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여자로 변신된 이야기, 장로 소레이야 이야기(Soreyyattheravatthu, Dhp43)
남자가 여자로 바뀌고 여자가 남자로 바뀔 수 있을까? 현대에서는 가능하다. 현대과학으로 얼마든지 신체구조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정신마져 남자에서 여자로, 여자에서 남자로 바꿀 수 있을까? 초기경에 변신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법구경 43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말한다.
부모도 친척도 해주지 않는 것
법구경 43번 게송은 다음과 같다.
Na taṃ mātā pitā kayirā 나 땅 마따 삐따 까이라
aññe vā pi ca ñātakā 안녜 와삐 짜 냐따까
Sammāpaṇihitaṃ cittaṃ 삼마빠니히땅 찟땅
seyyaso naṃ tato kare. 세이야소 낭 따또 까레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하고
다른 친족이 대하는 것보다
올바로 지향된 마음이
자신을 대하는 것이 더욱 훌륭하다.
(Dhp43, 전재성님역)
母も父も
その他親族がしてくれるよりも
さらに優れたことを、
正しく向けられた 心がしてくれる。
(Dhp43, 中村元역)
어머니나 아버지
또는 어느 친척이 베푸는 선보다도
바른 진리를 향한 마음이
우리에게 더욱 큰 선을 베푼다
((Dhp43, 법정스님역)
是意自造 시의자조
非父母爲 비부모위
可勉向正 가면향정
爲福勿回 위복물회
(Dhp43, 한역)
어머니도 할 수 없고 아버지도 할 수 없으며
그 어떤 친척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바르게 인도되는 마음만이
모든 이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다.
((Dhp43, 거해스님역)
Whatever a mother, father
or other kinsman
might do for you,
the well-directed mind
can do for you
even better.
(Dhp43,Thanissaro Bhikkhu역)
게송에서 아버지(pita)와 어머니(mātā)가 나온다. 이는 “Na taṃ mātā pitā kayirā”구절에 대한 것이다. 이 구절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해 주지 않는다”의 뜻이다. Kayirā는 ‘karoti 의 grd’의 형태로서 ‘作さるベき’의 뜻이다. 이는 친족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나까무라하지메는 “他親族がしてくれるよりも(타친족이 해주는 것도)”라 번역하였다. 나까무라하지메역을 중역한 법정스님은 “어머니도 할 수 없고 아버지도 할 수 없으며 그 어떤 친척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 하였다. 부모도 해 줄 수 없고 친척도 해 줄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부모의 마음은
부모는 자식에게 무엇이든지 다 해주고자 한다. 심지어 자식이 잘 되게 하기 위하여 강제로 해주고자 한다. 그래서 방과후에 학원을 보내고 고액과외를 시켜 준다. 이렇게 부모는 아낌 없이 자식을 위하여 헌신한다. 이와 관련된 구절이 “Na taṃ mātā pitā kayirā”이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Na taṃ mātā pitā kayirā: DhpA.I.332에 따르면, 부모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주어 현세에서 평생을 편안히 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부를 제공할 수 있다. 비싸카(Visakha)의 부모도 재산이 많고 부유해서 그녀에게 이 생에서 편안히 먹고 살 수 있는 재산을 주었다. 그러나 자식에게 사대륙의 전륜왕의 지위의 영광을 물려주거나 천상계의 반영이나 첫 번째 선정 등의 성취를 물려줄 수 있는 부모는 없다. 출세간의 성취에 대해서는 이야기조차 해주는 부모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을 올바로 지향된 마음으로 얻을 수 있다.
(법구경 636번 각주, 전재성님)
누구나 부자가 되고자 한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노후에 활동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하여 젊었을 때 많이 벌어 놓고자 하는 욕망이 발동하여 뒤나 옆도 보지 않고 오로지 앞만 향하여 맹목적으로 돌진 한다.
