을 해 놓은 것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수행녀가 아난다존자를 사모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처소로 끌어 들여 애정행각을 벌이고자 한 의도임을 파악할 수 있다.

 

여자와 부딪쳤을 때

 

아난다존자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열반에 드실 때 아난다존자에게 특별하게 당부한다. 그것은 “보지말라” “말하지말라” “알아차려라”로 요약된다. 이는 아난다존자가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여인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라고 물어 본 것에 대한 답이다.

 

마하빠리닙바나경에 따르면 여자와 부딪쳤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아난다여, 쳐다보지 않는 것이다. (Adassana ānandā)”라고 말씀 하셨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었다면 “아난다여, 말하지 않는 것이다. (Anālāpo ānandā)”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남자가 이 세상을 살아 가면서 여자를 보지 않고는 살아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출가수행자라 할지라도 여자를 쳐다 보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또 때에 따라 말을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여자와 말을 하게 되면 친밀감이 생겨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애정으로 발전하기 쉽다.

 

왜 단둘이서 만나면 안되는가?

 

도반들끼리 모임이 있다. 불교교양대학법우님들이다. 모임에서는 여성법우님들이 더 많다. 모두 나이든 세대들이다. 이렇게 남녀가 모였다고 하여 애정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모이면 형제나 자매 처럼 반갑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한가지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둘만 만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아무리 종교를 기반으로 한 모임일지라도 남자와 여자가 단 둘이서 만나서 대화하는 것은 여러모로 보기에 좋지 않기 때문이다. 대화를 하다 보면 친밀감을 느끼게 되고 애정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임을 가질 때는 여러 명이 함께 대화를 나눌 뿐이지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없다.

 

여자보기를 가족처럼

 

아난다는 아픈 수행녀의 요청으로 처소에 갔다. 그런데 수행녀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아픈체 하고 있다. 이렇게 둘만 남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부처님이 “아난다여,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 (Sati ānanda upaṭṭhapetabbā)”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수행자는 여자를 쳐다 보지도 말고, 설령 쳐다 보았다고 할지라도 말을 걸지 말아야 한다. 설령 말을 한다고 해도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주석을 근거로 하여 표를 만들었다. 이 세가지에 대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여자를 대할 때

대응 방법(D16 주석)

쳐다보지 않는다

Adassana

탁발하러 가서 가까운 장소에서 보았을 때 (Smv.582-583)

말을 하지 않는다

Anālāpo

여성과 대화하면, 친교가 생겨나고 친교가 생기면, 정이 깊어지고, 번민하고, 계행을 파괴하고 괴로운 곳을 채우는 자가 된다. (Smv.582-583)

알아차림을 유지한다

Sati upaṭṭhapetabbā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이여, 어머니의 연배의 여성에 대해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좋다. 자매 연배의 여성에 대해서는 자매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좋다. 딸의 연배의 여성에 대해서는 딸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좋다.’라고 가르쳤다. (Smv.582-583)

 

 

 

 

bhikkhuni

 

 

여자를 대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예 보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탁발을 나갈 때 여자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여자와 마주쳤을 때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말을 하다 보면 친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친해졌을 때 결국 애정이 생겨서 계행이 파괴 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말을 하였더라도 알아차림(sati)를 유지하는 것이다. 어떻게 유지하는가? 어머니의 연배라면 어머니로 보고, 자매의 연배로 보면 누이로 보면 된다. 그리고 나이가 딸의 연배라면 딸로 보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자를 대할 때 여자로 보지 말고 가족처럼 대하라는 것이다. 여자보기를 가족처럼 하라는 뜻이다.

 

이 몸이 생겨난 원인 네 가지

 

아난다는 거짓으로 아픈 척 하는 수행녀를 위하여 법문을 해 주었다. 그 것은 이 몸은 어디서 왔는가?”라는 주제의 법문이다. 마치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네 가지로 설명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Āhārasambhūto aya bhagini kāyo. Āhāra nissāya āhāro pahātabbo. Tahāsambhuto aya bhagini.Kāyo taha nissāya tahā pahātabbā mānasambhūto aya bhagini kāyo. Māna nissāya māno pahātabbo. Methuna sambhūto aya bhagini kāyo. Methune ca setughāto.Vutto bhagavatā.

 

 

[아난다]

누이여, 이 몸은 자양분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자양분에 의존하여 자양분을 극복해야 합니다. 누이여, 이 몸은 갈애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갈애에 의존하여 갈애를 극복해야 합니다. 누이여, 이 몸은 자만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자만에 의존하여 자만을 극복해야 합니다. 누이여, 이 몸은 성교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성교를 법도의 파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Bhikkhunīsutta -수행녀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159, 전재성님역)

 

 

아난다는 이 몸이 생겨난 원인을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자양분(Āhāra), 갈애(Tahā), 자만(Māna), 성교(Methuna) 이렇게 네 가지이다. 그런데 네 가지중에 오로지 성교만이 다르다.

