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수명의 사마시시를 성취한 뿌띠갓따 띳사 장로이야기(Dhp41)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0. 16. 16:04

 

수명의 사마시시를 성취한 뿌띠갓따 띳사 장로이야기(Dhp41)

 

 

인생에서 겟투(GET2)?

 

한 꺼번에 두 가지를 성취할 수 있을까? 그런 경우 겟투(get two)라 할 것이다. 야구경기에서 두 사람의 주자를 한꺼번에 아웃시키는 일을 말한다.

 

담배이름에도 겟투가 있었다. 영어로 ‘GET2’라 하였다. 담배역사를 보니 1997년도에 나온 것이다. 하지만 겟투담배에서 겟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우리 속담에 일석이조라는 말이 있듯이 겟투담배를 피움으로 인하여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다는 뜻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담배를 피움으로 인하여 돈과 건강이 잃어 진다면 동시에 두가지를 잃은 것이 되기 때문에 겟투가 아니라 로스투(LOSS2)’라 해야 할 것이다.

 

겟투는 야구용어이다. 병살타가 이에 해당된다. 이렇게 한꺼번에 두 가지를 잡았을 때 경기를 쉽게 이끌어 간다. 더구나 만루위기 찬스에서 두 명의 주자를 잡게 되면 행운이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겟투는 없을까?

 

병이 들어 죽어 가는 모습

 

법구경 마음의 품(Cittavagga)’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Acira vataya kāyo             아찌랑 와따양 카요

pahavi adhisessati,            빠타윙 아디셋사띠

Chuddho apetaviññāo             춧도 아뻬따윈냐노

nirattha va kaligara      니랏탕 와 깔링가랑.

 

(Cittavaggo, dhp41)

 

 

, 쓸모없는 나무 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머지않아 이 몸은

땅 위에 눕혀지리라.

 

(dhp41, 전재성님역)

 

 

머지않아 이 몸은 땅바닥에 버려지고

마음 또한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리.

그때 덧없는 이 몸은 실로

썩은 나무토막보다도 소용없으리.

 

(dhp41, 거해스님역)

 

 

ああ、このはまもなく

地上によこたわるであろう。

意識い、無用木片(きぎれ)のように、

てられて。

 

(dhp41, 中村元)

 

 

, 이 몸은 머지 않아

땅 위에 누우리라.

의식을 잃고 쓸모 없는 나무토막처럼

버려져 뒹굴 것이다.

 

(dhp41, 법정스님역)

 

 

是身不久     시신불구

還歸於地     환귀어지

神識已離     신식이리

骨幹獨存     골간독존

 

(dhp41, 한역)

 

 

All too soon, this body

will lie on the ground

       cast off,

bereft of consciousness,

like a useless scrap

       of wood.

 

(dhp41, Thanissaro Bhikkhu)

 

 

이 게송은 어느 장로빅쿠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병이 들어 죽어 가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게송에서 첫 번째 구절은 “Acira vataya kayo”이다. 이 구절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 쓸모없는 나무 조각처럼이라 하였다. 나까무라 하지메는 無用木片(きぎれ)のように라 하여 역시 쓸모 없는 나무조각처럼이라 하였다. 여기서 나무조각은 무엇을 말하는가? 죽은 몸에 대하여 버려진 나무토막 처럼 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반얀나무(banyan tree)?

 

첫 구절 “Acira vataya kayo”에서 vataya이 있다. vataya ‘vata + aya의 형태이다. 여기서 vaa‘a banyan tree’의 뜻이다. 반얀나무(banyan tree)는 어떻게 생겼을까?

 

반얀나무에 대하여 한자어로는 無果花(무과화), 榕樹(용수)라 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반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A Banyan (also Banian) is a fig that starts its life as an epiphyte (a plant growing on another plant) when its seeds germinate in the cracks and crevices on a host tree (or on structures like buildings and bridges).

 

(Banyan, 위키백과)

 

 

반얀(Banyan)은 착생식물로 뿌리를 내리는 무과화라 한다. 착생식물이란 나무나 바위와 같은 토양 이외의 것이나 다른 식물 표면에 뿌리와 기근(氣根)의 대부분을 노출하고 착생하는 식물을 말한다. 마치 빌딩이나 다리와 같은 구조물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반얀에 대한 사진은 다음과 같다.

