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등 따습고 배부른 자들의 ‘환망공상’희론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0. 21. 11:40

 

등 따습고 배부른 자들의 환망공상희론

 

 

 

불교칼럼을 보면

 

교계신문사이트를 보면 수 많은 칼럼을 볼 수 있다. 주로 스님이나 교수의 칼럼이다. 또 교계에서 이름 있는 사람들의 칼럼이다. 이런 칼럼을 대할 때 불교교리나 담마에 대한 것을 찾아 보기 힘들다. 거의 대부분 자신들의 신변이야기 또는 자신의 일과 관련된 이야기 등으로서 부처님이 말씀 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불교닷컴에 실리 어느 스님의 칼럼을 보면 교리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한문으로 된 한시가 보인다. 마치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고 하듯이 불교칼럼이지만 교리에 대한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댓글이 거의 달리지 않는다.

 

어느 교수의 칼럼을 보면 역시 교리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새롭게 불교를 해석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경전을 무시하기 일쑤이다. 경전에 쓰여진 문구는 낡은 것, 쾌쾌묵은 것 정도로 간주한다. 심지어 비과학적 내용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거품을 걷어 내자고 말한다.

 

K교수의 환망공상을 보면

 

불교닷컴에 기고된 K교수의 칼럼을 보면 불선심을 자극한다. 자신과 견해가 다른 글을 보았을 때 로그인하게 만든다라고 하는데, K교수의 환망공상을 보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말이기 때문이다.

 

K교수는 수학자이다. 과학을 근거로 하여 컬럼을 쓰기 때문에 과학적 내용이 가득하다 진화론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러므로 지구상의 특정한 생명체가 아메바와 같은 미물微物과 인간 사이를 위로 아래로 왔다 갔다 하며, 유한개의 고정된 동물의 몸과 마음의 형태로, 무한한 시간동안 무한히 되풀이해서 윤회한다는 이론은 엉터리 이론이다.

 

(테라 인코그니타: 미지의 땅: 환망공상의 , K교수, 불교닷컴 2014-10-20)

 

 

거두절미하고 K교수는 윤회한다는 이론은 엉터리 이론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이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면 부정하는 말이다.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우는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수 없이 윤회를 말씀 하셨음에도 윤회는 없다고 한다. 윤회가 없다면 인생은 원타임(One Time)’이란 말인가?

 

? 윤회가 엉터리이론이라고?

 

K교수가 윤회를 엉터리로 보는 근거가 있다. 그것은 지구의 역사에 대한 것이다.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한 지는 오래 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몇 백만년전이다. 크로마뇽인이 출현한 것은 수 만년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질학에 따르면 2억년 전에는 공룡이 이땅의 주인이었다. 이런 지질학적 인류학적 상식으로 보았을 때 인간이 동물이 되고, 동물이 인간이 되고, 심지어 미생물이 인간이 되는 등의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불교의 윤회가 나오게 된 것은 그 때 당시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렇게 과학적 잣대를 들이밀어 간단하게 윤회한다는 이론은 엉터리 이론이다라고 선언 한 것이다.

  

K교수가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어떻게 아메바와 같은 미생물이 인간이 되기도 하고, 인간이 미생물이 될 수 있는지 의문 하는 것이다. 그래서 K교수가 말하는 진화는 오로지 한쪽 길로만 간다고 한다. 한번 침팬지의 길로 가면 그 길로 죽 갈 뿐 인간으로 진화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진화의 나무에는 무수한 다른 가지들이 존재한다. 이 다른 가지들은 절대 다시 만나지 않는다. 일단 한번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치면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는다.(K교수)”라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오로지 인간의 길로만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과 관련하여 이제 물질적은 진화는 거의 멈추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일체유심조를 강조하면 이제는 정신적인 진화로 가야 함을 강조한다.

 

영원주의자인가 허무주의자인가?

 

그리고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의 끝에는 무아(無我)라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 무상(無常)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연기(緣起)의 대해(大海)를 건너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이 끝에 도달한 자들은 이 괴물에게 잡아먹힌다. 그 순간 세계는 찬란한 대자유의 세계로 돌변한다.

