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식물도 불살생의 범주에 들어가는가? 식물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9. 30. 19:03

 

식물도 불살생의 범주에 들어가는가? 식물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 때

 

 

 

행운목꽃이 피었을 때

 

식물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강한 냄새를 발산하였을 때이다. 사무실에서 키우고 있는 행운목에서 꽃이 필 때 그랬다.

 

사무실에 있는 행운목이 이제 7년이 되었다. 처음 화원에서 사올 때는 승용차안에 들어 갔으나 7년이 지난 지금 행운목은 천장에 닿기 일보직전이다. 그런 행운목에서 꽃이 피면 커다란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있다. 그런데 7년 동안 네 번의 꽃이 피었다. 이렇게 꽃이 필 때마다 기록으로 남겼다.

 

 

 

행운목꽃(2013-12-10)

 

 

행운목에 꽃이 피면 향내가 매우 강렬하다. 특히 사무실과 같이 밀폐된 공간에서 꽃향기가 발산되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강렬하다. 마치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냄새를 잡기 위해 방향제를 뿌려 놓은 것처럼 신선하면서도 상큼한 냄새가 꼬를 찌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행운목꽃은 밤에만 핀다는 사실이다. 해가 질 무렵에 피어서 아침에 해가 뜨면 닫는다. 이렇게 본다면 행운목꽃은 야행성임에 틀림 없다.

 

행운목꽃은 밤에만 피고, 꽃이 피면 강렬한 향내를 발산한다. 그래서 행운목꽃이 필 때 늘 느끼는 것은 행운목이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텅빈사무실에서 행운목꽃과 함께 있으면 마치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꽃이 피고 향내를 발산하면

 

행운목이 식물이긴 하지만 꽃이 피고 향내를 발산하면 자신을 과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식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꽃이 핀다는 사실 자체는 일종의 생명활동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일터로 향하는 길에 나팔꽃이 피어 있다. 늘 다니는 생태하천길에는 스스로 자라는 나팔꽃을 볼 수 있는데 종류도 다양하다. 어떤 것은 보라색조를 띠고, 또 어떤 것은 빨강색을, 또 어떤 것은 작은 꽃잎을 가진 청색도 있다.

 

 

 

 

 

 

 

 

 

 

 

 

 

 

 

 

 

 

 

나팔꽃은 해가 뜰 무렵 핀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팔꽃은 행운목과 정반대이다.

 

왜 함부로 나뭇가지를 꺽는가?

 

식물에서 꽃이 필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 더구가 강렬한 향내를 발산할 때 더욱 더 살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처럼 꽃이 피고 향기를 발산하는 식물을 대할 때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함부로 식물의 가지를 꺽거나 훼손 하는 것을 삼가게 된다.

 

식물에도 감정이 있을까?

 

식물에도 감정이 있을까? 과학자에 따르면 식물에도 감정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식물도 움직일 수 있을까? 다큐프로에 따르면 움직이는 식물도 있다. 심지어 곤충을 잡아 먹는 식물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식물도 일종의 정신작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식물은 정신작용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무정물(無情物)’이라 한다. 이와 반대로 정신적 작용을 하는 생류를 유정물(有情物)이라 한다.

 

무정물에 대한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식물, 광물 따위와 같이 감각성이 없는 물건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유정물은 감각이 있는 것으로 분류 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무정물과 유정물의 분류에 대하여 정신작용의 유무로 판단한다. 그래서 정신작용이 있는 것에 한해서 중생으로 분류하고 있다.

 

금강경의 중생분류방식

 

금강경에 따르면 중생분류방식이 소개 되어 있다. 대승정종분에 실려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所有一切衆生之類 -卵生 -胎生 -濕生 -化生 -有色 -無色 -有想 -無想 -非有想非無想 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則非菩薩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인, 이른바 알에서 태어나는 것,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 습기에서 태어나는 것, 화현하여 태어나는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여열반(
無餘涅槃)의 세계로 인도하여 완전한 멸도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실은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 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강경, 대승정종분)

 

 

금강경의 클라이막스는 대승정종분이다. 정정분은 금강경의 핵심적 내용에 대한 것으로 비록 초반에 위치하고 있지만 피크를 이룬다. 그래서 항상 이 분을 독송할 때 마다 감정이 고조 된다.