상당한 재산이 축적 되었을 때 죽어서 가져 가지 못할 것이다. 애써 힘들게 모은 재산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 당연히 자식에게 물려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모를 잘 만난 자식은 한평생 물려준 재산으로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이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삼대를 넘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부자 삼대 못 간다고 하는데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 이상은 기대하기 힘들다. 명예나 권력 등이 있지만 이는 자신의 힘으로 이룩해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자신의 힘으로 성취해 본적이 없는 자식은 오로지 부모로 분터 물려 받은 재산에 의지 해야 하기 때문에 굳이 애써 힘들게 노력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상속자는 사대륙의 전륜왕의 지위를 갖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또 천상계에 태어나기도 힘들다. 물려준 재산으로 소비만 할 뿐 하늘나라에 태어나기 위한 지계와 보시를 소홀히 할 것이기 때문으로 본다. 더욱 더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출세간의 경지이다. 부모가 출세간의 경지가 있다는 것 조차 모를 뿐만 아니라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다. 혹시 출가해버리면 그 동안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상속받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 부모
부모는 자식에게 평생 모은 재산을 물려 준다. 이렇게 재산을 물려 주지만 지혜는 물려 주지 못한다. 재산을 모으기까지의 험난하였던 과정과 경험을 물려 줄 수는 없다. 잡은 물고기를 주지만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 주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물고기잡는 방법은 경험이고 기술이고 노하우이고 지혜이다. 이런 지혜만 있으면 큰 재산을 물려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는 부모도 출세간의 경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막을지 모른다. 특히 대부호인 경우가 그렇다. 이런 장면은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 ‘랏타빨라의 경’에서 부모가 “사랑하는 아들 랏타빨라여, 먹고 마시고 놀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누리고 공덕을 쌓으며 즐겨라. 네가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M82)”라고 말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어느 부모이든지 자식이 출가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재산가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재산보다 더 가치 있는 것
법구경 게송에 따르면 부모나 친족이 물려준 것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있다고하였다. 그것은 ‘올바로 지향된 마음(Sammāpaṇihitaṃ cittaṃ)’ 이다. 그렇다면 올바로 지향된 마음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열 가지 착하고 건전한 길”이라 하였다. ‘십선도’를 말한다.
부모가 재산을 물려 주는 것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십선행’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십선행을 실천하면 천상에 나기 때문에 막대한 재산이나 왕권과 같은 권력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알 수 있다.
왕권과 천상의 행복
앙굿따라니까야에 ‘바쎗타의 포살에 대한 경(A8.43)’이 있다. 경에서는 재가신도가 여덟 가지 고리를 갖춘 포살을 준수하면 많은 공덕을 낳고 큰 가치를 지닌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지상의 왕권과 천상의 비유를 들고 있다. 먼저 왕권의 비유를 보면 다음과 같다.
바쎗타여,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이와 같이 많은 칠보가 있는 십육대국 즉, 앙가, 마가다, 까씨, 꼬쌀라, 밧지, 말라, 쩨띠, 방가, 꾸루, 빤짤라, 맛차, 쑤라쎄나, 앗싸까, 아반띠, 간다라, 깜보자의 지배자로 왕권을 누리는 것이 이와 같이 여덟 가지 고리를 갖춘 포살을 준수하는 것의 십육분의 일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바쎗타여, 인간의 왕권은 천상의 행복에 비해 보잘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쎗타의 포살에 대한 경, 앙굿따라니까야 A8.44, 전재성님역)
옛말에 아흔 아홉칸의 집을 가진 자는 백 칸을 채우고자 한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지금 9억을 가지고 있는자는 10억 채우고자 하고, 목표가 달성되면 다시 100억을 갖고자 한다. 이렇게 끊임 없이 소유하려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그런 욕망의 정점은 권력일 것이다. 옛날 같으면 왕권이다.
고대국가에서 왕권을 쟁취하면 그 나라는 사실상 왕 일인의 소유나 다름 없었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 십육대국이 있었는데, 각 나라는 왕 일인의 것이나 다름 없다. 이렇게 본다면 지상에서 왕만큼 많이 가진 자는 없다. 그런데 가르침에 따르면 왕권도 천상의 행복에 비하면 십육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십육분의 일은 매우 작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마치 달이 허공에 비추면 별들의 무리들이 빛을 잃어버리듯(A8.42)”라는 게송이 있는데, 이는 별빛이 달빛에 비하면 십육분에 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여덟 가지 포살의 고리를 준수하면
지상의 왕권은 천상에 비하여 매우 작은 것이다. 요즘말로 하면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다.
바쎗타여, 인간의 오십 년이 네 위대한 왕의 하늘나라 신들의 하루 밤낮이고, 그러한 서른 밤이 한달이고, 그러한 열두 달이 일년이고, 그러한 일년의 오백년이 네 위대한 왕의 하늘나라 신들의 수명입니다. 바쎗타여, 세상에 어떤 여자나 남자가 여덞 가지 고리를 갖춘 포살을 준수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네 위대한 왕의 하늘나라 신들 사이에 태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인간의 왕권은 천상의 행복에 비해 보잘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쎗타의 포살에 대한 경, 앙굿따라니까야 A8.4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재가신자가 여덟 가지 포살의 고리를 준수하면 왕권이 부럽지 않다고 하였다. 이를 천상중에서 가장 하층에 있는 사대왕천에 비유하였다. 인간의 오십년은 사대왕천의 하루 밖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으로 보는 왕은 그야말로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재가자 바쎗타에게 포살을 닦아 천상에 날 것을 말씀 하신다.