 

 

 

Banyan Tree(위키백과)

 

 

위키백과에서 제공된 반얀나무를 보면 썩어서 쓰러진 것도 볼 수 있다. 마치 마치 시체가 널부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게송에서 쓸모없는 나무 조각처럼이라 하였을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썩은나무

 

게송에서쓸모 없는 나무 조각처럼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하여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Acira vataya kayo: DhpA.I.321에 따르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쓸모 없는 나뭇조각을 말한다. 사람들은 목재를 구하러 숲속에 들어가 나무들을 자르고 바른 것은 바른 모양대로 모으고 굽은 것은 굽은 모양대로 모은다. 나머지 텅 비었거나 썩었거나 매듭이 뭉친 것과 같은 것들을 잘라서 버린다.

 

목재가 필요한 다른 사람이 거기에 오면, 그 버려진 나뭇조각을 취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그 가운데 필요한 것만 취한다. 나머지는 땅위에 버려진다. 목재는 여러 가지 공정을 거쳐 침대의 구성요소가 되거나 발판이 되거나 의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몸의 서른 두 가지 구성요소는 어떠한 부분도 침대의 구성요소나 다른 도움이 되는 재료로 사용될 수 없다. 머지않아 몸은 완전히 의식을 빼앗기고 땅위에 쓸모없는 나뭇조각처럼 눕혀질 것이다.

 

(법구경 628번 각주, 전재성님)

 

 

좋은 목재는 가구의 재료가 되지만 썩은 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우리 몸이 죽으면 마치 버려진 나무토막과도 같다는 것이다.

 

의식이 이몸을 떠났을 때

 

게송에서의식 없이 버려진 채(pahavi adhisessati)”라 하였다. 이말은 무슨 뜻일까? 이는 의식이 없는 존재를 말한다. 의식이 떠난 몸에 대하여 의식없이 버려졌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육체가 파괴 되면 정신 역시 파괴 될 것이다. 병 등으로 인하여 육체가 파괴 되었을 때 정신 역시 사라지고 마는데, 이처럼 정신 마저 떠나게 되었을 때 버려진 나무토막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천하를 호령한 영웅일지라도 그가 죽으면 자신의 힘으로는 손가락 하나 까닥 할 수 없는 것도 의식이 그의 몸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가 파괴되어 의식도 없어 졌다고 하여 단멸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가 남아 있는 한 그 행위(kamma)를 조건으로 하여 재생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 없이 유전하고 윤회하게 될 것이다.

 

쁘띠갓따 띳사와 관련된 이야기(Putigattatissattheravatthu)

 

게송과 관련하여 인연담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시가 설해진 데는 이와 같은 인연담이 있다: DhpA.I.319-320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에 계실 때, 장로 쁫띠갓따 띳싸와 관련된 이야기(Putigattatissattheravatthu)이다.

 

싸밧티 시의 한 청년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감동을 받아 출가했다. 출가 후에는 구족계를 받고 장로 띳싸가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언제부턴가 그의 온몸에 겨자씨만한 크기의 종기가 생겼다. 겨자씨만했던 것이 콩알만한 크기가 되고,  콩알만했던 것이 대두콩만한 크기가 되었으며, 대두콩만했던 것이 대추씨만한 크기가 되고, 대추씨만했던 것이 대추만한 크기가 되고, 대추만했던 것이 아말라까(amalka)만한 크기가 되고, 아말라까 만했던 것이 아직 익지 않은 칠엽수의 열매(beluvasalatuka)만한 크기가 되었으며, 아직 익지 않은 칠엽수의 열매만 했던 것이 칠엽수의 열매만한 크기가 되어 터져서 피와 고름을 흘렀다. 그래서 그는 쁫띠갓따 띳싸(Putigatta Tissa)라 불렸다.

 

땅바닥에 버려진 채 아무도그를 돌보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향실을 떠나 수행승 띳싸가 있는 곳으로 가서 승원을 돌아 다니다가 화로방으로 들어가 그릇을 씻어서 화로 위에 올려 놓고 물을 덥히고 화로방에 섰다. 그리고 물이 덥혀진 것을 알고 수행승이 누워있는 침대의 끝을 붙잡았다. 그러자 수행승들이 세존이시여, 물러서십시오. 우리가 그를 옮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침대를 가져와서 띳싸를 화로방으로 옮겼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승들에게 도구를 가져오게 해서 덥힌 물을 퍼서 찬 물에 덥힌 물을 섞어, 띳싸의 곁으로 가서 그의 몸을 더운 물로 적시며 목욕을 시켰다. 목욕이 끝나자 상의가 말랐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승들에게 상의를 그에게 입게 하고 하의를 벗겨서 더운 물에 빨아서 햇빛에 말리게 했다. 물이 증발하자 하의도 말랐다. 띳싸는 황색 가사 가운데 하나를 하의로 입고 다른 것은 상의로 입었다. 그리고 그는 몸이 상쾌해지고 마음은 통일되어 침대에 누웠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머리 맡에서 의식은 그대를 떠나고 몸은 쓸모 없이 통나무처럼 땅위에 버려질 것이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시로서 , 머지않아 쓸모 없는 나무 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이 몸은 땅위에 눕혀지리라.’라고 가르쳤다. 그 가르침을 듣고 장로 띳싸는 거룩한 경지를 성취하고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이 그의 장례를 지내고 유골을 수습하여 안치하라고 지시했다. 수행승들이 거룩한 경지를 성취할 자가 어떻게 그러한 심한 질병에 들었는지를 궁금해 하자 부처님께서는 그의 전생을 이야기했다.