 

금강경은 우주적 스케일이다. 그래서 사실은 한사람도 제도한 바 없다(實無衆生 得滅度者)”라는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삼계가 동원이 되고 모든 중생이 동원된다. 이때 중생의 종류가 태생, 난생, 습생, 화생 이렇게 네 종류의 중생이 소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네 종류의 중생을 모두 성불시키겠다는 커다란 발원을 한 것이다.

 

금강경에서 알에서 난 것도 중생에 들어감을 알 수 있다. 닭과 같은 조류를 말한다. 그리고 습한 곳에서 난 모기나 파리 역시 중생의 영역으로 보았을 때 모두 성불의 대상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 식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렇게 본다면 대승불교에서 식물은 성불의 대상에서 제외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식물도 자애의 대상?

 

식물도 중생의 범주에 들어 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초기불교에서는 식물이 중생의 범주에 들어 간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다음과 같은 문구로서 살아 있는 것의 범주에 들어 감을 알 수 있다.

 

 

Ye keci pāa bhūtatthi

tasā vā thāvarā vā anavasesā
D
īghā vā ye mahantā vā

majjhamā rassakāukathūlā

 

살아있는 생명이건 어떤 것이나,

동물이나 식물이거나 남김없이,

길다랗거나 커다란 것이거나,

중간 것이거나 짧은 것이거나,

미세하거나 거친 것이거나, (stn146)

 

 

Diṭṭhā vā ye vā addiṭṭhā

ye ca dūre vasanti avidūre

Bhūtā vā sambhavesī vā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거나,

멀리 사는 것이나 가까이 사는 것이나,

이미 생겨난 것이나 생겨날 것이나,

모든 님들은 행복하여지이다. (stn147)

 

(자애의 경, 숫따니빠따 Sn1.8, 전재성님역)

 

 

자애의 경(Mettasutta)을 보면 마치 자애의 대상이 언급되어 있다. 마치 금강경에서처럼 성불의 대상이 태---화로 언급되어 있듯이, 자애의 경에서는 자애의 대상이 모든 생류가 됨을 알 수 있다.

 

자애의 경에서 모든 생류(pāa)의 대상으로서 14가지로 분류 되어 있다. 그런데 전재성님역을 보면 식물도 자애의 대상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동물이나 식물이거나 남김없이(tasā vā thāvarā vā anavasesā)”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식물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될 것이다. 함부로 나뭇가지를 꺽는다거나 꽃을 따는 행위는 동물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식물은 정신기능이 없기 때문에 베어도 문제가 없다고 한다. 벼를 베어 수확을 하면, 거기에서 나오는 쌀을 먹고 살기 때문에 식물을 베는 행위는 살생의 범주에 들어 가지 않음을 말한다. 또 식물은 베어도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동물을 살생하는 것과 다르다고 말한다.

 

만일 식물도 중생의 영역에 넣어 살생을 금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인류는 전멸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식물에 한해서는 살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식물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그것은 초기경전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자애의 마음을 가져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자애의 경에서는 자애의 대상으로서 14가지 항목 중에 식물이 포함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애의 대상으로서 식물

 

자애의 대상으로서 식물에 대하여 언급된 경이 또 있다. 사리뿟따의 경(Sn4.16)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Theyya na kareyya na musā bhaeyya
Mett
āya phasse tasathāvarāni,
Yad
ā vilatta manaso vijaññā
Ka
hassa pakkhoti vinodayeyya.

 

도둑질을 하지 말고,

거짓말을 하지 말고,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든 생물에게 자애를 베풀어야 하리라.

