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잡담과 법담, 그리고 고귀한 침묵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1. 12. 12:42

 

잡담과 법담, 그리고 고귀한 침묵

 

 

 

카톡방에서 재잘재잘 하는 것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떠들어 댄다. 이를 다른 말로 수다떤다라고도 한다. 이렇게 수다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과시와 불안감의 해소라고 볼 수 있다. 혼자 있으면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옆에 있어 주면 안심하듯이 대화로서 위로 받고 싶은 심리도 있는 것이다.

 

수다를 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자신의 눈앞에 상대방이 있어야 가능한 것은 아니다. 카톡방에서 재잘재잘 하는 것도 일종의 수다이기 때문이다. 문자나 이모티콘, 사진, 심지어 동영상을 이용한 채팅도 수다인 것이다. 그런데 남이 수다하는 것을 즐길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TV를 시청하는 것도 일종의 간접적인 수다이기 때문이다. TV에서 말장난하는 프로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낀다면 일종의 수다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수행자들

 

수행자에게 있어서 수다는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팔정도에서 올바른 언어사용이라 하여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어에서 꾸며대는 말을 하지 않는 것(samphappalāpā veramaī)’을 말한다. Samphappalāpā‘talking nonsense’의 뜻으로 기어(绮语)’라고 말한다. ‘교묘하게 잘 꾸며대는 말을 말한다. 잡담이나 가십등도 이에 해당된다.

 

수행자가 세상돌아 가는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이에 대하여 우다나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그때 많은 수행승들이 식사를 마친 뒤, 탁발에서 돌아와 강당에 모여 앉아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수행승들]

벗들이여, 마가다 국의 쎄니야 빔비싸라 왕과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두 왕들 가운데 누가 더 부유하고 누가 더 재산이 많고 누가 더 재보가 많고 누가 더 영토가 많고 누가 더 수레가 많고 누가 더 군대가 많고 누가 더 능력이 많고 누가 더 권력이 많은가?”

 

(Rājasutta-왕들에 대한 경, 우다나 Ud10, 전재성님역)

 

 

행위의 두려움, 윤회의 두려움을 알아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들이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래서 그 때 당시 십육대국 가운데 강국이라 불리우는 두 나라, 즉 마가다와 꼬살라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장면이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그대들이

 

수행자들이 정치, 경제, 사호, 문화 등 세상 돌아 가는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수행자답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강당에 들어 오자 수행승들의 잡담은 중단 되었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여기에 모여 앉아 지금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어떠한 이야기를 하다가 중단하였는가?”라고 물어 보신다. 이에 수행승들은 왕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고 말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훈계한다.

 

 

“Nakhveta bhikkhave tumhāka patirūpa kulaputtāna saddhā agārasmā anagāriya pabbajitāna, ya tumhe evarūpi katha katheyyātha. Sannipatitāna vo bhikkhave dvaya karaīya dhammī vā kathā, ariyo vā tuhī bhāvo ti.

 

[세존

수행승들이여, 훌륭한 가문의 아들로서 믿음으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그대들이 그와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모여 앉아서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고귀한 침묵을 지키는 것, 그 둘중의 하나를 실천해야 한다.”

 

(Rājasutta-왕들에 대한 경, 우다나 Ud10, 전재성님역)

 

 

 

silence

 

 

부처님은 고귀한 침묵(ariyo vā tuhī bhāvo)’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들이 쓸데 없이 잡담이나 하고 있는 것에 대한 경책이다. 수행자가 굳이 말을 한다면 법담(dhammī vā kathā)’을 해야 함을 말한다. 법담을 하지 않으면 침묵을 지키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말할까?

 

왜 고귀한 침묵인가?

 

침묵에도 종류가 있다.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는 것이 침묵이긴 하지만 부처님 말씀 하신 침묵은 고귀한(ariyo)’ 침묵이다. 왜 고귀한 침묵인가? 이에 대한 설명이 초기경전 도처에 있다. 이는 우다나 경의 제목인 라자경(Ud10)’에 대한 각주에서 알 수 있다.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Nett.165; Pe.55; MN.I.161; SN.II.273; SN.V.342; Dhp.178’이라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고귀한 침묵과 관련된 이야기가 실려 있는 경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MN.I.161을 찾아 보았다.