 

과거불인 깟싸빠(Kasapa)부처님 당시에 띳싸는 새사냥꾼이었다. 그는 많은 새를 잡아서 대부분 왕실에 바쳤다. 남은 것은 내다가 팔았다. 그는 새들을 죽여서 보관하면 팔지 못하는 것과 잡힌 새가 도망가는 것이 두려워, 다리의 뼈나 날개의 뼈를 부러뜨려 한쪽에 쌓아두고 그것을 팔았다. 너무 많으면 자신이 요리해서 먹었다.

 

어느 날 맛있는 음식을 요리 했는데, 한 번뇌를 부순 님이 자신의 집으로 탁발을 와서 문앞에 섰다. 띳싸는 그 장로를 보고 신심이 생겨나 나는 많은 생명을 죽여서 먹었다. 고귀한 님이 내 집 앞에 있고 집안에는 맛있는 음식이 있다. 그에게 탁발음식을 보시하자.’라고 생각하여 발우를 받아서 맛있는 음식을 채워서 장로에게 오체투지하고 존자여, 그대가 본 최상의 원리가 제게도 구현되어지이다.’라고 말했다. 장로는 그렇게 될 지어다.’라고 감사의 말을 했다.

 

수행승들이여, 그때 행한 행위의 힘으로 띳싸는 이렇게 된 것이다. 새들의 뼈를 부러뜨린 결과로서 사지가 썩었고 뼈가 부러졌고, 번뇌가 부수어진 님에게 탁발음식을 공양한 결과로 거룩한 님이 되었다.

 

(법구경 41번 게송 인연담, 쁫띠갓따 띳싸와 관련된 이야기(Putigattatissattheravatthu), 전재성님역)

 

 

 

전인도의 대지를 승가에 보시한 아소까

 

인연담에서 열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에 아말라까(amalka)가 있다. 아말라까는 어떻게 생겼을까? 아말라까 열매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죽음을 극복하려면, 슬픔없는 아소까와 아말라까열매(2011-04-16)’라는 제목의 글이다.

 

아말라까열매는 아소까대왕과 관련이 있다. 일아스님이 지은 책 아소까에 따르면 아소까는 자신이 정복한 전 인도의 대지를 승가에 보시하였다. 고대인도에서 나라는 왕의 것이나 같기 때문에 나라를 승가에 보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신들이 금을 주고 다시 나라를 사 왔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 시대의 관습이었다고 한다.

 

아말라까(amalaka)

 

전세상을 승가에 보시하였던 아소까대왕의 말년은 비참하였다. 아소까대왕이 말년에 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하였을 때 승가에 진귀한 보물을 공양하려 하였다. 그러나 가신들이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늙고 병들고 힘이 빠졌을 때 아소까는 자신의 힘으로 무엇 하나 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기록이 대당서역기에 실려 있다. 말년의 아소까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빠딸리뿟따의 꾹꾸따라마(Kukkutarama)승원에 큰 탑이 있는데 이름이 아말라까(amalaka)탑이라 하는데 아말라까란 인도의 약용과일 이름이다. 아소까 왕이 병이 들어 중태가 되었을 때 승가에 진귀한 보물을 공양하려 하였으나 가신들의 만류로 공양할 수가 없었다.

 

천하를 마음대로 통치했던 권력은 가버리고 이제는 오직 식사에 나온 아말라까만 뜻대로 될 뿐이라고 한탄하면서 아말라까를 먹지 않고 꾹꾸따라마 승원으로 보냈다. 그래서 승가대중들은 그 아말라까를 끈으로 묶어 국을 끓여 국물은 대중이 모두 먹고 아말라까를 꺼내어 탑을 세우고 탑 속에 모셨다 한다.

 

(대당서역기 기록, 일아스님의 아소까 75p)

 

 

대당서역기에 실려 있는 아말라까열매 이야기이다. 천하를 호령하고 천하를 승가에 보시하였던 아소까이었다. 그래서 아소까(Asoka)’라 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asoka라는 말은 ‘free from sorrow’ 의 뜻으로 슬픔이 없는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슬픔이 없는 아소까라 한다.

