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생명의 경이로움과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화생(化生: opapatika yoni)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1. 8. 13:17

 

 

생명의 경이로움과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화생(化生: opapatika yoni)

 

 

 

경이로움을 느낄 때

 

경이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자연을 보았을 때이다. 특히 압도적인 풍광을 보았을 때이다. 전에 보지 못하던 광경을 접하였을 때 사람들은 경이로움을 느낀다. 이때 경이(驚異)’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놀라울 만큼 신기하고 진기함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놀랍고 이상스럽다라는 표현도 있다. 영어로는 wonder, a marvel, a miracle’의 뜻이다.

 

아름다운 풍광, 전에 보지 못하였던 것만 경이의 대상이 아니다. 가장 경이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생명이다. 생명이야말로 가장 경이로운 대상이다. 특히 생명의 탄생이 그렇다. 마치 없던 것에서 홀연히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생명의 탄생이다.

 

유정란을 부화시킨 이야기

 

최근 인터넷기사를 보았다. 유정란을 부화시킨 이야기이다. ‘마트 계란이 병아리로...진짜 되네요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마트에서 유정란을 사서 스스로 만든 부화기로 부화시켰더니 21일만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온도만 맞으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어미닭이 품어 주지 않아도 온도와 습도 등 조건만 맞으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도 나올 때쯤 되면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였을 때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또 하나의 부화이야기가 있다. 세관 압수물보관창고에서 오리알이 부화하였다는 이야기(압수물 오리알 부화...오리 새끼 26마리 탄생)이다. 베트남 등 동남아국가에서는 유정란 오리알을 먹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수입업자가 이를 상품화 하기 위하여 몰래 들여왔으나 경찰에 적발된 것이다. 그래서 오리알을 창고에 보관해 두었는데 몇 일 후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창고안에서는 부화한 오리새끼들이 꽥꽥 거리며 이러저리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어떤 악조건하에서도 생명은 태어난다. 하지만 필요조건이 있다. 닭이나 오리의경우 유정란이어야 하고 또 온도와 습도가 맞아야 한다. 그래서 어미새가 둥지를 만들고 일정기간 품어 주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생명체가 태어날 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암수의 결합에 의해서 생명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난생, 태생에 한한다. 이외에도 생명이 태어나는 또 다른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화생이다.

 

네 갈래의 태어남이 있는데

 

금강경 대승정종분에 생명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소유일체중생지류약난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이라는 말이다. 중생에 대하여 난생, 태생, 습생, 화생 이렇게 네 가지 태어남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분류방식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깊은 통찰에 따른 분류방식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태, , , 화라는 말은 금강경에만 있는 말일까? 금강경 보다 훨씬 이전에 전승 되어온 맛지마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Catasso kho imā sāriputta yoniyo. Katamā catasso? Aṇḍajā yoni, jalābujā yoni, sasedajā yoni, opapātikā yoni,

 

katamā ca sāriputta aṇḍajā yoni? Ye kho te sāriputta sattā aṇḍakosa abhinibbhijja jāyanti, aya vuccati sāriputta aṇḍajā yoni.

 

Katamā ca sāriputta jalābujā yoni? Ye kho te sāriputta sattā vatthikosa abhinibbhijja jāyanti, aya vuccati sāriputta jalābujā yoni.

 

Katamā ca sāriputta sasedajā yoni? Ye kho te sāriputta sattā pūtimacche vā jāyanti pūtikuape vā pūtikummāse vā candanikāya vā oigalle vā jāyanti, aya vuccati sāriputta sasedajā yoni.

 

Katamā ca sāriputta opapātikā yoni? Devā nerayikā ekacce ca manussā ekacce ca vinipātikā. Aya vuccati sāriputta opapātikā yoni.

 

Imā kho sāriputta catasso yoniyo.

 

 

사리뿟따여, 이러한 네 갈래 태어남이 있다. 네 갈래란 어떠한 것인가?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이다.