 

‘MN.I.161’의 뜻은 PTS본 맛지마니까야 1 161페이지라는 뜻이다.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믿음으로써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그대들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이 법담을 위하여 모였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수행승들이여, 모임은 두 종류로 이루어져야 한다. 법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고귀한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고귀한 구함의 경, 맛지마니까야 M26, 전재성님역)

 

 

맛지마니까야에서도 역시 법담과 고귀한 침묵을 강조 하고 있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고귀한 침묵에 대하여 두 번째 선정과 근본적인 명상주제가 모두 이 고귀한 침묵에 해당된다.(Pps.II.169)”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고귀한 침묵은 단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선정과 고귀한 침묵

 

각주에 따르면 고귀한 침묵은 이선정명상주제라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수행자들이 모여서 잡담을 하는 것은 옳지 않고 법담 하는 것은 허용된다. 법담을 하지 않는다 하여 입을 다물고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선정에 드는 것을 말한다. 그것도 두 번째 선정에 드는 것이 고귀한 침묵이라 하였다. 두 번째 선정상태가 아니라면 명상주제를 정하여 명상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를 근본적인 명상주제(mulakammatthana)’라 하는데 아마 사마타명상주제 40가지를 말하는 것 같다.

 

고귀한 침묵이 단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각주에 따르면 이선정상태나 근본적명상주제라 하였다. 특히 두 번째 선정상태라 하였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상윳따니까에 나온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Idha mayha āvuso, rahogatassa patisallīnassa eva cetaso parivitakko udapādi: "ariyo tuhībhāvo ariyo tuhībhāvo'ti vuccati, katamo nu kho ariyo tuhībhāvo"ti?

 

Tassa mayha āvuso etadahosi: "idha bhikkhu vitakkavicārāna vūpasamā ajjhatta sampasādana cetaso ekodibhāva avitakka avicāra samādhija pītisukha dutiya jhāna upasampajja viharati. Aya vuccati ariyo tuhībhāvo"ti.

 

[목갈라나]

"벗이여, 내가 한적한 곳에서 홀로 선정에 들었을 때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일어났다. '고귀한 침묵, 고귀한 침묵 하는데, 고귀한 침묵이란 무엇인가?'

 

벗이여, 그때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일어났다. '수행승이 사유와 숙고를 멈춘 뒤 내적인 평온과 정신의 통일과 무사유와 무숙고와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번째 선정에 들면 그것을 고귀한 침묵이라고 부른다.

 

(Kolitasutta-꼴리따의 경, 상윳따니까야 S21.1,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고귀한 침묵에 대하여 명확하게 정의 되어 있다. 그것은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번째 선정에 들면(samādhija pītisukha dutiya jhāna)이라는 말이다.

 

목갈라나를 괴롭힌 것은?

 

고귀한 침묵(ariyo tuhībhāvo)이선정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목갈라는 이선정상태에 대하여 그러나 사유와 관계된 지각과 정신활동이 이와 같이 수행하는 나를 아직 괴롭히고 있습니다.(S21.1)”라고 말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두 번째 선정은 사유가 숙고가 멈추어지고 언어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고귀한 침묵이라 한다.(Srp.II.233)”라고 설명되어 있다. 목갈라나가 두 번째 선정에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입만 다물고 있을 뿐 머리 속으로는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표현이라 볼 수 있다.

 

각주에 따르면 사유와 관련된 지각과 정신활동에 대하여 사유를 수반하는 지각과 정신활동(作意)을 말한다라 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은 내가 이와 같이 머물 때 일으킨 생각이 함께한 인식과 마음에 잡도리함이 생겨났습니다.(S21.1)”라고 번역하였다. ‘잡도리하다는 것은 마음을 기울이다라는 뜻이다. 한자어로 작의(作意)’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입을 다물고 침묵을 하여도 머리속에는 생각이 있음을 말한다. 비록 말은 하지만 머리속으로는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이선정에서 사유와 숙고를 여의어야 함에도 목갈라나는 단지 멈춘 것에 불과 하다. 그래서 사유와 관계된 지각과 정신활동이 이와 같이 수행하는 나를 아직 괴롭히고 있습니다.(S21.1)”라 하였다.

 

사유와 숙고가 왜 언어적 형성일까?

 

목갈라나의 고민에 대하여 각주를 보면 “SN.41:6에 따르면. 사유와 숙고는 언어적 형성이라고 한다.(상윳따2 755번각주)”라 하여 전재성님은 개인적인 견해를 밝혀 놓았다. 그래서 SN.41:6을 찾아 보았다.