 

(테라 인코그니타: 미지의 땅: 환망공상의 , K교수, 불교닷컴 2014-10-20)

 

 

 

 

fantasy-world

 

 

어떤 글이든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만일 메시지가 없는 글이라면 횡설수설하고 말 것이다. 길게 글을 쓰지만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말을 쓰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본다면 K교수의 긴 글 끝에 결론적으로 쓰여 있는 글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K교수의 결론을 보면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였다. 노골적으로 직설적 화법을 피하고 언어를 상징화 한 것이다. 그렇다면 K교수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이제 까지 K교수의 글을 보면서 느낀 점은 단멸론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K교수는 결론부에서 세계의 끝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죽음을 뜻한다. 그런데 세계의 끝에 무아가 있다고 하였다. 그것도 무아의 괴물이라 하였다. 무아를 왜 괴물이라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밝히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이 무아라는 괴물에게 잡혀 먹는다라고 하였을 때 아마 해탈 등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찬란한 대자유의 세계로 돌변한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K교수의 결론에 대하여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영원주의이고 또 하나는 허무주의이다. 영원주의는 절대로 있다는 절대유를 강조한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K교수의 합일론은 전형적인 영원주의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내세와 윤회를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허무주의이다.

 

허무주의는 영원주의와 반대로 절대무를 강조한다. 허무주의자들은 육체와 정신을 상호의존관계로 본다. 그래서 연기 또한 상호의존적 관계로 본다. 이렇게 육체와 정신을 상호의존적 연기로 보았을 때 단멸론이 성립된다. 육체가 무너지면 정신도 함께 무너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K교수는 영원주의자인가 허무주의자인가?

 

과학의 시대라 하지만

 

이 세상의 종교는 영원주의 아니면 허무주의이다. 이는 부처님 당시 상황이 잘 말해 준다. 영원주의를 대표하는 종교가 브라만교이었고, 육사외도의 대부분이 허무주의인 것은 초기경전을 보면 명확하게 나와 있다. 이처럼 종교나 사상은 영원주의 아니면 허무주의이다. 이런 사조는 문명과 과학이 발달된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배격한다. 부처님이 연기법으로 논파한 것이다. 이런 연기법은 과학과 문명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변함이 없다. 왜 그런가? 이미 원리로서 확정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S12.20)”라고 말씀 하셨다. 연기법은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근본원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의 시대에 연기법 역시 그대로 적용된다.

 

부처님이 무기한 이유는

 

K교수는 과학적 상식을 들어 윤회를 부정하고 있다. 특히 진화론을 근거로 들고 있다. 심지어 부처님 당시에 진화론이나 지질학을 몰랐기 때문이라 하며 허황된 이야기가 경전에 쓰여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물리적 진화의 예를 들어 간단하게 윤회를 부정한다. 그런데 정신적 진화가 있다고 한다. 앞으로 인류는 무한한 정신적 진화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 정신적 진화의 끝은 어디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열반으로 귀결된다. 탐진치 등 번뇌를 소멸하고 청정한 삶을 살았을 때 다시는 윤회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악업은 물론 선업 등 일체 업을 짓지 말아야 함을 강조한다. 그런 업은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으로 짓는 업을 말한다. 그렇다면 정신적으로 환망공상에 사로 잡혀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의 무기(無記)’가 있다. 대표적으로 말룽끼야뿟따경을 들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라든가 “세상은 무한한가?” 등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의문하는 말룽끼야뿟따에게 부처님은 쓸데 없는 데에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체 답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답을 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질문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질문

 

부처님이 희론에 대하여 무기한 첫 번째 이유는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질문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그와 같은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존재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람이 존재한다.’라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존재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존재가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난다. (S12:12)”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설명될 수 있다.

 

만일 부처님이 “세상은 무한한가?”등에 대하여 답을 하게 된다면 회의론자들은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또 다시 질문하여 물어 볼 것이다. 사실상 회의론자들에게 답이 될 수 없다. 이렇게 형이상학적 주제는 필요 없는 논쟁만 야기할 뿐이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질문은 결국 희론이다. 그런 희론에 매달려 보아야 평생 풀리지 않는다.