 

사리뿟따여, 난생이란 어떠한 것인가? 사리뿟따여, 생명체가 그 껍질을 깨고 태어나면, 사리뿟따여, 이것을 난생이라고 한다.

 

사리뿟따여, 태생이란 어떠한 것인가? 사리뿟따여, 생명체가 태의 막을 까고 태어나면, 사리뿟따여, 이것을 태생이라고 한다.

 

사리뿟따여, 습생이란 어떠한 것인가? 사리뿟따여, 생명체가 썩은 물고기, 부패한 시체, 부패한 굳은 우유에서나 물웅덩이나 연못에서 태어나면, 사리뿟따여, 이것을 습생이라고 한다.

 

사리뿟따여, 화생이란 어떠한 것인가? 사리뿟따여, 신들이나 지옥의 뭇 삶들이나 특수한 인간이나 특수한 타락한 영혼들이 생겨나는데, 사리뿟따여, 이것을 마음에서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이라고 한다.

 

사리뿟따여, 이와 같은 네 갈래 태어남이 있다.

 

(Mahāsīhanādasutta-사자후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2, 전재성님역)

 

 

빠알리니까야 이미 사생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상세히 실려 있다. 이렇게 본다면 금강경에 실려 있는 태, , , 화 이야기의 원조는 빠알리니까야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화생(化生: opapātikā yoni)

 

네 가지 태어남 중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그것은 화생(opapātikā yoni)이다. 경에서는 홀연히 생겨나는(opapātikā)이라 하였다. 홀연히 생겨난다는 뜻의 opapātikā에 대하여 PCED194를 찾아 보았다.

 

 

opapātika

: lit. 'accidental' (from upapāta, accident; not from upapatti, as PTS Dict. has); 'spontaneously born', i.e. born without the instrumentality of parents. This applies to all heavenly and infernal beings. "After the disappearing of the 5 lower fetters (sayojana, q.v.), he (the Anāgāmi) appears in a spiritual world (opapātika) ...."

 

(Buddhist Dictionary, PCED194)

 

 

불교사전에 따르면 우연히(accidental)’ 생겨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upapāta라는 말이 우연을 뜻하기 때문이다. PTS사전에서는 자발적 태어남(spontaneously born)’이라 하였다. 그것도 부모 없이 곧바로 태어남을 말한다. 이런 태어남은 천상이나 지옥과 같은 악처에 적용된다고 한다.

 

화생을 뜻하는 opapātika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원인 없이 일어나는(arisen without visible cause)’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모를 갖지 않는 자발적 태어남이다. 악행을 저지른 자가 악처에 태어날 때 부모 없이 곧바로 악처에 화생하는 것이다. 또 공덕을 지은 자는 천상에 태어날 때 역시 부모없이 자발적으로 화생한다. 그래서 유령 같은, 허깨비 같은 태어남 (apparitional rebirth)이라 볼 수 있다.

 

초기경에서 화생에 대한 문구는 수 없이 등장한다. 이에 대하여 PCED194에 따르면 ‘D.I,27, 55, 156; III,132, 230 (°yoni), 265; M.I,34, 73, 287, 401 sq., 436 sq, 465 sq.; II,52; III,22, 80, 247; S.III,206, 240 sq., 246 sq.; IV,348; V,346, 357 sq., 406; A.I,232, 245, 269; II,5, 89, 186; IV,12, 226, 399, 423 sq.; V, 265 sq., 286 sq., 343 sq.; Pug.16, 62, 63; Vbh.412 sq.; Miln.267; Vism.552 sq., 559; DA.I,165, 313.’라는 경전적 근거를 들고 있다.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화생에 대하여 마음에서 순간적으로 화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번역비교를 해보면

 

화생과 관련하여 초불연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빅쿠보디의 각주 역시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 문구와 관련하여 약간의 번역차이가 있다. 이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Mahāsīhanādasutta(M12) 번역

 

빠알리어

Katamā ca sāriputta opapātikā yoni? Devā nerayikā ekacce ca manussā ekacce ca vinipātikā. Aya vuccati sāriputta opapātikā yoni.

