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오취온이 고성제인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0. 22. 12:54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오취온이 고성제인 이유

 

 

 

인간의 목숨은

 

하늘에서 바다에서 땅에서 땅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렇다고 하여 집안에만 꽁꽁 숨어 있어야 할까? 어떤 사람이 내일 죽을 운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하루 종일 집안에만 꼼짝 않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집천장이 무너져 죽었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언제 어떻게 변을 당할지 알 수 없다. 이런 사실이 진리임에도 사람들은 죽음은 나와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고 주변의 사고를 보아도 나와 무관한 일로 여긴다.

 

아직 나에게 닥치지 않았다고 하여 남보듯 할 수 있을까? 숫따니빠따에 따르면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럽고 짧아 고통으로 얽혀 있습니다.(stn574)”라 하였다. 이렇게 분명히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인간의 목숨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길을 걷다가 낡아 빠진 간판이 떨어져 즉사 하는 경우도 있다. 멀쩡하던 지붕이 무너져 죽기도 하고 땅이 꺼지듯이 바닥이 내려 앉아 죽기도 한다. 다리를 건너던 버스가 다리 중간이 끊어지는 바람에 죽기도 한다. 단단하다고 여긴 백화점 건물이 갑자기 붕괴하기도 한다. 마치 죽음을 향하여 모든 것이 시나리오가 짜져 있는 듯 하다. 그럼에도 죽음의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남은 자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인생관은 어떤 것일까?

 

미래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접고

 

요즘 JTBC뉴스가 기다려진다. 최근 시간대가 변경되어 저녁 8시에 시작하는데 끝나는 시간은 9시를 훌쩍 넘긴다. 이러다 보니 다른 방송사의 뉴스시간은 별로 관심이 없다. 준수한 용모의 인간미 넘치는 뉴스진행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JTBC 대담프로에서 성수대교참사에서 살아 남은 사람의 인터뷰가 있었다. 그 때 당시 의경으로 있었는데 다리가 끊어짐과 동시에 동료들과 함께 탓던 봉고버스가 아래로 추락하였다고 하였다. 다행히 아무런 부상을 입지 않았고 주변의 사람들을 구조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후 정신적 외상에 시달렸다고 하였다. 이를 영어로 트라우마라 한다.

 

트라우마에 시달린 전의경은 20년 전의 일을 회상하였다. 뉴스진행자가 그 때 당시와 지금의 삶에 방식에 차이가 있는지 물어 보았다. 이에 전의경은 큰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접었다는 것이다. 사고 이전에는 미래에 대한 꿈이 부풀어 있었고 별일 없는 한 실현 될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가 난 후 바뀌었다고 하였다. 내일을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 하루를 즐겁게 살자라고 바뀌었다고 하였. 이런 식의 이야기는 끔찍한 사고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다. 어느 종편방송에 출연한 신정아씨 역시 이런 말을 하였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기적적으로 살아 남은 신정아씨 역시 미래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접었다고 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 한다.

 

절망이라는 종착역을 향하여

 

부처님 말씀처럼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운명이다. 그래서 운명지워졌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의 운명은 항상 절망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는 십이연기정형구에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 하였다.

 

존재의 삶은 결국 절망으로 귀결 된다. 여기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는 말은 빠알리어가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이다. 이는 여러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복합어이다.

 

복합어에서 절망과 관련된 말은 ūpāyāsā이다.  Ūpāyāsā‘tribulation; grief’의 의미로 시련, 고난, 재난, 슬픔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절망이라는 말과 거리가 있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도 ūpāyāsā에 대하여 절망이라 번역하였다. 빅쿠보디 역시 ‘despair’라 하여 절망으로 번역하였다.

 

번역자 마다 연기의 회전에서 종착지에 대하여 절망이라 하였다. 인간의 삶이 끊임 없이 유전하고 윤회하지만 그런 연기의 종착점은 항상 절망으로 끝남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웃고 즐겁고 행복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절망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절망이라는 종착역을 향하여 폭주 하는 기관차에 타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하여 불교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종교, 절망을 이야기하는 종교일까?

 

세상사람들이 알고 있는 불교는

 

세상사람들이 알고 있는 불교는 어떤 것일까? 우리 국민의 약 절반이 약간 넘는 55%정도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 불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22%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반사람들은 불교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실상 거의 모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불자들도 자신의 종교의 교리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사람들이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매우 심오하기 때문이다. 이는 신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는 종교와는 다른 것이다. 불교에서는 창조신을 인정하지 않기에 인간의 이성을 마음껏 확장하여 인생과 자연과 우주의 근본원리를 밝혀 놓았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접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부처님의 원음이 우리말로 번역 되어 나와서 누구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을까?