 

경에 따르면 장자 찟따와 존자 까마부의 형성에 대한 대화이다. 먼저 까마부가 장자여, 세가지가 있습니다. 신체적 형성, 언어적 형성, 정식적 형성이 있습니다.(S41.6)”라고 말한다. 이에 장자가 어떤 것인지 묻는다. 그러자 까마부는 장자여,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신체적 형성이고 사유와 숙고는 언어적 형성이고 지각과 느낌은 정신적 형성입니다.(S41.6)”라고 말한다.

 

까마부에 따르면 사유와 숙고는 언어적 형성에 속한다. 이는 일반사람들의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보통사람들은 사유와 숙고가 머리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정신적 요인이라 볼 수 있으나 경에 따르면 분명히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언어적 형성과 정신적 형성은 어떻게 다른가? 까마부는 장자에게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한다.

 

 

Assāsapassāsā kho gahapati kāyikā, ete dhammā kāyapaibaddhā, tasmā assāsapassāsā kāyasakhāro. Pubbe kho gahapati vitakketvā vicāretvā pacchā vāca bhindati, tasmā vitakkavicārā vacīsakhāro. Saññā ca vedanā ca cetasikā, ete dhammā cittapaibaddhā, tasmā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khāroti.

 

[까마부]

자여, 들이쉬고 내쉬는 것은 신체적인 것이고 이것들은 몸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들이쉬고 내쉬는 것은 신체적 형성입니다. 장자여, 먼저 사유하고 숙고한 뒤에 언어로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사유와 숙고는 언어적 형성입니다. 지각과 느낌은 정신적인 것이고 이것들은 마음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각과 느낌은 정신적 형성입니다.

 

(Dutiyakāmabhusutta-까마부의 경2, 상윳따니까야 S41.6, 전재성님역)

 

 

까마부의 설명에 따르면 사유(vitakka)와 숙고(vicāra)가 언어적 형성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는 먼저 사유하고 숙고한 뒤에 언어로 표현됩니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먼저 생각이 일어나야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글을 쓸 때 먼저 머리로 정리되어야 타이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글쓰는 행위는 구업(口業)’에 해당된다.

 

표로 정리해 보면

 

까마부가 한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표로 만들 수 있다.

 

 

 

 

 

신체적 형성

kāyasakhāra

들이쉬고 내쉬는 것

Assāsapassāsā

호흡 

언어적 형성

vacīsakhāra

사유와 숙고

vitakketvā vicāretvā

 멸진정에서

가장 먼저 소멸

정신적 형성

cittasakhāra

지각과 느낌

Saññā ca vedanā

 

 

 

꼴리따의 경에서 목갈라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이선정에 들어 간 것에 대하여 고귀한 침묵이라 하였다. 그러나 입만 열지 않을 뿐 사유와 숙고와 관련된 정신활동이기 때문에 이것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하였다. 입으로는 말을 하지 않지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 자체가 사실상 말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까마부경(S41.6)에서 명확하게 밝혀 지고 있다. 경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할 때

 

장자는 까마부에게 그런데 존자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S41.6)”라고 묻는다. 이는 상수멸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지각과 느낌은 세 가지 형성중에 정신적 형성에 해당된다.

 

지각과 느낌이 언어적 형성이 아닌 정신적 형성에 해당된다면 멸진정에 이르렀을 때 어떤 상태를 말할까? 이에 대하여 까마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까마부]

장자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승에게는 이와 같이 나는 지각과 감수의 느낌을 성취할 것이다.’라든가 나는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하고 있다.’ 라든가 나는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했다.’ 라든가 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그렇게 수련되어 그를 그러한 상태로 이끕니다.