 

ekacce ca manussā

전재성님역

[세존]

싸리뿟따여, 화생이란 어떠한 것인가? 싸리뿟따여, 신들이나 지옥의 뭇 삶들이나 특수한 인간이나 특수한 타락한 영혼들이 생겨나는데, 싸리뿟따여, 이것을 마음에서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이라고 한다.”

특수한 인간

각묵스님역

사리뿟따여, 무엇이 화생인가? 사리뿟따여, 신들, 지옥에 태어난 자들, 몇몇 인간들, 몇몇 악처에 태어난 자들을 화생이라 한다. 사리뿟따여, 이들이 네 부류의 태어남이다.”

몇몇 인간들

빅쿠보디역

“What is spontaneous generation? There are gods and denizens of hell and certain human beings and some beings in the lower worlds; this is called spontaneous generation. These are the four kinds of generation.”

certain human beings

 

 

차이가 나는 번역은 ‘ekacce’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특수한이라 번역하였고, 초불연의 대림스님은 몇몇이라 번역하였다. 그래서 “ekacce ca manussā ekacce ca vinipātikā”문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특수한 인간이나 특수한 타락한 영혼들이라 하였고, 대림스님은 몇몇 인간들, 몇몇 악처에 태어난 자들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특수한 인간몇몇 인간들이 대비 된다. 특수한 타락한 영혼들몇몇 악처에 태어난 자들이 대비된다. 빅쿠보디는 ‘certain human beings(어떤 인간존재)’‘some beings in the lower worlds(어떤 낮은 세계의 존재)’라 번역하였다.

 

네 가지 화생이 있는데

 

초기경에서는 화생에 대하여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한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전재성님역

대림스님역

빅쿠보디역

Devā

신들

신들

gods

nerayikā

지옥의 뭇 삶들

지옥에 태어난 자들

denizens of hell

ekacce ca manussā

 

특수한 인간

몇몇 인간들

certain human beings

ekacce ca vinipātikā

 

특수한 타락한 영혼들

몇몇 악처에 태어난 자들

some beings in the lower worlds

 

 

네 가지 화생의 종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화생에는 천상이나 지옥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뿐만 아니라 인간세계도 해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ekacce ca manussā”라는 문구에 근거한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특수한 인간이라 하였다. 대림스님은 몇몇 인간들이라 하였고, 빅쿠보디는 ‘certain human beings(어떤 인간존재들)’이라 하였다. 하지만 각주에는 이에 대한 주석이나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대체 어떤 인간들이 부모 없이 화생하는 것일까?

 

인간도 화생할 수 있을까?

 

초기경에 따르면 특수한 인간또는 몇몇 인간들’, 또는 ‘certain human beings’은 화생한다고 하였다. 부모 없이 자발적으로 홀연히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화생한다고 한다. 이렇게 초기경에서 인간도 화생한다고 하였을 때 갖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가장 먼저 대승보살사상을 떠 올릴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보살사상이다. 따라서 보살사상은 대승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래서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거대한 서원을 세운다. 그것은 사홍서원으로 설명된다. 지장보살의 경우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이 구원받기전에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서원하였고, 법장비구는 괴로운 중생에게 깨달음을 주기 전에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서원하였다.

 

보살로서 삶을 살게 되면 부처가 되거나 열반하여서는 안된다. 그래서 “우주공간이 존재하고 중생이 남아 있는 한 나 역시 여기 남아서 세상의 고난을 없애도록 하소서 !” 라고 외친‘산띠데바’처럼 보살로서의 삶을 살아 가게 된다. 이처럼 보살로서의 삶을 원생이라 한다. 반면 욕심과 집착으로 인한 삶을 업생이라 한다.