 

십이연기의 순관과 고성제와의 관계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으로 요약된다. 이런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모아 놓은 경전이 상윳따니까야이다. 모두 56개의 주제로 하여 주제별로 분류된 것이다. 연기에 관하여 알고자 한다면 12번 째 주제에 해당되는 인연의 모음(S12)’을 보면 된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의 말씀은 서로 연결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이 이 경전에서 이런 말하고 저 경전에서 다른 말하는 식이 아니라 알고 보면 서로 긴밀하게 연결 되어 있어서 서로 보완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예로 십이연기의 순관과 고성제를 들 수 있다.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마지막 구절을 보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 하였다. 여기서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라는 말에 주목한다. 왜 주목하는가? 이에 대한 설명이 초전법륜경 고성제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고성제에서는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라 하였다. 그렇다면 십이연기의 마지막 구절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았다.

 

 

구 분

경전 문구

 

분별의 경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 (S12.2)

십이연기

초전법륜경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S56.11)

고성제

 

 

 

십이연기의 순관은 사성제에서 고성제와 집성제에 해당된다. 이는 연기적 삶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연기적 삶은 일반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말한다. 그래서 유전하고 윤회하는 삶을 살아 간다. 그런데 초전법륜경을 보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 즉 오취온이 괴로움이라 하였다. 이는 분별의 경에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과 초전법륜경에서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같은 것임을 암시 한다.

 

괴로움의 꽃다발

 

십이연기 순관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괴로움의 다발들이라는 말은 ‘dukkhakkhandha’를 말한다. 그런 괴로움의 다발이란 무엇을 말할까?

 

괴로움의 다발은 마치 꽃다발을 연상시킨다. 여러 개의 꽃이 모아 놓은 것을 꽃다발이라 하듯이 여러 종류의 괴로움을 모아 놓은 것이 괴로움 다발. 즉 고온(苦溫)이다. 이런 고온은 고성제에서도 설명이 되어 있다.

 

고성제에서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S56.11)”라는 정형구가 있다. 이는 생노병사 사고와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이렇게 세 가지 고통을 합한 칠고(七苦)를 말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다발이다. 그러나 이런 괴로움의 다발은 일반사람들, 즉 유아견을 가진 범부가 겪는 괴로움의 다발이다. 그렇다면 팔고(八苦)란 무엇인가?

 

사고팔고와 오취온고(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불교에서는 사고를 말한다. 팔고를 말한다. 그래서 사고팔고라 한다. 사고팔고라 하였을 때, 사고는 생---사와 같은 근본적이고 운명적인 고통을 말한다. 여기서 운명이라고 한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거역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팔고라 하였다. 이는 사고에다 네 가지를 더한 것이다. 그 네 가지는 무엇인가?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이라는 문구로 표현 된다. 이를 한자어로 옮기면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취온고 이렇게 네 가지를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고팔고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여덟 가지 괴로움이 있다고 하여 팔고라 한다. 그러나 범부들은 일곱가지 생노병사 등 일곱가지 괴로움을 겪는다. 물론 이외에도 수 많은 괴로움이 있지만 크게 일곱 가지 괴로움의 범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팔고 중에 오취온고가 있다. 이는 초전법륜경 고성제에서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S56.11)”라고 설명된다. 설명문에 따르면 오취온고는 모든 괴로움의 바탕이 된다. 그래서 사고팔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오취온고가 된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설하였다. 이를 고성제라 한다. 그런데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한마디로 오취온고로 요약된다. 이는 줄여서 말하지면이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빠알리어가 ‘sakhittena’에 대한 번역이다. ‘sakhittena’에 대하여 빠알리사전을 보면 括地略地라 설명 되어 있다. 따라서 생노병사 등 일곱가지 괴로움, 아니 모든 괴로움을 한단어로 요약하면 오취온고(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가 된다. 그래서 부처님의 괴로움에 대한 가르침은 오취온고로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불교를 한 없이 어렵게 만드는 말 오취온

 

불교를 한 없이 어렵게 만드는 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오취온이라는 말이다. 오온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오취온이라 하니 불자들은 불교가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불교에 대하여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오온과 오취온을 구별하느냐?”는 식의 질문을 한다. 그리고 장황하게 오취온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마치 오취온을 모르면 불교를 모르는 것처럼 말한다. 오취온은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오온과 오취온은 어떻게 다를까?

