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왜 열심히 노력해도 실패할까? 기쁨으로 보시할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9. 26. 00:13

 

 

왜 열심히 노력해도 실패할까? 기쁨으로 보시할 때

 

 

 

두 가지 정견이 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다양하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크게 출세간의 가르침과 세간의 가르침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커다른 마흔의 경(M117)’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Katamā ca bhikkhave, sammādiṭṭhi: sammādiṭṭhimpaha bhikkhave, dvaya vadāmi: atthi bhikkhave, sammādiṭṭhi sāsavā puññābhāgiyā upadhivepakkā atthi bhikkhave, sammādiṭṭhi ariyā anāsavā lokuttarā maggagā.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올바른 견해인가? 수행승들이여, 나는 올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가 있고, 수행승들이여, 번뇌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가 있다.

 

(Mahācattārīsaka sutta- 커다른 마흔의 경, 맛지마니까야 M117,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정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간적 정견이고 또 하나는 출세간적 정견이다. 이는 다름 아닌 세간적 가르침과 출세간적 가르침의 동의어라 볼 수 있다.

 

세간적 정견이란?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간적 정견은 무엇일까? 경에 따르면 번뇌의 영향을 받는 것(sāsavā)’이라 하였다. 탐진치 등의 살아 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정견을 말한다. 그래서 보시도 있다. 제사도 있다. 공양도 있다. 선악의 과보도 있다. 이 세상도 있고 저 세상도 있다.”등으로 표현되는 세속적 정견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업과 업의 과보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간적 정견은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함으로서 성립된다. 이를 한자어로 표현 하면 업자성정견이라 한다.

 

출세간적 정견이란?

 

출세간적 정견은 무엇인가. 이는 번뇌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anāsavā)’ 이라 하였다. 고귀한 경지를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세간적 정견과 반대의 길을 가는 것을 말한다. 탐진치를 소멸하는 길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주석에 따르면 출세간적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개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열반의 성취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그 진리를 꿰뚫어 아는 것을 말한다. 이런 앎은 주석에 일반적으로 인식작용으로 본다.

 

존재론과 인식론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탐진치로 살아가는 뭇삶들을 위한 세간적 정견이 있는가 하면, 탐진치의 소멸하기 위하여 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출세간적 정견이 있다. 여기서 세간적 정견은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으로 존재론이라 볼 수 있다. 출세간적 정견은 사성제를 실천하여 아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인식론이라 볼 수 있다.

 

키로 까불러 미신은 날려 보내고

 

이처럼 부처님은 출가자 뿐만 아니라 재가자들을 위한 가르침을 펼치셨다. 그럼에도 어느 학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래서 슬프게도, 불교계에는 아직도 이런 신들이 진짜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화엄경 등의 종교경전은 키로 까불러 미신은 날려 보내고 위대한 사상만 취할 일이다.

.

.

.. 팔리경전 등 특정 경전에서 모든 답을 찾으려하는 것은 광신이다. 뿐만 아니라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 등 근본가르침을 제외하고는 어디까지가 부처님의 친설(親說)인지 알 길이 없다.”

 

(몽매주의,  K교수, 불교닷컴 2014-09-05)

 

 

불교닷컴에 기고된 K교수의 글은 파격적이다. 특히 경전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이다. 불자들이 경전을 근거로 신행생활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어리석게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전에 쓰여 있는 문구를 그대로 믿는 것은 맹신이고 광신일 뿐이라 한다.

 

K교수가 맹신한다고 비판하는 경전군 속에는 빠알리니까야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이외는 모두 키질하여 날려 버리자고 한다.

 

K교수 말대로 근본가르침 이외의 경들을 키질하여 날려 버렸을 경우 부처님의 세간적 가르침을 잃게 될 것이다. 탐진치로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뭇삶들에게 있어서 필요한 가르침을 잃게 되는 것이다.

 

왜 열심히 노력해도 실패할까?

 

부처님은 뭇삶들을 위해서도 수 많은 가르침을 설하였다. 주로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에 대하여 재가자를 위한 가르침을 모아 놓은 경으로 보기도 한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사업의 경이 있다. 경의 제목이 마치 사업하는 사람들을 위한 경처럼 보인다. 내용은 어떤 것일까? 먼저 사리뿟따존자가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Ko nu kho bhante hetu, ko paccayo, yena midhekaccassa tādisāva vaijjā payuttā chedagāminī hoti?