 

(Dutiyakāmabhusutta-까마부의 경2, 상윳따니까야 S41.6, 전재성님역)

 

 

지각(Saññā)과 느낌(vedanā)은 언어적 형성이 아니라 정신적 형성에 속한다고 하였다. 일종의 인식작용에 해당된다. 따라서 지각과 느낌은 생각으로 알 수 없음을 말한다. 지각과 사유가 언어적 형성에 해당됨으로 생각 역시 언어적 형성에 해당된다. 그런데 지각과 느낌은 정신적 형성에 해당되므로 상수멸정에 들었을 때 지각과 느낌이 사라지지만 이는 생각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멸진정 상태에 들어 가는 순서

 

장자는 까마부에게 계속 물어 본다. 이번에는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했을 때에 신체적 형성이나 언어적 형성이나 정신적 형성 가운데 어떠한 것이 먼저 소멸합니까? (S41.6)”라고 묻는다.  이는 멸진정의 상태를 말한다. 이에 까마부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자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승에게는 언어적 형성이 먼저 소멸하고 그 다음에 신체적 형성이 소멸하고 그 다음에 정신적 형성이 소멸합니다.

 

(Dutiyakāmabhusutta-까마부의 경2, 상윳따니까야 S41.6, 전재성님역)

 

 

멸진정 상태에 들어 가는 순서에 대한 것이다. 경에 따르면 가정 먼저 소멸되는것이 언어적 형성이다. 이는 이선정에서 사유와 숙고가 여의는 것과 같다. 다음으로 신체가 소멸되는 것이라 하였다. 좌선시에 호흡에 집중하다 보면 몸도 사라지고 호흡도 살아진다고 하는데 몸이 사라진다는 것은 문맥으로 보아 호흡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본다. 이는 신체적 형성에 대하여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신체적 형성이고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장 먼저 사유와 숙고에 따른 생각, 즉 언어적 형성이 사라지고 다음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 즉 신체적 형성이 사라진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것이 지각과 느낌, 즉 정신적 형성이 사라진다고 하였다.

 

멸진정과 죽음은 어떻게 다른가?

 

이렇게 차례로 언어적 형성, 신체적 형성, 정신적 형성이 사라졌을 때 이를 상수멸정 또는 멸진정 상태라 한다. 그렇다면 이 상태는 죽은 것과 다름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장자는 또 물어 본다. 그래서 그런데 존자여, 죽어서 사망한 것과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것과 그들 사이에 차이는 어떠한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까마부존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까마부]

장자여, 죽어서 사망하면, 신체적 형성이 소멸하여 그치고, 언어적 형성이 소멸하여 그치고, 정신적 형성이 소멸하여 그치고 목숨이 다하고 온기가 사라지고 모든 감관이 부수어집니다.

 

장자여, 그러나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승에게도 신체적 형성이 소멸하여 그치고, 언어적 형성이 소멸하여 그치고, 정신적 형성이 소멸하여 그치지만 목숨은 아직 끝나지 않고 온기가 아직 식지 않고 모든 감관이 청정해집니다.

 

장자여, 죽어서 사망한 것과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것과 그들 사이에 차이는 이와 같습니다.

 

(Dutiyakāmabhusutta-까마부의 경2, 상윳따니까야 S41.6, 전재성님역)

 

 

일반적으로 상수멸, 즉 멸진정의 상태에 대하여 열반과 동의어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위 설명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열반에 든 유여열반에 대한 설명이라 본다. 그런데 정신적 형성인 지각()과 느낌() 마저 소멸하였을 때 마치 죽은 듯이 보이는데 죽은 것과 다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죽은 자는 온기가 없고 감관이 부서진 상태를 말하지만, 열반에 든 자는 몸에 온기가 남아 있고 더구나 감관도 매우 청정한 상태라 하였다. 다만 호흡(신체적), 사유와 숙고(언어적), 지각과 느낌(정신적) 현상만 소멸한 상태가 죽음과 다르다는 것이다.

 

멸진정에서 나왔을 때

 

장자는 계속 묻는다. 이번에는 상수멸정상태에서 나왔을 때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대하여 존자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했을 때에 어떻게 거기서 일어납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까마부존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Katha pana bhante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āna hotīti. Na kho gahapati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ahantassa bhikkhuno eva hoti: "aha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ahissanti vā aha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ahāmīti vā aha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ito vā" ti, atha khvassa pubbeva tathā citta bhāvita hoti ya ta tathattāya upanetīti.