 

오취온은 문자 그대로 오온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오취온을 뜻하는 빠알리어 ‘pañcupādānakkhandhā‘pañca()+upādāna()+khandhā()’의 복합어이기 때문이다. , , , , 식 이렇게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 또는 무더기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오온에 대한 집착을 설한 경을 모아 놓은 것이 상윳따니까야 칸다상윳따(S22)’이다. 그렇다면 고성제의 오취온고와 오온은 다른 것일까?

 

오온과 오취온은 어떻게 다를까?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다.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그 집착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는 별도로 집착이 있는 것입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그 집착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동일한 것도 아니며,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는 별도로 집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벗이여 비싸카여,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에 대하여 욕망과 탐욕을 지니면, 그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이 바로 그 집착입니다.

 

(교리문답의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44, 전재성님역)

 

 

교리문답의 작은 경에 오온과 오취온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라한이 된 담마딘나의 전남편 비싸카가 재가신도의 입장에서 물어 본 것이다.

 

담마딘니는 오온과 오취온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 하였다. 그래서 오온에 대하여 탐욕을 지니면 오취온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오온이 따로 있고 오취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들이 욕망과 탐욕에 집착하였을 때 오취온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범부와 아라한

 

오온과 오취온을 설명할 때 흔히 범부와 아라한의 비유를 든다. 범부는 오취온의 존재이고, 아라한은 오온이라 한다. 범부들은 이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보아 내 뜻대로 하고자 하여 오취온의 존재라 하지만,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이 없어서 오온 그 자체의 존재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집착(upadana)’이라는 말이다.

 

탐진치 등 번뇌가 소멸하여 청정한 삶을 사는 아라한에게 있어서 더 이상 집착은 없다. 이 때 집착은 아비담마에 따르면 52가지 마음부수 중의 하나이다 집착은 존재의 발생을 유발하고 만다십이연기 정형구를 보면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Upādānapaccayā bhavo, S12.2)”라는 구절이 이를 말해 준다.

 

집착은 업으로서 태어남(업유)’를 야기하고 만다. 이렇게 본다면 연기적 삶, 즉 연기의 순환적 삶을 사는 일반사람들은 결국 오온에 대한 집착의 삶을 살아 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새로운 태어남을 가져 오기 때문에 삼계를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다.

 

하지만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에게 있어서 더 이상 새로운 태어남은 없다. 따라서 아라한의 몸과 마음은 집착이라는 번뇌에 매이지 않아 오온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경전적 근거를 보면

 

오온과 오취온의 차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 명확하게 설명 되어 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나는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과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에 관해 설할 것이니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S22.48)”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런 차이에 대하여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경전문구

차이

오온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탁월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무엇이든지 이와 같은 것을 물질의 다발이라 한다.(S22:48)

 

오취온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탁월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번뇌와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물질의 집착다발이라고 한다. (S22:48)

번뇌와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

 

 

 

표를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하다. 차이는 번뇌와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이라는 문구이다. 오온이 번뇌를 일으키는 집착의 대상이 되었을 때 오취온이라 하는 것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전재성님은 “cdb 1058에 따르면, 집착다발은 번뇌를 수반하고 집착을 수반하면, 집착다발이 아니라, 번뇌와 집착의 대상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집착다발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상윳따3 145번 각주)”라고 하였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다.

 

요지는 이렇다. 오취온은 집착의 대상이 되었을 때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집착하지 않으면 될 것이다. 이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고 집착하지 않으면 더 이상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빅쿠보디의 cdb각주를 찾아보니

 

빅쿠보디의 cdb각주를 찾아 보았다. 오온과 오취온의 차이와 관련하여 본문의the five aggregates subject to clinging”에 대한 각주는 다음과 같다.

 

 

This sutta is quoted and discussed at Vism 477-78 (Ppn 14:214-15), in relation to the difference between the aggregates and the aggregates subject to clinging. The key terms distinguishing the panc upadanakkhandha from the pancakkhandha are sasava upadaniya, "with taints and subject to clinging." The panec upadanakkhandha are included within the pancakkhandha, for all members of the former set must also be members of the latter set.

 

However, the fact that a distinction is drawn between them implies that there are khandha which are anasava anupadaniya, "untainted and not subject to clinging." on first consideration it would seem that the "bare aggregates" are those of the arahant, who has eliminated the asava and upadana.