 

[싸리뿟따]

세존이시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하는데 그만큼 열심히 노력해도 실패하는데, 거기에는 어떠한 원인, 어떠한 조건이 있습니까?

 

(Vaijjāsutta-사업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79, 전재성님역)

 

 

여기서 사업이라고 번역된 말은 빠알리어로 ‘vaijjā’이다. 와닛자(vaijjā)‘trade; trading’의 뜻으로 무역, 거래, 통상의 의미이다. 이렇게 보아을 때 장사, 사업, 비즈니스의 뜻이라 볼 수 있다.

 

사리뿟따가 의문하는 것은 사업하는 사람들이 왜 열심히 노력해도 잘 안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또 의도한 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런 의문에 대하여 부처님께 묻는다.

 

부처님의 컨설팅

 

부처님은 반드시 출가자들만을 위한 출세간적 가르침만을 설하지 않았다. 세간에서 탐진치로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재가자들을 위해서도 법을 설하였다. 장사가 잘 안될 때 컨설팅역할도 해 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만능해결사와 같다.

 

초기경전에는 뭇삶들이 고민하느 모든 해법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든지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초기경전을 열어 보면 해법이 있다는 것이다. 사리뿟따의 질문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세존]

싸리뿟따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을 찾아 가서 존자여, 필요한 것을 말씀하십시오.’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가 약속한 것을 보시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거기서 죽어서 이 세상에 왔다고 한다면, 그가 어떠한 사업을 하든 열심히 하더라도 실패한다.

 

(Vaijjāsutta-사업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79, 전재성님역)

 

 

사업에 실패 하는 요인이 있다. 그것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보시로서 설명하고 있다. 누군가 종교단체에 가서 기부하겠다고 말해 놓고서는 지키지 않았을 때를 말한다.

 

경에서 말하고자 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약속이다. 그렇다면 왜 약속이 중요할까? 그것은 모든 비즈니스의 시작이 약속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비즈니스의 시작은 약속에서부터

 

누군가 몇 시에 만나자고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으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마 믿지 못할 것이다.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약속을 어겼을 때 말은 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신용 없는 사람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렇게 한 번 마음속에서 불신이 일어나면 좀처럼 바꾸기 힘들다.

 

모든 비즈니스의 출발점은 약속지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만나기로 하였으면 제시간에 나타나야 한다. 이렇게 만남부터 시작되는 것이 비즈니스이다. 이는 다름 아닌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상거래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결재할 달이 되었음에도 결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순간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신용이 불량한 자로 간주 한다. 이렇게 한 번 의심을 시작하면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는 장사 또는 사업, 비즈니스를 하기 힘들다. 왜 그럴까? 신용이 없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거래를 하려 하지 않는다. 물건을 주었는데 돈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 의심이 들면 절대로 물건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 번 마음에서 벗어난 자는 거래하기 힘들다. 이런 이유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가 사업을 하였을 때 실패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기대이상으로 성공한 사람들

 

그렇다면 사업에서 성공하는 자는 어떤 케이스일까?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싸리뿟따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을 찾아 가서 존자여, 필요한 것을 말씀하십시오.’라고 약속한다. 그리고 그가 약속한 것을 의도한 것 이상으로 보시한다. 만약 그가 거기서 죽어서 이 세상에 왔다고 한다면, 그가 어떠한 사업을 하든 열심히 노력을 하면 의도한 것 이상으로 성공한다.

 

(Vaijjāsutta-사업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79, 전재성님역)

 

 

 

NEW ZEALAND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스토리를 들어 보면 기대이상으로 성공하였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렇게 크게 될 줄 몰랐다는 말이다. 의도한 것 이상의 결과를 가져 왔음을 말한다.

 

의도한 것 이상 성공하는 케이스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전 생에 의도한 것 이상의 보시를 하였기 때문이다. 스스로 승원에 보시하겠다고 서원하였는데, 약속한 것 이상을 보시한 케이스를 말한다. 이렇게 의도한 것 이상으로 보시 하였을 때 의도 한 것 이상의 성공을 거둘 수 있음을 말한다.

 

한 번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 특히 승가에 대한 보시가 그렇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벗어 났을 때이다. 이런 경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게 된 케이스에 해당된다.