여덟 가지 포살의 고리는 무엇인가?
부모가 자식에게 막대한 재산을 물려 주지만 그 재산이 끝까지 유지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부모 덕에 편안한 생활을 즐기는 자식에게 살아 가는 방법, 삶의 지혜를 물려 주지 않는 한 재산은 금방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살아 가는 지혜 보다 더 수승한 것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열 가지 선행을 하는 것이다. 십악행과 반대되는 십선행을 말한다. 이런 십선행과 더불어 여덟 가지 포살을 닦을 것을 말씀하신다. 그 여덟 가지는 무엇인가? 다음과 같다.
1)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떠난다.
2) 주지 않는 것을 빼았는 것을 떠난다.
3) 청정하지 못한 삶을 버린다.
4) 거짓말을 버린다.
5) 취기가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버린다.
6) 하루 한끼 식사를 하고 때 아닌 때 식사하는 것을 삼간다.
7) 춤, 노래, 음악, 연극을 관람 하는 것과 꽃다발, 향료, 크림으로 치장하고 장식하는 것을 삼간다.
8) 높고 큰 침대를 삼간다.
이것이 재가자가 지켜야 할 여덟 가지 포살이다. 출가자라면 매일 지켜야 하지만 재가의 삶을 살아 가는 재가자는 매일 지킬 수 없다. 그래서 날짜를 정해 놓고 지킨다. 이를 팔관재일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불음주계로 대략난감한 불자들, 불교포살달력이 필요해(2014-09-2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남자가 여자로 변신된 이야기, 쏘레이야와 관련된 이야기(Soreyyattheravatthu)
법구경 43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에서는 남자가 여자로 변신된 이야기가 있다. 이는 장로 쏘레이야와 관련된 이야기(Soreyyattheravatthu)라는 이야기로 전승되어 왔다. 어떻게 하다가 여자의 몸으로 바뀌게 되었을까?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다.
Soreyyattheravatthu
Na taṃ mātā pitā kayirāti imaṃ dhammadesanaṃ satthā sāvatthiyaṃ jetavane viharanto soreyyattheraṃ ārabbha kathesi.
Vatthu soreyyanagare samuṭṭhitaṃ, sāvatthiyaṃ niṭṭhāpesi. Sammāsambuddhe sāvatthiyaṃ viharante soreyyanagare soreyyaseṭṭhiputto ekena sahāyakena saddhiṃ sukhayānake nisīditvā mahantena parivārena nhānatthāya nagarā nikkhami. Tasmiṃ khaṇe mahākaccāyanatthero soreyyanagaraṃ piṇḍāya pavisitukāmo hutvā bahinagare saṅghāṭiṃ pārupati. Therassa ca suvaṇṇavaṇṇaṃ sarīraṃ. Soreyyaseṭṭhiputto taṃ disvā cintesi – ‘‘ aho vata ayaṃ vā thero mama bhariyā bhaveyya, mama vā bhariyāya sarīravaṇṇo etassa sarīravaṇṇo viya bhaveyyā ’’ ti. Tassa cintitamatteyeva purisaliṅgaṃ antaradhāyi, itthiliṅgaṃ pāturahosi. So lajjamāno yānakā oruyha palāyi. Parijano taṃ asañjānanto ‘‘ kimeta ’’ nti āha. Sāpi takkasilamaggaṃ paṭipajji. Sahāyakopissā ito cito ca vicaritvāpi nāddasa. Sabbe nhāyitvā gehaṃ agamiṃsu. ‘‘ Kahaṃ seṭṭhiputto ’’ ti ca vutte, ‘‘ nhatvā āgato bhavissatīti maññimhā ’’ ti vadiṃsu. Athassa mātāpitaro tattha tattha pariyesitvā apassantā roditvā paridevitvā, ‘‘ mato bhavissatī ’’ ti matakabhattaṃ adaṃsu. Sā ekaṃ takkasilagāmiṃ satthavāhaṃ disvā yānakassa pacchato pacchato anubandhi.