 

However, in the Abhidhamma all rupa is classified as sasava and upadaniya, and so too the resultant (vipaka) and functional (kiriya) mental aggregates of the arahant (see Dhs §§1 103, 1219). The only aggregates classed as anasava and anupadaniya are the four mental aggregates occurring on the cognitive occasions of the four supramundane paths and fruits (see Dhs §§1 104, 1220).

 

The reason for this is that sasava and upadaniya do not mean "accompanied by taints and by clinging," but "capable of being taken as the objects of the taints and of clinging," and the arahant's mundane aggregates can be taken as objects of the taints and clinging by others (see As 347). For a detailed study of this problem, see Bodhi, "Aggregates and Clinging Aggregates."

 

Spk: Among the five aggregates the form aggregate is of the sense sphere, the other four aggregates are of the four planes (sense sphere, form sphere, formless sphere, supramundane). With taints (sasava) means: what becomes a condition for the taints by way of object; so too that can be clung to (upadaniya) means what becomes a condition for clinging

 

[Spk-pt: by being made its object]. Among the aggregates subject to clinging, stated by way of the practice of insight, the form aggregate is sense sphere, the others pertain to the three planes (i.e., excluding only the supramundane).

 

(CDB 1058p, 65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가 말하는 오온과 오취온의 구분은 청정도론을 참고 하고 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대림스님이 번역한 청정도론을 보면

 

여기서 느낌 등은 번뇌가 다한 것도 있고 [번뇌가 함께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물질은 그렇지 않다. 물질은 더미라는 뜻에서 무더기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무더기들 가운데서 언급된다. 또한 이것은 무더기라는 뜻과 번뇌가 함께 한다는 뜻에서 취착하는 무더기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취착하는 무더기들 가운데서도 언급된다. 그러나 느낌 등은 번뇌가 다한 것은 오직 무더기들 가운데서만 언급되고 번뇌의 대상이 될 때는 취착하는 무더기들 가운데서 언급된다. 여기서 취착하는 무더기란 ‘취착의 대상인 무더기들이 취착하는 무더기들이다’라고 그 뜻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는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한데 묶어 무더기라 한다고 알아야 한다.(14 215)”

 

라고 되어 있다. 한글로 번역된 것을 보면 이해 하기 어렵다.

 

아라한의 오온은 어떤 것인가?

 

오온과 오취온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빅쿠보디는 순수오온(bare aggregates)’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범부의 오온은 오염되고 집착 된 것을 말하지만 순수오온은 아라한의 오온이라 한다. 이 아라한의 오온(순수오온)은 오염과 집착이 제거 된 상태라 하였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물질(rupa) 오염되고 집착된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은 과보(vipaka)에 주어진 물질과 작용(kiriya) 만 하는 정신적 무더기들(느낌, 지각, 형성,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번뇌 다한 아라한도 범부와 똑 같은 몸을 가졌지만 행위에 대하여 작용만 하기 때문에 업을 짓지 않아 순수오원을 가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작용만 한다는 것은 행위에 대한 과보를 생산해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무오염과 무집착의 네 가지 정신적(느낌, 지각, 형성, 의식)무더기는 네 가지 출세간적 길과 경지(사향사과)를 인식하였을 때 발생한다.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오염되지 않고 집착이 없는 순수오온상태를 말한다. 이런 아라한의 오온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sasava and upadaniya do not mean accompanied by taints and by clinging,”라고 설명한다. 이는 오염과 집착이 더러움에 수반되는 것이 아니라 한다. 그래서 “capable of being taken as the objects of the taints and of clinging,”라 하였다. 더러움과 집착의 대상을 취함으로서 발생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물질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정신적무더기(느낌, 지각, 형성, 의식)는 처음부터 오염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삶의 과정에서 점차 오염된 것으로 본다.

 

오온과 오취온은 다른 것이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번뇌를 야기 하였을 때 오취온의 존재가 된다. 번뇌에 대한 집착은 연기의 회전을 일으켜 유전하고 윤회하는 살게 된다. 또한 오온의 존재는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는 집착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가져 오게 된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고성제와 유사하다.  

 

오취온도 고성제이다!

 

전재성님의 칸다상윳따 해제글에 따르면 놀랍게도 오온에 대한 집착이 고성제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añca bhikkhave, dukkha ariyasacca: pañcupādānakkhandhātissa vacanīya. Katame pañca: seyyathīda: rūpūpādānakkhandho1 vedanūpādānakkhandhā saññūpādānakkhandho sakhārūpādānakkhandho viññāūpādānakkhandho, ida vuccati bhikkhave, dukkha ariyasacca.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곧 물질의 집착다발, 느낌의 집착다발, 지각의 집착다발, 형성의 집착다발, 의식의 집착다발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고 한다.