 

슬픔 없는 아소까의 슬픔

 

슬픔이 없는 아소까는 말년을 슬프게 보냈다. 이에 대한 게송이 청정도론에 실려 있다.

 

 

 “Sakala medini bhutvā, datvā koisata sukhī;

Aḍḍhāmalakamattassa, ante issarata gato.

Teneva dehabandhena, puññamhi khayamāgate;

Maraābhimukho sopi, asoko sokamāgato”

 

(Visuddhimaggo)

 

 

“He gave with joy a hundred millions

After conquering all the earth,

Till in the end his realm came down

To less than half a gall-nut’s worth.

Yet when his merit was used up,

His body breathing its last breath,

The Sorrowless Asoka too

Felt sorrow face to face with death.”

 

(영역 청정도론, 빅쿠 냐나몰리역)

 

 

전 대지를 정복하여 10억을 보시했던

행복한 왕도 마지막에는 그 왕국이

아말라까 열매의 반 정도에도 미치지 못했다.

비록 슬픔 없는 아소까였지만 공덕이 다 하여

죽음을 향했을 때 바로 그 몸으로 슬픔을 느꼈다.”

 

(청정도론, 7 14, 대림스님역)

 

 

이 게송은 청정도론에서 죽음에 대한 명상에 실려 있는 것이다. 천하를 지배한 슬픔없는(sorrowless) 아소까대왕도 말년에 늙고 병들어 죽어 감에 따라 슬픔을 느꼈다는 것이다.

 

아말라까 열매

 

천하를 승가에 보시한 아소까이었지만 말년에는 아말라까 열매 하나 밖에 보시할 수 없었다. 그런 아말라까 열매는 다음과 같다.

 

 

 

 

아말라까열매

 

 

칠엽수 열매, 마르멜로

 

인연담에 따르면 띳싸의 병은 작은 겨자씨만한 종기로 시작하여 아말라까열매만하게 커졌다고 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더 커져서 칠엽수 열매만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칠엽수 열매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칠엽수를 뜻하는 beluvasalatuka를 키워드로 검색하니 unripe fruit of Marmelos.’라 한다. Marmelos를 검색하니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발견하였다.

 

 

Aegle marmelos, commonly known as bael, Bengal quince, golden apple, stone apple, wood apple, bili, is a species of tree native to India. It is present throughout Southeast Asia as a naturalized species.[3]

 

(Aegle marmelos, 위키백과)

 

 

마멜로스는 일반적으로 bael’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벵갈 마르멜(quince)이라 하며, 황금색 사과, 돌사과, 나무사과 등으로 불리우는 인도원산의 나무라 한다. 우리말로는 마르멜로로 알려져 있다. 마르멜로에 대한 사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마르멜로(위키백과)

 

 

법구경 인연담에 언급되어 있는 칠엽수열매, 즉 마르멜로 열매는 무척 크다. 띳싸의 몸에서 겨자씨만한 열매가 마르멜로만한 열매로 커졌을 때 그것을 원인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육체적 죽음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인연담에 따르면 부처님은 죽음을 앞둔 띳싸를 극진히 간호 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 맡에서 의식은 그대를 떠나고 몸은 쓸모 없이 통나무처럼 땅위에 버려질 것이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시로서 , 머지않아 쓸모 없는 나무 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이 몸은 땅위에 눕혀지리라.”라고 가르침을 펴신 것으로 되어 있다.

 

 통나무처럼 땅위에 버려질 것이다라는 말은 맛지마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다. 경에 따르면 꼿띠따가 사리뿟따존자에게 “벗이여, 얼마나 많은 상태가 이 몸을 떠나면, 여기 이 몸이 무정한 통나무처럼 버려지고, 던져져 누워있게 되는 것입니까? (M43)”라고 묻는다. 이는 육체적 죽음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Yadā kho āvuso ima kāya tayo dhammā jahanti, āyu usmā ca viññāa, athāya kāyo ujjhito avakkhitto seti yathā kaṭṭha acetananti

 

“벗이여, 세 가지 상태 즉 생명력과 체열과 의식이 이 몸을 떠나면, 여기 이 몸은 무정한 통나무처럼 버려지고, 던져져 누워있게 됩니다.

 

(Mahāvedalla sutta- 교리문답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43, 전재성님역)

 

 

사리뿟따는 육체적 죽음에 대하여 생명력(āyu) 과 체열(usmā)과 의식(viññāa) 이렇게 세 가지 요소가 몸을 떠났을 때 죽는 것이라 하였다.