 

몸의 발생요인을 존재론적으로 보았을 때

 

이 몸이 생겨난 요인에 대하여 존재론과 인식론적으로 볼 수 있다.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물질적 요소와 관련 되어 있고, 인식론적으로 본다면 정신적 요소와 관련 되어 있다.

 

지금 여기에 나가 있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대부분 생물학적 요인으로 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서 여기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또는 어머니의 어머니는 누구일까?” 하며 무한소급하며 올라 간다. 그러나 결코 답을 찾아 낼 수 없을 것이라 하였다. 왜 그럴까? ‘풀과 나뭇가지의 경(S15.1)’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 잠부디빠에서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따다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놓고 이분은 나의 어머니, 이분은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식으로 헤아려나간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의 어머니의 어머니식의 헤아림이 끝나기 전에 여기 잠부디빠의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모두 소모되어 없어져버릴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Tiakaṭṭhasutta- 풀과 나뭇가지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1, 전재성님역)

 

 

여기서 잠부디빠는 한역으로 염부제라 하며 인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경에 따르면 어머니의 어머니는 누구일까?”라며 무한소급해 가며 잎사귀로 피라미드로 쌓는다면 인도대륙의 잎사귀가 남아 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나를 찾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말한다. 만일 나를 찾아 무한소급하여 올라간다면 이 세상을 있게 하는 하나의 원인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누군가는 존재의 근원이라 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궁극적 실재라 할 것이다. 이에 인격을 부여하면 야훼, 브라흐마 등 창조주가 될 것이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누구일까?’라며 무한 소급하다 보면 결국 이 세상을 있게 한 창조주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존재론의 바탕이 된다.

 

이 세상을 존재론적으로 보면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 이 세상을 살다가 죽어도 여전히 이 세상은 잘 돌아 갈 것이다. 이 세상이 있어서 내가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부모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경에 따르면 내가 존재하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자양분과 성교이다. 부모의 성교에 따라 임신이 되어 자양분을 먹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몸에 있게 된 네 가지 요인 중에 자양분과 성교는 물질을 기반으로 한 존재론에 바탕을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몸의 발생요인을 인식론적으로 보았을 때

 

그런데 네 가지 중에 이 몸이 있게 된 요인으로 갈애자만을 들고 있다. 이런 방식은 자양분과 성교와 다른 것이다. 왜 다른가? 정신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특히 갈애로 인하여 이 몸이 여기에 있게 된 것으로 본다.

 

나는 누구인가?’라며 나를 찾는 수행을 하지만 이는 번뇌만 야기할 뿐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되었는가? 그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갈애 때문이다. 부처님이 초전법륜경 집성제에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Ida kho pana bhikkhave, dukkhasamudayo ariyasacca: "yāya ta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 seyyathīda: kāmatahā bhavatahā vibhavatahā".

 

이당 코 빠나 빅카웨, 두카사무다야 아리야삿짱: 야양 딴하 뽀노바위까 난디라가사하가따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 세이야티당: 까마딴하 바와딴하 위바와딴하”.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전재성님역)

 

 

지금 내가 여기에 이렇게 된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무명 때문이다. 이는 몰랐기 때문에 여기에 있게 된 것이다. 몰랐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가르침을 모른 것을 말한다. 사성제를 몰랐기 때문에 세세생생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 윤회의 근본 요인은 무명과 갈애이다. 그래서 과거의 무명으로 지금 여기에 있게 되었고 지금 갈애를 일으킴으로 인하여 미래의 태어남의 원인이 될 것이다.

 

합일의 존재론, 열반의 인식론

 

두 개의 세계관이 있다. 하나는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세상이 전개된다. 이는 인식론에 기반한다. 또 하나는 세상속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있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존재론에 기반한다.

 

그런데 존재론적 사고방식에서는 합일을 실현할 수 있지만 열반을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존재론은 존재의 근원 또는 궁극적 실재라 불리우는 창조주를 제일원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의 근원과 합일 또는 창조주로부터 구원은 있을지 몰라도 열반은 실현할 수 없다.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사성제에서 잘 표현 되어 있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있게 된 이유가 갈애이기 때문에 갈애를 소멸하면 된다. 갈애를 소멸하면 미래의 새로운 태어남의 원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식론에서는 갈애를 소멸하여 태어남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열반을 성취될 수 있다.