 

(Khandha sutta-존재의 다발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56.13, 전재성님역)

 

 

이제까지 고성제는 생노병사 등 팔고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온에 대한 집착, 즉 오취온도 고성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다.(dukkha ariyasacca: pañcupādānakkhandhātissa vacanīya. S56.13)”라 하였다. 그런데 이후 집성제와 멸성제, 도성제의 문구는 기존 초전법륜경에서의 사성제 내용과 동일 하다. 다만 고성제의 내용만 다를 뿐이다.

 

고성제가 두 가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초전법륜경에서 팔고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칸다경(S56.13)에서 오취온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똑 같은 내용이다. 왜 그런가? 초전법륜경 고성제에서는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S56.11)”라 하여 오취온이 괴로움이라 정의 내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취온고가 사성제에서 고성제에 해당 됨이 증명된다.

 

왜 오취온이 괴로움일까?

 

오온에 대한 집착은 필연적으로 괴로움을 야기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오취온이 괴로움일까? 이에 대한 법문이 무아상경이라  불리는 다섯 명의 경(S22.59)’에 나타난다.

 

초전법륜경에 이어 부처님의 두 번째 설법이라는 불리우는 무아상경에서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괴로움을 야기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보인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로 질문한다. 그러면 제자들은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라고 답한다.

 

이와 같은 문답식 법문의 말미에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라고 묻는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말이다.

 

다섯 명의 경(S22.59)’ 초반부에 부처님은 오온은 나의 통제에서 벗어난 것임을 말씀 하셨다. 물질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S22.59”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에도 나의 것처럼 착각하여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하였을 때 필연적으로 괴로움이 따를 것이라 한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사람들은 내 뜻대로하고자 한다. 그래서 남편이나 아내도 내 뜻에 따라야 하고, 아이도 내 뜻대로 따라야 한다. 심지어 대통령도 내 뜻대로 따라야 하고, 돈도 내 뜻대로 벌려야 한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내 뜻대로 하고자 하나 긴장과 갈등만 야기 할 뿐이다. 아이에게 공부를 잘 시키기 위해 내 뜻대로 하고자 하나 따라 주지 않는다. 대통령도 뜻대로 되지 않고 돈도 뜻대로 벌리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짜증만 늘어 간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화가 나고 남의 탓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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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뜻대로 하고자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진리이다. 이는 경에서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S22.59)”라고 표현 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몸이 진정 나의 것이라면 이 몸은 병도 나지 말아야 하고 늙지도 말아야 하고 죽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 몸은 나의 뜻대로 되지 않고 배신한다. 그래서 결국 늙어 병들어 죽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물질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S22.59)”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내 몸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말한다.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

 

내 몸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이미 내 몸이 아니다. 나의 통제를 벗어난 몸에 대하여 내 몸이라 볼 수 있을까? 이는 몸 뿐만 아니라 느낌, 지각, 형성, 의식도 해당된다. 지금 이 즐겁고 행복한 느낌이 오래토록 지속 되기를 바라지만 조건이 바뀌면 사라진다. 그래서 느낌도 내 느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온은 내 것이 아니다. 나의 통제를 벗어난 몸과 마음에 대하여 내 것이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아의 가르침을 설하였다. 무아의 가르침에 대한 정형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Pañcavaggiya sutta-다섯 명의 경-무아상경, 상윳따니까야 22:5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무상의 가르침부터 시작해서 무아의 가르침으로 끝을 맺는다. 물질에 대한 무상함을 그리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마지막으로 무상한 물질에 대하여 내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 하여 무아를 설하였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상에서 시작하여 괴로움, 그리고 무아의 가르침 순이다. 그래서 무상--무아라 하지, 무아--무상 또는 고-무상-무아 등의 순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항상 무상--무아의 순이다. 그 중에서도 무아의 가르침은 항상 나중이다. 무상과 고를 알아야 무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무아의 가르침은 다름 아닌 오온이 내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나 자신도 내 뜻대로 되지 않은데 하물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오온이 내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이런 논리를 모든 삶의 방식에 적용할 수 있다. 지금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짜증이 났다면 이는 오온을 내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나 아내가 또는 아이가 심지어 대통령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왜 그런가? 나 자신도 내 뜻대로 되지 않은데 하물며 주변사람들이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가?

 

 

2014-10-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