 

등 따습고 배부른 자들이

 

부처님이 희론에 대하여 무기한 두 번째 이유는 삶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론에 대한 의문이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조금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세계의 끝에는 무아(無我)라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 무상(無常)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연기(緣起)의 대해(大海)를 건너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이 끝에 도달한 자들은 이 괴물에게 잡아먹힌다. 그 순간 세계는 찬란한 대자유의 세계로 돌변한다.”라는 K교수의 말이 고단한 삶을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등 따습고 배부른 자들이 심심풀이로 공상해 보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환망공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뽓따빠다여, 이러한 것들은 유익한 것이 아니고 원리에 맞지 않고 청정한 삶을 시작하는데 맞지 않고, 싫어 하여 떠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사라지기 위한 것이 아니고, 소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치지 위한 것도 아니고, 곧바로 알기 위한 것도 아니고, 올바로 깨닫기 위한 것도 아니고, 열반에 들기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것에 대해 설하지 않습니다. (D9)”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희론을 배격하였다.

 

세상의 발생원리와 희론의 발생원리

 

K교수가 칼럼에서 언급한 환망공상은 희론에 지나지 않다. 그런 희론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초기불교 경전에 답이 있다. ‘마두삔디까경(M18)’에 따르면 희론의 발생 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가장 먼저 접촉에 따른다. 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삼사화합이라 한다. 삼사화합이란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S35;107)”라고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든 정신의 세상이든 모두 접촉에 따른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런 접촉은 세 가지 즉, 시각과 형상과 시각의식을 말한다. 이 세 가지가 화합 하였을 때 접촉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접촉에 대하여 팟사(phassa)라 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감각접촉을 말한다. , , 코 등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의 접촉과 그에 따른 인식을 감각접촉(phassa)’라 한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세상의 발생원리와 희론의 발생원리에서 공통되는 것은 삼사화합에 따른 접촉과 접촉을 조건으로 하는 느낌의 발생이다. 이렇게 접촉에서 느낌까지는 같지만 느낌 이후에서 부터는 갈라진다. 세상의 발생원리는 느낌을 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고순으로 연기가 전개 되지만, 희론의 발생원리는 느낀 것을 지각하고로 시작 되는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난다. 이에 대하여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공통점

차이점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S35.107)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 (S35.107)

세상(괴로움)의 발생원리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M18)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 (M18)

희론의 발생

 

 

  

 

삼사화합에 따른 접촉으로 느낌까지는 공통이다. 그러나 느낌 이후에는 달라진다. 세상이나 괴로움의 발생은 느낌을 조건으로 시작되는 연기의 회전이 일어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두삔디까경(M18)에 따르면 느낌 이후에 희론으로 발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희론의 발생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느낌-지각-사유-희론 순으로 발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희론은 오염된 것

 

경에 따르면 이런 희론에 대하여 오염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라 하였다. 그렇다면 희론이 왜 오염된 것일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욕망을 조건으로 시간과 존재가 생겨난다고 하는 인식론적인 과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 여섯감역(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을 통해서 각각의 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자각하고 자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戱論)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시간과 존재에 관한 관념이 생겨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유의 근거 없는 확장, 즉 희론이 시간과 존재에 관한 관념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358번 각주, 전재성님)

 

 

이 각주는 주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전재성님의 개인적인 견해이다. 전재성님에 따르면 희론에 대하여 사유의 근거 없는 확장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오로지 정신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토끼의 뿔은 실재 하지 않지만 정신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그래서 느낀 것을 자각하고, 자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戱論)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시간과 존재에 관한 관념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K교수가 말하는 환망공상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희론은 오염된 것이라 하였다. 이는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에 실려 있는 62가지 사견을 들 수 있다.