 

갈애에 의존하여 갈애를 극복한다

 

아난다는 수행녀의 의도를 간파하였다. 수행녀가 자신을 유혹하기 위하여 꾀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아난다는 이 몸에 대하여 네 가지로 설명한다. 그 중에 갈애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아난다]

누이여, 이 몸은 갈애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갈애에 의존하여 갈애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무엇을 연유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누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아무게 수행승은 번뇌를 부수었으므로 번뇌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현세에서 곧바른 앎으로 스스로 실현하여 성취하였다.’라고 듣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나도 반드시 번뇌를 부수고 번뇌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현세에서 곧바른 앎으로 스스로 실현하여 성취하리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갈애에 의존하여 갈애를 극복합니다.

 

(Bhikkhunīsutta -수행녀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159, 전재성님역)

 

 

아난다는 갈애의 극복에 대하여 갈애에 의존하여 갈애를 극복한다(taha nissāya tahā pahātabbā)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마치 독으로서 독을 제독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taha nissāya tahā pahātabbā: Mrp.III.136에 따르면, 이와 같이 일어난 현재의 갈애를 통해 윤회의 뿌리가 되는 이전의 갈애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 현재의 갈애는 비록 궁극적로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지만 해탈에 기여하는 것이므로 섬겨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결생(結生: patisandhi)을 초래하지는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은 현재의 갈애마저 극복해야 한다.

 

(앙굿따라니까야4 554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을 보면 마치 독으로서 제독하는 듯하다. 갈애가 윤회하게 하는 근본 원인이긴 하지만 해탈하고자 하는 갈애가 일어 났을 때 이를 갈애에 의존하여 갈애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동종요법으로

 

이처럼 독을 독으로 다스리는 것과 같은 방식을 동종요법이라 한다. 이는 간화선에서도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초기불교에 가장 가까운 수행법이 간화선이라고?(2012-08-28)’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렇다면 동종요법이란 무엇인가? 버스웰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의학적 접근방법인데요, 동종요법(homopathy)이라고 합니다. 오래된 의학법인데요, 동종요법은 병을 치료 하기 위하여 의사들이 아주 소량의 독극물을 사용하여 몸의 질병 극복반응을 촉발시켜 병을 치료 하는 것입니다.

 

몸에 안 좋은 독약을 사용하여 보다 심각한 질병을 낫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주 극소량의 비소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비소는 아주 위험한 독소이지요.

 

하지만 극히 미세한 분량을 처방하면 몸에 질병극복 반응을 촉발시켜 질병이 치유 될 수 있습니다. 꽤 오래된 의학이론으로 아마 신빙성을 잃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구의학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이론입니다.

 

(로버트 버스웰,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제 27, 불교TV 2011-12-13)

 

 

동종요법은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온 의학요법이라 한다. 특히 독을 사용하여 제독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주 미소한 분량의 독을 몸에 투여하여 병을 치유코자 하는 것이다.

 

간화선도 일종의 동종요법

 

버스웰교수가 동종요법이야기를 한 것은 간화선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간화선에서는 의심이라는 법을 이용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방식을 말한다. 여기서 의심은 독에 해당된다. 실제로 의심은 극복해야 될 불선법이다. 그래서 마치 독과 같은 불선법인 의심을 이용하여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방식에 대하여, 마치 독을 독으로서 다스리고자 하는 동종요법과 같음으로 설명하고 있다.

 

갈애가 분발의 요인으로

 

갈애는 극복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갈애가 긍정적으로 사용되어 질 수 있음을 말한다. 분발하는 요인으로 사용 되었을 때이다. 누군가 열심히 정진하여 성과를 이루었을 때 나도 저와 같이 해보고 싶다는 갈애가 일어 났을 때 이는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성취하였을 때 그런 갈애는 버려야 한다. 마치 뗏목으로 저 강을 건넜다면 더 이상 뗏목에 고마워하며 집착할 필요가 없듯이 해탈을 성취하였다면 해탈을 성취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던 갈애는 당연히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자양분과 자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양분에 대해서는 자양분에 의존하여 자양분을 극복한다(āhāra nissāya āhāro pahātabbo)’라 하였고, 자만에 대해서 자만에 의존하여 자만을 극복한다(māna nissāya māno pahātabbo)’라 하였다.

 

성교로 성교를 극복하는 것은 왜 안될까?

 

하지만 이 몸을 생겨나게 한 네 가지 중에 성교만큼은 예외이다. 그래서 성교에 의존하여 성교를 극복한다라는 말은 통용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Methunasambhūto aya bhagini kāyo, methune ca setughāto vutto bhagavatā"

 

[아난다]

누이여, 이 몸은 성교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성교를 법도의 파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Bhikkhunīsutta -수행녀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159, 전재성님역)

 

 

이 몸이 부모의 성행위에 의해서 생겨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존재하는 나에 대한 설명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설명에서와 같이 성교에 의존하여 성교를 극복한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세존께서는 성교를 법도의 파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한마디로 끝낸다.

 

각주에 따르면 수행승이나 수행녀가 성교를 하면 승단추방죄(斷頭罪:parajika)’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도의 파괴(setughāto)’라 하였다. 여기서 setughāto‘setu (a bridge) +ghāto (destruction)’의 뜻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다리[]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라 하여 직역하였다.