 

[까마부]

장자여, 지각과 느낌이 소멸한 뒤에 다시 일어나는데, 수행승은 이와 같이 나는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성취에서 일어날 것이다.’ 라든가 나는 느낌의 소멸의 성취에서 일어나고 있다.’ 라든가 나는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성취에서 일어났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은, 이전에도 그렇게 닦여져 왔듯이, 그를 그러한 상태로 이끕니다. “

 

(Dutiyakāmabhusutta-까마부의 경2, 상윳따니까야 S41.6, 전재성님역)

 

 

멸진정에서 일상으로 되돌아 왔을 때 어떤 생각이나 의지 작용이 있어서 돌아 오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지각과 사유라는 언어적 현상이 소멸된 상태에서 생각 역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되돌아 오는가? 이에 대하여 그를 그러한 상태로 이끕니다(ya ta tathattāya upanetīti)라 하였다.

 

그러한 상태(tathatta)와 진여불성

 

그러한 상태로 이끈다(tathattāya upanetīti)”라는 뜻은 무엇일까? 여기서 ‘tathattāya’가 있다. 이는 tathatta의 형태로서 ‘the state of being so; the truth.’의 뜻이다. 이를 대승한역에서는 진여(眞如)로 하였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진여가 불성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불성을 이야기하였을까?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Srp.III.97에 따르면, 여기서는 새김의 상태 또는 지성적인 상태(sacittakabhava)’를 말한다. ‘이전에도 그렇게 닦여져 왔듯이는 지멸을 성취하기 전에 당시에 나는 새김이 없었지만, 이후에는 새김을 확립할 것이다.’라고 결정하는 것과 관계된 표현이다.

 

(상윳따 4 832번 각주, 전재성님)

 

 

Tathatta의 뜻이 그러한 상태또는 진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대승에서 말하는 진여불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단지 새김의 상태 또는 지성적인 상태(sacittakabhava)’를 뜻한다고 하였다.

 

장자와 까마부의 대화는 상수멸에 대한 것이다. 경의 말미에 장자는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위해서 어떤 원리가 도움이 됩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까마부존자는 멈춤과 통찰이 가장 도움이 됩니다.”라고 말한다.

 

부처님의 말씀에

 

까마부경에서는 사유(vitakka)와 숙고(vicāra)가 정신적 형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하여 놓았다. 이런 고민을 안 부처님이 신통으로 목갈라나에게 가르침을 준다. 이에 대하여 목갈라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목갈라나]

벗이여, 그때 세존께서 신통력으로 나를 찾아오셔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목갈라나여, 바라문 목갈라나여, 고귀한 침묵에 방일하지 말라. 고귀한 침묵에 마음을 정립하라. 고귀한 침묵에 마음을 통일하라. 고귀한 침묵에 마음을 집중하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Kolitasutta-꼴리따의 경, 상윳따니까야 S21.1, 전재성님역)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에 목갈라나는 더 이상 사유와 숙고를 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나는 참으로 사유와 숙고를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와 숙고를 여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에 완전히 들었습니다.(S21.1)”라 하였다. 이와 같은 목갈라나의 가르침으로 보았을 때 사유와 숙고가 언어적 형성임에 틀림 없다.

 

세간과 비교되지 않는 행복

 

부처님은 수행자들에게 잡담을 금하였다. 출가한 수행자들이 세속사람들이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정치나 경제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수행자들이 법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떠들썩하게 잡담하는 모습을 좋게 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잡담하느니 침묵을 지키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입만 다물고 있으라는 것은 아니다. 고귀한(ariya) 침묵이라 하여 이선정상태에 드는 것이나 명상주제를 들고 있는 침묵을 말한다. 특히 이선정상태에 대하여 사유와 숙고를 여읜 희열과 행복이라 하였다.

 

사유와 숙고라는 언어적 형성이 끊어진 이선정상태에서 희열과 행복은 세상사람들이 잡담을 하며 얻는 행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갈애가 부수어짐에 따른 행복은 이 세상 어느 행복 보다 더 수승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다나에서 감흥어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세계에서 어떤 욕계의 행복이라도

어떠한 천상의 행복이라도

갈애의 부숨에서 오는 행복에 비해

십육 분의 일도 미치지 못한다.”(Ud10)

  

 

이 게송은 법구경에 실려 있는 Dhp178과 유사하다. 178번 게송은 지상에서 유일한 왕권보다 천상계로 가는 것 보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 보다 진리의 흐름에 드는 것이 탁월하다.(Dhp178)”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더라도 그러한 자는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흐름에 든 님(예류자)은 가장 허약할지라도 이 생에서 다시 태어나는 다음 7 번째의 생애 안에서는 완전히 해탈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2014-11-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