Atha naṃ manussā disvā, ‘‘ amhākaṃ yānakassa pacchato pacchato anugacchati, mayaṃ ‘ kassesā dārikā ’ ti taṃ na jānāmā ’’ ti vadiṃsu. Sāpi ‘‘ tumhe attano yānakaṃ pājetha, ahaṃ padasā gamissāmī ’’ ti gacchantī aṅgulimuddikaṃ datvā ekasmiṃ yānake okāsaṃ kāresi. Manussā cintayiṃsu – ‘‘ takkasilanagare amhākaṃ seṭṭhiputtassa bhariyā natthi, tassa ācikkhissāma, mahāpaṇṇākāro no bhavissatī ’’ ti. Te gehaṃ gantvā, ‘‘ sāmi, amhehi tumhākaṃ ekaṃ itthiratanaṃ ānīta ’’ nti āhaṃsu. So taṃ sutvā taṃ pakkosāpetvā attano vayānurūpaṃ abhirūpaṃ pāsādikaṃ disvā uppannasineho gehe akāsi. Purisā hi itthiyo, itthiyo vā purisā abhūtapubbā nāma natthi. Purisā hi parassa dāresu aticaritvā kālaṃ katvā bahūni vassasatasahassāni niraye paccitvā manussajātiṃ āgacchantā attabhāvasate itthibhāvaṃ āpajjanti.
Ānandattheropi kappasatasahassaṃ pūritapāramī ariyasāvako saṃsāre saṃsaranto ekasmiṃ attabhāve kammārakule nibbatto. Paradārakammaṃ katvā niraye paccitvā pakkāvasesena cuddasasu attabhāvesu purisassa pādaparicārikā itthī ahosi, sattasu attabhāvesu bījuddharaṇaṃ pāpuṇi. Itthiyo pana dānādīni puññāni katvā itthibhāve chandaṃ virājetvā, ‘‘ idaṃ no puññaṃ purisattabhāvapaṭilābhāya saṃvattatū ’’ ti cittaṃ adhiṭṭhahitvā kālaṃ katvā purisattabhāvaṃ paṭilabhanti, patidevatā hutvā sāmike sammāpaṭipattivasenāpi purisattabhāvaṃ paṭilabhanteva.
Ayaṃ pana seṭṭhiputto there ayoniso cittaṃ uppādetvā imasmiṃyeva attabhāve itthibhāvaṃ paṭilabhi. Takkasilāyaṃ seṭṭhiputtena saddhiṃ saṃvāsamanvāya pana tassā kucchiyaṃ gabbho patiṭṭhāsi. Sā dasamāsaccayena puttaṃ labhitvā tassa padasā gamanakāle aparampi puttaṃ paṭilabhi. Evamassā kucchiyaṃ vutthā dve, soreyyanagare taṃ paṭicca nibbattā dveti cattāro puttā ahesuṃ. Tasmiṃ kāle soreyyanagarato tassā sahāyako seṭṭhiputto pañcahi sakaṭasatehi takkasilaṃ gantvā sukhayānake nisinno nagaraṃ pāvisi. Atha naṃ sā uparipāsādatale vātapānaṃ vivaritvā antaravīthiṃ olokayamānā ṭhitā disvā sañjānitvā dāsiṃ pesetvā pakkosāpetvā mahātale nisīdāpetvā mahantaṃ sakkārasammānaṃ akāsi. Atha naṃ so āha – ‘‘ bhadde, tvaṃ ito pubbe amhehi na diṭṭhapubbā, atha ca pana no mahantaṃ sakkāraṃ karosi, jānāsi tvaṃ amhe ’’ ti. ‘‘ Āma, sāmi, jānāmi, nanu tumhe soreyyanagaravāsino ’’ ti? ‘‘ Āma, bhadde ’’ ti. Sā mātāpitūnañca bhariyāya ca puttānañca arogabhāvaṃ pucchi. Itaro ‘‘ āma, bhadde, arogā ’’ ti vatvā ‘‘ jānāsi tvaṃ ete ’’ ti āha. ‘‘ Āma sāmi, jānāmi. Tesaṃ eko putto atthi, so kahaṃ, sāmī ’’ ti? ‘‘ Bhadde, mā etaṃ kathehi, mayaṃ tena saddhiṃ ekadivasaṃ sukhayānake nisīditvā nhāyituṃ nikkhantā nevassa gatiṃ jānāma, ito cito ca vicaritvā taṃ adisvā mātāpitūnaṃ ārocayimhā, tepissa roditvā kanditvā petakiccaṃ kiriṃsū ’’ ti. ‘‘ Ahaṃ so, sāmī ’’ ti. ‘‘ Apehi, bhadde, kiṃ kathesi mayhaṃ sahāyo devakumāro viya eko puriso ’’ ti? ‘‘ Hotu, sāmi, ahaṃ so ’’ ti. ‘‘ Atha idaṃ kiṃ nāmā ’’ ti? ‘‘ Taṃ divasaṃ te ayyo mahākaccāyanatthero diṭṭho ’’ ti? ‘‘ Āma, diṭṭho ’’ ti. Ahaṃ ayyaṃ mahākaccāyanattheraṃ oloketvā, ‘‘ aho vata ayaṃ vā thero mama bhariyā bhaveyya, etassa vā sarīravaṇṇo viya mama bhariyāya sarīravaṇṇo bhaveyyā ’’ ti cintesiṃ. Cintitakkhaṇeyeva me purisaliṅgaṃ antaradhāyi, itthiliṅgaṃ pātubhavi. Athāhaṃ lajjamānā kassaci kiñci vattuṃ asakkuṇitvā tato palāyitvā idhāgatā, sāmīti.