 

다리를 파괴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출가자가 성행위를 한다는 것은 청정한 삶을 포기한다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승단에 머물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성행위를 하면 마치 머리가 잘리는 듯한 죄를 짓는다하여 승단추방으로 다스리고 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수행녀

 

아난다는 꾀병으로 침상에 누워 있는 수행녀에게 네 가지 법문을 하였다. 특히 네 번째 법문에서 누이여, 이 몸은 성교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성교를 법도의 파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 하였다. 이는 아난다가 수행녀의 의도를 간파해서 한 말이다. 그러자 수행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행녀]

존자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는 어리석고 미혹하고 신중하지 못해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존자여,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잘못을 잘못으로 알고 참회하오니, 저의 참회를 받아 주십시요.”

 

(Bhikkhunīsutta -수행녀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159, 전재성님역)

 

 

수행녀는 의중을 간파당하였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그 수행녀는 침상에서 일어나 한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존자 아난다의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이와 같이 말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수행녀는 아난다를 유혹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난다는 이에 넘어 가지 않고 오히려 수행녀의 잘못을 일러 주었다.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수행녀에게 아난다는 잘못을 잘못으로 알고 가르침에 따라 참회하므로, 그 참회를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참회를 받아 들인다.

 

능엄경에서 아난다의 이미지는?

 

초기경을 보면 아난다가 여자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일까 능엄경에서는 아난이 여인에게 유혹당하는 것으로부터 경이 시작된다. 대승경전 능엄경에서 묘사된 아난다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수려한 용모와 뛰어난 지혜를 갖춘 남자. 이런 남자라면 시대를 불문하고 뭇 여성들의 흠모를 받는다. 그러나 그 남자가 수행자라면 그렇게 사람을 끄는 매력은 뜻하지 않는 장애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 아난존자가 바로 그런 경우다. 아난존자가 공양을 위해 걸식을 하고 기원정사로 돌아오는 길에 강가에서 '마등가'라는 처녀를 만나 물 한잔을 얻어 마시게 된다. 그녀는 아난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버린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주술을 하는 어머니께 졸라서 결국 아난존자를 집까지 유혹해 오도록 만든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천안통으로 아난이 마도(
魔道)의 위기에 처한 것을 알게 되고 '능엄주'라는 주문를 외워서 그를 구한다. 아난존자는 마등가의 유혹과 주문에 홀린 것이 자신의 수행력 부족임을 깨닫고 부처님께 도 닦는 법을 여쭙게 되는데, 부처님과 문답이 이루어지면서 '능엄경'은 전개된다

 

( 스님의 쉽게 읽는 불교경전 <17> 능엄경  , 국제신문 2010-08-13)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이라 볼 수 있는 능엄경에서 아난존자는 우유부단형이다. 얼굴은 수려하게 잘 생기고 지혜도 갖추었지만 여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준다. 그래서 탁발중에 마등가라는 처녀를 만나 반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초기경전에서 아난다는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수행녀의 경을보면 아난다를 유혹하려는 수행녀를 교화시켜 주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 나의 어머니” “, 나의 딸” “, 나의 누이

 

수행녀의 경에서 아난다는 빅쿠니에게 누이여라고 호칭하였다. 이 말은 ‘bhagini’의 번역어이다. Bhagini는 여성명사로 ‘sister’의 뜻이다. 그렇다면 아난다는 수행녀에게 수행녀를 뜻하는 빅쿠니여라고 말하지 않고 왜 누이여라고 말 하였을까? 이는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 부처님이 당부하신 말씀과 관련이 있다.

 

부처님은 수행승이 탁발할 때 여자를 쳐다보지 말라고 하였다. 또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말을 하더라도 알아차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알아차려야할 대상이 있다. 그것은 어머니뻘 되는 여자는 어머니라 보고, 자신과 비슷한 연배이면 누이로, 자신보다 어려 딸 정도의 여자에게는 딸로 보라고 하였다. 이는 모든 여자를 가족처럼 보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아난다가 자신을 유혹하려는 수행녀에게 마치 가족처럼 누이여라고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난다는 수행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는 대승 능엄경에서 아난의 우유부단한 행동과 매우 대조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자를 대할 때는 생물학적 기능을 가진 여자, 또는 성적인 대상으로서 여자로 보지 말라는 이야기와 같다. 이렇게 본다면 자신 보다 나이가 스무살 이상 먹은 여인에게는 , 나의 어머니라 하고, 자신보다 스무살 아래의 여자에 대해서는 , 나의 딸이라 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위아래로 스므살차이 나는 여인에게는 , 나의 누이라 하며 자애의 마음을 낸다면 우리사회는 훨씬 더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2014-09-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