 

모든 것은 감각접촉(phassa)에서

 

62가지 삿된 견해는 모두 접촉에서 기인한다. 예를 들어 영원주의자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감각접촉에 따른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들이 접촉없이 그것을 인식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D1)”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접촉없이는 이러한 견해의 감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법문집에 따르면 요컨대, 우리가 말하거나, 쓰거나, 견해를 갖거나, 생각하거나, 마음이 자유롭게 망상하도록 그냥 내버려 둘 때에는 생생한 상상, 즉 감각접촉[]이 필요합니다.”라 하였다. 과거의 풍요로움이나 미래에 풍요롭게 되리라는 예상과 관련된 표상처럼 즐거운 감각접촉은 즐거운 느낌을 일으키고, 반면 괴로운 감각접촉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려야 한다. 이렇게 느낌이 갈애로 발전되지 않도록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환망공상은 희론

 

느낌단계에서 알아 차리지 못하면 연기의 회전이 시작 되거나 희론으로 발전된다. 모든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것들이다. 특히 K교수가 말하는 환망공상은 대표적 희론이다. 그런데 K교수의 환망공상론에 따르면 윤회는 부정된다. 더구나 윤회한다는 이론은 엉터리 이론이다라 하였다. 희론으로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단멸론적이고 허무주의적 견해이다.

 

허무주의 견해는?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의 사상 대부분은 허무주의이었다. 그렇다면 단멸론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단멸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헌공도 없고,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화생하는 뭇삶도 없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세상에서 올바로 살고 올바로 실천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도 없다.

 

네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사람의 그 목숨이 끝날 때에 땅은 땅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 네 명의 인부가 상여에 시체를 싣고 가서 화장터에 조사를 읊조리지만 마침내 뼈는 표백되고 제물은 재가 된다.

 

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이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허황된 망설이다.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

 

(Natthidinnasutta-보시도 없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24.5, 전재성님역)

 

 

이것이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단멸론이다. 그런데 이런 단멸론을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문명이 발달한 요즘이나 부처님 당시나 단멸하여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견해는 조금도 변함 없다. 아니 과학문명이 발달한 요즘 더 기승을 부리는 것 같다. 과학적 상식에 근거하여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 대부분이 단멸론자라고 보면 틀림 없다.

 

단멸론을 조목조목비판한 마하시 사야도

 

단멸론과 같은 삿된 견해를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집착 때문이다. 십이연기에 따르면 집착에는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 (2) 사견에 대한 집착(diṭṭhi-upādāna) (3)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sīlabbata-parāmāsa-upādāna) (4)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atta-vāda-upādāna) 이렇게 네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네 가지 집착중에 두 번째 사견에 대한 집착’이 있다. 이는 단멸론으로 설명된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첫 번째 사견은 보시란 좋은 업을 짓는 행위가 아니고 단지 돈만 날리는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선행의 가치와 과보를 부정합니다만 사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보시행은 보시자를 기쁘게 하고 보시 받는 자를 물질과 정신으로 이롭게 하고 심지어는 굶주린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데 도움이 되기 합니다. 보시자는 평판이 좋고 큰 존경을 받습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천신계에 태어납니다. 이렇게 죽은 뒤에 받는 보상을 회의론자들에게 납득시키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업의 세속적 과보는 신통력을 가진 아라한과 다른 성자들은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통력의 하나는 하늘 눈[天眼]입니다. 이러한 하늘 눈[天眼]으로 보시자가 천신계에서 잘 살고 있는 것과 악행을 일삼은 비보시자는 악처에서 고통을 겪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한 광경은 신통력을 얻지는 못했지만 깊은 삼매를 얻은 일부 수행자들도 볼 수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광경을 상상의 산물이라고 치부해버리겠지만 저 세상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를 수긍하는 것은 이야기의 신빙성에 더 무게를 싣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사견도 또한 큰 규모의 보시가 가져오는 업의 이익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사견은 새해를 맞이하여 손님을 대접하고 선물을 주는 등의 행위가 가져오는 업의 이익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 사견은 본질에 있어서 첫 번째 사견과 같습니다. 이는 당시 외도(外道)들이 무익하다고 치부해버린 고대 인도에서 성행하던 작은 보시행을 가리킵니다.