마음의 혼란을 알아차린다면,

그것이 곧 악마의 동반자라 생각하여,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stn967)

 

(싸리뿟타의 경, 숫따니빠따 Sn4.16, 전재성님역)

 

 

사리뿟따의 경에서는 오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애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든 생물에게 자애를 베풀어야 하리라(Mettāya phasse tasathāvarāni)”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살생이라는 말 대신 자애(Mettā)’라는 말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식물도 동물과 같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애의 대상임을 알 수 있다.

 

식물도 아픔을 느낄까?

 

전재성님의 번역에 따르면 자애의 대상으로서 식물도 포함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는 번역이 어색해진다.

 

 

Nidhāya daṇḍa bhutesu

tasse thāvaresu ca,
Yo na hanti na gh
āteti

tamaha brūmi brāhmaa

 

동물이건 식물이건

어느 생물에게도 폭력을 쓰지 않고,

또 죽이거나 죽이도록 하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릅니다. (stn629, 와셋타의 경)

 

 

Virato methunā dhammā

hitvā kāme parocare.
Aviruddho as
āratto

pāesu tasathāvare

 

성적 교섭에서 떠나

온갖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든 생명 있는 것에 대해

적대하지 말고, 애착하지도 말라. (stn704, 날라까의 경)

 

 

와셋타의 경에서는 동물이건 식물이건 폭력을 쓰지 말라고 하였다. 여기서 폭력이라는 말은 ‘daṇḍaṃ’의 번역어이다. daṇḍa, 의 뜻으로 곤장이나 몽둥이를 말한다. 식물도 몽둥이로 맞으면 아픔을 느낄까?

 

날라까의 경을 보면 동물이든 식물이든 적대하지 말라고 하였다. 여기서 적대라는 말은 ‘viruddha’이다. 또 애착이라는 말은 ‘sāratta’이다. 식물이 어떻게 적대적일 수 있고 애착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마치 식물에 대하여 사람을 대하는 듯한 번역이다.

 

왜 식물이라 번역하였을까?

 

전재성님의 번역을 보면 식물이 마치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자애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 폭력을 하지 말고, 적대하지도 말고 애착도 가지지 말라고 하였다. 이렇게 정신작용이 없는 식물에 대하여 마치 중생대하듯이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자애의 경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tasā vā thāvarā vā: 역자는 움직이는 것이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나라는 의미로 동물이건 식물이건이라고 번역하였으나 Prj.I.245에서 붓다고싸는 갈애가 있는 것(satanhesu)’갈애가 없는 것(nittanhesu)’이든 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심지어 갈애가 없는 것은 아라한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440번 각주, 숫따니빠따, 전재성님)

 

 

440번 각주는 전재성님의 견해이다. 이 부분만큼은 주석의 견해를 따르지 않고 번역자의 견해가 실려 있다. 그래서 tasā vā thāvarā vā’에 대하여 직역하면 움직이는 것이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나라고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동물이건 식물이건이라고 의역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빠알리어 tasā‘movable, trembling’의 뜻이다. 움직이는 것 또는 떠는 것의 뜻으로 전재성님은 동물로 번역하였다. Thāvarā‘immovable; long-lasting’의 뜻으로 움직이지 않는또는 오래 지속되는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식물로 의역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번역자들은 약한 것 또는 강한 것이라 하여 직역하였다. 오로지 전재성님만이 동물과 식물로 의역한 것이다.