‘‘ Aho vata te bhāriyaṃ kammaṃ kataṃ, kasmā mayhaṃ nācikkhi, apica pana te thero khamāpito ’’ ti? ‘‘ Na khamāpito, sāmi. Jānāsi pana tvaṃ kahaṃ thero ’’ ti? ‘‘ Imameva nagaraṃ upanissāya viharatī ’’ ti. ‘‘ Sace piṇḍāya caranto idhāgaccheyya, ahaṃ mama ayyassa bhikkhāhāraṃ dadeyyaṃ, sāmī ’’ ti. ‘‘ Tena hi sīghaṃ sakkāraṃ karohi, amhākaṃ ayyaṃ khamāpessāmā ’’ ti so therassa vasanaṭṭhānaṃ gantvā vanditvā ekamantaṃ nisinno, ‘‘ bhante, sve mayhaṃ bhikkhaṃ gaṇhathā ’’ ti āha. ‘‘ Nanu tvaṃ, seṭṭhiputta, āgantukosī ’’ ti. ‘‘ Bhante, mā amhākaṃ āgantukabhāvaṃ pucchatha, sve me bhikkhaṃ gaṇhathā ’’ ti. Thero adhivāsesi, gehepi therassa mahāsakkāro paṭiyatto. Thero punadivase taṃ gehadvāraṃ agamāsi. Atha naṃ nisīdāpetvā paṇītenāhārena parivisitvā seṭṭhiputto taṃ itthiṃ gahetvā therassa pādamūle nipajjāpetvā, ‘‘ bhante, mayhaṃ sahāyikāya khamathā ’’ ti āha. ‘‘ Kimeta ’’ nti? ‘‘ Ayaṃ, bhante, pubbe mayhaṃ piyasahāyako hutvā tumhe oloketvā evaṃ nāma cintesi, athassa purisaliṅgaṃ antaradhāyi, itthiliṅgaṃ pātubhavi, khamatha, bhante ’’ ti. ‘‘ Tena hi uṭṭhahatha, khamāmi vo aha ’’ nti. Therena ‘‘ khamāmī ’’ ti vuttamatteyeva itthiliṅgaṃ antaradhāyi, purisaliṅgaṃ pātubhavi.
Purisaliṅge pātubhūtamatteyeva taṃ takkasilāya seṭṭhiputto āha – ‘‘ samma sahāyaka, ime dve dārakā tava kucchiyaṃ vutthattā maṃ paṭicca nibbattattā ubhinnampino puttā eva, idheva vasissāma, mā ukkaṇṭhī ’’ ti. ‘‘ Samma, ahaṃ ekenattabhāvena paṭhamaṃ puriso hutvā itthibhāvaṃ patvā puna puriso jātoti vippakārappatto, paṭhamaṃ maṃ paṭicca dve puttā nibbattā, idāni me kucchito dve puttā nikkhantā, svāhaṃ ekenattabhāvena vippakārappatto, puna ‘ gehe vasissatī ’ ti saññaṃ mā kari, ahaṃ mama ayyassa santike pabbajissāmi. Ime dve dārakā tava bhārāti, imesu mā pamajjī ’’ ti vatvā putte sīse paricumbitvā parimajjitvā ure nipajjāpetvā pitu niyyādetvā nikkhamitvā therassa santike pabbajjaṃ yāci. Theropi naṃ pabbājetvā upasampādetvā gaṇhitvāva cārikaṃ caramāno anupubbena sāvatthiṃ agamāsi. Tassa soreyyattheroti nāmaṃ ahosi. Janapadavāsino taṃ pavattiṃ ñatvā saṅkhubhitvā kotūhalajātā taṃ upasaṅkamitvā pucchiṃsu – ‘‘ evaṃ kira, bhante ’’ ti? ‘‘ Āma, āvuso ’’ ti. ‘‘ Bhante, evarūpampi kāraṇaṃ nāma hoti ’’ ? ‘‘ Tumhākaṃ kucchiyaṃ kira dve puttā nibbattā, tumhe paṭicca dve jātā, tesaṃ vo kataresu balavasineho hotī ’’ ti? ‘‘ Kucchiyaṃ vutthakesu, āvuso ’’ ti. Āgatāgatā nibaddhaṃ tatheva pucchiṃsu.