 

(4) 네 번째 사견은 도덕적인 선행이나 악행이 가져오는 업보를 부정하는 견해(akiriya-diṭṭhi)입니다. 사람이 현생에서 짓는 행위에 대해 받는 업보와 다른 세속적인 과보에 대한 증거가 많이 있으며, 신통력으로 그것을 입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감각적 쾌락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욕망에 그냥 내맡겨 두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물질적 향상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되는 도덕적 가치와 이상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업의 법칙을 부정하는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논리를 제시합니다. 최종적인 분석결과 이는 그들이 감각적 쾌락을 지나치게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5) 다섯 번째와 (6) 여섯 번째 사견은 어렸을 때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아준 부모에게 입은 은혜에 표하는 공경이나 경의, 후원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쩌다가 성관계를 맺어서 애를 가졌고 책임감에서 애를 키운 것이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감사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를 돌보아 드리는 게 선행도 아니며 부모에게 못되게 구는 것도 죄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끔찍한 견해로 이러한 사견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아이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7) 일곱 번째 사견은 인간계와 축생계를 제외한 다른 중생계를 부정합니다. 이 사견은 동물이 인간으로 재생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부정합니다.

 

(8) 여덟 번째 사견은 인간이 천신계나 축생계, 또는 지옥에 재생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죽으면 삶이 끝난다는 단멸론(斷滅論)을 가르칩니다.

 

(9) 아홉 번째 사견은 화생(化生)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태에 들지 않고 완전히 성장한 성체를 지니고 나타나는 천신, 범천, 아귀, 아수라등과 같은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선하거나 악한 유령과 만났다는 보고가 있고 유령, 천신, 범천 등을 불러올 수 있는 무당과 심령술사가 있으며, 이들은 때로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에게 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견해는 지지할 수 없습니다.

 

(10) 열 번째 사견은 이 세상과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을 설하고 자신들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문이나 바라문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스스로의 실제적이고 남다른 경험을 토대로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독자적으로 설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들의 모든 가르침은 다 추측과 공론이어서 거짓이며 삿된 것임을 뜻합니다.

 

오늘날 이 견해는 종교를 조롱하는 사람들에 의해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부처님과 아라한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하지만 이 견해에 근거하고 있는 논리는 자기 당착적이고 파멸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견해를 지니고 있는 사람도 역시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해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똑같은 사유를 통하여 우리는 이 견해를 부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8.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일어난다,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법문집에서)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 법문집을 보면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단멸론을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이런 비판은 오늘날 환망공상과 같은 단멸론에도 유효하다.

 

삼계와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

 

법문에 따르면 일곱 번째에 다른 중생계를 부정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삼계를 부정한다는 말과 같다. 어떤 이는 삼계는 실존하는 세계가 아니다라고하여 삼계를 부정하였다.

 

또 단멸론자들은 동물이 인간으로 재생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부정한다고 하였다. 이는 K교수의 유한개의 고정된 동물의 몸과 마음의 형태로, 무한한 시간동안 무한히 되풀이해서 윤회한다는 이론은 엉터리 이론이다.”라고 말한 것을 꼭 집어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삼계를 부정하고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모두 단멸론으로서 허무주의적 견해이다. 오로지 현생만을 생각할 뿐 죽음 이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여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직 죽어서 돌아 온 사람들이 없을 뿐더러 죽어서 확인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검증의 잣대로서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을 단멸론자 또는 허무주의자라 한다.

 

망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면 영원주의자나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 과학적 지식에 근거하여 개인적인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 대부분은 경전을 무시한다. 오래 되고 퀘퀘묶은 것으로 보아 과학문명이 발달된 시대에 쓸모가 없는 것으로 본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검증의 잣대로 가르침을 재단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영원주의 아니면 허무주의 둘 중의 하나로 귀결 되기 쉽다.  

 

삼계를 부정하고 윤회를 부정하는 환망공상의 삿된 견해를 가진 자들은 그물에 갇힌 물고기와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62가지 사견을 가진 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과거를 생각하고

과거-미래를 생각하는 자로서

어떠한 수행승들이나 성직자들이라도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갖고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망설을 주장한다면,

모두가 이러한 예순 두 가지

그물코를 가진 그물에 사로 잡혀,

거기에서 빠져나가려고

오르락내리락 하면 할수록,

거기에 갇힌 채 그물에 조여

발버둥치게 될 것이다. (D1)

 

 

 

2014-10-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