 

몸에서 의식만 떠나서는 죽는 것이라 볼 수 없다. 식물인간의 경우 의식은 없지만 생명력과 체열이 있으므로 죽은 것이 아니다. 생명력과 활기가 모두 소멸하여야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죽음의 삼요소는 마침내 목숨과 온기와 의식 그리고 몸을 버리면, 버려진 채 놓이니 무정하게 다른 것의 먹이가 되네.(S22.95)”라고 하여 상윳따니까야에서도 보인다.

 

사마시시(samasīsī)?

 

생명력과 체열과 의식이 몸을 떠나면 통나무처럼 무정한 것이 된다. 띳싸 역시 무정한 통나무와 같은 몸이 되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띳싸는 거룩한 경지를 성취하고 열반에 들었다라고 인연담에 표현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사마시시를 말한다.

 

사마시시에 대하여 수 많은 글을 올렸다. 가장 최근에 올린 것은 고디까, 왁깔리, 찬나, 빅쿠는 자살하였나?(2014-07-29)’라는 제목의 글이다.

 

한꺼번에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하는 것에 대하여 ‘사마시시(samasīsī)’라 한다. 또 이룬 자를 ‘사마시신(samasīsīn)’이라 한다. 이 용어는 인시설론(人施設論, Pug.19)에 처음 나타나는 단어라 한다. 어원을 보면 “동시에(sama)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한 자(sīsīin)”의 뜻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사마시시관련 내용이 있다. ‘무상에 대한 관찰의 경에 따르면 그는 앞도 뒤도 아니고 동시에 번뇌의 종식과 목숨의 종식이 이루어진다.(A7.16)”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이 실현 되었음을 말한다. 이렇게 동시에 두가지가 달성 되었다고 하여 이를 ‘사마시시(samasīsī)’라 하고, 이를 이룬 자를 ‘사마시신(samasīsīn)’이라 한다.

 

네 가지 사마시시가 있는데

 

주석서에 따르면 네 종류의 사마시시가 있다. 질병의 사마시시, 느낌의 사마시시, 자세의 사마시시, 수명의 사마시시를 말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사마시시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사마시시 종류

   

비고

질병의 사마시시

rogasamasīsī

어떤 질병에 걸렸다가 질병의 치유와 더불어 번뇌의 소멸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

 

느낌의 사마시시

vedanasamasīsī

어떤 느낌을 느끼다가 느낌의 지멸과 더불어 번뇌의 소멸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

 

자세의 사마시시

iriyapathasamasīsī

어떤 자세를 취하면 통찰하는 자가 자세의 종료와 더불어 번뇌의 소멸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

 

수명의 사마시시

jivitasamasīsī

앞도 뒤도 아니고 동시에 번뇌의 종식과 목숨의 종식이 이루어지는 것

고디까, 왁깔리, 찬나

 

출처; 무상에 대한 관찰의 경(A7.16)

 

 

네 가지 사마시시 중에 수명의 사마시시가 있다. 이 수명의 사마시시는 다른 사마시시와 달리 죽음과 함께 번뇌가 종식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드는 케이스에 해당된다.

 

수명의 사마시시를 성취한 띳사

 

죽음의 사마시시로서 수행중에 자결한 고디까, 중병으로 자결한 왁깔리와 찬나빅쿠가 해당된다. 그런데 법구경 인연담에 등장하는 띳싸의 경우도 해당 될 것이다. 띳싸빅쿠가 중병에 걸려 임종에 이르렀을 때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완전한 열반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번뇌가 소멸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들었음을 말한다. 번뇌가 소멸되었다는 것은 아라한이 되었음을 말한다.

 

아라한이 된 상태로 살아 간다면 이를 유여열반이라 한다. 그런데 임종순간에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면 이는 한꺼번에 두 가지를 성취한 것이다. 영어로 겟투(GET2)’에 해당된다. 이렇게 임종순간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 것이다. 이를 사마시시(samasīsī)’라 하고, 성취한 자에 대하여 시마시신(samasīsīn:首等者)’이라 한다.

 

띳싸는 겨자씨만한 종기가 마르멜로 열매만하게 커져 죽었지만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임종순간에 번뇌가 소멸되어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을 성취하였다. 비록 그의 몸은 통나무처럼 버려졌지만 재생의식이 일어나지 않아 윤회로 부터 벗어난 것이다. 이와 같은 띳싸의 죽음은 육체적 죽음과 함께 정신도 소멸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단멸론과는 다른 것이다.

 

 

2014-10-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