 

업생으로 살면 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윤회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보살로서의 삶을 살게 되면 중생이 바라는 곳에는 어디든지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래서 중생은 업생이라 하고, 보살은 원생이라 한다. 이렇게 자유자재로 인간세계에 나타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법화경 관세음보문품에 염피관음력이 있다. 관세음보살을 지극정성으로 염하면 그 염하는 힘으로 칠난에서 벗어 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 등을 친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설로서 신화로서 전승되어 왔다.

 

전설이나 신화속에 등장하는 보살은 대부분 홀연히 나타난다. 마치 화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보살들은 인간세계에 자유자재로 화생하는 존재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화생에 대하여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종교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초기경에서 화생에 대한 근거가 되는 문구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ekacce ca manussā”라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번역자들은특수한 인간또는 몇몇 인간들’, 또는 ‘certain human beings’라고 번역하고 있다.

 

부처님이 신통을 보여 주지 않는다고 하여

 

금강경 대승정종분에서는 태, , , 화 이렇게 사생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사생을 언급한 것은 대승보살사상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중생들을 제도하되 실은 제도를 받은 중생은 없느니라.”라고 역설적인 표현이 나온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서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이에 대한 수 많은 해석이 있어서 상당히 어렵과 난해한 문구라 아니 할 수 없다. 중생을 구원하되 구원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단 한사람도 제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태, , , 화의 원조라 볼 수 있는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어떻게 표현 되어 있을까?

 

맛지마니까야에서 부처님은 네 갈래의 태어남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네 갈래란 어떠한 것인가?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이다.(M12)”라고 말씀 하셨다. 이와 같이 말씀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을 비난한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회의론자들이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과 같다.

 

한때 부처님의 제자이었던 수낙캇따가 있었다. 주석에 따르면 수낙캇따는 부처님에게 실망해서 교단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부처님이 신통을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수행자 고따마는 인간의 상태를 뛰어넘지 못했고, 그에게는 고귀한 분이 갖추어야 할 앎과 봄에 관한 지극한 탁월함이 없다. 수행승 고따마는 단지 사유를 조작하여 자신의 말재주에 따라 추론하여 법을 설한다. (M12)”라고 비난하고 다닌 것이다. 이는 신통을 보여 주지 않자 한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한 것은 모두 언변에 따른 말재주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사리뿟따로부터 들은 부처님은 십력에 대하여 설하신다. 여래만 가지고 있다는 특별한 열 가지 능력을 말한다.

 

여래만 갖는 십력은 무엇인가?

 

초기경에 언급된 십력은 여래만 갖출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 힘을 갖춘 여래는 최상의 지위를 선언하고 대중 가운데 사자후를 토하며 하늘의 수레를 굴린다.(M12)”라고 하였다. 그 열 가지 힘은 무엇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리뿟따여, 이 세상에서 여래는 조건을 갖춘 경우와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를 여실히 안다.

 

2) 사리뿟따여, 또한 이 세상에서 여래는 과거, 미래, 현재의 업보에 관해 가능성과 조건을 살펴 여실히 그 과보를 안다.

 

3) 사리뿟따여, 또한 이 세상에서 여래는 모든 길(운명)으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관해 안다.

 

4) 사리뿟따여, 또한 이 세상에서 여래는 많은 세계로 구성된 다양한 세계의 세계에 관해 안다.

 

5) 사리뿟따여, 또한 이 세상에서 여래는 다른 뭇 삶들의 여러 가지 경향에 관해 안다.

 

6) 사리뿟따여, 또한 이 세상에서 여래는 뭇 삶들의 능력의 높고 낮음에 관해 안다.

 

7) 사리뿟따여, 또한 이 세상에서 여래는 선정, 해탈, 삼매, 성취에 대해서 오염과 청정과 벗어남을 안다.

 

8) 사리뿟따여, 또한 이 세상에서 여래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한다.

 

9) 사리뿟따여, 또한 이 세상에서 여래는 청정한,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눈으로 뭇 삶들을 본다.