Thero ‘‘ kucchiyaṃ vuttakesu eva sineho balavā ’’ ti punappunaṃ kathento harāyamāno ekova nisīdati, ekova tiṭṭhati. So evaṃ ekattūpagato attabhāve khayavayaṃ samuṭṭhāpetvā saha paṭisambhidāhi arahattaṃ pāpuṇi. Atha naṃ āgatāgatā pucchanti – ‘‘ bhante, evaṃ kira nāma ahosī ’’ ti? ‘‘ Āmāvuso ’’ ti. ‘‘ Kataresu sineho balavā ’’ ti? ‘‘ Mayhaṃ katthaci sineho nāma natthī ’’ ti. Bhikkhū ‘‘ ayaṃ abhūtaṃ kathesi, purimadivasesu ‘ kucchiyaṃ vutthaputtesu sineho balavā ’ ti vatvā idāni ‘ mayhaṃ katthaci sineho natthī ’ ti vadati, aññaṃ byākaroti, bhante ’’ ti āhaṃsu. Satthā ‘‘ na, bhikkhave, mama putto aññaṃ byākaroti, mama puttassa sammāpaṇihitena cittena maggassa diṭṭhakālato paṭṭhāya na katthaci sineho jāto, yaṃ sampattiṃ neva mātā, na pitā kātuṃ sakkoti, taṃ imesaṃ sattānaṃ abbhantare pavattaṃ sammāpaṇihitaṃ cittameva detī ’’ ti vatvā imaṃ gāthamāha –
‘‘ Na taṃ mātā pitā kayirā, aññe vāpi ca ñātakā;
Sammāpaṇihitaṃ cittaṃ, seyyaso naṃ tato kare ’’ ti.
Tatthana tanti taṃ kāraṇaṃ neva mātā kareyya, na pitā, na aññe ñātakā. Sammāpaṇihitanti dasasu kusalakammapathesu sammā ṭhapitaṃ. Seyyaso naṃ tato kareti tato kāraṇato seyyaso naṃ varataraṃ uttaritaraṃ kareyya, karotīti attho. Mātāpitaro hi puttānaṃ dhanaṃ dadamānā ekasmiṃyeva attabhāve kammaṃ akatvā sukhena jīvikakappanaṃ dhanaṃ dātuṃ sakkonti. Visākhāya mātāpitaropi tāva mahaddhanā mahābhogā, tassā ekasmiṃyeva attabhāve sukhena jīvikakappanaṃ dhanaṃ adaṃsu. Catūsu pana dīpesu cakkavattisiriṃ dātuṃ samatthā mātāpitaropi nāma puttānaṃ natthi, pageva dibbasampattiṃ vā paṭhamajjhānādisampattiṃ vā, lokuttarasampattidāne kathāva natthi, sammāpaṇihitaṃ pana cittaṃ sabbampetaṃ sampattiṃ dātuṃ sakkoti. Tena vuttaṃ ‘‘ seyyaso naṃ tato kare ’’ ti.
Desanāvasāne bahū sotāpattiphalādīni pattā. Desanā mahājanassa sātthikā jātāti.
Soreyyattheravatthu navamaṃ.
Cittavaggavaṇṇanā niṭṭhitā.
Tatiyo vaggo.
장로 쏘레이야와 관련된 이야기(Soreyyattheravatthu)
싸밧티 시 근처에 쏘레이야 시에 한 부호의 아들 쏘레이야가 두 아들의 아버지로 살았다. 그는 많은 시종을 거느리고 친한 친구들과 함께 수레를 타고 교외로 목욕하러 갔다가 마하 깟짜야나장로가 탁발하러 쏘레이야 시로 들어 오는 것을 보고는 ‘아, 저 수행승이 나의 아내가 된다면! 나의 아내의 피부는 저 수행승처럼 고울 텐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일으킨 순간에 그의 몸은 남자에서 여자로 변했다.
그는 당황해서 아무도 몰래 수레에서 내려와 딱까씰라 시를 향해 도망갔다. 쏘레이야가 사라지자 집에서 그에 대한 장례를 치러주었다. 여자가 된 쏘레이야는 딱까씰라 시로 향하는 카라반의 지도자를 보고 그의 수레를 바싹 따라갔다. 카라반 가운데 한 사람이 그녀를 보고 ‘한 여자가 수레 뒤를 바싹 따라온다. 누구의 딸인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여보시오, 수레나 보시오. 나는 따라 걷겠소.’라고 말했다.