 

악행(papa)과 공덕행(puñña)

 

보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은 능력껏하는 것이다. 이는 능력에 따라 보시하고(S1.41)”라는 구절에서 근거한다. 그래서 수입이 많은 사람은 수입에 걸 맞게 보시하면 되고, 수입이 없는 사람은 몸으로도 보시하면 된다. 법당청소 등은 돈이 없어도 보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시를 하되 의도한 것 이상을 보시하면 의도한 것 이상의 과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렇다고 하여 대가를 받기 위하여 보시를 한다면 이는 순수한 보시라 볼 수 없다.

 

만일 대가를 바라는 보시라면 정치헌금과도 같은 것이다. 마치 비즈니스를 하는 것처럼 주고받기식이 정치헌금이다. 그래서 정치헌금과 같이 목적을 가지고 보시하는 것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악행(papa)로 본다.

 

그렇다면 공덕행(puñña)은 어떤 것일까?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공덕행은 착하고 건전한 행위에 해당된다. 그것은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보시를 할 때는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한다. 정치헌금처럼 한 자리 바라거나, 또는 입법로비를 위한다면 불교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악행에 해당된다. 그러나 공덕행은 대가를 바라는 것 없이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보시하기 전에는 기뻐하고, 줄 때는 마음이 청정하며, 주고 나서는 만족해야 한다라고 표현 할 수 있다.

 

학인스님을 만났는데

 

보시는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이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줄 때는 청정해야 한다. 이 것 역시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또 보시하고 나서는 흡족해야 한다. 이 것 또한 대가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보시로서 가장 좋은 것이 스님에 대한 보시일 것이다.

 

스님에게 보시를 할 때 돈으로 하는 것 보다 책이 더 낫다고 본다. 그럴 일이 생겼다. 지난 여름 우연히 어느 스님을 만났다. 인터넷상으로 알게 된 사람을 만났는데 학인스님이랑 같이 왔다. 그래서 인사동에서 식사를 하며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학인스님은 D대 경주캠퍼스에 다니고 있다. 저학년이다. 그리고 나이도 매우 젊다. 요즘 출가연령이 49세까지 되어 있어서 나이 들어 출가한 사람들도 많다고 하지만 만난 학인 스님은 대학생들과 똑 같은 연령대이다.

 

디가니까야를 보시하고

 

스님을 만나는 경우가 드믈지만 학인스님과 대화를 하다 보니 말이 잘 통했다. 그것은 관심사가 같았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서 초기불교에 대한 공부도 하고 있다고 하였다.

 

학인스님에게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물어 보자 상윳따니까와 맞지마니까야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사부니까야 중에 디가니까야와 앙굿따라니까야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디가니까야를 보시하겠다고 말하였다.

 

금일 디가니까야를 구매하여 학인스님에게 보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디가니까야는 단권으로 되어 있다. 여러 권의 책을 한 권으로 만든 것으로서 여러모로 편리하다. 더구나 학인스님도 번역자에 대한 선호도가 일치하여 단권으로 된 책을 택배로 발송하였다.

 

책을 살 돈이 없어서

 

책을 발송하는 과정에서 문자로 알렸다. 그랫더니 전화가 걸려 왔다. 문자로 하기 보다 전화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라고 하였다.

 

학인스님과 전화로 긴 대화를 나누었다. 먼저 학인스님들이 책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그러자 대부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학교의 도서관을 활용한다고 하였다.

 

책은 언제가 가까이 있어야 한다. 항상 가까이 놓고 언제든지꺼내 놓고 보아야 함에도 학인스님들은 책이 없다. 이유를 물어 보니 돈이었다. 돈이 없어서 책을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도서관을 활용한다고 한다.

 

보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디가니까야를 발송하고 나니 후련하였다. 여름에 약속한 것을 지켰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화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자 약속 지키기를 잘했다고 본다.

 

책을 보시하는 것은 부담이 없다. 돈을 보시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값어치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공부하는 학인스님에게 책을 보시하는 것 이상 좋은 보시가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보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금강경에서와 같이 막연하게 무주상보시공덕을 이야기해야 할까? 그러나 보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가장 좋다고 본다.

 

 

보시하기 전에는 기뻐하고,

줄 때는 마음이 청정하며,

주고 나서는 만족해야 한다

 

 

2014-09-2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