 

10) 사리뿟따여, 또한 이 세상에서 여래는 번뇌를 부수어 번뇌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잘 알고 깨달아 성취한다.

 

(Mahāsīhanādasutta-사자후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2, 전재성님역)

 

 

이것이 십력이다. 부처에게만 있는 특별한 능력과 특별한 힘을 말한다. 이와 같은 십력을 설명하면서 네 갈래의 태어남, 즉 태, , , 화 이렇게 사생에 대하여 말씀 하신다.

 

잘못된 견해를 가지면

 

부처님은 네 갈래의 태어남(사생)을 말씀하시고 난 다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존]

사리뿟따여, 이러한 네 갈래 태어남이 있다. 사리뿟따여,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아서 나에 관해 이처럼 ‘수행자 고따마는 인간의 상태를 뛰어넘지 못했고, 그에게는 고귀한 분이 갖추어야 할 앎과 봄에 관한 지극한 탁월함이 없다. 수행승 고따마는 단지 사유를 조작하여 자신의 말재주에 따라 추론하여 법을 설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설할 때에는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로 이끌기 위한 것이라고 설한다.’라고 말하며, 그 말을 버리지 않고 그 마음을 버리지 않고 그 견해를 놓아버리지 않으면, 던져지듯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사리뿟따여, 예를 들어 계율을 갖추고, 삼매를 갖추고, 지혜를 갖춘 수행승은 지금 여기에서 궁극적인 지혜를 성취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그 말을 버리지 않고 그 마음을 버리지 않고 그 견해를 놓아버리지 않으면, 던져지듯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나는 말한다.

 

(Mahāsīhanādasutta-사자후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2,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말씀 하신 것은 교단을 떠난 수낙깟따가 부처님을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신통을 보여 주지 않는다 하여 부처님이 말장난 하는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부처님은 잘못된 견해를 가졌을 때 필연적으로 악처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 하였다.

 

부처님이 경에서 네 갈래의 태어남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금강경에서는 사생과 삼계의 어떤 중생도 제도 해야 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한사람도 제도할 수 없다는 취지로 사생을 말씀 하셨다. 그러나 맛지마니까야에서 부처님이 사생을 언급한 것은 잘못된 견해를 가졌을 때 위험을 말씀 하신 것이다.

 

경전을 한권으로 요약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단지 말재주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부정하였을 때 결코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신통을 보여 주지 않는다 하여 모두 거짓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이런 행태는 요즘에도 볼 수 있다. 넷상에서 일부 불자들은 초기경전과 관련하여 거품을 걷어내자고 말한다. 초월적이고 신비한 내용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거품을 걷어 내고 나면 단권으로 된 근본가르침만 남게 될 것이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을 모아 놓으면 방대하다. 이는 빠알리니까야를 번역해 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글로 번역된 사부니까야를 보면 책장을 가득 차지 한다. 상윳따니까야는 7, 앙굿따라니까야는 무려 9권에 달한다. 단권으로 된 디가니까야나 맛지마 니까야가 있고, 또 법구경, 숫따니빠따 등 수 많은 경전이 있다. 이렇게 많은 경전을 갖게 된 것은 불자로서 행운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바다에 풍덩빠져 지내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한권으로 요약하자고도 말한다. 만약 수 많은 경전을 한권으로 요약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권으로 요약된 빠알리경전이 있다. 일아스님이 편집한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이다. 사부니까야 번역본을 갖추기 이전에는 일아스님의 책을 주로 보았다. 그런데 완전히 갖추어진 번역본과는 차이가 있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이야기가 모두 삭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는 오로지 근본가르침과 합리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예를 든다면, 율장대품 초입에 첫번째 재가신도라 불리우는 따뿟사와 발리까의 이야기가 있는데 하늘사람이야기가 빠져 있다. 또 사함빠띠의 청원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그 사이에 , 하느님의 세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세존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 (S6:1)”라는 구절이 있는데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전하고자 하는 핵심적 내용만 표현 되어 있어서 매우 현실적으로 보인다.