상당한 거리를 걸어서 여행한 뒤에, 상인들에게 반지를 뇌물로 주고 한 수레에 자리를 마련했다. 카라반들은 ‘싸밧티 시에 있는 우리 부호의 아들에게 아내가 없다. 이 여자를 그에게 소개하면 우리에게 마음에 드는 선물을 주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딱까씰라 시에 도착하자 가서 그에게 ‘주인님, 여자라는 보물을 가져왔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부호의 아들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자신의 나이에 알맞고 아주 아름다운지라 그는 사랑에 빠져 그녀와 결혼했다.
그녀는 임신하여 열 달이 지나자 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아이가 걷기 시작하자마자 두 번째 아이를 낳았다. 이로써 쏘레이야는 쏘레이야 시에서 태어난 두 명의 아들의 아버지이자 딱까씰라 시에서 태어난 두 명의 아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쏘레이야는 모두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어느 날 쏘레이야 시에서 대상을 하는 부호의 아들이 오백대의 수레를 몰고 쏘레이야 시에서 딲까씰라 시에 도착해서 수레에 앉아 도시로 들어섰다. 그 순간 부인 쏘레이야는 저택의 맨 위층의 창문에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하인을 보내 그를 저택의 큰방에 불러서 자리를 내어주고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자 그 손님은 그녀에게 ‘부인, 저는 전에 뵈온 적도 없는데, 제게 너무 호의를 베푸십니다. 당신은 제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존자여, 그렇습니다. 저는 압니다. 당신은 쏘레이야 시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부인. 그렇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녀의 부모와 옛날의 아내와 아들들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손님은 ‘그들은 모두 잘 지냅니다.’라고 말했다. ‘당신은 그들을 압니까?’ ‘존자여, 그렇습니다. 그들은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부인, 그에 대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어느 날 수레에 같이 타고 가다가 도시를 벗어나자 목욕을 한다며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모에게 말하자 그들은 울고 통곡하며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존자여, 내가 바로 그입니다.’ ‘부인이여, 무슨 말을 하십니까? 그는 나의 친구로 천상의 왕자 같았습니다. 그는 남자이었습니다. ‘ 존자여, 하여튼 그가 바로 같은 나입니다..’
쏘레이야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친구에게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쏘레이야가 마하 깟짜야나 장로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쏘레이야의 카라반-친구의 부호의 아들은 장로가 사는 곳으로 가서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아 ‘존자여, 내일 저의 공양을 받아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장로는 초대에 응했다. ‘부호의 아들이여, 그대는 방문객이 아닙니까?’ ‘존자여, 방문객이건 아니건 저의 공양을 받아 주십시요.’라고 말했다.
장로가 초대에 응하자 쏘레이야의 집에서 많은 양식이 준비되었고 다음날 장로가 와서 자리에 앉자 부호의 아들은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다. 그리고 여인을 데려가 장로의 앞에 앉히고 ‘존자여, 나의 친구를 용서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장로는 ‘무슨 일인가?’라고 물었다. ‘존자여, 이 여인이 나의 가장 친한 남자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을 보고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다가 몸이 남자에서 여자로 변해버렸습니다. 존자여 용서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장로는 ‘일어서시오 내가 그대를 용서합니다.’라고 말했다.
장로가 용서하자 쏘레이야의 몸은 곧 다시 여자에서 남자로 회복되었다. 쏘레이야의 남편은 남자로 변한 아내에게 계속 같이 살자고 하였으나 쏘레이야는 ‘나는 처음에는 두 아들의 아버지이었다가 다음에는 두 아들의 어머니이었습니다. 한생에서 두 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제는 재가생활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장로를 따라 출가하여 수행승이 되었다.
사람들이 쏘레이야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경험을 물으면 처음에는 ‘어머니었을 적의 두 아들에게 더 애정이 간다’고 대답하다가 나중에 거룩한 경지를 성취한 뒤에는 ‘어느 쪽의 아들에게도 애정이 없다.’고 말했다. 수행승들도 이 이야기를 듣고 부처님께 ‘이 수행승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나의 아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나의 아들의 마음은 길을 본 그 날 이후에 올바로 지향되었다. 뭇삶들에게 어머니나 아버지가 그 이익을 줄 수 없지만, 올바로 지향된 마음만이 그러한 이익을 준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하고 다른 친족이 대하는 것보다 올바로 지향된 마음이 자신을 대하는 것이 더욱 훌륭하다.’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했다.