 

번역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참고로 tasā(movable)thāvarā(immovable)에 대한 번역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번역자

번역

비고

빠알리어

tasā vā thāvarā vā

Movable, immovable

전재성님역

동물이건 식물이건

 

中村元역

えているものでも、

なものでも

겁에질린 것이나 강건한 것이나

법정스님역

겁에 떨거나 강하고 굳세거나

 

각묵스님역

약하거나 강하거나

 

석지현스님역

약한 것이건, 강한 것이건

 

Ñanamoli Thera

frail or firm

약한 것이나 견고한 것이나

Acharya Buddharakkhita

weak or strong

약한 것이나 강한 것이나

Piyadassi Thera

feeble or strong

(or the seekers and the attained)

연약한 것이나 강한 것이나

Thanissaro Bhikkhu

weak or strong

약한 것이나 강한 것이나

 

 

대부분의 번역자들이 약한 것이나 강한 것이나로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tasā(movable)에 대하여 약한 것(weak)’이라 하였고, thāvarā(immovable)에 대하여 강한 것(strong)’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번역방식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movable’의미의 tasā‘immovable’의미의 thāvarā를 정확하게 표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식물은 틀린 번역일까?

 

전재성님은 tasā에 대하여 동물이라 하였고, thāvarā에 대하여 식물이라 하였다. 아직 까지 이런 방식의 의역을 보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틀린 번역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약한 것이나 강한 것이나라 번역하였을 때, 오로지 전재성님만은 동물이건 식물이건이라 번역하였다. 이는 동물에 대하여 움직이는 것(movable)’으로 보았고, 식물에 대해서는 움직이지 않는 것 (immovable)’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움직임 여부로 동물과 식물로 구분하여 의역한 것은 어쩌면 tasā(movable)thāvarā(immovable)의 뜻이 잘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결정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뜻의 pāa가 앞에 붙었기 때문이라 본다.

 

생류의 범주에 식물도

 

Tasāthāvarā가 들어간 게송을 보면 공통적으로 pāa가 앞에 수식된다. 그래서 “pāesu tasathāvare”로 정형화 되어 있다. 이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든 생명 있는 것이라고 번역된다. 여기서 생명 있는 것빠나(pāa)’의 번역이다. 그런 빠나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빠나(pāa)에 대하여 빠알리어사전 PCED194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pāa

: [m.] life; breath; a living being.

 

pāa

:m. [pa-an Sk. prāa] 生物, 有情, 生類, 生命.

 

 

영어설명을 보면 ‘life(); breath(); a living being(살아 있는 존재)’의 뜻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해당된다. 한자로는 生物, 有情, 生類, 生命라 번역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빠나(pāa)’에 대한 적절한 번역은 생류(生類)라 보여 진다. 생류라 하는 것은 식물도 해당된다.

 

불살생의 범주에 식물도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그 어떤 경우라도 살생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살생의 의미는 인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동물까지 포함된다. 그런데 “pāesu tasathāvare”라는 정형구에 따르면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든 생명 있는 것의 뜻으로 모든 생류가 대상이 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불살생의 범주에 식물이 들어 가는 것도 타당해 보인다.

 

식물이 불살생의 범주에 속하는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맛지마니까야 데바다하의 경(M101)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있다.

 

 

[세존]

그는 종자나 식물을 해치는 것에서도 떠난다. 하루 한 번 시사하고, 밤에는 식사하지 않으며, 때 아닌 때에 먹는 것을 떠난다. 노래·춤·음악·연극 등을 보는 것에서 떠난다….”

 

(데바다하의 경, 맛지마니까야 M101,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그는 종자나 식물을 해치는 것에서도 떠난다 So (bījagāmabhūtagāmasamārambhā paivirato hoti)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bījagāma’‘seed-kingdom’의 뜻으로 종자로 번역되었고, ‘bhūtagāma’vegetation’의 뜻으로 식물로 번역 되었다. 그래서 종자나 식물을 해치는 것(samārambha)에서 떠나야 함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앞서 게송에서 동물이건 식물이건 어느 생물에게도 폭력을 쓰지 않고(stn629)”라든가,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든 생물에게 자애를(stn967)”이라는 문구가 성립된다. 이는 부처님이 종자나 식물을 해치는 것에서도 떠난다(M101)”이라 하였기 때문에,  생류(pāa)로서 식물에 대하여 폭력을 행사해서도 안되고 죽이는 것을 삼가야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자애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2014-09-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