 

경전을 한권으로 요약하면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내용이 발 붙이지 못한다. 그렇게 된다면 맛지마니까에 표현되어 있는 여래의 십력 역시 허황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권으로 된 경전이 독자들에게는 편리할지 모르지만 가르침에 대하여 취사선택하여 적용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사생과 삼계에 대하여 언급한 이유는?

 

초기경전에 쓰여 있는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전승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초월적이고 신비한 이야기일지라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전승된 것이다. 그럼에도 후대사람들이 자신의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대어 황당한 이야기라거나 소설이라고 규정한다면 수낙깟따와 같은 케이스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신통을 보여 주지 않는다 하여 부처님을 비난하고 교단을 떠난 수낙깟따에게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악처에 난다고 하였다. 그런 이유로 부처님은 네 갈래의 태어남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런데 경에서는 네 갈래의 태어남과 함께 다섯 갈래의 운명이 소개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섯 갈래란 어떠한 것인가? 지옥, 축생, 아귀, 인간, 천상이다. (M12)”라고 말씀 하셨다. 마치 금강경에서 태란습화 다음에 -有色 -無色 -有想..”로 시작 되는 삼계를 언급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사생과 삼계육도가 함께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사생과 삼계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뭇삶들이 끊임 없이 윤회함을 말한다. 왜 윤회하는가? 정견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성제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윤회하는 것이다. 또 잘못된 견해를 가졌기 때문에 윤회하는 것이다. 그런데 윤회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거쳐 가는 곳이 지옥이다. 이렇게 악처에 나기도 하고 선처에 나기도 하는 것이 뭇삶들의 삶의 방식이다.

 

늘 다니는 생태하천길에

 

늘 다니는 길에 하천이 있다. 도심을 흘러 가는 생태하천이다. 옛날에는 폐수가 흘렀으나 요즘에는 잘 정비 되어 물고기와 물새가 살 수 있을 정도로 수질이 좋아 졌다.

 

생태하천에서 늘 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물고기다. 어른 장딴지만한 물고기 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물고기를 볼 때 마다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누군가 보살펴 주는 사람도 없는데 스스로 알아서 잘 큰다는 것이다. 더구나 커나감에 따라 개체 특유의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것을 보면 놀랍다.

 

 

 

 

 

생명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귈 때 저 새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마치 스스로 알아서 태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물고기이든 새이든 스스로 태어나지 않는다. 부모가 있어서 교합이 이루어져 알을 낳아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어디에선가는 끊임 없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디에선가 죽어 갈 것이다. 이렇게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한다. 그런 태어남에는 네 갈래의 태어남 즉,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난생, 태생, 습생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지만 가장 이해 가지 않는 것은 화생이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소중한 부처님 말씀

 

부모 없이 자발적으로 홀연히 태어나는 것이 화생이라 한다. 이는 유령이나 허깨비가 나타난 것과 같다. 그래서 불교사전에서는 유령 같은 같은 태어남 (apparitional rebirth)’이라 하였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초기경전에 화생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많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사함빠띠가 부처님 앞에 나타났을 때 경에서는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그 사이에 , 하느님의 세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세존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 (S6:1)”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회의론자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인간세계에서도 화생이 일어 나고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한 경전적 근거는 화생에 대하여 네 가지로 설명할 때 “ekacce ca manussā”라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번역자들은특수한 인간또는 몇몇 인간들’, 또는 ‘certain human beings’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렇게 초기경전은 서로 연결 되어 있다. 그래서 단권으로 경전을 압축한다면 가르침이 전달 될 수 없다. 전승된 가르침에는 모두 다 나름 대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초기경전에 표현된 이야기는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모두 소중한 부처님 말씀이다.

 

 

 

 

2014-11-08

진흙속의연꽃