(법구경 인연담, dhp43, 쏘레이야와 관련된 이야기(Soreyyattheravatthu), 전재성님역)
법구경인연담 ‘쏘레이야와 관련된 이야기’를 보면 비현실적이다. 그럼에도 교훈을 주고 있다.
이 세상에서 내 뜻대로 된다면
가장 먼저 욕망을 들 수 있다. 이는 쏘레이야가 장로빅쿠를 보고 흑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 저 수행승이 나의 아내가 된다면! 나의 아내의 피부는 저 수행승처럼 고울 텐데!”라고 생각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단지 피부가 곱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장로에게 연정을 품은 것이다. 그런데 욕망은 현실로 되었다. 더구나 번뇌 다한 장로의 맑은 얼굴을 탐한 과보로 그는 여자로 몸이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만은 바뀌지 않았다. 자아의 동일성은 유지한채 몸만 남자에서 여자로 바뀐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내 뜻대로 된다면 어떻게 될까? 남편이나 아내도 내 뜻대로 따라야 하고, 아이도 내 뜻대로 따라야 하고 심지어 대통령도 내 뜻대로 따라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가지고 원하는 것을 가지고 싶은 대로 마음껏 가진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누구나 부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현전하게 될 것이다. 아마 욕계천상에서 ‘화락천’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화락천은 욕계육욕천 중의 하나이다. 사전에 따르면 “도솔천 바로 위에 있고 타화자재천의 아래에 있는 곳으로 이 하늘나라에 나면 바라는 바가 무엇이든 이루어지게 하여 즐겁게 한다고 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천상을 말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nimmāna-rati’라 하는데 ‘창조하고 기뻐하는 신들의 하늘나라’라고 길게 번역된다.
무엇이든지 내 마음대로 이루어진다면 좋은 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누군가를 미워하여 “저 사람 없어 졌으면 좋겠다!”라 하였을 때 진짜 없어져 버린 다면 어떻게 될까? 소름끼치는 끔찍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내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차라리 ‘재앙’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쏘레이야가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게 된 것은 무엇이든지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하는 욕심에 대한 과보라 볼 수 있다.
지혜를 물려 주어야
두번째 교훈은 올바른 마음에 대한 지향이다. 이에 대하여 인연담에서는 “어느 쪽의 아들에게도 애정이 없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아라한이 된 쏘레이야는 남자와 여자이었을 때 가진 네 아들에 대한 애정이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는 마음이 올바로 지향 되었음을 말한다.
자녀를 가진 부모는 자식을 위해 헌신한다. 그래서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물려주고자 한다. 하지만 이는 잡은 고기를 물려 주는 것과 같다. 그런 고기는 오래 가지 못한다. 부자가 삼대를 넘기지 못한다는 말이 이를 입증한다.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 줄 것이 아니라 지혜를 물려 주어야 한다. 고기잡는 방법을 알려 주면 고기를 물려 주지 않아도 되듯이, 삶의 지혜를 물려 주면 자립할 수 있다. 그런데 더 좋은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 주는 것이다. 재가자에게는 십선행과 여덟 가지 포살의 고리에 대한 실천을 말한다. 이런 가르침을 알려 주었을 때 지상의 왕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출세간의 진리를 알려 주는 것이 더
모든 것을 다 갖는 왕이라 하여도 최하천상이라 불리우는 사대왕천의 하루나 이틀 밖에 살지 못한다. 이렇게 본다면 지상에서 아무리 욕심을 부려 이루어 놓았다고 하더라도 천상의 행복에 비하면 “마치 달이 허공에 비추면 별들의 무리들이 빛을 잃어버리듯(A8.42)”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상의 행복 보다 더 수승한 것이 있다. 그것은 출세간의 진리이다.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 나는 것이다. 이런 진리가 있음에도 부모들은 이런 진리가 있는 줄 조차 모르는 가 하면, 설령 알더라도 알려 주지 않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출세간의 진리를 알려 주는 것이 궁극적으로 가장 큰 이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하고
다른 친족이 대하는 것보다
올바로 지향된 마음이
자신을 대하는 것이 더욱 훌륭하다. (Dhp43)
2014-10-31
진흙속의연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잡담과 법담, 그리고 고귀한 침묵 (0) | 2014.11.12 |
---|---|
생명의 경이로움과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화생(化生: opapatika yoni) (0) | 2014.11.08 |
적이 적을 대하고, 소치기 난다와 관련된 이야기(Nandagopalavatthu, Dhp42) (0) | 2014.10.24 |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오취온이 고성제인 이유 (0) | 2014.10.22 |
등 따습고 배부른 자들의 ‘환망공상’희론 (0) | 2014.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